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끝에서 서서 순흥을 본다>
‘피끝’이란 마을을 아는가? 10여리 시내를 붉게 물들이며 흐르다가 마침내 그 핏물이 끝난 마을, 그래서 ‘피끝’이라고 불리는 마을.
피끝에 서면 순흥이 보인다. 순흥의 넓은 들이 보이고, 들 건너편에 커다란 학이 비상을 하려는 듯 날개를 펴고 있는 소백산이 보인다. 연화봉·비로봉·국망봉도 여기서는 그냥 소백산일 뿐이다. 마냥 평화로운 산촌의 들녘, 하지만 이곳에 서면 순흥의 아픔도 볼 수 있다. 바로 눈앞에 비어있는 들판이 안향이 살았고, 안축이 죽계구곡으로 노래했던 고을, 30리길을 처마 밑으로 가며 비를 피했다는 영남 제1의 영화를 누렸던 순흥도호부의 땅이기 때문이다.
548년 전,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영월로 유배되던 정축년, 단종의 또 다른 삼촌인 금성대군이 순흥으로 유배되어 온다. 영월과 순흥, 빠른 걸음이면 하루 만에 오갈 수 있는 바로 접해 있는 고을에 유배 온 금성대군은 어린 조카를 위해, 아니 잘못된 역사를 바로 잡기 위해 복위운동을 하게 된다. 하지만 바로 이웃 고을에 금성을 유배시킨 것은 계략이었다. 세조에 저항하는 올곧은 영남의 선비들을 마지막으로 정리하려는 술책이었다. 그래서 거사를 미쳐 시작도 하지 못한 체 발각이 되고, 죽음으로 항거하던 선비들의 피는 죽계를 따라 흘러 이곳 피끈까지 흐르게 된다.
피끝은 영주에서 순흥으로 20리쯤 가다가 순흥 입구에서 만나는 작은 마을(안정면 동촌리)이다. 평소엔 거의 그냥 지나쳐 버리지만, 정월 보름엔 여기에서 멈추고 순흥을 본다. 그리고 아직 하얗게 눈이 덮인 소백산을 본다. 하얀 학이 막 날개를 펴고 있었다.
<정월 보름마다 한(恨)을 다스리는 순흥>
해마다 정월 보름에 순흥에서는 큰일을 치른다. 하나는 순흥도호부 시절부터 행해 오다가 일제 때 멈추었던 순흥 큰 줄다리기의 재현이고, 또 하나는 금성대군을 받드는 두레골 서낭제이다.
우리나라 어느 마을에서나 보름 놀이가 있지만, 순흥에서 하는 행위는 놀이가 아니고 일이고 의식이다. 정축년 거사뿐만 아니라 구한말 의병운동으로 이어졌던 순흥 사람의 올곧은 정신은 일본제국주의자들에게 저항이 거센 곳으로 인식하게 하고, 이곳에서 이루어지는 행위를 다른 어느 지역보다 엄격하게 통제를 하게 된다. 그래서 순흥은 순흥부에서 순흥군으로 되었다가 영주군으로 편입되어 순흥면으로 전락되고, 죽동(피끝 위 마을) 서낭당에 모셨던 금성대군의 혈석은 보다 온전하게 받들기 위해 동쪽 기슭 깊숙한 두레골(단산면 단곡리)로 옮기게 되고, 줄다리기는 사라지고 만다.
두레골서낭제는 특별하다. 추상적인 어떤 신을 모시는 것이 아니라, 절의를 위해 이 지역에서 희생한 금성대군을 모시는 것도 그렇지만, 제물로 소를 쓴다는 것도 특별하다. 임금이나 하늘에 제를 드릴 때 쓰이는 황송아지를 쓰는 것은 단종과 금성대군을 섬기는 제사이기 때문일 것이다.
