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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다는 일은 저렇게 곧게 쏟아져 내리는 폭포 같은 것은 아닐 것이다
기어이 산맥은 길을 끊어 왕포나 채석강에서 바위 절벽 아래 떨어지고 바다 끝까지 달려간 마음도 저녁 노을로 스러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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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첩대나 지서 사람들이 밤새 술상머리를 두드리며 부르던 그 유행가 소리를 옛집에서 듣는다
선거場이 설 때마다 공화당 표몰이꾼들에게 말들이 막걸리와 그 질긴 만월표 고무신짝을 풀며 신명을 내던 아버지 내 모든 생각들이 숨을 멈추고 엎드려 있던 대공수사대 벌건 갓등 아래 시멘트벽에 발가벗겨진 내 알몸의 그림자 외롭게 춤출 때 듣던 아버지의 또 다른 이름 빨치산 전향자라는 이름
할아버지 살아계시던 옛집엔 지금도 정정한 참오동나무 한그루 아침 저녁으로 가지를 흔들며 마당에 옛말을 뚝뚝 떨구고 있다
아들의 목숨을 사기 위해 한 마을을 부리던 논마지기도 당신이 묻혀서 들판을 지켜보고 싶던 선산마저 올려세우더니 그예 돌아가셨다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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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어떤 시간의 물살에 허물어져 그 이름이 쓸려가고 살붙이들에게마저 말할 수 없었던 것들이 거기 묻힌다 한들 아버지에겐 끝내 지울 수 없었던 칼날의 마음 흰 눈에 호랑가시나무 마냥 푸르른 겨울숲에 홀로 들어 그 붉은 열매 앞에 몇 번이나 멈추어서서 고개 돌리고 눈물지었으리
쓰러진 마음들이 바위 절벽으로 저를 세워 파도의 아우성 키우는 변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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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는 한 바다를 이루어놓고도 저렇게 돌아서고 돌아서서 어느새 물소리 한자락 없이 제 생애를 비워놓고
-변산 기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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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이 자리에는 박영근을 아주 잘 아는 분들이 참여하므로 굳이 박영근의 시 세계와 현실참여에 대해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내가 박영근을 잘 아는 것도 아닐뿐더러 생전에 한번도 만난본 적이 없습니다. 그가 부안 출신이듯이 나도 단지 부안 출신이며 지금 부안에 살고 있다는 연줄과 나 자신이 부안의 지역문화에 대해 연구를 하고 있다는 문화적 의미가 작용한 까닭입니다. 나는 그의 시들을 읽어본 정도에 노동자시인이라는 특정성을 떠나 시가 참 좋다는 기억이 있을 뿐입니다. 그가 부안에서 활동을 한 것도 아니지만, 그럼에도 그의 고향인 부안/변산반도와 박영근을 하나의 장소-주체로 마주치도록 기억하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으리라 기대해봅니다.
박영근의 절친들이 이야기하겠지만, 내 이야기의 흐름을 위해 그의 생애를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박영근은 1958년 9월 3일 변산면(당시 산내면) 마포리 산기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변산면에서 구 도로로 격포 쪽으로 가다보면 격포 방면과 내소사 방면으로 갈라지는 삼거리가 나옵니다. 마포학교에 오기 직전 삼거리 모서리에 동문슈퍼가 있는데, 바로 그 집터가 박영근이 태어나고 자란 곳입니다. 옛집은 사라졌고 양옥으로 지은 집에서 다른 사람이 살고 있습니다. 박영근은 교육열이 대단했던 아버지의 뜻에 따라 초등학교 5학년 때 집을 떠나 익산으로 옮겨 갔고 전주고등학교에 진학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1학년 때 박영근은 이미 <사상계>나 <창작과비평>을 읽었고 김지하, 고은, 황석영, 이호철 등을 알았으며, 교사들 사이에서는 ‘요주의 학생’으로 찍혀 결국 자퇴하고 맙니다. 