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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농민항쟁을 이끈 류계춘(柳繼春)선생
* 2012년 6월 24일
* 경상남도진주시 수곡면 창촌리 옛무실장터에서
* [진주농민항쟁기념탑]이 2001년 9월26일 창립한 [진주농민항쟁사업회] 주관으로 부지 13,850평방미 터에 6억여 원의 진주시비와 경상남도비로 준공되었습니다.
* 진주농민항쟁을 이끈 류계춘 선조님의 민족사랑 나라사랑 모습을 여기 올립니다.
이걸이 저걸이 갓걸이 진주망건 또 망건
짝 발이 휘양건 도래 줌치 장도칼
머구밭에 덕서리 칠팔월에 무서리 동지 섣달 대서리
이 노래는 1862년 임술 진주농민항쟁 무렵 진주 지방에서 비롯되어 농민 시위대가 뜨겁게 소리쳐 불렀던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혁명가로서 뒷날 한국인들이 즐겨 부른 민중가요였다. 이는 진주농민항쟁을 이끄신 선비 류계춘(柳繼春1818-1862)선생이 손수 노랫말을 짓고 곡을 붙여 한 시대의 아픈 역사를 상징적으로 증언해 주는 귀한 진주의 문화유산이다.
선생은 진주 무실(수곡) 원당에서 文化柳氏(좌상공파) 28세손 之德과 晉州鄭氏의 3남2녀 중 長男이셨다. 선생의 시대에는 國家 財政의 根本인 三政이 문란하여 農民의 고통이 하늘에 사무쳤다. 선생은 농민이 겪는 참혹한 수난을 바라 볼 수만 없어 그들의 억울함과 슬픔을 덜어주기 위하여 농민과 한 몸이 되고자 했고 이는 시대의 부름이기도 했다.
곳곳을 찾아다니며 관리들의 비리와 폐단을 질타하는 泣訴(읍소)와 영소(營訴)를 올려 농민들을 도우자 농민들은 先生을 의지하며 따랐다. 농민들은 선생의 절규(絶叫)를 알아듣고는 마침내 오래 억눌려 온 분노의 함성을 터트렸다. 그 함성은 해묵은 모순 덩어리를 깨뜨리는 천둥이 되어 진주 산하를 흔들고 그 메아리는 온 나라로 퍼졌다. 임술 진주농민항쟁은 東學이 세상에 뿌리내릴 수 있는 土壤이되어 주었고 32년 뒤에는 저 東學農民革命의 꽃이 필 수 있는 歷史의 모체가 되었다. 선생이 순국한지 143년 지나 선생의 숭림(崇臨)한 인간사랑 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後孫들의 떨리는 마음을 모아 여기 진보(眞寶)의 작은 등불을 밝혀 세운다.
병술년 서기2006년 봄날 平江 정동주 삼가 짓고 윤효석 삼가 쓰다.
위의 글은 진주시 대평면 당촌리 선생의 묘에 지난 2006년 4월 5일 제막된 비문이다. 150여 년간 선생의 후손들의 아픔은 말로 글로 표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제 세월이 바뀌어 후손들은 선조의 고귀한 정신과 행동을 오늘에 되살리고 후세에 전하고자 뜻을 모으고 있다.
1592년 임진왜란 5년 후 1597년에는 다시 정유재란이 이 나라 백성들을 괴롭혔다. 1636년에는 병자호란이 조선을 멍들게 하면서, 조선의 운명은 서서히 하양 곡선을 긋고 있었다. 대원군의 쇄국정책, 서구 열강의 침략, 일본의 조선 잠식이 이 나라 앞날에 먹구름이 드리워가는 무렵, 위정자(爲政者)와 관리들은 국태민안(國泰民安)보다는 권력을 앞세운 민중수탈이 자행되었는데 그 도가 경상도 진주를 중심하여 심했다.
조선시대의 조세제도의 근간인 삼정은 전정(田政), 군정(郡政), 환곡(還穀)이다. 전정은 토지세, 군정은 병역의무와 관련된 세금, 환곡은 봄철의 식량부족과 파종기 종자 부족을 해결하기 위하여 국가에서 곡식을 빌려 주었다가 가을 수확 때 이자를 붙여 되돌려 받았다. 이 같은 국가 조세제도의 골격인 삼정제도가 오랜 모순으로 폐단이 커지자 이에 따른 구체적인 폐해는 농민들의 부담으로 귀결되었다.
