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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터 알뛰세르주의자들: 주체 개념을 중심으로
박기순(충북대 교수), pp. 331-382.
- 발리바르(Etienne Balibar, 1942-)
랑시에르(Jacques Rancière 1940-)
바디우(Alain Badiou, 1937-)
다시 쓰는 맑스주의 사상사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오월의 봄, 2013, P. 560.
*세철학자는 철학의 근원적 의미보다 사회 또는 사건의 현상적이고 현실적인 의미에 치중하였다. 물론 맑스주의의 기본적 토대가 권력의 전환으로 인민의 행복 또는 자유와 평등을 실현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인지 이 논문은 정치에 치중되어 있음에도 현실적 변혁보다 이론적 변혁에 더 많이 할애하였다. 프랑스의 독특한 면 중에서 하나가 실재성과 현실성의 실증에 관한 것인데, 논자는 이 짧은 논문에서 잘 드러내지 못하였다. (50NKF)
[서(序)]
맑스주의는 ‘해방’이라는 이념을 자신의 근본적인 문제설정으로 삼았다. 그러나 맑스주의의 정초자들과 그 직접적 계승자들에 의해 시도되었던 그 첫째 기획은 현실과 이론 속에서 실패와 위기를 경험했다. 알튀세르는 그 누구보다도 일찍이 그 위기를 통찰했고, 그 위기 속에서 맑스주의를 전화[轉化]하고자 했던 철학자였다. 그 전화의 노력에서 알튀세르에게서 점점 더 분명하게 나타났던 것은 ‘정치’의 고유성, 사회 및 경제적 조건으로 환원할 수 없는 정치의 자율성을 사유했다. (333-334) [정치적 경제학(la Economie politique)에서 정치를 먼저 내세우면 경제적 정치학(la politique economique)가 될 것이다. 그런데 ‘정치’를 강조하면 정치학의 범주 속에서 보자는 것이될 것이다. 그러면 ‘정치’ 경제적 삶 뿐만 아니라 생산관계를 포함하여 사회관계, 문화와 풍토를 보탠다면 ‘정치학’의 본류로 전회(轉回)하는 것이 아닐까? (50MLI)]
따라서 이로부터 새로운 정치철학적 과제가 제기된다. 비정치적으로 전유되고 있는 정치적 개념들에 고유한 정치성을 부여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통해 정치의 새로운 가능성, 해방의 새로운 가능성을 사유하는 것이 그것이다. 발리바르, 바디우, 랑시에르는 모두 이것을 자신들의 근본적인 척학적 과제로 삼고 있다. / ... ‘주체(subject)’의 문제가 그것이다. (334)
그런데 1960년대 프랑스 구조주의 운동 속에서 ‘주체’는 일반적으로 이해되고 있는 것과 다르게 단순히 해체된 것이 아니다. 주체가 해체되었다면, 그것은 기원, 토대, 원인 또는 본질로서 주체, 따라서 의식 속에서 되찾고 회복해야 할 목적으로서 주체일 뿐이다. 이러한 주체가 해체된 바로 그곳에서 철학자들은 주체에 대한 새로운 사유의 가능성을 모색했다. (335)
구조주의자들에게 주체는 인식과 행위의 토대 또는 원리가 아니라 하나의 효과로서 구성된 것이다. .. 그러나 문제 효과로서 구성된 주체가 단지 수동적이고 주어진 체제 속에 포섭되는 주체인 것만 아니라, 동시에 어떻게 변혁적인 주체가 될 수 있는 설명하는 것이다. (335) [구성된 주체는 신칸트학파의 이론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며, 더 확장하여 보면, 상층의 관념의 포획된 주체로서 실질상 주체(le sujet)가 아니라 논리상 신민이다. 합리적 공론장의 주체가 대부분 신민인 것과 마찬가지이다. (50MLI)]
제1장 에티엔 발리바르 336 [(Etienne Balibar, 1942-)]
1. 알튀세르와 주체(화)의 문제 설정 336
