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리석은 승부
우리들은 작고 하잘 것 없는 일에 지나치게 신경 쓰고 쓸데없이 에너지를 낭비하는 때가 많다.
대범하게 생각하면 아무 것도 아닌 것을 공연히 심각하게 여겨서 고민하고 고통스러워하는 경우가 그것이다.
지금부터 30여 년 전의 얘기다.
당시 나는 대구에서 군에 복무 중이었는데 휴가로 서울에 갔다가 공교롭게 추석날 돌아오게 되었다.
고속버스가 운행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으므로 꽤 인기 있는 교통기관이었는데
승차하기 전에 친구와 얘기가 길어져서 막 출발하기 직전에 제일 마지막으로 올랐다.
아직 총각시절이어서 짓궂은 나의 친구는 나에게
“네 시간 동안의 여행이 행복하도록 자네 옆자리에는
가장 아름다운 여자가 앉게 되길 바란다.”고 눈을 찡긋하며 말했다.
농담이라고 해도 기분 좋은 말이었고 은근히 나도 그의 말이 현실화되길 기대했다.
내가 중간쯤 있는 나의 좌석을 향해 좁은 통로를 지나가면서
이미 내 옆 좌석에 앉아있는 사람을 보았을 때,
그 사람은 미리 나에 대해서 실망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내가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고,
어쩌면 양쪽 다 실망하고 있는 것이었는지도 몰랐다.
내 좌석이 창문쪽이었으므로, “실례합니다.”라고 향해를 구하고
내가 안쪽으로 들어가려고 했을 때, 일반적인 경우에는 그가 잠간 일어나서 비켜서 주는 법인데
그는 크고 뚱뚱한 체구를 약간 옆으로 비틀었을 뿐이었고,
나는 베를린 장벽을 넘는 것처럼 어렵게 그의 무릎을 스쳐 내 좌석에 앉을 수 있었다.
추석날이었으므로 버스의 안내양은 곱게 한복을 차려 입었었고 승객들 대부분이 좋은 옷을 입고 있었다.
아마 그 전날 양복점에서 새로 맞춰 입은 것으로 보이는 감색 싱글과
방금 이발소에서 나온듯한 머리-포마드가 자르르 흐르는, 윤기 나는 숱 많은 검은 머리와
버스 타기 직전에 닦아 신은 듯한 번쩍이는 구두... 등 요컨대
그는 자기의 차림새에 대해서 상당히 신경을 쓴 것 같았다.
그러나 적어도 내가 보기에 그것은 오히려 세련되지 못한 촌스러움으로 느껴졌는데,
왜냐하면 눈부시게 하얀 와이셔츠 소매와 크고 거칠며 손톱 끝에 때가 끼인 그의 손모양의 부조화,
그리고 흉터가 있는 검은 얼굴의 인상과
껌을 질겅질겅 씹고 있는 무교양한 표정 등이 그것을 나타내주는 듯 했다.
특히 서너 번 씹다가 규칙적으로
“딱”하고 크게 소리를 내는 껌 씹는 기술은 그를 좋게 봐줄 수가 없었다.
차가 서울의 톨게이트를 지나왔을 때 그는 3돈쯤 정도의 금반지를 낀 손으로
조끼 주머니에서 당시 제일 고급이었던 청자 담배를 꺼냈다.
그리고는 대부분의 경우 남자끼리라면 옆 사람에게 담배 한 대 정도는 권하게 마련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나를 완전히 무시한 채 한 개비만 쑥 뽑아 입에 물더니 다시 다른 주머니에서
가스라이터-그때는 가스라이터가 무척 귀할 때였다-를 꺼내 자랑스럽게 불을 붙이고는
호기 있게 담배를 피워대기 시작했다.
그뿐이 아니었다.
때마침 스피커에서는 승객들에게 서비스해 주기 위해서 유행가가 흘러나오고 있었는데,
예컨대 배호의 돌아가는 삼각지, 혹은 남일해가 부르는 구성진 곡조들인데,
그는 대단히 익숙하게 번쩍이는 구두 끝으로 박자를 맞추고 있었다.
나는 너무나 기분이 나빴다.
유행가도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의 장단 맞추는 능숙한 솜시는 정말로 불쾌한 느낌을 주었다.
나는 의도적으로 그를 무시해버리기로 마음먹었으나 오히려 신경이 더 쓰였다.
나는 담배를 꺼냈다. 점퍼 주머니에 구겨져있는 담배갑-‘청자’보다는 한 단계 저급담배-속에서
빼낸 담배는 유감스럽게도 거의 부러져 있었는데 그것을 궁색하게 입에 물고 성냥을 꺼냈는데
신경질 나게 성냥불도 잘 켜지지 않아 서너 개비를 실패한 후 가까스로 불을 붙일 수 있었다.
나는 여러 가지 면에서 그에게 패배하고 있었다.