관청의 재정 결손액인 이포(吏逋)를 충당하기 위해, 전세(田稅), 대동세(大同稅) 기타 세목을 합해 금전으로 환전하여 일괄 부과하는 도결(都結)을 시행하고, 관청의 환곡미 결손 분을 각호에 분담시키는 통환(通還))의 방법으로 농민을 수탈하였다. 당시의 사회계층은 사농공상(士農工商)으로, 국가가 필요로 하는 노동력과 세금을 가장 낮은 계층인 농민들의 육체적 노동과 농사지은 곡식, 베틀로 짠 군포로 받쳐야 했다. 양반 사대부는 병역의 의무도, 부역 등 노동력을 바쳐야 할 필요도 없었으며, 아무리 재산이 많더라도 세금 낼 까닭이 없었기 때문에 국가가 어려울수록 항상 고통 받는 것은 농민들 뿐이였다. 끊임없이 늘어 가는 삼정 폐해에 따른 부담은 농민들을 살아갈 수 없도록 만들고 있었다.
첫째, 전정의 문란 즉 토지세의 모순은 전 국토를 쑥대밭으로 만든 임진왜란, 정묘재란, 병자호란으로 더욱 심각해져 같다. 오랜 전쟁 때문에 많은 토지가 황폐해진데다 양반, 관리, 토호들이 고의적으로 토지 대장에 등록하지 않고 숨겨둔 토지와 세금을 안내는 면세 토지가 늘어나자 국가의 조세 수입은 그만큼 줄어들었다. 이렇게 줄어 든 세금을 모두 농민들에게 부담시켰으니 농민들의 삶은 고통 뿐 이였다.
여기에다 관청에 근무하는 관리들이 개인적으로 탕진해 버린 공금을 채워 넣기 위해 도결(都結), 통환(通還)이라는 이름의 세금을 만들어 마음대로 부과하여 거둬들였다.
둘째, 군정 즉 병역의무와 관련된 세금은 군포(軍布)라는 이름의 베를 징수하는 것이다. 그런데 양반, 아전, 관노(官奴)는 병역이 면제 된데다, 정치 기강이 문란해지자 일부 농민들도 세도 있는 양반 가문에 붙어서 병역을 기피하는 폐단이 깊어 갔다.
셋째, 환곡제도는 앞의 두 제도보다 더 심했다. 고리대(高利貸)로 변질되어 지방관청 관리들이 탐욕을 키우는 가장 악질적인 농민 수탈 방법이였다. 처음부터 월급이 없는 아전들은 농민을 착취하고 공금과 관청 곡식을 횡령 착복하는 협잡을 하도록 되어 있었다. 얼마만큼의 부정부패를 국가가 공식적으로 묵인해주고 있었던 것이다.
이 같은 전 국가적 모순에 저항의 횃불을 맨 처음 든 것은 경남 진주 수곡 원당리에서 류계춘선생이 앞장선 농민들이였다. 조선 어느 지방보다 모순이 더 크고 착취가 심했기 때문이다. 진주는 진주 목사가 다스리는 행정 관청 외에 경상우도 병마절도사가 다스리는 군사기관인 병영까지 있어서 관리와 아전의 숫자가 그만큼 많았다. 또한 향교와 서당이 많아서 향교의 교생, 서원의 원생은 모든 의무에서 면제되는데 그 면제 액 만큼 농민들의 부담은 늘어났다.
류계춘선생은 위와 같은 진주목과 병영 아전들의 혹독한 수탈에 대하여 여러 해 동안 해당 관청에 진정서를 내거나 고발장을 접수시키기도 하면서 폐단을 고쳐달라고 애원하는 소(訴)를 통하여 문제제기를 했다. 이에 관에서는 류계춘선생을 온갖 방법으로 박해하고 괴롭혔다. 이런 선생을 지켜보던 농민들은 류계춘선생에게 직, 간접적인 지지를 보내기 시작하였다. 그러는 사이에 농민수탈은 더욱 심해 류계춘선생은 무력항의 방법을 택한다. ‘이걸이 저걸이 갓걸이----’노래를 지어 농민들이 함께 부르며 결속력을 다지도록 했다. 거사가 성공하든, 실패하든 주모자는 극형 당함을 예상하고 모든 것을 선생이 책임지는 방향으로 조직을 이끌어 갔다, 사족(士族)인 이명윤은 조직에서 제외시키고 그의 6촌 이계열을 초군(樵軍)을 지휘하는 행동대장에 참여 시켰다. 류계춘, 장교출신 김수만, 의령출신 이귀재, 이계열 등이 주동이 되었다.
농민들에게 가장 악랄한 아전으로 알려진 자와 양반으로서 가장 탐학과 착취가 심한 자들을 선정하여 그들의 구체적인 비리 내용과 이름을 적은 전단지를 한글로 만들어 붙이고 뿌렸다. 농민들이 더 이상 참기만 해서는 안 되는 이유, 구체적으로 어떤 인물이 농민의 적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소상하게 적어서 비밀리에 돌려 읽히는 회문(回文), 맹세하는 통문(通文)을 만들어 거사에 임했다.