맑스주의 정치는 해방의 기획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해방으로서 정치’는 근대 계몽주의와 더불어 정립된 것이었다. 이전에 정치가 어떤 원리(arche) 또는 질서의 구현으로서 이해되었다면, 계몽시대 이후 그것은 오히려 비판과 해방(~로부터 벗어남)으로 나타난다. (336) [“~로부터 벗어남”은 전제정일 경우 해방으로 여길 수 있으나, 삶의 다양한 관계 속에서 탈주 또는 탈영토에 가깝다. 해방은 억압과 금기에서부터 나오는 것은 ‘정치’만이 아니라 환경과 문화까지 전반적인 탈주가 필요하다. 사람들은 탈주가 탈국가 또는 무정부주의라고 여기는 것은 국가 권력에 대해서만 문제 삶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탈영토와 탈권위주의는 들뢰즈 표현으로 기계의 연결 방식 즉 배치가 바뀌는 것이다. - 맑스주의가 생산관계의 전복을 이야기 한다면, 들뢰즈에서 배치에서 층위의 변화와 좌우 앞뒤로 옆지층의 변화, 그리고 한 칸을 건너 재영토화의 관계 등의 변화는 되기(생성)이기도 하고 새로운 고원의 솟아남이기도 하다. (50MLI)
‘구성하는 주체’(sujet constituant)가 아니라 구성된 주체(sujet constitué)라는 논제는 알튀세르의 ‘호명’(interpellation)에서 보다 구체화 되고 확장된다. (338)
알튀세르가 제시하고 있는 이데올로기의 물질성은 단지 그것이 학교, 교회, 법, 정치제도, 언론 기관 등 물질적 장치들 속에 존재한다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의 핵심은, 이데올로기가 그 물질적 실존의 힘을 통해 개인들을 예속 존재(être assujetti)로, 즉 신민/주체(le sujet)로 정립한다는데 있다. 알튀세르의 호명테제는 이로부터 출현한다. “이데올로기는 개인들을 신민/주체로 호명한다.” (338) [이데올로기의 상층이 표면의 시뮬라크르로서 신민에게는 예속된 방식밖에 없다. 이에 비해 심층의 욕망(열망)은 시뮬라크르로서 주체의 생산이 있다. 이 두 모방(시뮬라크르)를 층위로 본 것은 플라톤인데 비해, 전복의 관계로 본 것은 스토아를 재해석한 들뢰즈였다. (50MLI)]
알튀세르는 ... 지배적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와 비판적 혁명적 프롤레타리아 이데올로기 사이에는 비대칭성이 존재하기 때문에 기능주의 해석은 오독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발리바르는 알튀세르의 이러한 변호가 불충분하다는 점을 지적한다. (339)
발리바르는 그의 스승이 남긴 이 미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알튀세르에게는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개념을 끌어들인다. 발리바르가 스피노자와 시몽동(G. simomdon, 1924-1989)으로부터 발견해내고 있는 “초개체성(transindividuality)개념이 그것이다. ... 따라서 해명되어야 할 문제는 개인과 집단 사이의 접합(articulation)의 문제인 것이다. (340) [주체의 성립문제가 접합의 문제라는 것은 들뢰즈에게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그럼에도 들뢰즈의 접합은 생성과정에서부터이며 이중분절의 의미를 담고 있고, 여기서는 정치 사회적 관계에서 보는 것 같다. /생성에서 이중분절은 거울효과가 아니다. 거울효과는 대칭적인데 비해 이중분적은 비대칭적이며 각각은 계열들을 내포하고 있다. 가정에서 분절이란 결혼에서 대립적 이성(異性)의 결합이라기보다 2성(二姓)의 문화의 접합으로 전형적인 비대칭이다. (50MLI)]
스피노자와 시몽동은 모두 개체를 주어진 실체나 통일체가 아니라 개체화(individuation), 즉 어떤 과정의 결과물이라는 점에 인식을 공유한다. 우리의 언어구조는 관계 이전에 먼저 관계항(terms), 즉 개체들을 전제한다. 그러나 두 철학자에 따르면 이것은 언어가 만들어낸 허구일 뿐이다. 개체는 관계이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 또는 소통(communication)에 의해 구성된다. ... 이 집단성 또한 이미 주어진 독립적 전체가 아니며, 개체 형성과정의 역동성에 결부되어 있는 결과물이다. 초개체성은 이 개체 구성과 집단 구성이 동시에 발생하는 과정을 지시한다. (341)
