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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예수가좋다오 원문보기 글쓴이: (일맥)
죽음직전,지옥 안가는 방법을 알려준 호스피스
주간조선 심층취재 특종 [手記] 호스피스 체험 13년 내가 지켜본 사람들의 마지막 모습 호스피스 체험 13년… 인간은 어떻게 하면 아름답게 죽음을 맞을 것인가 『죽음은 敵이 아니다. 威嚴을 갖고 맞이해야 할 인간 삶의 종착역이다』
저자/崔華淑
1955년生. 梨花女大 간호과학대학 학사, 同대학원 석사, 중앙대학교 대학원 간호학 박사, 무의촌 진료 간호사, 동대문 병원 정신과 병동 책임 간호사, 세브란스 호스피스 간호사, 한국 호스피스협회 부회장 역임, 現 京仁女大 精神간호학 겸임교수․이화여대 호스피스 책임자
『의사의 통보를 받고 갑자기 지나온 삶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는데 「나는 이제 죽으면 어떻게 될까」하고 생각해 보았더니 「잘한 것이 아무것도 없어 죽으면 꼼짝없이 지옥에 갈 수밖에 없구나」하는 생각이 들면서 공포에 휩싸여 몸이 굳어버리는 것이었다』
●병을 치료하면 이길지 질지 모르지만 인간을 치료하면 항상 이긴다. 죽음과 싸우는 것은 무의미하다. 우리가 싸워야 할 대상은 무관심이다
●生의 마지막 과정에 있는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곳에서 원하는 사람과 함께 원하는 방식으로 살다가 원하는 장소에서 죽을 수 있어야 한다
●한국인 중 10%가 죽음을 담담히 수용한다… 고급종교 믿는 사람들 중에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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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g 1 of 19 ▶ 『선생님, 죽은 다음에 천국이 있습니까?』
주요내용
『선생님, 죽은 다음에 천국이 있습니까?』
「예비적 憂鬱」
『利己的으로 살아온 삶이 후회스럽다』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아름다운 죽음 / 훌륭하게 生을 마감하는 데 있어 불필요한 것들 臨終단계에서 보이는 두 세계
밤마다 검은 옷 입은 사람이 나타나 『아빠를 용서해 주겠니?』 『흰옷을 입은 사람이 와 있다』
『어머니가 데리러 왔다』 인간다운 삶의 마지막 방식이란? 末期환자들이 갖는 일곱 가지 질문들
두려워지면 화를 낸다 죽음은 威嚴을 가지고 만나야 할 삶의 종착지 來世觀이 있는 사람의 경우
남은 시간도 信念에 따라 달라 안타까운 죽음
「인간은 靈物」
죽음을 도와주고 나의 죽음을 준비하는 자세 / 호스피스의 歷史 / 한국의 호스피스 조직
이 세상에는 보이는 세계만이 존재하는 것일까? 이들이 달려가는 종착역은 어디일까 ? 호스피스 경험자로서, 또 하나의 다른 세 계가 이런 현상들 속에서도 존재하고 있음 을 알리고 싶다. 이것은 靈(영)의 세계인데 보이지 않는 세계다. 인간이란 건강할 때 는 보이는 세계에 치중하다가도 병이 들면 보이지 않는 세계를 생각하게 되는데 죽음 에 임박한 말기환자들에게는 이 세계가 좀 더 분명해진다.
「인간은 靈物」
많은 이들이 來世와 같은 보이지 않는 세계 에 대해 증명할 수 없을지 모르지만 호스피스에서 이는 엄연히 존재하는 현상이다. 그 리고 필자가 체험한 바에 따르면 「인간은 靈物(영물)」이라는 것이다. 장갑을 낀 채 오랫동안 손을 움직이다 보면 손이 아닌 장갑이 움직이는 것으로 착각할 수 있으나 장갑을 벗으려 할 때 비로소 손 이 움직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 마찬가지로 건강할 때는 움직이는 몸이, 눈에 보이는 세계만이 전부라고 착각하였을지라도 막상 臨終過程이 시작되어 靈이 몸에서 빠져나가려 하는 시점이 오면 서로 다른 두 세계 가 보이게 되고 자신을 움직였던 것이 장갑이 아니라 손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손이 빠져나간 장갑이 스스로 움직이지 못 하듯이 영혼이 빠져나간 몸도 움직일 수 없으며 우리는 그 몸을 屍體(시체)라고 부르고 壽衣(수의)를 입혀 장례식을 치르게 된다. 靈魂이 몸에서 빠져나가는 과정은 신비로운 데 2~3일간의 臨終過程을 통해 몸이 서서 히 기능을 정지하면서 체인 스톡 호흡을 하 다가 때가 되면 코로 긴 한숨을 쉬듯이 빠져나가 버린다. 코로 들어간 生氣가 코로 나가는 모습을 목도하노라면 實存하는 靈을 확인하는 느낌이다.扈
1998년도 보건복지부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 연 간 末期癌(말기암)으로 사망하는 사람의 수는 약 5만명에 달한다고 한다. 이는 하루에 1백37.3명, 한 시간에 5.7명에 해당하는 숫자이다. 평균 가족수가 4명임 을 감안하면 매시간 20명이 넘는 사람들이 臨終(임종)하는 사람 곁에서 마음을 졸이 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지금 이 시간에도 6개월 혹은 1년 이내에 생명을 마감해야 하는, 생명의 불길이 꺼져 가는 숱한 사람들 이 존재하고 있다는 말이다. 이들에게 있어서 마지막 관심사는 무엇일까 ? 돈일까? 명예나 출세일까? 수천만 원 짜리 모피 코트일까? 13년간 호스피스 실무자로 서 체험한 바에 따르면 그런 것들은 자기 삶의 마지막 순간을 사는 사람들의 관심과 는 전혀 관계가 없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13년 동안 末期환자 및 그들의 가족과 함께 하면서 수백 명의 患友(환우)들을 먼저 보내고 그들 삶의 마지막 순간들을 함께 지켜 본 사람이 한국에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 末期환자와 가족을 全人的(전인적)으로 도와주고 死別(사별) 후 유가족 관리까지 포함하는 호스피스에 대해 알게 된 것은 1980년대 중반 梨花女大(이화여대) 대학원에 서 석사과정을 밟으면서였다. 「입원환자의 靈的(영적) 간호 요구에 관한 연구」라는 제목으로 학위 논문을 준비하면서 호스피스에 대해 알게 되었고 석사학위를 받은 후 바로 이 일에 참여하게 되었다. 사실 이런 제목의 논문을 쓰게 된 것도 나름대로는 충격적인 경험이 있어서였다. 20 여 년 전 이화여대부속 동대문병원에서 야 간 근무를 하던 중에 마주치게 된 한 환자 가 있었다. 젊은 남자 환자였는데 폐렴으로 호흡곤란이 심한, 별로 상태가 좋지 않았던 患友였다.
