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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작가 故 정채봉
흰구름이 말하였습니다.
마을에서 외따로 떨어진 산 밑에 고아원이 있었지. 아까시나무와 상수리나무와 오리나무들이 빙 둘러서
있고 슬레이트 지붕에 빨간 칠을 해서 먼 데서 보면 아늑한 과수원집 같아 보이지만 사실은 낙엽처럼 쓸쓸한 아이들이 모여 사는 서글픈
곳이야. 어떤 날 보면 배가 고픈 아이가 우물가로 나와서 찬물을 한 바가지 마시고는 하늘을 물끄러미 우러러보곤 하는데, 그럴 때면 나는
빵으로 부풀지 못하는 아쉬움에 한숨을 쉬곤 하지. 그러나 이 때보다도 더 가슴이 미어지는 적이 있어. 해질 무렵
산그리메(그림자)가 들녘으로 소리 없이 내려오면 아이들의 놀이판은 꽃잎이 시드는 것처럼 후줄근해지지. 소꿉장난을 하던 아이들도, 숨바꼭질을 하던
아이들도 등불이 하나 둘 물리는 마을 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는 거야. 아아, 그리하여 저 먼 정거장에 와 닿는 기차의 기적이 울린 뒤,
저녁 안개가 묻어 오는 신작로에 어느 여인의 치맛자락이라도 비칠라치면 우우 울타리 너머를 내다보는 아이들…… 그들의 가슴마다에 번져
가는 빠알간 노을을 나는 알고 있지. 노을이 스러지면 어둠이 찾아들고, 어둠이 깊어지면 별이 떠오르듯 이 외로운 고아들에게도 별처럼 아름다운 보모가
계셨어. 어느 날 엄마가 보고 싶어서 굴뚝 밑에 쪼그리고 앉아서 우는 아이의 등을 쓸어 주며 하는 이 보모의 얘기를 나는
들었지. "나도 너처럼 엄마 아빠가 없이 홀로 자랐단다. 내가 밥을 끓이고, 설거지도 하고, 동생의 옷을 갈아입히기도 했지. 내가 선애
너만 했을 때의 가을 운동회날이 생각나는구나. 남들은 다들 부모 형제가 왔는데 나는 혼자뿐이었지. 달리기에서 일등을 하였는데도 누구 하나 반겨
주는 사람이 없었어. 나는 점심 시간에 혼자서 뒷동산으로 올라갔지. 풀숲에 들어가서 한참 울다가 고개를 들어 보니 글쎄 잡초 틈에 피어 있는
코스모스가 눈에 들어오지 뭐야. 누구 하나 돌봐 주지 않았을 텐데도 저 혼자 꿋꿋하게 자라서 꽃을 피운 잡초 속의 코스모스가 어찌나 좋아
뵈던지…… 나중에 나는 그 코스모스와 약속을 했어. 꿋꿋하게 나도 잘 자라서 이쁜 꽃을 피우겠다고 말이야. 선애야, 너도 나와 약속할 수
있겠니?" 아이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나는 보았지. 기쁨으로 가득 찬 내 가슴이 뭉게뭉게 부풀어오르는
한낮이었어. 그런데 며칠 전부터였어. 이 고아원의 아이들이 끼리끼리 모여서 머리를 맞대고 수군거리는 것이 자주 내 눈에
띄었지. 무슨 일일까, 궁금한 나는 귀를 바짝 세웠지. 그러나 아이들은 어찌나 작은 소리로 말을 옮기는지 좀처럼 그 비밀이 새어
나오지를 않는 것이야. 나는 아이들 중에서 가장 나이가 어린 인영이의 머리 위에서 머물렀지. 인영이한테 그 비밀이 옮겨져 오면 틀림없이
인영인 그것을 터뜨리지 않곤 배겨 내지 못할 테니까. 아니나다를까. 인영이가 물가에서 올챙이를 잡고 있는데 선애가 쪼르르르 달려왔어.