“어떤 (상상적) 경험이 강한 의미에서 보편화, 즉 사회에서 일반화되고 동시에 [개인들의] 의식 속에서 이념화를 가능케 하는가? (...) 그런데 반대로 대답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무엇보다도 지배자들의 ‘체험된 경험이 아니라, 존재하는 ’세계에 대한 수용과 승인, 또는 저항과 반역을 동시에 함축하는 (맑스는 종교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피지배 대중들의 ‘체험된’ 경험이라고, (...) 주어진 한 사회에서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는 항상 피지배자들의 상상물이 특정하게 보편화된 것이다. 지배 이데올로기가 만들어내고 있는 관념들은 정의, 자유, 평등, 노동, 행복 등의 관념들이다. 그런데 이 관념들이 잠재적으로 갖는 보편적 의미는, 정확히 그 관념들이 개인들의 상상물에 속한다는 사실에 연원한다.” (342)
이와 같이 발리바르는 초개체성 개념을 매개로 하여, 알뛰세르가 단편적 단서들만을 제공하고 있을 뿐 충분히 해명하지 못했던, 주체 개념의 이중성, 즉 신민과 주체, 예속과 해방이라는 이중성을 통일적으로 설명한다. (343) [양면성의 통일성을 주장하는 자들은 기본적으로 상층의 우월성에 대한 인정이다. 심층과 생성과 발현(발산)쪽에서는 통일성이 아니라 새로운 종합이다. 언제나 상층이 우월한 것처럼 보인 것은 결과에 대한 향유이며, 심층의 발현은 철학의 본연의 임무는 완성의 추구이다. 즉 자기 생성과 자기 전개를 통한 자기 정체성확보로 향한 열망(욕망)의 실현을 위한 과정이다. (50MMH)]
2. 시민과 보편성의 정치 343
발리바르에 따르면, 그가 알뛰세르를 경유해서 도달한 주체 개념을 우리는 근대정신의 역사적 산물로 가지고 있다. ‘시민’(citoyen)개념이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그는 ‘주체 이후에 무엇이[누가] 오는가?라는 질문에 ’시민‘이라고 답한다. (343-344)
[왜 이 부류들이 인민 보다 ‘시민’을 강조할까? 유럽 문명에 대한 은연중의 옹호이다. 세상은 제도를 만들고 그속에 안주하는 이들이 있는가하면, 다른 문화를 접하면서 변형을 만들어(창조해)가는 이들도 있다. 후자를 들뢰즈가 전쟁기계라고 보았는데, 기 기계가 세상을 변혁하고 혁명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50MMH)]
현대적 사유를 특징짓는 것 가운데 하나는 근대적 ‘주체’개념, 즉 자율성과 통일성에 의해 규정될 수 있는 자기정립적 주체에 대한 비판과 문제제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그러나 발리바르는 이렇게 구성된 근대성은 철학사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가를 묻는다. (344)
따라서 1789년 이전에, 즉 “인간과 시민의 권리에 대한 선언”(Déclaration des droits de l’homme du citoyen)이전에, 주체(subjectum)는 존재하지 않는다. 시민이 주체 이후에 오는 것이라면, 이 시민 이전의 주체는 ‘예속 존재’[신민]라고 해야 할 것이다. (344)
1789년 “선언”은 인간 본성의 동등성 또는 평등(l’égalité)을 통해 시민의 절대성을 정초한다. 이제 까지 모든 형이상학적 또는 정치적 절대성이 위계적 질서의 토대였고 그것을 정당화하는 원리였다면, 시민의 절대성을 정초하는 평등은 그러한 위계질서나 차이[차별]을 무화하는 토대라는 점에서, 시민 주체의 고유성이 존재한다. (345)
발리바르는 이 필연적 결합을 ‘평등자유’(égaliberté)라는 새로운 개념을 통해서 제시함과 동시에, 그것을 통해 ‘시민성’(citoyenneté)의 정치 또는 ‘인권의 정치’를 제시한다. 그에 따르면 평등자유는 세가지 의미를 갖는다. 첫째, 평등과 자유는 서로 배타적이지 않으며 오히려 서로 함축한다. .. 둘째, 평등자유는 보편성을 함축한다. .. 셋째 평등 자유는 정치에 대한 모근 사람의 권리, 정치적 주체가 될 수 있는 권리를 의미한다. (345-346) [‘평등자유’라는 것을 정치적 영역에 한정시키는 논의 협소해 보인다. 이 개념자체가 도덕성의 개념으로 들리기 때문이다. 사회라는 영역의 가장 기본 논의 ‘화이부동’ 즉 다양체가 아니겠는가? (50MMH)]
발리바르의 이러한 정치적 사유는 지젝이 언급하고 있듯이, ‘보편성의 귀환’(univerality’s return) 또는 ‘보편성의 정치’로 규정될 수 있다. (346)