1861년 말 진주목사의 도결 결정, 경상우병사 백낙신의 통환결정, 이에 반발하여 류계춘선생은 1862년 1월 내평촌에서 궐기를 모의하기에 이른다. 2월2일 류계춘과 이명윤은 항의방법에 대하여 마찰을 일으키고 류계춘은 독자적 방법을 택한다. 2월4일 단성에서 민란이 먼저 발생하자 이에 자신감을 얻고, 마침내 1862년 2월6일 수곡에서 도회(都會:대집회)를 열어 각 지역의 대표자 300여명과 수많은 군중이 참여한 회의에서 온건론을 버리고 류계춘선생은 강경한 방향을 택한다. 수청가(지금의 자양리) 회의에서는 사람을 더욱 모아 철시(撤市)를 선동하여 분위기를 고조시키고 초군(樵軍:지게꾼 군인)을 주축으로 지도부의 주장이 농민항쟁으로 나타나도록 치밀하게 유도하였다. 도회 직후 2월7일 농민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자 류계춘선생은 진무청에 감금되었으나 2월13일 집안의 제사를 이유로 휴가를 얻어 집으로 돌아온다.
2월14일 덕산 시장에서 농민들의 봉기를 주도하고 훈장 이윤서 집을 공격하였다. 덕천강을 따라 진주읍으로 향하면서 곳곳의 농민들을 규합하였다. 2월18일 평거역에서 격렬한 시위를 벌이고, 목사의 도결(都結) 취소 결정문이 이명윤을 통해 나오도록 한다. 이후 이명윤은 귀양을 갔다고 하나 확실치는 않다. 2월18일 오전에 머리에 흰 수건을 쓰고 몽둥이를 든 농민 수 천 명이 진주읍과 진주성에서 서쪽으로 5리 떨어진 곳에 진을 치고“도결과 통환를 혁파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2월19일 진주목 객사 앞에서 수 만 명의 농민이 시위한다. 경상우병사 백낙신은 시위대들을 회유하고자 즉석에서 김희순을 처형한다. 시위대는 통환철폐 공문을 받아내고 병사를 감금하면서 목사의 자리를 옮긴다. 2월20일 오후 외곽지역으로 분산하여 공격한다. 이날 경상우병사는 농민항쟁의 소식을 알리는 장계를 조정에 보고한다. 2월21일 농민 주력군은 소촌역에서 시위를 한다. 2월22일 남성동, 청강마을 토호(土豪)들을 공격하면서 옥천사까지 진격한다. 2월23일 옥천사에서 시위대는 해산을 한다.
해산 이후에도 농민들의 열기는 가라앉지 않고 안핵사(按覈使)와 같이 특수한 임무를 띤 관리가 파견되자, 그들의 요구를 재확인하려고 다시 모였다. 심지어 체포, 구금된 자가 몰래 각 면에 통문을 보내어 다시 집회를 열어 자기들을 구해달라고 촉구하기도 하였다. 이미 신임 목사, 병사가 파견된 뒤에도 항쟁의 분위기는 지속하였다.
농민군이 해산한 후에 나타난 특징은 첫째, 해산 후 관의 탄압으로 류계춘선생 등의 주동자들이 체포된 뒤에도 새로운 인물들이 활동을 주도하였다. 이들은 항쟁과정에서 부각된 매우 활동적인 인물이였을 것이다. 둘째, 활동의 내용은 미리 예정한 대로 다시 집단 시위를 벌이는 것 이였는데 이는 이전에 목사와 병사에게서 획득하였던 내용을 중앙에서 특별히 파견된 관리를 통해 다시 다짐받기 위해서였다.
3월18일 안핵사(按覈使) 박규수가 진주에 도착하여 조사가 시작되었다. 3월 들어 농민항쟁이 함양, 거창 등 다른 고을 삼남 전역으로 파급되면서 이후 충청이남 전 지역에서 농민항쟁으로 이어지고 32년 후에는 동학농민전쟁(1894)으로 이어졌다.
5월30일 주동자 류계춘선생은 진주 분강(진주시외버스 강변모래사장, 나루가 있었음)모래사장에서 44세의 혁명아로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김수만, 이귀재 함께)
선생이 생장한 원당리는 문화류씨 고려개국공신인 대승공 류차달의 13세 좌상공 휘 만수(좌상공파조)의 증손자 16세 중군사정(사정공파 중시조) 휘 사문(思問)의 아들 인동현감 휘 형(炯)이 500여 년 전 무오사화(戊午士禍)를 피하여 은둔하고자 서울에서 낙향하여 자리 잡은 곳이다.
