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상강도로 변한 계엄군
증언자 : 박중복(남)
생년월일 : 1940. 2. 28(당시 나이 39세)
직 업 : 운전기사 (현재 무직)
조사일시 : 1989. 1
개 요
5월 20일 새벽에 보성을 출발하여 서울로 가기 위해 트럭운전을 하고 광주를 지나려다 계엄군에게 끌려가 금품을 강탈당하고, 죽도록 맞고, 대검으로 등을 찔렸다. 가정을 이끌고 나가야 할 가장이 몸이 성치 못해 앞으로의 생계가 막연한 실정이다.
보성도축장에 취직이 되어
나는 보성군 보성읍 주봉리에서 논 30마지기를 가진 가정에 5남 2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보성국민학교를 거쳐 보성중학교를 졸업하였다.
그동안 부모님과 함께 농사를 지으셨던 둘째형은 6·25가 끝나자 군에 입대하게 되었고, 셋째형은 조선대학교를 졸업하고 군영장이 나왔으나 그 당시 6·25사변으로 전국이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있던 터라 군대 기피를 하고 구례군 산림계장을 하고 있었다. 박정희 정권이 들어서면서 군기피자라는 이유 때문에 공직에서 추방당했다. 그 후 형은 서울에서 유광교통주식회사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셋째형은 회사택시 관리실에서 1965년까지 3년 동안 근무했으나 그 회사가 망하게 되어 다시 보성으로 내려왔다.
아버지는 위의 두 형들이 농삿일을 거들어주지 못하자 머슴 둘과 나와 함께 농삿일을 하자고 했다.
나는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싶었으나 아버지는 학비를 대주지 않았다. 이렇게 하여 나는 4년 정도 농사를 짓게 되었다. 시골에서는 동네 형들과 꽤 친하게 지냈는데 그 형들이 군에 가야 할 때가 되어 영장이 나오자 나도 군대를 지원하였다.
군대생활 3년 6개월을 마치고는 뚜렷한 기술이 없어 집에서 농사를 짓고 있었다. 집에서 농사를 짓고 있던 나에게 서울에서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서울에서 택시회사에 다닐 때 운전면허증을 따 두었던 것이 있어서 70년부터 택시도 운전하고 삼륜차 트럭 등을 운전하면서 생활을 하다가 1976년에 보성화물에 취직하였다.
1977년에 아는 사람의 소개로 보성 도축장에 취직이 되어 지금까지 12년 동안 근무하였다. 내가 하는 일은 도축장에서 돼지를 잡으면 잡은 돼지를 냉동차에 실어 광주를 거쳐 서울까지 운반하는 일이었다.
조선대 앞에서 계엄군이 차를 세워
5월 17일 비상계엄 확대조치와 18일 광주에서 일어난 사건은 보성에까지 널리 퍼져 있었다.
5월 19일 밤늦게 도축장에서 잡은 돼지를 가득 실은 8톤 트럭을 몰고 보성을 출발하였다. 출발하기 전 사장에게 광주가 시민 학생들의 데모 때문에 어수선하여 어떤 봉변을 당할지 모르는데 올라가야 할지 모르겠다고 하였으나 사장이 생활필수품을 실은 차는 아무 일 없을 것이라며 괜찮을 것이라 하였다. 사장은 그렇게 말했지만 지금 광주를 간다는 것이 무리일 것 같아 다시 벌교 도축장 책임자인 이추월 씨에게 이야기했더니 이추월 씨가 벌교지서에 연락을 해보니 지서에서도 광주 상황을 확실하게 알 수 없다고 하였다 한다. 이추월 씨로부터 광주의 상황이 심상치 않은것 같으면 즉시 보성으로 되돌아오라는 말을 듣고 상사의 명령이라 어쩔 수 없이 무거운 마음으로 보성을 출발하였다.
보성을 출발한 차는 화순을 거쳐 광주로 들어왔다. 지원동에서 전남대 의대 앞까지 왔는데 전남대 의대 앞에 총을 맨 몇 명의 계엄군을 보았을 뿐 나는 별다른 느낌을 받지 못했다. 전남대 의대 앞에 계엄군들이 차량통제를 하고 있었지만 우리는 그냥 지나가게 하였다. 차는 금남로 쪽으로 빠져나가려고 했으나 가지 못하고 조선대학교 정문을 통과하여 법원을 지나 산수오거리 쪽으로 가려고 마음먹었다.
5월 20일 새벽 1-2시 사이에 조선대학교 앞 노상을 지나가려고 할 때 총을 맨 2명의 계엄군이 다가왔다. 한 계엄군은 차 문 쪽으로, 또 한 계엄군은 조수가 앉아 있는 쪽으로 오더니 착검한 총을 들이대면서 나에게 차를 세우라고 했다.