발리바르는 평등자유라는 보편적 이념과 권리, 그리고 그것에 의해 정초되는 시민 주체 개념을 통해서 해명하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해방으로서 정치’를 역사적으로 그리고 이론적으로 재정립하게 된다. (347) [보편성과 절대성의 회귀 또는 귀한은 조심해야 할 것이다. 플라톤과 헤겔의 공통점이 동일성의 회귀가 아닌가... 심층의 시대에도 상층의 이데올로기가 여전히 기세를 펼치는 형국이 아닌가? 박근혜가 헌재에서 거의 루이16세 수준으로, 어제 나는 순진했다고 전하지 않았던가, 보편성과 절대성이 착각 또는 허구이며 그녀 또한 한 인민임을 자각해야 한다고 해야 법정에 세워지지 않겠는가? (50MMH)]
제2장 알랭 바디우 347-360
1) 맑스주의의 위기와 재구성: 공산주의의 이념 347
레닌, 스탈린, 마오 등을 ‘맑스주의자’라는 이름으로 부를 수 있게 해주는 공통적인 무엇이 실재로 존재한다는 가정이 존재한다. 그러나 그에 따르면 맑스주의는 존재하지 않으며, 그것은 단지 지정합적인 집합에 붙여진 비어 있는 이름일 뿐이다. 존재하는 것은 정치적이고 철학적인 특이성(singularités)이다. 레닌, 마오, 알뛰세르 등은 그러한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347-348) [논자가 이름들을 나열하면서 교묘하게 서술한다. 앞에서 스탈린을 넣었고 특이성의 경우에는 스탈린을 빼고 알뛰세르를 넣었다.]
바디우의 정치적 사유의 출발점은, 알뛰세르와 마찬가지로 맑스주의, 보다 정확히 말하면, ‘맑스주의의 위기’였다. 그에 따르면 역사에서 능동적으로 작용해 왔던 유일한 혁명적 정치사상이었던 맑스주의는, 자신에게 부여해왔던 준거들이 붕괴되면서 위기에 봉착하게 된다. ... 준거들은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혁명적 국가들 즉 공산주의로의 이행을 담보하는 사회주의 국가들의 존재, 둘째 봉건적 또는 식민지적 상태에 대한 민족해방전쟁, 셋째 맑스주의의 가장 일반적 준거였던 노동운동. (348-349)
바디우는 맑스주의 정치가 자본주의에 대한 분석으로부터 나오는 ‘귀결’이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 이 점은, 맑스의 출발점은 사회구성체에 대한 분석이 아니라, 그가 ‘사회구성체의 히스테릭적 징후(symptôme d’histérie du social)라고 부르는 것, 봉기, 노동운동 등과 같은 정치적 투쟁들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었다는 사실에서 역사적으로 입증된다. (349) “오늘날 맑스주의 정치의 준거들은 맑스주의적이지 않다. 맑스주의의 고유한 장소를 지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전에 맑스주의에는 일종의 자기준거가 존재했다. 맑스주의는 자신의 일반적 신용을, 맑스주의적이라고 불리는 국가들로부터, 맑스주의 정당들의 지도하에 이루어졌던 민족해방 투쟁으로부터, 맑스주의적 노동조합들의 틀 내에서 이루어졌던 노동운동으로부터, 이끌어 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준거는 생을 마감했다. 대중적인 거대한 역사적 추동들은 더 이상 맑스주의에 준거하지 않는다. 적어도 중국 문화혁명의 종말 이후에는 그러하다. 폴란드와 이란의 경우를 보라. (...) 노동자들과 대중들의 실질적인 삶에 새겨진 모든 정치적 준거들은 오늘날, [역사적] 맑스주의에 관련해서 보면, 비전형적이고 특정한 위히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고정되어 있지 않다.” (350)
바디우의 정치철학의 과제는 맑스주의의 위기가 긍정적으로 드러내어 보여주었던 맑스주의 정치의 핵심, 즉 공산주의 이념(l’idée du communisme)을 정초하는 것이다. (351)
2) 주체없는 주체성 352
바디우는 알뛰세르가 라깡을 경유해서 사유하려고 했던 주체, 즉 호명을 통한 개인들의 주체로의 정립은 실행불가는 한 것임을 못 박음으로써 발리바르가 갔던 길을 차단한다. (352)
“철학은 특저안 방식으로, 특정한 영역에서, 특정한 현실에 관련하여 연장된 정치라고 해야 할 것이다. 철학은 이론의 영역에서 정치를 표현한다. 보다 정확히 말한다면 과학들의 편에 서서 – 그리고 그 반대이기도 하다. 철학은 정치에서 계급 투쟁에 참여하고 있는 계급들의 편에서 서서 과학성을 표현한다. (...) 철학은 어딘가에 제3심급으로 철학을 하나의 심급으로 구성하는 두 주요 심급들, 즉 계급투쟁과 과학의 사이에서 존재한다.” (354)