그후 문학을 하겠다는 꿈을 품고 상경 생활을 하다 신정동 뚝방촌으로 흘러갔습니다. 당시 박영근은 수많은 책들을 독파하며 시에 미쳤던 문학청년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신정동 뚝방촌으로 흘러 들어간 것은 이 땅에서 힘들고 가난하게 살아가는 민중의 실체와 마주치는 운명의 시간이었습니다. 그후 땡볕과 삭풍이 되풀이 되는 공장에서 고된 일에 시달리고 겨우 방 한 칸에서 끼니나 때우며 사는 노동자들이 있었던 구로공단 등지에서 노동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구로공단은 1980년대 노동운동의 상징이었습니다. 문학청년은 노동자 생활을 하면서 1984년 대학가에서 널리 읽힌 첫 시집 <취업 공고판 앞에서>(청사)를 냅니다. 뒤이어 박영근은 <대열>(풀빛>, <김미순전>(실천문학사), <지금도 그 별은 눈뜨는가>(창비), <저 꽃이 불편하다>(창비) 등 시집들을 펴냈고, 산문집 <공장 옥상에 올라>(풀빛)와 시평집 <오늘, 나는 시의 숲길을 걷는다>(실천문학사) 등의 책들도 펴냈습니다. 그는 또한 1980년 시동인 <말과힘> 활동을 시작으로 민중문화운동협의회, 노동문화패 두렁, 민족문학작가회의, 인천민예총 등지에서 활동하였고, 제12회 신동엽창작상과 제5회 백석문학상을 받았습니다. 타계 1주기에 즈음하여 유고시집 『별자리에 누워 흘러가다』(창작과비평사)가 출간되었습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부안을 떠나 고향을 잊은 박영근이 1997년부터 다시 부안으로 회귀합니다. 잦은 교류를 했던 깨북장구 동무 허정균에게 고향 사람들에 대해 꼬치꼬치 캐묻더니만 결국 밤중에 서울역에서 택시를 타고 변산으로 달려갑니다. 그를 반긴 사람은 옆집에 살던 깨북장구 동무 조찬준이었고, 이후 허정균은 박영근과 동행하여 곰소, 변산, 해창, 계화도, 돈지 등을 둘러보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나온 시들이 ‘변산기행’ ‘해창에서’ ‘바다에 내가 있다’ ‘물때’ 들입니다. 어떤 이는 박영근의 시가 있게 한 문학적 지주 중 하나는 ‘탯줄을 묻은 고향 부안’이라고 짐작했습니다. 핵폐기장 싸움이 한창이던 2004년 11월 13일 박영근은 격포항에서 있었던 ‘상생, 평화, 공존을 위한 문학축전’에 참여해 고향의 동무이자 시인인 박형진 등과 함께 시낭송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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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로, 나는 박영근의 시를 좋아합니다. 그의 시는 삶의 현장, 노동의 현장에 있었고, 그 자신도 시의 뿌리가 1980년대의 노동현장에 있다고 했으며, 그렇다고 노동자 이데올로기를 시로 형상화하는 방법을 구사하지는 않았다고 봅니다. 그는 자신이 표현한대로 “가장 서정적인 게, 가장 민중적이라는 진리”를 시로 보여주었습니다. 박영근은 부조리한 현실에 대해 어떤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말씀을 시로 드러내는 것에 대해 매우 불편하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시를 쓴다는 것은 자신의 몸과 마음에 새겨진 세상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 즉 무엇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고 드러내는 것이라고 힘주어 말합니다. 그는 자신이 현실의 생생한 일부이기를 원했습니다. 박영근이 노동자 시인으로 위치하고 있으면서도 시 본래의 힘을 강렬하게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시에 대한 이러한 태도 때문이었을 겁니다. 시인 정희성은 이렇게 말합니다. “좋은 시는 울림이 크고 가슴에 오래 그 향기를 남긴다. ‘지금도 그 별은 눈뜨는가’가 그렇다.” 박영근의 시는 우리의 기억 속에 영원히 향기를 남길 것입니다. 달리 표현하자면, 삶-욕망의 문제가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현실참여에서는 이데올로기가 중요한 문제였겠으나 시세계에서는 삶-이데올로기-주장이 아니라 삶-욕망-드러내기의 미학적 표현을 중시했을 겁니다.