15년 전, 두레골서낭제에 동참한 적이 있었다. 계간 영주문화 창간호를 준비하며 읍내리 사람들에게 특별히 허락을 받았다. 정월 초사흘, 읍내리 사람들끼리 엄격한 심사를 하여 가장 깨끗한 사람을 제관으로 뽑아, 또 그날부터 매일 죽계에서 목욕을 하며 정성을 드려 온 것을 생각해 보면 대단한 배려였다.
정월 열 나흗날 새벽 세시, 아직 아무도 밟지 않은 눈길이 우리를 맞이했다. 단곡리 계곡을 한참 올라가다 인가가 거의 벗어난 지점에서 얼음 사이로 흐르는 개울물 소리만 맑게 들리는 바위 위에 옷을 개어두고 목욕을 했다. 물속에 몸을 담그고 앉으니 어슴푸레하게 밝아오는 하늘 옆으로 병풍처럼 둘러 처진 소백의 능선이 무척 아늑하게만 보였었다.
상당과 본당 그리고 두 명의 제관은 솔잎으로 서낭당과 그 주변을 청소했고, 새앙을 올리고, 제물을 준비했다. 정월 첫 번째 장에서 모셔온 양반님(소)을 잡는 것은 순식간이었지만 제물 만들기는 온종일의 일이었다. 그리고 달이 하늘 한가운데 걸릴 쯤 제사를 올렸다. 제관들은 차례로 소지를 올렸다. 대통령, 국무총리, 도지사, 군수, 면장, 그리고 면민들을 위한 소지를 차례차례 올렸다.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불꽃, 그 때 문득 밤하늘에 퍼져가는 피의 항변이란 생각이 들었었다.
하루 동안 거의 묵언으로 움직였던 제관들은 돌아오는 길에서야 한마디씩 아꼈던 말을 뱉었다.
“백마고지 전투였다네. 며칠 계속된 공방전으로 대열에서 낙오가 되어 어느 산비탈에 쓰러져 깜빡 잠이 들고 말았지 뭔가. 그때 그분이 나타나신 거야. ‘이놈 여기서 무얼 하느냐.’고 호통을 치더군. 깜짝 놀라 동료들을 찾으려 저만치 가는데, ‘꽝!’하고 터지는 거야. 바로 그 자리였어.”
그 때, 그 이야기는 순흥사람들에게 이 두레골서낭당 아니 금성대군은 삶의 일부분이 아니라 삶의 바탕처럼 느껴지게 했었다.
올해도 여느 해처럼 양반님(소)을 제물로 바쳤다고 했다. 그 일을 주관한 초군청 좌상(김용기, 53)은 그 제물을 큰 줄다리기 행사장에서 음복으로 나누어주었다.
<재현하는 순흥 큰 줄다리기>
줄다리기 행사가 다시 시작된 것은 불과 5년 전이다. 면면히 이어온 서낭제와 함께 이제 제대로 된 보름날 의식을 갖추게 된 셈이다. 작년까지 면사무소 앞에서 행하던 행사를 올해부터는 청다리 건너편에 새롭게 조성이 된 선비촌에서 갖게 되었다.
선비촌에 도착해 보니 순흥면 각 동리 사람들은 서로 편을 갈라 윷놀이를 하고 있었고 관광객들은 제기차기, 투호놀이 등을 하며 정월 명절놀이를 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었다. 면민들은 외지 손님을 위해 국밥, 인절미, 귀밝이술도 준비해, 순흥의 넉넉한 인심을 보여주며, 오후에 한 판 붙을 큰 줄다리기를 위한 전의를 다지고 있었다.
‘순흥 큰 줄다리기’는 순흥읍성을 기준으로 남과 북으로 나뉘어 했던 민속놀이이다. 남쪽으로 안동, 북쪽으로 영월과 사이의 순흥부 사람들이 모여 했던 일이고 보면 그 규모는 대단했을 것이다. 이번 줄다리기에 사용된 줄은 암수 각 40미터이다. 용머리 수줄이 24가닥이며 암줄은 23가닥, 종 줄이 40개씩 붙어 있고, 고리가 3가닥이다. 이 줄은 볏짚만도 8톤가량 투입되었다고 한다.