바디우는 맑스주의 철학자로서 알뛰세러의 철학적 문제의식, 즉 ‘주체없는 주체성’의 사유를 자신의 것으로 삼으로면서 스스로를 알뛰세르의 계승자임을 긍정한다. (355)
3) 사건과 주체 356
바디우의 사유는 다음과 같은 존재론적 공리로부터 출발한다. “하나는 존재하지 않는다(l’un n’est pas)”. 어떤 존재도 하나의 통일적 원리 또는 본질에 의해 규정될 수 없다. 이러한 의미에서 존재는 다수적(multiple)이다. (356) [원인 또는 근원에 관한 “하나” 또는 덩어리의 문제는 이미 결정 난 것이 아닌가? 세계와 실재성과 현실에서, 본질로서 하나, 또는 시작으로 “하나”는 수학적 등질이 아니라 이질적이라는 것은 당연하지 않는가? (50NKE)]
사건의 발생은 ‘개입’(intervention) 또는 결정(décision)을 통해서만 긍정될 수 있다. 사건을 명명함으로써, 사건은 상황에 존재하는 것으로 결정되게 된다. (357)
바디우에게서 주체(화)는 사건의 존재에 대한 승인과 그 사건의 귀결들을 구성하는 것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렇게 구성되는 사건의 귀결들을 바디우는 ‘진리’라고 부른다. 따라서 주체의 구성은 진리의 구성과 동시적이다. (357)
이 주체적 행위는, 어떤 원리에 의존해 있지도 않고 그 원리로부터 나오는 과학적 절차에 따라서 진행되지도 않는다. 그것은 오직 사건에 대한 근거 없는(sans raison) 충실성(fidélité)에 따라 이루어지는 전사적[운동적] 행위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바디우에게 주체는 ‘전사’(militant, 운동가, 혁명가)와 동일시된다. (357)
정치적 상황의 경우, 바디우는 그것을 세 가지로 요약해서 설명하고 있다. 첫째, 정치적 사건은 집단적(collective)이라는 특수성을 갖는다. 여기서 집단성은 양적인 다수성을 의미하지 않는다. (358)
둘째, 바디우에 따르면 존재론적으로 모든 상황은 무한하다. 즉 그것은 모든 가능한 규저들에 대한 부정을 함축한다. 요컨대, 주어진 상황을 재현하고 규정하는 지식 체계에서 벗어나는 요소가 상황에는 반드시 존재한다. 이것은 ‘하나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바디우의 존재론적 공리로부터 나오는 귀결이다. (359)
셋째, 정치의 고유성은 국가(Etat), 보다 일반적으로 ‘상황상태’(état de stuation)와의 관계 속에서 그 고유한 의미를 갖게 된다. 바디우에 따르면,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상황이 주어지거나 현시되면(présenté), 그 상황을 특정한 방식으로 규정하는 재현(représentation)이 동시에 함께 주어진다. 이 재현을 바디우는 ‘상황상태’라고 부르는데, 정치적 상황의 경우 그것은 ‘국가’에 상응한다. (359)
이렇게 바디우는 정치적 ‘사건’ 개념에서 출발해서 집단적 주체성, 자유, 평등을 규정하면서, 맑스주의 위기 속에서 우리에게 새롭게 던져진 정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한다. (360)
제3장 자크 랑시에르 360-376
1) 알뛰세르와 결별과 그 교훈 360
랑시에르는 일찍이 1960년대에 자신의 스승인 알뛰세르와 함게 막스주의의 개조라는 철학적 기획에 참여했다. 그 이후, 1970년대 초 알뛰세르의 교훈을 시발점으로 자신의 스승과 단절하고 독자적인 길을 개척해 나갈 때도, 그의 철학적 사유를 추동했던 것은 맑스주의 전통, 특히 맑스주의 정치를 구성하는 주요문제들과 개념들이었다. .. 이러한 작업의 성과는 프롤레타리아의 밤(La nuit des prolétaires, 1981), 무지한 스승(Le maitre ignorant, 1987), 불화(La mésentente, 1995) 등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저작들을 통해 제시되고 있다. (361)
“출발점은 알뛰세르였습니다. 과학과 이데올로기의 대립, 정치와 사회의 행위자들이 실천했던 것, 그러나 그들 자신은 사유하거나 사유할 수 없었던 것에 대해 진리를 말한다고 주장하는 담론에 대한 이론을 제시했던 알뛰세르였습니다. 이러한 입장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나는 출발했습니다.”