병실을 돌면서 환자들이 잘 자고 있는지를 살피고 있었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나를 붙잡는 것이었다. 놀라서 돌아보니 바로 이 환자였는데 심한 호흡곤란으로 숨을 헐떡이면서 떠듬떠듬 하는 말이 『선생님, 죽은 다음에 천국이 있습니까?』 하는 것이었다 . 무엇인가를 추구하는 듯, 간절히 알고자 하는 열망이 깃들어 있는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면서 묻는 그 환자의 말에 순간 몹시 충격을 받고 말았다. 아마도 이렇듯 숨이 가쁜 환자의 경우 의료인에게 『선생님, 숨 좀 편안히 쉴 수 있게 해 주십시오』라 고 요청하리라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는 지도 모르겠다. 이 사건으로 인해 환자에게 는 身體的(신체적)인 요구뿐만 아니라 靈的 인 요구도 함께 있음을 알게 되었다. 어쨌든 지난 13년 동안 가정호스피스간호를 하면서 집에 있는 환자를 대상으로 하였기에 서울시는 물론이고 경기도 미금시, 교문 리, 과천, 안양, 성남, 부천 등 인근 지역 에 이르기까지 길을 지나다 보면 「저곳에 는 ○○ 환우의 집이 있었지, 저기에 살던 患友는 어떠 어떠했었지…」 하면서 거리와 골목마다 그들과 함께 하였던 경험들이 기 억으로 남아 있어 운전하다가도 가끔씩 차를 세우고 회상해 보곤 한다.
S동을 지나다 보면 H부인의 경우가 특히 생각이 난다. 그녀는 사려 깊고 조용한 여성이었다. 오른쪽 유방암으로 수술 후 1년 동 안 잘 지내다가 再發(재발)하여 抗癌(항암 )치료를 하였는데 치료 후 3년 정도 건강하게 지내다가 재발하여 호스피스에 의뢰된 경우였다. 일주일에 두 번 정도 이 환자를 방문하였는데 라포(Rapport-의료진과 환자와의 사이에 형성되는 신뢰관계․필자注)가 만들어지면서 H부인은 낮은 목소리로 조용조용 자신의 지나온 삶과 질병 경험에 대해 털어놓기 시작하였다.
남편은 고위 공무원이었으며 자녀들도 다 자라서 막내가 대학생이었던 H부인은 6년 전 처음 癌이라는 진단을 받고 移動式(이동 식) 침대에 누워 수술실 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을 때 『하나님, 살려만 주신다면 신앙생활을 하겠습니다』 하고 기도 드렸고 그 후 종교를 가지게 되었다고 하였다. 물론 수술 당시 그녀는 종교인이 아니었으며 더 구나 그 수술실 앞에 가기 전까지는 한번도 하나님을 생각해 본 적도, 불러 본 적도 없었다. 그러나 이동식 침대에 누워 곧 수술실에 들어갈 것을 생각하니 지나간 삶이 주마등처럼 떠오르면서 자기도 모르는 사 이에 하나님을 찾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 전까지 그녀는 자신이 모든 일을 혼자서 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고 인간이 노력하면 못할 일이 없다고 생각하였기에 박봉인 남편의 월급을 가지고도 알뜰하게 살며 최선 을 다해 자녀를 양육하는 등 나름대로는 열 심히 살아왔으나 그 순간, 인생에서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절반밖에 되지 않 음을 깨닫게 되었다고 고백하였다. 再發하여 抗癌치료를 받게 되었을 때는 「 아! 인생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삼분의 일 정도밖에 안 되는구나」 하는 깨달음이 왔으며 성직자와 교우들이 방문하여 기도 해 주는 것이 마음에 많은 위로가 되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다시 재발하여 完治(완치)를 위한 치료는 어렵고 증상조절을 위한 호스피스 치료가 필요한 상태에 이르자 「人生이란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구나 . 전부가 그분에 의해서 되어지는구나」 하 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하였다. 호스피스 치료를 받기 시작한 지 두 달 정 도 지나면서부터 H부인은 「예비적 憂鬱(우 울)」을 경험하기 시작하였다. 죽어 가는 사람의 심리상태를 연구했던 미국의 심리학자이자 정신과 의사인 퀴블러 로스에 의하면 「예비적 憂鬱」이란 「다가올 자신의 죽 음을 예측하면서 미리 슬퍼하는 상태」이다 . H부인 역시 자신이 죽게 될 것을 알았으며 그것을 생각하며 슬퍼하였기에 감정은 한없이 낮아져서 말이 없고 고요하였다.
『利己的으로 살아온 삶이 후회스럽다』
가끔씩 깊은 한숨을 쉬곤 했는데 들릴 듯 말 듯한 낮은 소리로 천천히 이야기한 것은 『떨․어․지․는․저․낙․엽․을․내․ 가․다․시․볼․수․있․을․까․나․는․ 이․걸․생․각․해․봐․요』라는 것이었다.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모든 것이 다 생소해 보이고 「이게 마지막이구나. 지금 보 는 것을 다시는 보지 못하겠구나」라고 생각하니 심각해지고 진지해진다는 것이었다 . 그녀는 자신의 주변을 살펴보며 문득 생경스럽게 느껴지기도 해서 가만히 그것들을 음미하곤 했다. 그러면서 이제 서서히 다가오는, 곧 닥치게 될 자신의 떠남을 생각하면서 현재의 세상과 다가올 세상을 함께 느끼고 있었다.
이런 감정적 분위기는 삶의 일상적인 소란스러움과는 상당히 거리가 먼 것인데 환자 는 가족들이 거실에 모여 앉아 텔레비전을 시청하면서 웃고 있으면 「저․게․뭐․이 ․저․렇․게․재․미․있․을․까?」 의아스러워진다고 하였다. 한동안 「예비적 우울 단계」에 머물러 있던 H부인은 어느 날 나에게 의논할 일이 있다고 하였다. 그녀는 자신의 지나온 삶을 가만히 돌이켜보니 모두가 자신과 가족만을 위해 利己的(이기적)으로 살아온 삶이요, 이웃과 국가를 위해서는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어서 너무나 부끄럽고 미안하다고 하였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생애에서 자신이 남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았다고 하면서 臟器(장기) 기증을 하고 싶다고 하였다. 필요하면 屍身(시신) 전부라도 기증하고 싶으니 방법을 알아봐 달라는 것이었다.
