<고양이를 부탁해>한국, 성장드라마, 2001년, 정재은 감독
결 있고 솔직한 영화다.
영화를 보며 내가 가르쳤던 여고 아이들을 보는 것 같았다. 그처럼 연기와 에피소드들이 자연스럽고 친근감 있다.
처음 개봉관에서 보았을 때 이 작품은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상고 졸업반 동창들의 호들갑스런 웃음꽃으로 출발해 이들이 겪어가는 각자 삶의 우여곡절이 참으로 발랄하면서 쓸쓸하고 또 진하게 다가왔다. 미묘한 갈등과 대립 속에 그려지는 여자 아이들의 심리표현도 참 좋다. 그들의 넘치는 생명력을 볼 때는 참 아름답고 유쾌했지만 그래서 그들의 겪는 문제들은 더 무겁다. 아무튼 배두나의 역이나 성격이 너무 잘 어울리고 멋져서 반하기도 했다.
한국사회의 그늘진 단면을 그대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사실적이다. 전국의 학교가 서울대를 정점으로 한 피라미드 구조로 서열화 되어 있고, 교육이 기회의 균등이기보다 서열화와 계급재생산 기능을 더 담당하고 있는 현실에서 가난한 서민의 자녀로서 비인문계 고등학생들이 겪는 어려움이 그대로 전해진다.
엉뚱하지만 동정을 잘하고 이해심이 많고 남 배려잘하는 백수 태희(배두나)는 아버지의 찜질방에서 일을 도와주며 다른 친구들에 비해 비교적 당장 밥걱정을 해야 하는 위기는 없다. 그래서 친구들의 관계를 조정하고 어려움을 기꺼이 같이해주는 역할을 한다. 조그만치의 경제적 여유가 그래도 있는 중산층 자녀의 모습이다.
서울의 증권회사에 취직해 잔일이나 하는 예쁜 혜주(이용원)는 나름 현실에 안주하고 만족하여 살고 싶고, 계층상승 욕구와 허영심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상고졸업의 학력 차로 인한 설움을 자주 겪는다. 점차 친구들과의 관계도 소원해지고 자신의 앞길만 걱정하는 신세가 된다.
그림을 잘 그리고 내성적인 지영(옥지영)은 판잣집에서 몸이 불편한 조부모와 같이 산다. 하지만 취직이 되질 않고 생활비가 없어 친구에게 돈을 꾸는 등 점점 궁핍함이 조여들자 더욱 폐쇄적이 되고 날카로워진다. 급기야 판잣집이 무너져 조부모 모두를 잃지만 경찰의 조사에서 입을 열지 않아 시설에 갇히며 절망한다. 태희(배두나)가 없었다면 완전 자폐에 빠질 쳐지지만 결국 태희와 여행을 떠나며 새로운 삶을 준비한다. 가난에 의해 철저히 파괴된 삶의 토대와 그늘을 얼굴에 간직한 모습은 내내 가슴을 아리게 한다.
한없이 명랑한 쌍둥이 비류(이은실)와 온조(이은주)는 화교인 것 같다. 악세사리를 만들어 학교 앞이나 역 앞에서 팔며 구김 없이 즐겁게 하루하루 산다.
그들의 모습은 결코 중심이 될 수 없는 젊고 아름답고 발랄한 소녀들이다. 하지만 이 사회에서 경제적 궁핍이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행복한 아가씨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보여준다.
인천 월미도 선착장이나 부두풍경, 복잡한 거리, 카페, 산동네 풍경 등 서민들이 살아가는 풍경과 갓 여고생티를 벗은 여고생 같은 스물의 여자들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풋풋한 느낌을 준다.
결국 어디에도 자리를 붙일 수 없는 들고양이처럼, 지영이와 상고졸업반 아이들은 주변부인생을 살아야할 것 같다. 하지만 태희는 쌍둥이 온조와 비류에게 지영이 주워 기르던 고양이 티티를 부탁하고 떠나야 한다. 비록 보장된 미래는 아니지만, 고양이가 비참해지지 않기 위해서는 보호자를 찾거나 더 강하게 자립해야 한다. 나는 이들이 현실에 절망하기보다 강한 생명력으로 자립하는 쪽을 택하리라 믿는다.
마지막 장면에서 친구를 위해 부모의 돈을 훔쳐 가출하는 배두나의 사려 깊은 마음 때문에 눈물이 핑 돌지만, 그래서 현실의 비참함을 처절하기 직시하지 않고 살짝 비껴나가며 끝나지만, 그래서 더욱 좋은 것 같다. 결국 배두나 같은 순수와 이상이 우리의 숨통을 트여주지 않는가?
젊음은 저지르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참 저지르지 못하고 살았다. 인생에서 후회하는 일은 없으나 아쉬운 것은 있다. 바로 많이 일을 저지르지 못한 것! 그것이 참 애석하다. 그런 점에서 나는 배두나와 지영의 편에 선다. 학교에서 이들이 배울 수 있었던 것은 현실과 전혀 관계없는 엉터리 지식이었다. 이제 비로소 이들은 스스로 경험을 통해 배우고 삶을 만들어갈 것이다. 가출과 여행이 그래서 소중하다.
사춘기는 물론 교육과 사회 계급 문제를 환기하는데도 좋은 자극이 되는 영화 같다.
첫댓글 무엇보다, 음악도 참 좋은 영화. 우주적으로 말이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