오후2시 줄다리기가 시작되었다. 두 줄은 나란히 서서 풍년을 비는 제를 올렸다. 옛 어른들이 행했던 것처럼 좌상(윤선율, 순흥면발전협의회장)은 순흥부사(순흥면장)에게 행사를 위임받아 큰 북소리로 통제를 하며 의식을 진행했다. 그런데 한편에서는 의식에 대한 설명을 계속하고 있었다. 모두가 하얀 한복을 입고 있어서 다들 순흥사람이려니 했는데, 함께 하길 희망한 관광객들을 참여시켰다고 한다. 그래서 다시 보니 얼굴이 말쑥한 도회지 사람의 모습이 보인다. 북소리에 맞추어 청군과 홍군은 힘겨루기를 한다. 풍물의 요란한 장단, 가빠지는 영차소리, 우열을 가리기 힘들자 지켜보던 할머니들까지 달려들어 힘을 보탠다.
<순흥의 문풍을 이어온 사람들>
순흥선비촌은 작년에 문을 열었다. 소수서원과 죽계를 사이에 두고 세운 선비촌은 영주지역에 산재한 옛 가옥들 중에서 선비정신이 깃들어 있는 집의 모양을 그대로 본 떠 지었다. 선비촌에서 소수박물관을 보고 돌다리를 건너면 우선 안축의 죽계별곡을 새긴 바위들을 볼 수 있다.
죽령의 남쪽과 영가의 북쪽 그리고 소백산의 앞에,
천 년을 두고 고려가 흥하고·신라가 망하는 동안 한결같이 풍류를 지닌 순정성 안에,
다른 데 없는 취화같이 우뚝 솟은 봉우리에는, 왕의 안태가 되므로,
아! 이 고을을 중흥하게끔 만들어준 광경, 그것이야 말로 어떻습니까? - 죽계별곡 1장 중에서
인걸(人傑)은 지령(地靈)이라 했던가. 소백산 큰산 아래 순흥땅에 많은 인물이 나고 또 생활했다. 부석사를 지은 의상대사가 이곳에서 뜻을 펼쳤고, 이곳 출신 안향은 중국에서 주자학을 가져와 연구와 전파에 여생을 바쳤다. 또 안향을 이은 안축이 성리학 연구에 깊이 몰두해 순흥을 성리학의 메카로 자리 잡게 한다. 이 학풍은 영주출신의 정도전에게도 영향을 주어 조선을 성리학의 나라로 만들게 한다. 그래서 안향과 정도전의 고향인 이곳을 해동(海東)의 추로지향(鄒魯之鄕)이라고 하지 않던가.
산새는 채봉이 날아 오르련듯·지세는 옥룡이 빙빙 돌아 서린듯, 푸른 소나무 우거진 산기슭을 안고,
향교 앞 지필봉(영귀봉)과 그 앞에는 연묵지로 문방사우를 고루 갖춘 향교에서는,
항상 마음과 뜻은 육경에 스며들게 하고, 그들 뜻은 천고성현을 궁구하며 부자를 배우는 제자들이여,
아! 봄에는 가악의 편장을 읊고 여름에는 시장을 음절에 맞추어 타는 광경, 그것이야 말로 어떻습니까? - 죽계별곡 3장 중에서
산천경개(山川景槪)가 글을 읽고 짓기 위해 문방사우를 완벽히 갖춘 향교와 같아 오래 전부터 육경의 공부에 대하여 뜻을 함께 해 온 옛 스승과 제자가 모여 온다고 했다. 안향 등 순흥 출신 학자들의 영향으로 순흥 지역은 유학적 문풍이 성하였고, 이는 이웃 고을에 까지 영향을 미친다. “영남에 뿌리박은 첫째 고을은 흥주(興州:순흥)라는 안축의 자찬은 바로 순흥지역이 갖는 문화선진성에 대한 발로였다.