가정호스피스 팀 회의에서 이 문제가 논의되어졌고 먼저 가족의 동의가 있어야 하며 그 다음으로 암 환자의 장기가 이식될 수 있는지 알아보기로 하였다. 그래서 H부인에 게 남편과 자녀들에게 자신의 이런 뜻을 직접 알리고 동의를 얻도록 하였으며 의사소 통이 여의치 않으면 돕겠다고 하였다. 한편으로 장기 기증 및 시신 기증에 대해 알아본 결과 암환자의 경우 각막이식만이 가능하며 屍身 기증은 의과대학생들의 해부 학 실습을 위해 쓰여진 후에 뼈를 보관하거나 정중하게 장례를 치러 드린다고 하였다 . H부인은 기뻐하면서 이 두 가지를 다 하기원하였으나 가족들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갑작스런 H부인의 말에 가장 충격을 받은 이는 남편인 듯하였다. 자녀들은 울면서도 어머니의 뜻이 그러하다면 따르겠다고 하였으나 남편은 필자를 좀 만나자고 하였다 . 호스피스 사무실로 찾아온 H 부인의 남편 은 이 문제는 생각해 보지도, 상상해 보지 도 않은 것이었다고 하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사실 臟器 기증을, 더구나 屍身 기증을 하 고 싶다는 환자의 말을 듣고 그 방법을 알아보는 동안에 이 문제는 필자 자신에게도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었다. 호스피스를 시작하고 나서 臟器기증을 제안한 것은 H부인이 처음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때까지는 필자 자신도 그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았던 것 같은데 갑작스레 환자가 꺼 낸 話頭(화두)로 인해 내 가슴도 콩닥거리게 된 것이었다.「필자인 나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죽게 되었다고 해서 내 몸 일부를 떼어주 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더구나 내 몸을 解剖(해부)하라고 내어주 는 일이 과연 가능한가?」
해부학 실습실에서 보았던 死體(사체)들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이러한 話頭에 대해 필자 역시도 자신을 省察(성찰)하고 있던 중이었다. 당시 함께 일하던 왕매련(Marian Kingsley) 교수는 미국 감리교 선교사였다 . 연세대학교 간호대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호스피스 책임자를 겸하고 있었는데 이분 의 경우 선교지인 韓國(한국)으로 떠나오기 전 遺書(유서)와 함께 臟器기증서에 서명 을 하고 왔으며 安息年(안식년)마다 그것을 검토하고 再서명해 왔다고 하였다. 그러나 필자에게는 그때가 이 문제에 대해 처음으로 진지하게 생각해 보게 된 경우였다. 그래서 남편의 질문에 대한 대답보다는 부인의 이야기를 들은 후 남편의 마음이 어떠했는지를 되물어 보았다. 남편은 몹시 곤혹스런 표정을 지으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했다. 자신은 종교인도 아니고 원칙적으로 동의할 수 없으나 사랑하는 아내 의 마지막 희망사항을 무조건 거절할 수가 없어서 고민이라는 것이다. 필자는 충분히 남편의 이야기를 들어준 후 환자를 포함한 가족회의를 열어 의논해 보는 것이 좋겠다 고 조언하였다. 먼저 H부인이 그런 생각을 하게 된 동기가 무엇인지, 진심으로 그렇게 하기를 원하고 있는지 등에 대해 말할 기회를 주고, 그 다음 나머지 가족이 한 사 람씩 자신들의 의견을 말한 후 의논해서 결정하는 방법을 제시하였는데 집에 돌아간 H부인의 남편은 그날로 가족회의를 소집하였다.
당시 H부인의 상태는 이미 질환으로 사망하는 사람이 죽기 2~3일 전에 도달하는 臨終過程(임종과정)을 시작하고 있었으므로 본 인 스스로 원활한 臟器이식을 위해 병원에 입원할 것을 희망하고 있었다. 氣力(기력 )이 너무 떨어지기 전에 가족에게 다시 한 번 자신의 의사를 밝히도록 기회를 줄 필요가 있었다.
가족회의에서 H부인은 「인간이 산다는 것 이 무엇인가」에 대해 이야기하였으며 무의미하게 살아온 자신의 삶에 종지부를 찍기 전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남을 위해, 人類(인류)를 위해 의미 있는 일을 한 번 해 보고 싶다고 하였다. 자신으로 인해 누군 가가 밝은 세상을 볼 수 있고 학생들의 解剖學 실습을 통해 醫學(의학) 발전에 이바지하게 된다면 얼마나 좋은 일이냐고 하면 서 그렇게 된다면 기쁜 마음으로 편히 눈을 감을 수 있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남편의 생각은 달랐다. 부인이 떠나고 난 뒤 못 견디게 그리움을 느낄 때 山所 (산소)마저 없으면 어디 가서 눈물을 흘리며 아내 잃은 것을 슬퍼할 수 있겠느냐고 하면서 屍身기증에 강하게 반대하였다. 그래서 H 부인도 남편의 마음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로 하여 角膜(각막)만 기증하고 屍身은 기증하지 않기로 절충하게 되었다.
아름다운 죽음 / 훌륭하게 生을 마감하는 데 있어 불필요한 것들
가족회의에서 이렇게 결정이 내려진 후 바로 입원한 H부인은 이튿날 온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평화스럽게 숨을 거두었다. 그리고 대기하고 있던 眼科(안과) 팀이 즉 시 角膜을 채취하여 H부인의 양쪽 각막은 다른 두 사람에게 각각 이식되어 계속해서 빛을 볼 수 있게 되었다.
호스피스에 가입한 지 1백2일 만에 召天(소 천․기독교에서 쓰이는 말로 「하나님의 부르심에 의해 하늘로 간다」는 뜻-편집자 注 )한 그녀가 남긴 것은 생전 처음으로 빛을 보게 되어 기뻐하는 두 사람의 감사와 나 도 우리 어머니처럼 아름답고 훌륭한 삶을 살겠다는 자녀들의 다짐, 그리고 그 아름다운 마음을 길이 기억하는 남편의 그리움이었다. 또한 H부인과 1백여 일을 함께 했 던 시간들은 나에게도, 우리 호스피스 팀 전체에게도 인간의 몸이 갖는 의미와 臟器 기증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해 준 귀중한 경험이 되었다.
호스피스 환자들에게서는 이럴 줄 알았으면 좀더 善(선)하게, 의미있게 살 것을 그랬다고 후회하는 모습을 종종 보게 된다. 軍人(군인)의 아내로서 B동에 살았던 W부인 의 경우도 그랬다. 그녀는 전문대학을 졸업 한 딸과 고등학생인 아들을 둔 50대 여성이었는데 남편과 함께 世界一周(세계일주) 여 행을 한 번 해보는 것이 소원이라서 將軍( 장군)인 남편이 은퇴하기만 기다리며 악착 같이 돈을 모았다. 많지 않은 남편의 월급으로 두 자녀를 키우며 땅을 사서 일꾼들을 독려하여 손수 아담한 2층 양옥집을 짓고 기본적인 생활비 이외에는 한푼도 쓰지 않았다고 한다. 대학에 합격한 시누이가 찾아 와 입학금만 빌려달라고 울면서 간청했을 때도 거절하였고, 심지어 月 일천원의 꽃동네 기부금조차도 아까워서 내지 못하였다고 한다.