나는 계엄군이 왜 그럴까 하고 이상하게 여겼지만 한편으로는 무섭기도 하여 차 문이 열리지 않도록 하는 보턴을 눌렀다. 문을 열려고 하던 계엄군은 문이 열리지 않자 문을 열라고 소리쳤다. 나는 문이 고장났다고 했다.
광주시내는 불이 꺼진 상태로 공포의 도시 같았다.
우리 트럭에는 3명이 타고 있었다.
조수는 밤중에 차를 몰고 와 피곤했던지 운전석 뒤에 누워 있었는데 그 순간에는 무서웠는지 이불을 뒤집어쓴 채 꼼짝하지 않고 있었다. 또 한 사람은 조수석에 앉아 있다가 계엄군을 보자 의자 밑으로 엎드렸다. 운전석 쪽으로 왔던 계엄군은 문을 부수고 나를 거세게 끌어냈다. 다른 때 같으면 악도 쓰고 항변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계엄령 하에 있는 데다가 깜깜한 밤중인지라 말도 못 하고 어디론가로 끌려갔다.
현금, 금품을 털리고 구타
차는 그대로 세워둔 채 내가 끌려간 곳은 조선대학교 앞 골목길이었다. 2명의 계엄군은 한 손으로는 총을 들고 또 한 손으로는 나의 겨드랑이를 낀 채 나를 데리고 갔다.
갑자기 계엄군이 나를 세우더니 언제 보았는지 팔목에 찬 시계를 빼앗더니 결혼할 때 서돈으로 만든 금반지가 작아서 얼마 전 닷돈으로 만들었던(손에 물만 묻어도 빠져버릴 정도로 큰) 반지를 뺏아가버렸다. 나는 시계, 반지가 아깝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내 목숨만 살려준다면 그것도 만족해야 했다.
그때의 나의 옷차림은 메리야스를 입고 그 위에 티셔츠를 입고 잠바를 걸친 상태였다. 잠바 속 주머니에는 서울까지의 경비, 즉 고속도로 통행료, 밥값 등으로 회사에서 준 10만 5천 원과 타이어가 빵꾸났다든지 차가 고장이 났을 때 쓰라고 준 비상금 10만 원, 내가 운전할 때마다 비상금으로 가지고 다니는 20만 원 등 합해서 40만 5천 원이 지갑 속에 들어 있었다. 총을 든 강도 계엄군은 그것마저 탈취해 갔다.
계엄군에게 끌려 서너 발자국이나 갔을까 길가 양쪽 담벼락에 갑자기 2명의 계엄군이 나타나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군화발로 복부를 세차게 걷어차는 것이었다. 2명의 계엄군이 양쪽 겨드랑이를 잡은 상태에서 복부를 맞은 나는 땅바닥에 쓰러지지도 못하고 엉거주춤 쓰러졌다. 그때의 그들은 나라를 지키는 군인이 아니라 노상강도로 변해 있었다.
쓰러져 고개를 푹 수그리고 있는 나의 등을 계엄군은 계속해서 워커발로 차고 개머리판으로 머리를 내리찍고 그래도 부족했던지 총에 착검을 한 채로 등을 찔러버렸다. 그때의 상처는 지금도 몸 여러 곳에 남아 있다.
차 안에 있던 두 사람은 내가 끌려간 뒤에도 무서워서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고 몸을 구부린 채 차 밖으로 나와 보지도 못했다 한다. 차 안에 있던 두 사람은 차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는 아무 소리가 없자 슬며시 고개를 들어보니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채 쓰러져 있던 나를 보고는 떨리는 손으로 끌어다 차 뒤에다 눕혔다 한다.
그러고는 차 뒤에 누워 있던 사람이 운전하여 법원을 거쳐 산수동을 지나 시청 고속도를 이용하여 장성에 있는 성심병원에 입원시켰다. 그러고는 보성 도축장의 주주로 있던 한재학이라는 사람에게 연락하였다. 소식을 들은 한재학 씨는 보성에서 택시를 타고 장성병원까지 오려고 했으나 택시 운전사들이 광주가 시끄러운데 어떻게 가냐며 가지 않겠다고 했다 한다. 그래서 보성군청 앞에서 다방을 운영하는 내 친구에게 전후사정을 얘기하며 장성까지 가자고 하였다. 친구가 쾌히 승낙하여 그 친구의 승용차로 목숨이라도 걸고 가자고 하며 우리 집에 들러 아내와 아이들을 만나 내가 다쳤다는 것을 간단하게 얘기했다. 아내는 남편이 죽은 줄 알고 울고불고 온 집안이 난리가 났다 한다.