그 후 우리나라 최고의 선비 퇴계(退溪 이황(李滉)이 청소년 시절 영주에서 공부를 하고, 또 이 소수서원에서 제자를 가르치게 된다는 것도 문풍을 간직한 순흥의 문화선진성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성리학(性理學)의 성지(聖地) 소수서원(紹修書院)>
소수서원은 1543년 당시 풍기 군수였던 주세붕이 평소 흠모하던 안향의 연고지에 부임하여, 그의 향리에 안향의 사당을 세우면서 비롯되었다. 1945년 안축·안보를 같이 배향(配享)하며 백운동서원이라 이름 지었는데, 우리나라 서원의 시작이 된다. 백운동서원은 주자의 백록동서원에서 이름뿐만 아니라 원규(院規)도 모범으로 삼는다. 하지만 서원의 양식은 자주적이라고 한다. 이서위상(以西爲上)의 규례에 따라 서쪽에서부터 사당과 학교의 순으로, 선생님들의 숙소와 학생들의 숙소의 순으로 배치하고 있다. 또 사당, 학교, 정자를 안팎으로 구분하여 담장을 만들어 공간을 구분하기도 하였다. 이밖에 정료대(庭燎臺, 등불), 일영대(日影臺, 해시계) 등도 남아있다.
주세붕의 바램대로 소수서원은 주자학의 전파기지가 되었다. 각 지역에 소수서원을 모범으로 한 서원이 생겨났고, 이 서원을 중심으로 주자학을 넘어선 조선의 독자적인 성리학이 꽃을 피우게 된다. 이 진원지는 순흥이었다. 주자의 학풍을 처음 소개한 곳도, 그 이념을 가장 충실히 실천한 곳도 순흥이었다. 순흥은 조선에서 주자학의 성지였다.
그래서 조선 지식인들은 순흥을 주자가 만년(晩年)에 정사(精舍)를 새우고 거처한 무이산(武夷山) 지역으로 다시 만들어보려고 하였다. 그들은 소백산을 중국의 무이산(武夷山)여기고, 무이구곡(武夷九曲)을 본 따 국망봉 아래로 흘러내리는 죽계의 곳곳에 죽계구곡(竹溪九曲)의 이름을 붙여주었다.
죽계구곡이 있는 이 계곡은 소백산의 여러 계곡 중에서 가장 깊고 넓은 지역이다. 그 한 가운데엔 초암사(草巖寺)가 있다. 그래서 초암계곡이라고 하기도 한다. 초암사는 옛날 의상대사가 부석사를 지을 때, 이곳에서 초막(草幕)을 얽었던 자리라 하여 초암사라고 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의 모습은 예전의 초암사가 아니다. 불사를 많이 해서 새 절이 되어버렸다. 조그만 절에 어울리지 않는 커다란 석축을 보며 옛날 이 절의 규모를 상상해 보곤 했었는데 이젠 그 상상을 못하게 한다.
초암사를 지나 죽계1곡을 찾아보았다. 너럭바위 위에 물이 흘렀었다. 계곡을 꽉 채운 그 바위가 너무 고와 금당반석(金堂盤石)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 너럭바위는 보이지 않는다. 얼음으로 덮여 있었다. 흐르는 물소리로 개울을 짐작하게 할 뿐이다. 초등학교 5학년 가을 소풍 때, 이 자리에서 너무 화려한 단풍에 난 질려 버렸었다. 산은 왜 그렇게 가팔랐는지 단풍을 보느라 목이 아플 지경이었다. 그날 이후 난 어지간한 단풍도 성이 차지 않게 되었다.
<퇴계선생의 영주 사랑>
나는 젊어서부터 영주·풍기를 다녔기에 소백산을 바라볼 수도 오를 수도 있었건만, 마음에만 두어온 지가 40년이다. -중략- 4월 신유일, 오랜 비가 개어 산 빛이 멱 감은 듯했다. 이에 백운동에 가서 생도들을 보고나서, 이튿날 드디어 산을 오를 새….