막상 남편이 제대한 후 이제 막 세계일주 여행을 떠나볼까 하는 시점에 그 부인은 子宮(자궁)경부암 말기라는 진단을 받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癌」이라는 소리를 들으면 「죽음」이라는 단어를 연상하지만 사 실 癌환자의 5년 이상 생존율은 50%나 된다 . 그 중에서도 자궁경부암은 胃癌(위암), 乳房癌(유방암)과 함께 長期(장기) 생존율 이 높은 부위의 癌이다. 그러나 이 부인의 경우는 방사선 치료와 항암 치료 모두 효과가 없었다. 그녀는 진단 받은 지 2개월만에 完治不可(완치불가)에 잔여수명이 6개 월 이내로 판정받고 호스피스에 의뢰됐다. 이 부인은 평소 자신의 건강도 꼼꼼히 챙기는 편이어서 6개월마다 자궁암 진단검사도 해 왔다고 한다. 진단 받기 3개월 전에 한 검사에서도 「정상」이라는 응답 엽서를 받았는데 생각지 않게 末期상태의 자궁경부암이라는 진단을 받아 몹시 상심한 상태에 서 호스피스에 가입하였었다. 어느 정도 感情(감정)의 파도가 지나간 다 음에 W부인은 자신의 삶에 대해 한탄하며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좀더 善하게 살 것 을 그랬다고 후회하는 말을 하였다. 인생이 이렇게 자신의 계획대로 되는 것이 아니고 어느 날 문득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것인 줄 알았더라면 좀더 주위 사람들에게 人間愛(인간애)를 베풀면서 善하게 살았어야 하는데 자신은 너무 못되게 살았다고 한숨을 쉬면서 거듭 말하는 것이었다.
훌륭하게 生을 마감하는 데 있어 불필요한 것들
자신은 오로지 남편과 함께 세계일주를 하고 싶어서 옆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건 개의 치 않고 그것만을 목표로 돈을 모으고 또 모아왔다는 것이다. 이제 와서 생각하니 너 무 친척들의 마음에 못을 많이 박으며 살아 왔음을 깨닫게 된다고 하는 것이었다. 자신의 餘命(여명)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認知(인지)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더 이상 돈도, 名譽(명예)도 出世(출세)도 快樂(쾌 락)도 추구하지를 않는다. 이제 그런 것들 은 빛을 잃어버리고 만다. 지금은 時間이 없고 그런 것들을 추구하기에는 너무 늦었 음을 그들은 아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것 들은 잘 죽는 데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그 들은 직감적으로 아는 것이다. 잘 죽으려면 잘 살아야 한다. 눈에 보이는 세계만이 아닌, 보이지는 않으나 엄연히 實在(실재)하는 세계를 의식하면서 벽돌을 쌓듯 삶의 부분들을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잘 쌓아야 하는 것이리라.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에 걸맞게.
인간에게 두 눈이 있는 것은 이 두 세계를 잘 보라고 있는 것이 아닐까? 많은 사람들 이 건강할 때는 보이는 세계만을 더 잘 보 고 그 세계가 다인 줄 알고 착각하며 산다 . 그러나 肉體의 氣力이 쇠하고 삶의 餘命 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특히 靈魂이 肉體 에서 빠져나가려고 할 때 그때에 이르러서 야 한 눈으로는 이 세상을, 다른 한 눈으로 는 다른 세상을 보게 된다. 이때 옆에 있는 가족들조차도 자신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 고 해서 환자가 헛것을 본다고, 이상하다고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臨終過程을 겪고 있는 환자에게는 實在인 것이다.
臨終단계에서 보이는 두 세계
骨髓炎(골수염)으로 오른쪽 다리를 절단하였던 L군은 열일곱 살이었다. 15세인 중학 교 3학년 때에 發病(발병)하여 열심히 치료하였으나 폐와 뇌에 轉移(전이)가 되어 결국은 호스피스에 의뢰된 경우였다. 형과 어머니가 극진히 L군을 보살피는 모습이 감동 적이었다.
어느 날은 성직자와 함께 방문을 하였는데 호흡곤란이 심한 상태였다. 폐에 病巢(병 소)가 있는 환자들은 마지막으로 갈수록 호흡곤란이 심해지는데 酸素(산소)나 약을 사 용해도 증상조절이 용이하지 않은 경우가 많아 애를 태우게 된다. L군 역시 처방된 약을 복용하고 있었으나 숨이 몹시 가쁜 상 태였다. 거기다가 L군은 통증이 심해지면 어쩌나 염려하는 마음이 있었다. L군의 어머니는 울고 있었고 L군은 자신의 걱정을 이야기하며 기도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동행했던 성직자가 L군을 안고 기도해주자 잠 시 후 L군은 잠이 들었고 숨소리도 그다지 나빠 보이지 않았다.
다음날 저녁에 L군이 召天(소천)하였다는 연락을 받고 밤늦게 빈소를 방문하였다. 그런데 평소에 조그만 일에도 눈물을 보이곤 하던 L군의 어머니가 전혀 울지 않고 있었을 뿐 아니라 얼굴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의아해 하면서 L군의 마지막이 어떠했는지 를 묻자 뜻밖의 대답을 하는 것이었다. 호스피스에서 방문한 다음에 잠을 잘 잤는 데 다음날 아침부터 환자가 자꾸 무엇이 보인다며 하늘을 쳐다보면서 웃고 놀라워하더라고 했다. 전혀 아프다는 소리가 없었으며 호흡곤란도 별로 없었는데 계속해서 하늘 을 쳐다보며 『베드로가 보인다』고 하고 『그 옆에 빛나는 분은 누구시냐』고 묻기에 엄마는 『무엇이 보이냐, 엄마는 아무 것도 안 보인다』고 하자 나중에는 L군이 『 큰일났다. 우리 엄마는. 나는 천국 가는데 우리 엄마는 지옥 가겠다』고 하면서 엉엉 울더라는 것이었다.
당황한 엄마가 어찌할 수가 없어서 아무 것도 안 보이지만 아이의 마음을 위로하기 위해서 『아 저거 말이니? 나도 이제 보인다 』라고 하자 환자가 너무 좋아하면서 자기 가 보고 있는 하늘의 모습을 엄마도 보고 있는 줄 알고 하나하나 가리키며 설명하더라고 하였다. 그후 저녁 무렵에 L군이 어머니의 손을 꼭 잡고 『엄마, 저거 보았지요? 나 먼저 갈 테니 나중에 오세요』 하며 숨을 거두었다 는 말을 하면서 『아마 우리 아이는 꼭 천 국에 갔을 거예요. 확신이 들어요』라고 했다. 얼른 들으면 이 현상이 이상한 일같이 들리지만 사실 죽음에 임박한 사람에게 있어서 이 세상과 저 세상을 동시에 보는 일은 흔하게 일어나곤 한다. 장갑을 끼었다 벗으려 면 손이 빠져 나오는데 조금 시간이 걸리는 것처럼 우리 몸에서 靈魂이 빠져나갈 때는 대개 2~3일 또는 수 시간이 소요되는데 그 때 잠깐 잠깐씩 양쪽 세계를 다 보게 되는 것 같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돌아가시기 2 ~3일 전에 이런 현상을 경험하지만 더러는 그보다 훨씬 일찍부터 이런 경험을 하게 되기도 한다.
밤마다 검은 옷 입은 사람이 나타나 승천하실 무렵에 침상 머리와 발 쪽에 흰옷 을 입은 빛나는 사람이 와 있다고 했던 49 세의 肺癌(폐암) 말기 환자 K씨의 경우가 그랬다. 이분은 호스피스에 의뢰될 당시에 밤마다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이 나타나 자 신의 이름을 부르며 나오라고 해서 도무지 잠을 자지 못하겠다고 했었다. K씨는 진단 받았을 당시 1년간 항암제로 치료하여 完治(완치)되었다가 재발된 사례로 骨轉移(골전이)가 있었다. 再發되었다는 진단을 받은 환자는 병원 진료실에서 각목 을 휘두르며 화풀이를 하는 바람에 병원 진료를 마비시키기도 했다.