한재학 씨와 친구 그리고 아내가 승용차로 장성병원에 도착해 보니 나는 의식을 잃고 온몸이 퉁퉁 부은 채 피가 묻어 있어서 처음 본 순간에는 나를 몰라보았다 한다. 피와 흙으로 범벅이 된 옷을 보고서야 나라는 것을 알았단다. 아내가 간호원의 말을 들으니 처음 차에 실려 병원에 왔을 때는 가망 없이 죽어버릴 줄만 알았다고 하더란다.
직장에서도 쫓겨나고
의식을 잃고 사경을 헤매던 나를 응급치료만 하고 다시 승용차로 장성병원에서 보성종합병원으로 옮겼다.
보성종합병원에 도착한 후에도 3일 동안은 의식을 잃은 상태였고, 4일째가 되어서야 겨우 의식을 되찾았다. 도축장 사장이 대어주는 입원비로 치료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도축장 사장 조욱현 씨가 퇴원하라고 하여, 완치된 후 퇴원하고 싶었지만 돈이 없어 그냥 퇴원하였다.
그러나 몸이 너무 아파 보성종합병원에서 통원치료를 받았다. 우리 집과 종합병원 사이의 거리가 멀어서 택시를 타야 했는데, 택시를 타면 나의 사정을 알고 있는 운전사들은 택시요금을 받지 않고 태워주었다. 그러한 정에 너무나 고마웠고 '그래도 인간 세상'이란 말이 떠올랐다.
그 후 돈이 없어 통원치료마저도 할 수 없게 되었다. 너무나 비참했다. 그러나 치료를 그만두자 몸이 더 아파 할 수 없이 보성읍에 있는 '길의원'이라는 병원에 다니면서 진통제 주사와 칼 맞은 등을 치료하였다. 그러고는 집에서 단방치료를 했다.
그 후 걸을 수 있게 되자 생계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전에 근무하던 곳에서 다시 근무하였다. 그러나 예전과는 달리 서울 근교에서도 돼지사육이 활발하게 되었다. 그리고 호남에서 생산되는 돼지고기가 경기도 지방의 돼지고기보다 비계가 많다는 이유로 사용량이 크게 줄어들었다. 그전에는 미리 계약금을 갖다주면서 돼지고기를 실어다달라고 하던 사업주들이 이제는 호남지방의 돼지고기를 기피하는 현상이 벌어진 것이다. 이렇게 되자 도축장에는 냉동차의 필요성도 줄어 들고 그에 따라 운전사도 줄어야 할 형편이라 12년 동안 근무하던 그곳을 그만두게 되었다. 12년 동안 근무한 회사에서 퇴직금 한푼 못 받고 쫓겨나는 처량한 신세가 되고 말았다. 회사를 그만두기 3개월 전까지는 20만 원의 월급을 받다가 3개월은 30만 원의 월급을 받은 것이 우리 가정의 유일한 생계수단이었는데 그것이 없어져버린 것이다.
퇴직금이라도 타볼까 하여 광주노동청에 전화로 물어보았다. 노동청에서는 그 회사에서 퇴직금을 주어야만 받을 수 있지 그렇지 않으면 받을 수 없다고 하였다 .
전직 두 대통령이 국민 앞에 증언하길
지금도 그때 계엄군에게 맞았던 부위가 비나 눈이 내릴 것 같으면 며칠 전부터 심한 두통과 빈혈로 인해 3-4일 정도는 꼼짝없이 누워 있어야 한다. 그럴 때마다 병원비가 없어 병원에 가지 못하고 수건을 뜨거운 물에 적셔 다친 부위에 붙여주는 정도로 치료를 하고 있다.
애들의 교육을 위해 애들과 함께 아내는 광주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나는 작년에야 광주로 올라왔다. 현재 살고 있는 상하방은 보성에 있는 논 6마지기를 판 돈 4백만 원으로 얻었으며 방 얻고 남은 돈으로 아이들의 학비로 쓰고 쌀도 팔아 먹고 기타 생활비로 사용하였다.
1980년 5월 20일 다친 직후에는 남들이 내가 계엄군에게 끌려가 맞았다는 사실을 알까 두려웠다. 그래서 유가족과 사망자에 대한 신고를 받고 있다는 것을 알았으나 감히 신고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1988년초 우연히 신문에서 사망자와 부상자에 대한 신고를 받는다는 광고를 보고 5·18 부상자회 회장인 박옥재 씨에게 연락을 하였던 것이다.
신고 후 광주시로부터 부상자에 대한 보상비로 3백만 원을 받았는데 그 돈도 지금까지 생활비로 쓰고 거의 없는 상태다. 앞으로 바라는 것이 있다면 지금 국회에서 청문회가 열리고 있는데 전두환 전대통령과 최규하 전대통령이 국회 청문회에 출석하여 그때의 상황 하나하나를 온 국민 앞에 솔직하게 털어놓았으면 하는 것이다. 그래서 진실이 정확하게 규명되고 난 후에는 거기에 따르는 보상이 꼭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조사.정리 허혜자) [5.18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