흙 뭍은 더러운 구두, 초라한 옷차림새 같은 것이 마치 그의 값진 가스라이터와
나의 부러진 성냥 개피 만큼이나 거리를 느끼게 했다.
천안 휴게소에서 내가 잠간 내렸다가 돌아왔을 때
그는 자랑스러운 듯한 표정으로 커피를 홀짝홀짝 마시더니
주머니에서 ‘님에게 초콜릿’을 꺼내 혼자서 조금씩 떼어먹었다.
그 순간 나는 그를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그런 초콜릿은 어린애나 혹은 예쁜 여자애들 아니면
얼굴이 희고 은테안경이라도 쓴 섬세한 남자에게나 어울리는 주전부리이지,
그따위 투박하고 무례하며 검고 거친 손을 가진 사내에게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아, 생각해보니 한마디로 그는 아무래도 나를 비웃고 조롱하며
내가 속상해하는 것을 은근히 즐기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주머니에 말아 넣었던 유식한 책을 꺼내서 펼쳐 들었다.
그것은 고어체의 독일어 책이었으므로, 나는 보란 듯이 내가 이렇게 유식한 책을
읽을 수 있는 정신적인 귀족임을 나타내어 그를 기죽게 할 작전이었다.
그러나 나의 심리전술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의 표정에는 기죽는 아무런 표정도 나타나지 않았다.
버스가 추풍령 휴게소에 닿았을 때였다. 나는 안내양에게 아주 친근하게 다가가서
버스에서 나오는 대중가요 대신에 클래식 음악을 부탁해 놓고,
휴게소에서 새알처럼 생긴 초콜릿을 하나 사다가 그녀에게 주었다.
나의 부탁대로 추풍령을 떠난 후 음악은 배호나 남일해가 아닌 바흐와 모차르트로 바뀌었다.
나의 교활한 추측처럼 그는 더 이상 번적이는 구두 끝으로 박자 맞추기를 중지했고,
나는 손가락 끝을 보일락 말락 까딱이면서 음률을 따라 들릴락 말락 하게 휘파람을 불었다.
그리고 안내양이 지나갈 때 나는 고맙다는 눈짓을 보냈고, 그녀도 생긋 웃으며 답례를 했다.
그 순간부터 나는 그에게 역전승의 계기를 잡은 것이었다.
나는 구겨진 담배지만 그에게 권하지 않고 호기 있게 피워 물었고
바흐를 즐겼으며 예쁜 안내양에게 웃음을 받았다.
그때부터 그는 기분 나쁜 표정을 나타내기 시작했지만 나는 그것을 싹 무시해 버렸다.
‘봐라, 나는 유식한 책을 읽을 수 있고 고상한 음악을 즐기며
예쁜 안내양과 호의 어린 눈인사를 하는 사람이다!’라고 마음 속으로 외치며
그에게 뽐내고 있었다.
차가 동대구역(당시에는 현재의 위치가 아닌, 교통이 불편한 곳에 떨어져 있었다)에 도착했다.
그의 뒤를 따라 내린 후 택시를 잡기 위해 나란히 서 있었다.
택시가 왔을 때 그와 나는 동시에 손을 들고 택시에 다가갔는데 내가 조금 빨랐다.
나는 택시에 오른 후 매정하게 문을 닫았다. 차가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 나는,
‘자! 최후의 승리자는 나다, 어떠냐?’ 하는 마음으로 뒤를 돌아다보았다.
그는 그 자리에 선채 증오심을 품은 표정으로 나를 쏘아보고 있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나는 쇠망치로 얻어맞은 듯한 느낌을 받았다.
아하! 진짜 패배자는 바로 나였구나!
내가 만일 택시의 문을 열고 그에게 상냥스러운 미소를 띄우면서
“자 먼저 타시죠”라고 양보했다면, 그야말로 나는 그를 압도할 수있지 않았을까?
아니, 처음부터 내가 대범하게 그에게 담배를 권하고 인사를 청했다면,
서울에서 대구까지 네 시간 동안의 버스여행이 고통스럽지 않고 오히려 즐겁지 않았을까?
요즘도 가끔 그때 일을 생각하면 부끄럽다.
내가 얼마나 내 멋대로 나하고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을 공연히 미워하고 무시했던가?
사실 나는 나의 평범함 일상 속에서 얼마나 작고 하잘 것 없는 일들을 가지고
쓸데없이 신경을 쓰고 정력을 낭비했던 것인가?
아아, 내 마음 깊은 곳에 도둑괭이처럼 웅크리고 있는
저 교활하고도 소심한 어리석음이여, 꺼져버려라! 영원히.
첫댓글 배호의 노래를 백뮤직으로 올리는 나는 진흥씨 한테 무식한 사람이라고 무시당할것 같은데...
그런데 나이 먹으니 옛날 대중가요가 좋은걸 어찌 합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