의료진들은 말기 상태인데다 소란을 계속 피우는 환자를 다 룰 수 없어서 호스피스에 의뢰한 경우였다. 1차 방문시 그의 아내는 지쳐 있었으며 아 이들은 겁에 질려 있는 상태였다. 환자는 심한 기침과 가래, 통증뿐 아니라 不眠症( 불면증)이 있어서 밤에도 깨어 있어야 한다 고 하였다. K씨는 밤에 불을 끄지 못하게 할 뿐 아니라 낮에 일하고 온 아내가 고단하여 잠시 졸면 발로 차서 깨우고 화를 내며 초등학교 5학년인 아들이 밥을 먹고 있으면 갑자기 주먹으로 얼굴을 때린다고 하였다. 얼굴은 초췌하고 잠을 못 자서 그런지 눈 밑이 그늘져 있었다. 통증 때문에, 혹은 기 침 때문에 자지 못하는가 생각하여 잠잘 수 없는 이유를 질문하였더니 뜻밖의 대답을 하였다.
『3주전부터 밤이면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이 나타나 내 이름을 부르며 「金 ○○, 나와!」 하고 부르기 때문에 겁이 나서 자지 못한다』고 하였다. 검은 옷을 입 은 사람은 세 사람인데 남자 같다면서 매일 밤 나타나서 같이 가자고 한다는 것이다. K씨는 내가 방문한 첫번째 호스피스 환자였는데 잠자지 못하는 이유에 대한 이분의 대 답은 우리를 놀라게 하였다. 당시 우리 호스피스 팀은 K씨의 상태가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한 靈的인 고통」이라고 보았 고 이 문제는 靈的으로 접근하여야 한다고 생각하여 환자의 집 근처에 있는 성직자를 찾아가 이 문제를 말씀드리고 도움을 청하기로 하였다. 마침 환자의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대한예수교장로회 ○○교회」라 고 간판이 붙은 자그마한 교회가 하나 있어 서 담임목사를 찾아가 사정을 말씀드렸더니 다행히 그분이 쾌히 응낙해 주시고 즉시 환자를 방문하여 상담해 주셨다.
몇 번의 상담을 통해 K씨는 더 이상 밤에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이 나타난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으며, 호스피스 치료를 통해 기침이나 통증 등의 증상도 어느 정도 조절 이 되자 그토록 못 자던 잠도 잘 잘 수 있게 되었다. 잠을 잘 잘 수 있게 되자 그동 안 가족을 불편하게 하였던 K씨의 짜증과 화내는 것이 누그러졌으며 무엇보다 가족들 이 밤에 잠을 잘 수 있게 되어 훨씬 편안해 하였다. 환자의 가정을 방문하는 호스피스 팀과 신뢰관계가 형성되면서 환자와 부인은 자신들 이 살아온 고단하였던 삶의 여정을 토로하기도 한다. 이 환자는 부모님이 일찍 돌아 가셔서 큰 형님과 함께 살았는데 도시락을 싸주지 않았던 큰형수에 대해, 넓은 과수원 이 있으면서도 그 한쪽에 자신이 묻힐 수 있도록 해달라는 말을 거절한 형님에 대해 , 그리고 자신을 치료하였던 의사에 대해 분노와 함께 적어도 그들보다는 오래 살아 야 한다는 傲氣(오기)를 가지고 있었다. 특 히 자신이 마약성 진통제를 복용하고 편안해 하자 더 오래 살게 될까봐 약을 감추고 주지 않았던 형수의 태도에 대해 흥분하며 『내가 반드시 나아서 저들보다 더 오래 살아 저들을 다 죽이고야 말겠다고 마음먹었었다』는 이야기도 하였다.
『아빠를 용서해 주겠니?』
이러한 분노가 쌓여 병원에 와서 큰 소란을 피우며 행패를 부린 것이었다는데 호스피스 치료를 받는 동안, 그리고 성직자와의 靈的 상담이 계속되는 동안 환자가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우선 환자의 표정이 편안해 졌으며 형님과 형수를 용서하기로 하였다. 오랜만에 방문한 큰 형님과 형수에게 孤兒 (고아)인 자신을 돌보아 준 것에 대해 감사 하다고 하면서 그 동안 화내었던 것을 용서 해 달라고 하였다. 그 말을 들은 형님 역시 그동안 좀더 신경 써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고 하면서 과수원에 묻힐 수 있도록 허락해 주었다고 하였다.
또한 자신을 치료하였던 의사를 용서하기로 하였으며 臨終이 가까워오자 자신이 그동 안 치료했던 병원에 입원하여 최후를 마치 고 싶어하였다. 그런데 현행 의료전달 체계 는 급성치료 중심이어서 3차 의료기관에 末期환자가 臨終을 위하여 입원한다는 것이 용이하지가 않았으며 환자의 主治醫(주치의 ) 역시 그동안의 이런저런 일로 이 환자에 대해서는 좋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기에 그 병원에 다시 입원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우리 호스피스 팀은 이러한 사실을 主治醫에게 알리고 한 번 도움을 청해보기로 하였다. 다행히 호스피스에 의뢰된 이후 의 환자 상태와 경과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주치의는 상당히 감동된 눈치로 그런 상태라면 자신도 그 환자를 용서하고 싶다고 하 면서 입원할 수 있도록 조처해 주는 것이었다. 입원 후 회진한 주치의에게 환자는 자 신의 행동에 대해 용서해 달라고 청하였으며 주치의는 응낙의 표시로 환자의 손을 굳게 잡았다.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그리고 밥 먹을 때마다 때리곤 했던 막내아들을 오라고 해서 『아빠가 널 때린 건 네 가 미워서가 아니야. 그냥 네가 잘 먹는 모습을 보면 아무 것도 먹을 수 없는 아빠 자 신에게 화가 나서 그랬던 거야. 그러나 널 때린 건 정말 미안하다. 아빠를 용서해 주겠니?』라며 용서를 청하였고 아들은 울면 서 고개를 끄덕였다. 아내에게도 그 동안 못 자게 하고 화내고 심하게 굴었던 것에 대 해 용서해 달라고 하였으며 사랑한다고 말하였다.
『흰옷을 입은 사람이 와 있다』
그 다음날부터 환자는 臨終過程을 시작하였는데 소변량이 줄고 음식을 거의 먹지 못하는 상태로 체인 스톡 호흡(임종과정에서의 독특한 호흡양상으로 잠깐 동안 숨을 안 쉬다가 몰아서 내쉬곤 하는 현상․注) 양상 을 나타내었다. 그러면서 환자는 자꾸 무언 가를 쳐다보는 듯한 표정과 눈이 부신다는 듯한 몸짓을 하였는데 『무엇이 보이느냐 ?』고 질문하였더니 『흰옷을 입은 사람이 와 있다』고 하였다. 어디에 있는지 묻자 환자의 침상머리 쪽과 발 쪽에 한 사람씩 있다고 하였다. 어떤 사람인지를 물어보자 빛이 나고 어깨에 날개가 있다고 하면서 얼굴 표정은 밝아 보였다.