둘째로, 나는 박영근의 노동자되기-민중되기 삶을 좋아합니다. 나는 나의 개인적 관점에서는 역사-사회의 주체에 있어서 다중적(多衆的) 주체성의 사회참여를 중시하는 입장이지만 그렇다고 노동자성/민중성마저 버리는 것은 아닙니다. 탈자본주의적, 탈근대적 삶을 지향하는 다중적 주체야말로 오늘의 희망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노동자되기-민중되기는 노동자-민중(또는 계급지배/권력지배)이 존재하는 한 영원한 소수자의 향기입니다. 노동자되기-민중되기는 가난한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박영근은 가난한 시인이었습니다. 그러나 박영근에 있어서 가난함이란 결핍을 욕망으로 충만하게 하는, ‘80년대와 90년대가 두서없이 찾아 왔’어도 좌절보다는 희망을 앞세우며 살도록 한, 힘의 근원이었고 문학적 화두였습니다. 가난은 부끄러운 게 아니라고들 하나요.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가난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생명력이자 창조성, 그리고 집단적 연대의 상징입니다.
셋째로, 나는 박영근이 부안사람인 것을 자랑스러워합니다. 이것은 지역주의적 발상이 아닙니다. 사실, 박영근이 어느 지역사람이면 어떻습니까. 그가 어떤 시를 썼고 어떤 삶을 살았느냐가 중요합니다. 그러나 시세계와 삶-욕망은 기억과 잠재태/현실태 속에서 구체적 장소성들과 존재론적으로 결부되어 있습니다. 박영근이 일찌감치 '요주의 학생'으로 찍혀 자퇴하고 결국 노동현장으로 귀의해 들어간 것은 '변산기행'에서도 나타나듯 '빨치산 전향자'를 아버지로 두고 '발가벗겨진 알몸의 그림자'로 기억되고 있었고, 또한 가난한 자로 살아갔기 때문이 아닐까요. 부안 사람들은 조선시대의 기생시인 매창과 20세기의 시인 신석정은 알아도 박영근은 전혀 모른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박영근은 최근래 시인이자 부안에서 활동한 시인이 아니니까요. 그러나 이제 박영근은 부안에서도 기억해야 합니다. 부안 사람들은 역사적 의미로 남겨질 부안항쟁의 저력을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그는 부안을 노래할 줄 아는 부안 출신의 시인이었고,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한 노동시인이었고, 그 시적 형상화에 있어서도 탁월한 미적 감촉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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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부안에서 박영근을 기억하는 방법으로서 전시대의 부안시인 신석정(1907-1974)과 연계할 것을 제안합니다. 이는 부안이라는 장소성과 결부하여 한국 근대성의 편린을 문학적으로 읽어내는 하나의 방법일 것입니다. 다른 결이긴 하지만, 신석정이 20세기 전/중반을 노래했다면, 박영근은 그 후반을 노래했고, 깊은 연구가 필요하겠지만 이들의 시세계에는 어떤 공통감각이 내재한 것으로 보입니다. 삶-욕망-드러내기-행위...
주지하다시피 신석정은 부안의 자랑스러운 한국현대사 시인입니다. 시인은 목가시인 혹은 서정시인으로 널리 알려져 왔습니다만, 참여성을 제거한 음풍농월하는 순수서정시는 거부하며 “시를 쓴다는 것은 시에서 살고 싶은 욕망에서 발로하는 행동의 일단”이라 말해왔습니다. 그는 또한 시의 고향은 바로 “생활이 아니면 안될 것”이라고도 말해온 바 곧 생활시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소시민적 생활시인이라고도 할 수 없는 게 한국의 현대적 삶을 살아가는 생존자 혹은 목격자로서의 현실을 격정적으로 표현한 까닭입니다. 그는 1974년 간행된 유고 수필집 <난초잎에 어둠이 내리면>에서 다음과 같이 술회합니다.
“한때 독립운동의 기치를 높이 들고 맨 앞장을 내딛던 분들이 학병과 지원병의 권유 유세의 앞장에서 눈물로 호소하던 슬픈 풍경을 목격했을 때, 나는 가슴 속으로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소리없는 통곡을 하던 일이 바로 엊그제 같이 선하게 떠오른다. 그들이 한때 생명처럼 여기던 지조를 헌신짝처럼 팔아넘기면서도 그들 나름의 변명은 없지 않았을 것이다. 일제의 총칼에 할 수 없었다는 것은 차라리 좋으나, 그것이 민족을 위하는 길이라는 궤변에는 침을 뱉아주기에는 내 침이 아까왔다.”