류계춘선생은 좌상공파 29세이며 중군사정 휘 思門이 13대조이고, 원당리에 낙향한 그 아들 인동현감 휘 炯이 12대조가 된다.
이후 그 손들이 사족(士族)으로 번성하여 원당, 덕산, 하동, 통영, 진주, 대구, 부산, 서울, 인천, 등 전국에 천여호가 생활하고 있다.
원내리에 있는 원천재(元川齋)에서 음력 10월 둘째 일요일 500여년 후손들을 이끌어 주시는 선조들의 시향을 뫼시고 있다.
류계춘선생의 9대조 조계류종지(潮溪柳宗智) 선생은 남명조식의 문인으로서 영남의 학자로 명성이 자자하다가 정여립의 모반 사건인 기축사옥(1586년) 때 44세의 나이로 무고에 의해 옥사하였다. 후에 사면이 되고 수곡면사곡리 대각서원에 제향되어 있다. 8대조 伊榮은 訓導, 7대조 해(楷)는 察訪을 지냈다. 선생은 김해 허씨와 결혼을 하고 아들 한분과 손자 셋, 손녀 셋을 두었다. 현재 손자 윤특(일명:내하 90세)옹이 진주시 사봉면에 거주하고 있다. 증손자 명열, 은열, 성열(경상대학근무), 일열, 자열, 찬열(김해시 상동면 협진프라스틱 대표), 등이 있다.
주도자들이 형을 집행당한 후 유족들의 어려움은 “말도 못한다. 우리가 사는 건 사는 게 아니였지, 수곡 원당이 고향인데 여기서 못살고 사봉에서 살아왔잖아. 도망가다시피 갔지. 그 때 만주로 일본으로 부산으로 가서 산 사람들도 있어 우리가 살아온 것을 책으로 쓴다면 몇 권은 될거야” 90세 류옹의 말. 후손들은 고향에서 살지 못했다. 주모자 가운데 한 명이였던 황계동의 후손들은 일본으로 건너가기도 했다. 일제 때에는 친일파에 의해, 그 후에도 토호 세력들에 의해 핍박을 받다가 다른 곳으로 도망가다시피 가서 살았다고 한다.
류계춘선생이 주도한 晋州農民抗爭은 한때 ‘진주민란’ 임술민란‘으로 불리면서 역사적으로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했으나 동학농민혁명을 잉태하고 있었다. 그나마 1980년대 이후 진주농민항쟁으로 인정받는 선에서 더 나아가지 못하고 정부주도나 관련 단체들의 기념물 하나 없는 처지이고, 후손들의 힘으로 세운 비석하나가 외로울 뿐이다.
필자는 계춘 할아버지의 역사적 사실에 대하여 문외한 이였다가 이 원고를 작성하기 위해 각종 자료를 접하고 수집하면서 계춘 할아버지의 생각과 말,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고 국가를 위해 목숨을 기꺼이 바치는 모습에서 목이 메여 글을 잇기가 힘들었다. 그리고 문화류씨, 좌상공파, 이곳 원당리에 뿌리내려 중군사정공 소종의 가족 울타리를 만든 선조와 함께 이 시대를 살아가는 가문에 대한 연민과 자랑을 함께 갖어 본다. 종친 여러분! 우리에게 이렇게 훌륭한 할아버지가 계셨고 그분의 피와 열정이 나와, 우리 자손들에게 이어지고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한다. “오호 지하에 계신 할아버지께 150여년이 지난 지금 영원한 안식을 기원드립니다.” 뿌리라는 것의 의미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이제 우리 후손들은 할아버지의 역사적 업적과 그 의미가 각계각층이 새로운 각도에서 조명하도록 모든 역량을 받쳐야 한다고 본다.
1988년 진주농민항쟁을 소재로 ‘백정’이라는 소설 10권이 발간되었다. 1,2,3권에서는 류계춘선생의 농민항쟁을 위한 활약상이 집중적으로 소설의 내용이 되고 있다.
아래의 참고자료에서나마 할아버지의 업적을 기리고 그 후속 조치들을 논의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으며 우리 자손들도 앞장서 할아버지의 고귀한 정신이 헛되지 않기를 바랄뿐이다.
참고자료 : 1. 경남신문 2. 진주신문 3. 소설‘백정’ 1989년. 정동주 저
4. 진주농민운동의 역사적조명 경상대학교. 2003년
5. 1862년 진주농민항쟁. 김준형. 지식산업사 6. 인터넷 각종자료
* 2007년 경상남도 진주시 수곡면 면지(面誌) 원고로 제출한 내용입니다.
* 150여년이 지난 2012. 6. 24. 항쟁의 횃불을 올렸던 옛 무실장터에 [진주농민항쟁기념탑]이 준공되는 모습을 다음 장에서 사진으로 기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