마지막 날 아침에는 K씨의 요청으로 방문한 성직자를 모시고 가족과 함께 예배를 드리고 나서 자신의 장례식은 어떻게 해 달라는 당부를 한 다음 부인의 손을 잡고 아직 학생인 자녀들을 두고 먼저 가서 미안하다고 하면서 나중에 만나자고 하였다. K씨의 자녀는 초등학교 5학년부터 고등학교 3학년까지 네 명이 있었는데 부인이 보험 설계사로 버는 수입으로는 벅찬 형편이었다 . 호스피스 팀에서 高3인 큰딸이 취직을 하 기 위한 기술을 배우도록 지원하기로 하였고, 이 사실을 K씨에게 알려서 안심하고 떠 날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네 자녀와 부인, 형님과 형수, 주치의와 호스피스 팀이 지켜보는 가운데 밝게 빛나는 얼굴로 고요히 숨을 거두는 K씨를 보면서 둘러선 사람 모두가 큰 감동을 받았다. 특별히 主治醫였던 K의사는 이때 받은 감동으로 인해 그 이후로 우리 호스피스 팀에게 자신의 의과대학 수업시간에 와서 강의해 달라고 요청하였으며 학생들에게는 『肉體 (육체)의 疾病(질병)만을 고치는 것이 醫師 가 아니다, 이런 세계도 있다는 것을 알아 야 한다』면서 우리들을 소개해 주었다. K씨나 H부인과 같은 경우는 성직자와의 상담이나 자신의 종교적 신념체계에 따라 來世(내세)가 있음을 알고, 확신하고 있었던 경우였으며 L군의 경우 來世(내세)를 미 리 봄으로써 자신뿐 아니라 주변의 가족까지 보이지 않는 세계가 있음을 더욱 확신하게 된 경우였다.
그렇다면 죽음 이후에 또 다른 세계가 있음 을 확신하는 사람에게만 이런 현상이 경험되는 것일까?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어떻게 경험될까? 이런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는데 필자가 만났던 환자들 중 일부는 이런 의문에 대해서도 답을 해주었다. B씨(男)는 55세의 末期胃癌환자였다. 전혀 아픈 곳이 없이 건강하게 살아왔는데 어느 날부터인가 소화가 잘 안 되는 것 같았고 그런 상태가 한 달 이상 계속되기에 병원 에 가보았더니 여러 가지 검사를 한 끝에 胃癌이라는 진단을 받았다고 하였다.
『어머니가 데리러 왔다』
수술을 하기로 하였으나 막상 열어본 결과 주변의 림프 결절에까지 轉移되어 있어서 그대로 도로 닫은 경우였다. 그후 抗癌(항 암)치료를 두 차례 하였으나 별 반응이 없어서 퇴원 후 가정 호스피스에 가입한 경우 였다. 이분은 통증이 심해서 호스피스에 가입한 초기에는 통증조절에 초점을 맞추었다. B씨 는 조용한 성품이었으며 방문 시 부인과 함께 있으면 이야기는 주로 부인이 다 하는 편이었으나 부인이 외출하고 없을 때는 수줍은 듯 조금씩 이야기를 하곤 하였다. 특별한 종교가 없었던 B씨는 儒敎(유교) 사 상을 가지고 있었으며 「사람이 죽으면 끝 」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늘 우울한 표정으로 미간에 주름을 짓고 있기에 무슨 걱정 이 있으시냐고 물어보았더니 한숨을 푸욱 쉬면서 『희망이 없잖아요』라고 했다. 나 을 수 있다는 희망이 없어서 우울하고 마음 이 답답하다는 거였다. 그러면서 자신은 『 어떻게 하든지 살고 싶다. 무슨 방법이 없겠는가. 나와 같은 경우를 많이 보았을 텐 데 얼마나 살 수 있는가』 하고 물었다. 이런 질문은 대개 환자가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본인의 생각 은 어떤지 되물어 보았다. B씨는 『정말이 지 죽고 싶지 않다』고 하면서 『그러나 몸 이 점점 쇠약해지니 이젠 못 일어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어 겁이 난다』고 조심스럽게 이야기하며 살피는 듯한 눈망울로 필자의 눈을 쳐다보고 더 이야기해도 좋겠는지를 묻고 있었다.
계속 이야기하라는 사인을 주자 『죽음이란 먹지도 마시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상태인 데, 죽으면 모든 것이 정지하고 끝나는 것인데 죽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나』면서 자신이 『이 세상에 끼쳐 놓은 것은 자식 하나밖에 없다』고 하였다. B씨에게는 딸 이 둘,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아들만 자식으로 간주하고 있었다. 이야기하는 동안 두 눈 가득히 고인 눈물이 마침내 떨어지고야 마는 모습을 보면서 내 마음도 안타깝고 답답하였다.
그런 B씨가 어느 날은 평소와 조금 달라 보 여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보았다. 한참 을 가만히 있던 B씨는 『돌아가신 어머니를 보았다』고 하였다. 처음에는 꿈인가 생각하였는데 가만히 보니 옆에 와 계시더라고 했다. 그러면서 「너 이틀 후에 나 만나러 오게 될 거야」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이었다. 가기 싫지만 어머니가 두 번이나 그렇게 말씀하셨으므로 가야 하는 걸 안다고 하 면서 한숨을 푸욱 쉰 후 『어쩔 수 없지요 』하며 눈을 감아버린다.
그리고 B씨는 그로부터 이틀이 지나서 운명하였다. B씨와 같이 죽음이 모든 것의 끝이 라고 생각하여 죽고 싶지는 않지만 가야 한 다는 사실을 알기에 어쩔 수 없이 현실에서 의 삶을 포기하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19 88년 3월부터 1989년 2월까지 우리가 방문하였던 환자 1백명을 대상으로 기록을 살펴 본 결과 그 비율은 22.6%였는데 다른 조사에서는 그 비율이 좀더 높게 나타나기도 하였다.
인간다운 삶의 마지막 방식이란?
美國人(미국인)을 대상으로 조사하였던 정신의학자 퀴블러 로스는 臨終환자의 마지막 심리단계로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受容(수용)」을 이야기하였다. 그러나 韓國人에게서 나타난 上記의 정서는 결코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기에 할 수 없이 「抛棄(포기)」 하는 것으로서 受容과는 전혀 다른 양상이었다. 韓國에서 末期환자에게 病況(병황)을 사실대로 통고해 주는 경우는 흔하지 않다. 의사가 머뭇거리면서도 사실대로 말해주는 美國과 달리 韓國에서는 대부분의 의사가 가족에게 말하고, 가족은 고심하다가 어렵게 환자에게 알려주거나 혹은 말해 줄 기회를 놓치고 마는 경우도 있다. 더러는 환자가 충격을 받을까 봐 또는 알지 못하는 채로 가시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여 胃癌을 胃炎 이나 胃潰瘍(위궤양)이라고 속이거나 肝癌 (간암)을 肝膿瘍(간농양)이라는 정도로 얼버무린 채 애매한 태도로 환자를 대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인간이 이런 식으로 죽음을 맞이하는 게 과연 인간다운 일일까? 의사의 예측 을 주변 사람들은 다 아는데 자신만은 모른 채 「왜 이렇게 빨리 못 일어나는 거야?」 하다가 끝내 일어날 수 없게 되어서야 희미하게 눈치채게 되는 이런 방식이 과연 인간다운 삶의 마지막을 대하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일까?