정치를 봉쇄하는 이 분할의 논리는 이미 정치철학의 정초자였던 플라톤에서부터 시작된 논리이다. 즉 그것은 플라톤의 국가에서 대중들이 왜 정치에 참여할 수 없고, 정치는 오로지 철학들의 몫일 수 밖에 없는 지를 논증하기 위해서 생산자들과 철학자들 사이에 분할의 선을 그을 때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 [들뢰즈는 의미의 논리에서 플라톤주의의 전복을 이야기 했다.]
이 분할의 논리는, 알뛰세르뿐만 아니라 많은 해방적 사사들에게서도 나타난다. ... 진보주의는, 여전히 대중들을 한갓 교육의 대상으로 삼음으로써 앞에서 언급한 분할의 논리를 반복한다. (364) [플라톤주의처럼 분할의 논리에 들어있는 한, 탄핵반대의 어벙이 연합을 교육의 대상으로 삼는다. 그러나 역사의 실천적 행위로부터 그들의 사고가 바뀔 것이다. 즉 박근혜, 이재용, 김기춘 등이 죄의 값으로 감옥에 가는 것을 보았을 때, 부정한 축제를 환수할때 바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민중을 또다시 개 돼지로 취급할 것이 않겠는가? (50NKF)]
그러나 랑시에르에 따르면, 정치는 목표로서 평등을 실현하는 것에 있지 않다. 오히려 그것은 평등을 도달점이 아니라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 다시 말하면, 해방 즉 정치는 오직 평등에 대한 긍정을 통해서만 존재하고 사유 가능하다. (364) [심층의 사유가, 즉 다양체의 활동이 필요하다. (50NKF)]
2) 평등과 정치, 또는 평등의 정치 364
지배자들의 언어가 분할의 언어라면, 대중들의 정치적 언어는 동등함과 평등의 언어이다. 그들은 말한다. ‘우리도 인간이다’ (364) [랑시에르 언어관은 물어보아야 한다.]
이 대중들의 언어 속에 정치의 비밀이 놓여 있다. 즉 그것은 인간들의 근원적 평등에 대한 긍정이다. / 이 평등은 무엇보다도 지능의 평등을 의미한다. (365) [지능(l’intelligence)인가, 속좁은 이성, 또는 오성에 국한된 것인가. ]
교육의 전통적인 모델은 설명(l’explication)이다. [이 명제자체가 주지주의이다. 안그런가? (50NKF)
그러나 랑시에르에 따르면 설명의 논리는 바보만들기(abrutissement)의 논리이며, 예속의 논리이다. 그것은 두 부류의 인간, 보다 정확히 말하면 두 부류의 지능, 우월한 지능과 열등한 지능 사이의 분할에 기초해 있기 때문이다. (366) [플라톤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하다. 자연주의(스토아, 루소)의 경우와 비교해 보아야 할 것이다. - 부르주아 사회의 토대를 먼저 인정하고 들어가는 것인가? ]
“모든 문장, 결국 그 문장들을 만들어내는 모든 지능은 같은 본성에 속한다. 이해하는 것은 번역하는 것과 결코 다르지 않다. 다시 말해 이해하는 것은 하나의 텍스트에 상응하는 것을 주는 것이지 그것의 이유(raison)를 주는 것이 아니다. 글로 쓰인 페이지 배후에는 아무 것도 없다. 다른 지능, 즉 설명자의 지능 작업이 필요한 이중의 바탕도 없다. 스승의 언어, 언어의 언어 – 어떤 텍스트의 단어들과 문자들의 이유를 말하는 권력을 갖는 단어와 문장 – 도 없다.” (367) [상위 또는 메타언어가 없다는 말을 어렵게 한 것 같다]
지능이 이렇게 이해되는 한에서, 그것은 특정한 계층에 고유한 능력으로 간주될 수 없다. 그것은 모든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는 보편적인 능력인 것이다. 그러나 지능의 평등이라는 이 논제는, 지능의 불평등이라는 논제와 마찬가지로 논증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368)