실제로 신석정은 1943년 당시 친일작품으로 한창 미쳐가던 서정주에게 보내는 시를 씁니다. “눈오는 겨울밤 / 피비린내 나는 네 시를 읽으며 / 꽃처럼 붉은 우름을 밤새 울었다는 청년 / 그 청년이 바로 우리 고을에 있다 // 정주여 / 나 또한 흰복사꽃 지듯 곱게 죽어갈수도 없거늘 / 이 어둔 하늘을 무릅쓴채 / 너와 같이 살으리라 / 나 또한 징글 징글하게 살어보리라”(‘흑석고개로 보내는 시─정주에게’). 뿐만 아니라 4·19 때는 이승만의 사진으로 밑씻개를 하자던 시인 김수영마저도 조롱합니다. “한 시인이 있어 / ‘딱터 이’의 초상화로 밑씻개를 하라 외쳤다 하여 / 그렇게 자랑일 순 없다 / 어찌 그 치사한 휴지가 우리들의 성한 / 육체에까지 범하는 것을 참고 견디겠느냐!”(‘쥐구멍에 햇볕을 보내는 민주주의의 노래’).
시인이 그 마을 사람들과 동고동락한 주민이었을 뿐만 아니라, 시인의 시세계는 청구원에만 갇혀 있지 아니하고 마을과 세상으로 열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선은동의 유년시절을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노령산맥이 동남으로 병풍 두르고, 눈이 모자라도록 넓은 벌을 끼고 있는 이 고을 뒷산에 오르면 서해바다의 수평선이 한눈에 들어오고, 그 산 옆에 아름드리 고목이 울창한 서림공원은 내 젊은 꿈이 한 그루 한 그루에 새겨진 유일한 산책의 길이었습니다. 그 숲속에서 베를레르의 ‘가을노래’를 읊으며 해를 지웠고...” 또한 시인은 <슬픈 목가>의 발문에서 “‘생활’이라는 무서운 현실”을 직시하였고, 앞서 보았듯 어느 글에서는 “시의 고향은 바로 생활이 아니면 안될 것이다”고 말합니다. 이 생각은 곧 시의 세계이기도 합니다. 가령, 1952년에 쓴 ‘귀향시초’(歸鄕詩抄)는 그것의 표현입니다.
1 껌도 양과자도 쌀밥도 모르고 살아가는 마을 아이들은 날만 새면 피뿌리와 칡뿌리를 직씬 깨물어서 이빨이 사뭇 누렇고 몸에 젖인 띠뿌리랑 칡뿌리 냄새를 물씬 풍기면서 쏘다니는 것은 퍽은 귀엽고도 안쓰러워 죽겠습데다.
2 머우 상치 쑥갓이 소담하게 뇌인 식탁에는 파란 너물 죽을 놓고 둘러 앉아서 별보다도 드믈게 오다 가다 섞인 하얀 쌀을 건지면서 ‘언제나 난리가 끝나느냐?’ 고 자꾸만 묻습데다.
3 껍질을 베낄 소나무도 없는 매마른 고장이 되어서 마을에서는 할머니와 손주 딸들이 들로 나와서 쑥을 뜯고 자운영순이며 독새기며 까지봉통이 너물을 마구 뜯으면서 보리고개를 어떻게 넘겨야겠느냐고 산수유꽃같이 노란 얼굴들을 서로 바래보고 시서겊어 합데다.
4 술회사 앞에는 마을 아낙네들이 수대며 자배기를 들고 나와서 쇠자라기와 술지겅이를 얻어가야 하기에 부세부세한 얼굴들을 서로 쳐다보면서 차표 사듯 늘어서서 꼭 잠겨 있는 술회문이 열리기를 천당같이 기두리고 있습데다.
5 장에 가면 흔전만전한 생선이 듬뿍 쌓여 있고 쌀가게에는 옥같이 하얀 쌀이 모대기 모대기 있는데도 어찌 어머니와 할머니들은 쌀겨와 쑤시겨전을 찌웃찌웃 굽어보며 개미같이 옹개옹개 모여서야 하는 것입니까? 쌀겨에는 쑥을 넣는 게 제일 좋다고 수군수군 주고받는 이야기가 목놓고 우는 소리보다 더 가엾게 들리드구만요. -귀향시초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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