어느 유명한 血液腫瘍(혈액종양) 전문 내과 의사 한 분이 癌환자들을 치료하고 연구하느라 너무 바쁜 나머지 「아, 나도 癌에 걸 려서 한 3개월만 투병하다가 죽을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러면 조금 쉬면서 내 삶도 정 리하고 떠날 수가 있을 텐데…」하고 생각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분이 평소의 꿈( ?)을 이루지 못한 채 그만 교통사고로 현장에서 운명하였다는 것이다.
실제로 대부분의 사람은 때가 이르면 자신 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안다. 환자들은 자 기 몸의 상태가 나빠지면 「혹시?」 하면서 의심하는 마음이 들게 되고, 臨終단계에 이르게 되면 자신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음 을 인지하게 된다. B씨 외에 다른 환자들도 임종 과정이 시작되면 「이미 돌아가신 동 네 어른이 와 계신다」고 하거나 「오래 전 에 돌아가신 친지가 와 있다」고 하는 등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으나 환자에게는 實在하는 어떤 對象이나 存在를 보게 된다. 그리고 자신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자기 삶 의 종착점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사람은 건강하고 힘이 넘치는 동안에는 죽 음을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언젠가 한 번은 죽게 되어 있고 이것은 인간이라면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죽음 앞에 서 인간은 무엇을 생각하게 될까? 우리 호스피스 대상자들은 호스피스에 가입하고 시간이 지날수록 生의 本質(본질)에 대해 질문하고 그 답을 찾고자 한다. 末期환자들은 처음에는 자신을 괴롭히는 身體的 증상들을 호소한다. 그리고 너무 아플 까 봐 미리 걱정을 하기도 한다. 이는 건강 한 자원봉사자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인데 호스피스 자원봉사자가 되기 전에 자신의 죽 음을 생각하며 가장 염려스러운 것이 무엇이냐고 질문하면 대개는 『痛症(통증)이 심할까 봐 걱정이 된다』고 대답한다. 그래서 평소에 죽음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병이 들어 아프다가 죽는 것은 피했으면 하는 것이 모든 인간의 마음인 것 같다. 그래서 호스피스 간호를 받고 통증 없이 末期 상 태를 보내게 되는 우리 환자들은 이런 면에 서 무척 다행스럽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末期환자들이 갖는 일곱 가지 질문들
그런데 호스피스 서비스를 통해 통증을 비롯한 증상들이 조절되고 나면 점차 먹지 못 하고 기력이 쇠해지는 자신을 보면서 스스로 많은 질문들을 하게 된다. 「인간이란 무엇인가?」「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죽음은 어떻게 오나?」「죽는다는 것은 무엇인가?」「죽은 후에는 정말 來世가 있는가?」「차가운 땅 속에 묻혀서 숨도 못 쉬고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될 것인가?」「神은 정말로 있는가?」 그리고 이런 질문들에 대해서 허심탄회하게 터놓고 말하고 싶어하고 알고 싶어한다. 이들에게는 富貴榮華(부귀영화)보다도 이런 것들이 당면한 더욱 큰 문제이고 두려움이다.
대부분의 환자들은 자신의 죽음을 인지하게 되면 자신의 지나간 삶을 어린 시절부터 파노라마처럼 회상하게 되는 모양이다. 그러면서 때로는 時間, 空間, 人間에 대한 혼돈이 와서 지금 있는 곳이 예전 어린 시절에 살았던 그 집인 줄 알고 자신이 지금 어린아이인 것으로 착각하여 말하기도 한 다. 이때 가족들은 「환자가 헛소리를 한다 」고 생각하지만 환자에게는 영화필름이 돌아가듯 지난 시간들이 회상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회상이 드라마틱하게 일어나는 환자 도 있다. Y씨는 3개의 회사를 경영해 온 60세의 남자로 肝癌 末期 진단을 받았다. 친구가 의사로 있는 S병원에서 진단을 받고 입원하였다. 친구인 M의사의 생각으로는 이 분이 평소 사리분별이 정확하고 또 경영하던 회사도 정리하여야 할 필요가 있을 것으로 사료되어 본인에게 현재의 건강상태를 설명해주고 교과서에 써 있는 바 대로라면 殘餘壽命(잔여수명)이 약 3개월 정도 남은 것으로 볼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잠시 후부터 이 환자의 상태가 이상해지더니 온 몸이 굳어서 움직이지를 못하고 말도 못하는 상태가 되어버렸다는 것이었다. 이유를 알 수 없게 된 M의사는 혹시 환자가 자신의 말에 충격을 받은 것이 아닌가 생각하여 정신과 의사에게 의뢰하였는 데도 별 효과가 없어서 마지막으로 호스피스에 의뢰한 경우였다.
빨리 좀 와 달라는 전화를 받고 병실에 올라가 보니 정말 환자는 침대에 똑바로 누워 무릎을 약간 세운 채 이빨 부딪치는 소리 가 들릴 정도로 덜덜 떨고 있었다. 두 눈을 크게 뜨고 무언가 무서운 것이라도 보고 있는 듯 공포에 질린 얼굴 표정으로 천장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래서 환자에게 다가가 얼굴을 쳐다보면서 『무엇이 그렇게 무서우세요?』 하고 질문하였는데 Y씨는 덜덜 떨면서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지…옥 …에…갈…까…봐…서…』라고 대답하였다 . 『그럼 지옥에 안 가는 방법을 알려드릴 까요?』 하자 반가운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 그래서 간단하게 지옥에 가지 않는 방법 을 알려주자 Y씨는 그 자리에서 그 방법을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그런데 다음 순간 Y씨가 갑자기 『감사합니다』라고 하면서 내 손을 꽈악 쥐길래 다시 한 번 쳐다보니 온 몸이 굳어 있던 것이 다 풀려 있었고 말도 제대로 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어째서 그렇게 온 몸이 굳었다가 다시 풀릴 수 있었는지 궁금했는데 Y씨가 의자를 가리키며 좀 앉으라고 하더니 설명을 해주었 다. M의사의 말을 듣고 난 후 갑자기 지나 온 자신의 삶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는데 「나는 이제 죽으면 어떻게 될까?」하 고 생각해 보았더니 「나는 아무 잘한 것도 없으니 죽으면 꼼짝없이 지옥에 갈 수밖에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갑자기 지옥의 공포가 몰려 와서 꼼짝도 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옥에 안 가는 방법을 선택하고 나니 그만 안도감으로 온 몸이 자기도 모르게 풀리게 되었다고 하면 서 다시 한 번 감사하다고 하였다.