퇴계선생이 지은 소백유산록(小白游山錄)이다. 그는 풍기군수로 재직하며 소백산을 오른다. 초암사에서 하룻밤 그리고 석륜가에서 이틀 밤을 자며 소백산을 기행하며 곳곳에 이름을 짓는다.
원근이 한눈에 들어, 온 산의 경치가 모두 여기 모인 듯한데도 주경유(周景游:世鵬)를 만나지 못해 이름이 속돼 보이기에, 자하대(紫霞臺)라 고치고, 그 옛성은 적성(赤城)이라 이름했느니, 옛글 천태산부(天台山賦)에 ‘적성에 놀이 일어 표를 세우다(赤城霞起而建標))’에서 취함이다. 대의 북쪽에 두 봉우리가 동서로 마주 서 있어 기 빛이 흰데, 이름이 없기에 내가 그 동편 것을 백학(白鶴), 서편 것을 백련(白蓮)이라 해서 백설봉(白雪峰)과 함께 백(白)으로 했다. 백이 많음을 마다 않은 것은 실상 소백(小白)이란 이름에 어울리기 때문이다.
이 글을 보면 주세붕도 소백산에 올랐음을 알 수 있다. 이름을 짓는다는 것은 애정의 표현이다. 어린 시절 삼촌의 손을 잡고 영주에 와서 공부를 하고 장가를 들고 후손까지 얻게 한 영주였기 때문이었을까? 아니 그보다 순흥의 문풍을 이어가는 즐거움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소수서원 운영에 심혈을 기울이고 제자를 가르치고….
영주에 오면 어디서든 소백산이 보인다. 그래서 이곳 사람들은 소백산을 잘 오른다. 소백산을 오르는 길은 희방사에서 연화봉(蓮花峰)으로 오르거나, 비로사에서 비로봉(毘盧峰), 초암사에서 국망봉(國望峰)으로 오른다. 초암사에서 오르는 길은 계곡이 길다. 그래서 사람들은 비로봉쪽의 길을 선택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계곡으로 흐르는 물소리를 함께 즐기며 오르는 이 길은 다른 곳과 또 다른 맛이 있다.
<순흥과 흥망을 함께하는 압각수(鴨脚樹)>
정축년 사건 이후 이 고을 저 고을로 갈기갈기 찢긴 채 황폐한 역모(逆謀)의 고을로 버려졌던 순흥. 순흥을 사랑했던 주세붕도 가고 이황도 갔지만 순흥 사람은 희망을 잃지 않았다. “은행나무가 다시 살아나면 순흥이 회복되고, 순흥이 회복되면 노산군도 복위 된다.”는 말을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은행나무는 소수서원 앞으로 지나는 국도 건너편에 있다. 순흥의 충신들이 죽는 날 함께 죽었던 나무가 숙종7년 밑동부터 살아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폐부된 지 228년만(숙종 9년)에 순흥부가 회복이 된다. 그래서 압각수(鴨脚樹)란 이름까지 받고 오늘날 1,200년의 수령를 자랑하고 있다.
압각수와 함께 명예를 회복한 순흥에 마련된 것이 금성단(錦城壇)이다. 압각수 바로 아래에 설치된 금성단은 금성대군과 당시 순흥부사 이보흠, 그리고 정축년에 희생된 의사(義士)들을 제사지내는 자리이다. 전국에서 온 유림들이 봄가을로 제사를 지낸다. 두레골서낭제가 초군청을 중심으로 민중들이 받드는 제사라면, 이곳은 유림이 지내는 제사이다. 금성대군은 그렇게 순흥사람들에게 신앙적 대상이 되었다.
1990년 두레골서낭제에 동행을 하며 1980년 광주에서 희생되었던 민중들을 생각했다. 그리고 순흥을 생각했다. 오늘 광주는 민주성지로 자리매김하였다 하지만 순흥은 228년의 고백을 끝내 뛰어넘지 못하고, 옛 영화만 남기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만다. 하지만 무성한 압각수처럼 새로운 문화가 언젠가 이곳에서 다시 잉태할 것이라고 순흥사람들은 아직도 믿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