그리고 인영이의 귀를 잡고 뭐라고 말하자, 금방 인영이의 얼굴이 빨갛게 변하는 것이었어. "뭐야? 엄마가 시집을
간다고?" "쉬이, 조용히 해." "내가 조용히 하면 엄마가 시집 안 가?" "바보." "그런 것도 모르는
언니가 바보지, 내가 왜 바보야." 인영이는 두 주먹을 쥐고 달려갔어. 고아원의 큰언니들이 복숭아나무 아래 모여 서
있더군. "큰언니, 엄마가 정말 시집가?" "넌 누구한테서 들었니?" "선애 언니한테서." "빠르기도
하네." "큰언니, 정말이야?" "그래, 정말이야. 결혼하신대." "그럼 큰일
아냐?" "왜?" "우리 진짜 엄마처럼 우리를 버리고 갈 거 아냐?"
"그렇지 않아. 지금의 우리 마리아 엄마는
우리와 헤어지지 않는다고 하셨어. 시집가서도 우리와 함께 계속 이 곳에서 사신댔어." "정말이야, 큰언니?" "그럼! 엄마가 우리한테 약속해 주셨는걸." "야아, 신난다! 그런데 언니들은 지금 무얼 걱정하고 있어?"
"엄마한테 결혼 선물을 해야겠는데 마땅한 게 없으니까 그렇지." "참 그렇구나……" 아이들은 다시 시름에 젖는
것이었어. 인영이가 갑자기 좋은 생각이 났는지 손뼉을 쳤어. "큰언니, 꽃다발을 선물하면 어때?" 그러자 키가 큰
사내아이가 한심스럽다는 듯 인영이를 내려다보면서 말했지. "꽃값이 얼마나 비싼 줄 알어? 우리한테는 지금 다 모은 돈이 삼백팔십 원밖에
안 된단 말이야." "나한테도 조금 있어." 인영이가 호주머니 속으로 손을 집어
넣었어. "얼만데?" "전번 은행 앞에서 주운 일 원짜리 셋하고…… 또 우체국 앞에서 주운 오 원짜리 하나하구."
그러자 큰아이들이 조용히 웃었지. "그래 봐야 삼백팔십팔 원밖에 더 되니?" 이 때 산 너머로부터 남풍이 불어와
나의 어깨를 가만가만히 떠다밀었어. 그 자리에 내가 더 있다가는 눈물을 머금게 될까 봐 바람은 은근히 걱정이 되었던 모양이야. 마침내
그 작은 고아원의 보모가 결혼식을 올리는 날이었어. 나는 그 날따라 먹구름이 얼른 비켜 주지 않는 통에 산 너머에서 늦게
나섰지. 강을 건너 들녘을 지나가는데 나를 실어 가는 바람은 또 어찌 그렇게 자주 쉬는지…… 읍내의 예식장에 이르렀을 때는
이미 결혼식이 진행되고 있었어. 유리창 너머로 살며시 들여다본 식장의 맨 앞에는 주례를 맡은 선생님이 서 계시더군. 그
맞은편에는 목화 같은 하얀 드레스를 입은 신부 그리고 깊은 바다 빛깔의 파란 양복을 입은 신랑이 서 있고, 그 뒤로는 단출한 축하객들이 가지런히
앉아 있고, 그 사이사이에는 아이들이 언덕 밑의 풀꽃처럼 박혀 있고. 식장을 한 바퀴 둘러본 나는 신부한테로 다시 눈을 돌렸지. 순간
나는 숨이 컥 막히도록 감격적인 것을 보았어.
신부가 가슴 앞에 두 손으로 모두어 들고 있는 꽃다발. 그것은 내가 처음 보는 아름답고도
고귀한 꽃다발이었지. 주례를 맡아 주신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을 끝맺으셨어. "……저는 오늘 이 조촐한 자리에서 이 세상은 정말
살아갈 만하구나 하고 찡하게 우러나오는 감동을 맛보고 있습니다. 오늘 결혼을 하는 이마리아 님은 고아로 자라나서 고아원 보모가 되신 분입니다.
그런데 이마리아 님이 보살피고 있는 어린이들이 놀라운 사랑의 선물을 가지고 왔습니다. 지금 신부가 안고 있는 꽃다발이 그것입니다. 들녘과
산비탈에 피어난 제비꽃과 진달래와 그리고 냉이꽃과 민들레를 엮어서 만든 이 꽃다발. 이것보다 아름다운 꽃다발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오늘 이
빛나는 결혼식에 참석한 모든 이들에게 풀꽃 꽃다발의 정이 두루 나누어지기를 소원합니다." <1986. 4>
출처: 창작과 비평사 (http://www.changb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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