평등을 증명할 수 있는(démontrer) 유일한 가능성은, 그것을 드러내는 것(manifester)이다. 교육의 장과 사회정치적 질서는 불평등과 분할의 논리에 의해서 존속하고 있다. (368-369)
정치는 이 분할의 질서 속에서, 그 질서가 자신의 토대로서 전제하고 있는 근원적 평등을 가시화하는 것에 있다. 주어진 이성의 질서에, 유일하게 정당한 세계라고 간주되는 것에 또 다른 사유, 또 다른 질서와 세계를 구성하여 그것에 대립시키는 것이, 랑시에르가 이해하는 정치이다. (369)
불화(la mésentente)는 무엇보다도 특정한 ‘말의 무대’(scène de parole)를 의미한다. 말은 사물들을 관계 짓는 특정한 방식이고, 그러한 한에서 지능의 표현이다. 따라서 말의 무대는, 서로 다른 지능의 표현들이 충돌하는 무대이다. (369) [베이컨의 ‘극장의 우상’과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 ] .
2) 민주주의의 역설과 정치 370
랑시에르에게 정치는 이렇게 평등의 실험으로 이해된다. 평등은, 누구나 말할 자격을 가지고 있음을, 따라서 누구나 정치에 참여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평등의 실험으로서 정치는 민주주의화 동일시된다. (371) [랑시에르의 낙관주의인가? - 21세기 남쪽에서 언론이 민중을 개돼지 취급하는데 말이다.]
민주주의 정치의 주체로서 데모스(demos)는 귀족들이나 부유한 자들이 내세우는 자격을 가지고 있지 않다. 매우 역설적으로 그들은 어떤 특별한 자격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바로 그 이유와 자격으로 정치에 참여할 권리는 갖는다[첫째 역설]. 여기에 민주주의의 역설과 독특성이 존재한다. 데모스의 통치(kratia)는, 자격이 없는 자들의 통치라는 점에서 부당함(tort)을 갖고 있다. (371) [인민 또는 대중이 자격이 없다(?) 정부의 관료와 특수한 직종들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겠지. 사유하는 인민의 등장은 벩송은 모터를 강조하고, 들뢰즈는 증기기관과 모터와 더불어 반도체도 포함한다. - SNS는 사유의 한 양식이 아닐까? 지배라기보다 조작과 검열이 횡횡하기는 하지만 말이다. (NKF)]
요컨대, 몫을 갖지 않는 자들[무산자 이상인 자들, 걸승]에 의한 정치는 사회의 특정한 부분이나. 계층이 아니라 모두에 관련되고, 모두를 표현한다. 데모스는 아무것도 아니기에, 전체가 될 수 있다(nous ne somme rien, soyons tout). 여기에 민주주의의 둘째 역설이 존재한다. ... 68혁명을 상징했던 슬로건은 이 역설의 정치를 잘 표현하고 있다. “우리는 모두 독일 유대인이다”(nous sommes tous des juifs allemands). (372) [이차대전으로 돌아갈 것 없이, 63?년 알제리 독립의 격렬했던 저항을 생각해보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가 저지른 알제리 독립에 대한 탄압에 비추어서, “우리는 모두 알제리 무슬림이다”고 말하지는 않을 것 같다. (50NKF)]
“인권은 성문화된 권리들이다. 그 권리들은 자유롭고 동등한 주체들로 구성되었다고 설정된 공동체의 기재(記載) 형식들(formes d’inscription)이다. 그런데 현실이 그것들을 부인하거나, 그 권리들이 현실에서 우롱당하는 일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권리들이 허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준수되지 않는 권리들이라는 기재 형식들은 여전히 권리들의 기재형식들이다. 그것들은 어떤 물질성을 가지고 있으며, 그 물질성을 주어진 것을 구체화하는 데 필요한 어떤 실질적 요소로 삼는 상징적 능력을 지니고 있다.” (373-374)
로사 팍스(Rosa Parks)라는 한 흑인 여성이 알라바마 주정부의 인종주의적 법제에 대항하여 백인 전용 좌석에 앉았을 때, 그[녀]는 미국 헌법이 모든 시민에게 인정했던 보편적인 권리, 인권의 이름으로 행동했다. (374)
제4장 결론 375
맑스주의의 개조[改造]를 자신의 과제로 삼았던 알뛰세르의 철학적 작업 전체를 관통하고 있었던 것은 해방의 기획으로서 맑스주의 정치를 어떻게 재확립할 것인가라는 문제설정이었다. (375)
발리바르는 ... 충실한 제자답게 ...정치적 주체화와 보편성의 정치의 가능성을 끌어내고자 한다. .. 바디우는 우회로를 선택했다. .. 랑시에르는 .. 자신의 스승과 근원적 단절 ... (375)
이 세 포스트 알뛰세르 주의자들이 ... 무엇보다도 평등과 자유라는 근대적 이념의 재전유와 재해석을 통해 해방으로서 정치를 개념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보편성의 정치’라는 점에서 그들은 만나고 교차하고 있다. (376)
* 참고문헌 [사실상 각주] 377-3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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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1 라깡(Jaques Lacan, 1901-1981)(80살) 인격성의 분열은 사유하는 주체의 지향점과 부피 있는 몸의 한계성 사이에서 이미 내재해 있다. 주체에서 몸으로 향하는 강박관념의 주체는 구조상 허구이며, 의식 내재적(무의식)의 발현은 주체를 기능하게 하는 능력이다. 이제 주체는 선전제도 항상적 존재 구속성을 지닌 존재도 억압적 존재도 아니고 단지 미래의 욕망에 대한 상징적 의미(또는 기표)일 뿐이다.
1918 알뛰세(Louis Althusser, 1918-1990) 정치경제학을 이론적 인문주의나 관념적 역사주의와 단절시킨다. 인민의 생존 생활 문화를 중시한다.
1937 바디우(Alain Badiou 1937-) 프랑스 철학자. 마오주의자.
1940 자크 랑시에르(Jacques Rancière, 1940- ) 1968년 프랑스 학생운동을 기점으로 루이 알튀세와 결별했다. 결별의 이유는 맑시즘의 엄격한 과학성과 결정론적 사상에 충실했던 알튀세와 실천 중심의 마오이즘(Maoism)에 경도되어 있던 랑시에르의 견해가 달랐기 때문이었다. 프롤레타리아의 밤(La nuit des prolétaires, 1981), 무지한 스승(Le maitre ignorant, 1987), 불화(La mésentente, 1995)
1940 낭시(Jean-Luc Nancy, 1940) 보르도 태생 프랑스 철학자. 스트라스부르대학 교수
1942 발리바르(Etienne Balibar, 1942- ) 프랑스 아발롱(욘느)에서 출생. 고등사범학교, 현재 파리 10대학(낭테르) 명예교수.
1949 슬라보예 지젝(Slavoj Žižek 1949- )
(10:15, 50NKF)
첫댓글 - 인간 본성(la nature)의 주체 개념과 사회 또는 정치에서 주체의 개념은 들뢰즈 표현으로 지층이 다른 것 같다. 정치 영역에서 주체는 영토와 재영토화에 있으며, 본성이란 의미에서 주체화란 인간에게서 탈영토화의 문제가 중요할 것 같다. 왜 들뢰즈/가타리가 되기(devenir)를 말했겠는가? 소크라테스는 ‘이뭣꼬(ti esti)’에서 영혼(양심, 본성)을 추구했을까? (50NKG)
꼴꽁들은 신민화를 자신들의 충성 또는 애국이라 믿는다. 그리고 대중이 자신들을 따라, 또는 여론 조작, 언론, 국정교과서, 문화리스 등을 통해 한 권력자에게 예속화의 길을 가게 만들고자 했다. 민주 공화국의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촛불의 광장에서 인민은 예속도 신민도 아닌 주체로서 자시 성립한다. 바디우는 촛불에서 뭘 생각할까? (50NLJ)