두려워지면 화를 낸다
Y씨의 경우는 「지옥에 대한 공포감으로 인 한 靈的위기」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런 문제 에 대해서는 醫療人(의료인)들도 잘 對面하 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美國에서는 病棟(병동)에 입원한 환자가 응급벨(Call Bell)을 누를 때 의사나 간호사가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조사한 결과를 한 예로 들 수 있다. 조사 결과 일반 환자가 벨을 누르면 즉시 달려가는 반면에 末期환자가 누르면 인터폰을 들고 무슨 일인지 질문한 다음 두세 가지 처치를 모아서 한꺼번에 들어가 환자의 눈도 쳐다보지 않은 채 빨리빨리 하고 나온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는데 그 이 유는 「두려움」 때문이라고 하였다. 醫療人들도 죽음에 대해서는 준비되어 있지 않아서 末期환자가 죽음과 관련된 話頭를 꺼낼까 봐 두려운 마음이 있어서라고 응답하였다는 것이다.
韓國에서도 필자와 함께 일했던 자원봉사자 중에 그런 고백을 한 사람이 있었다. 그녀 는 40대의 가정주부였는데 친구 중 한 사람 이 大腸癌(대장암) 末期로 입원을 하였다. 병 문안 차 방문한 그녀에게 환자는 무언가 이야기를 하고자 하였다는 것이다. 그 친 구는 당시 殘餘壽命이 3개월 정도 될 것이 라는 의사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으나, 호스피스에 가입하는 것은 반대하였고 대신 호스피스 교육을 마치고 자원봉사자로 막 활동을 시작하려고 하는 이분의 정기적인 방문을 원하였다고 한다.
이 봉사자는 직감적으로 그 친구가 자신의 임박한 죽음에 관해 무엇인가 이야기하고 싶어하고 그 상대로서 호스피스 교육을 받은 자신을 선택하였다는 것을 알았다고 한 다. 그러나 그녀는 그 친구가 생명을 다할 때까지 더 이상 방문하지 않았다. 아니 더 이상 방문할 수가 없었다고 하였는데 그 이유는 그녀 자신도 그런 話題가 두려웠기 때문이었다고 울면서 이야기하였다. 그분뿐만이 아니었다. 호스피스 자원봉사자 교육을 받으러 온 사람 중에는 기분 나쁘게 왜 죽는 이야기를 꺼내느냐고 화를 내는 교육생도 있었다.
호스피스 교육과정에는 죽음과 관련된 워크숍이 들어 있다. 호스피스에 참여하는 인력은 자신이 먼저 죽음 에 대한 느낌과 의미를 성찰해 보지 않으면 末期환자를 대면하는 데 어려움을 느끼게 되므로 이 워크숍은 호스피스 교육에 있어 서 대단히 중요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미리 遺書(유서)를 써보는 시간도 있고 小 그룹으로 나뉘어서 죽음에 대한 각자의 의미를 이야기하는 시간도 있는데 갑자기 그룹 인도자(「튜터」라고 부른다) 한 사람이 얼굴이 벌개져서 필자에게로 왔다. 자신이 인도하는 그룹원 중 한 사람이 『나 는 호스피스 교육을 받으러 왔는데 기분 나쁘게 왜 죽는 이야기를 하느냐』면서 몹시 화를 내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분은 50대 의 여행사 사장으로 직원들과 함께 단체로 좋은 일 좀 해보겠다고 호스피스 자원봉사 자 교육을 받으러 왔는데 자신의 內面(내면 )에서 죽음에 대한 강한 거부가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화를 내고 피하면 그뿐인 주제일까? 외면하면 本人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는 話頭일까? 애써 외면하려고 하면 할 수록, 화를 내면 낼수록 어쩌면 보다 큰 두려움이 그들 마음속에 숨어 있는 것은 아닐까?
죽음은 威嚴을 가지고 만나야 할 삶의 종착지
필자가 박사학위 논문을 쓰면서 글이 잘 풀리지를 않아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마침 집 근처의 영화관에서 상영하고 있던 「패 치 아담스」라는 영화를 아이들과 함께 본 일이 있다. 사실 그날은 몹시 머리가 아파 서 그냥 머리를 식히려고 갔던 것인데 전혀 기대 밖으로 너무나 큰 감명을 받아 극장 안 어두운 곳에서 수첩에 메모해 놨다가 집에 가자마자 논문의 서론 부분을 줄줄 써 내려갈 수 있었다.
그 영화에서 주인공 패치 아담스는 「죽음 은 敵이 아니라 威嚴을 가지고 맞이해야 할인간 삶의 종착지」라고 하였다. 의사가 질병을 치료하다가 더 이상 치료(완치)할 수 없을 때 실패했다고 느끼는데, 병을 치료하면 이길지 질지 모르지만 사람을 치료하면 언제나 이긴다고 하였다. 그래서 인간 을 치료하기 위해서 의사소통능력을 키우고 人間愛를 길러야 한다고 외치면서 「죽음 은 인간이 威嚴(위엄․dignity)을 가지고 맞이해야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하루 일과를 끝낸 사람들이 모두 집으로 돌아오듯 이 「죽음은 자연스런 인간 삶의 종착지이 기에 그것과 싸우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우리가 싸워야 할 것은 죽음이 아니라 무관심」이라고 외치고 있었다. 이것은 사실 늘 호스피스에서 하고 있는 일 이다. 호스피스의 哲學은 「죽음이란 인간 삶의 정상적인 과정 중 하나(a normal pr ocess of life)」라고 본다.
그러므로 生의 마지막 시간 동안 비록 완치는 안되더라도 최선을 다해 증상을 조절하고 삶의 質을 높이며 인간의 존엄성을 유지한 채 죽음을 맞아들일 수 있도록 개인적인 관심과 배려를 최대한 제공한다. 인간 삶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와 같은 본질적인 문제에 직면할 때에 도움이 되도록 의료인뿐 아니라 성직자도 한 팀을 이루어 활동한다. 그런 이유로 현대적 의학 기술로도 완치 하지 못하는 질환의 말기에 있는 사람들이 호스피스 치료를 받으면서 內面의 상처가 치 유되고 인간 實存의 의미를 찾게 되어 편안하고 행복한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다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호스피스 哲學 중 하나는 「生의 마지 막 과정에 있는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곳에 서, 원하는 사람과 함께 희망하는 방식으로 살다가 원하는 장소에서 죽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末期 질환이라고 모든 사람이 호스피스 치료를 받아야 한 다고 말하지 않고 희망하는 사람에 한해서 환자와 가족의 동의하에 입원시키는 것이 다. 또한 生의 마지막 시기에 지나간 生涯 를 돌이켜 보면서 삶을 정리하고 「안녕」 이라고 말하고 떠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는 해도 환자가 원하지 않으면 억지로 하지는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자신의 죽음을 인지하게 된 患友들 중에서 來世가 있다고 확신하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마지막은 조금 다른 양상을 보여주었다. 퀴블러 로스가 「受容 (수용)」이라고 명명하였던 情緖(정서)가 우리가 돌보았던 한국인 호스피스 대상자 중 10% 정도에서도 나타났는데 이들의 공통점은 죽음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시작이라고 믿고 있었다는 점이다. 앞서 이야기하였던 K씨와 L군이 그런 경우 였고 Y씨 역시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평화스러운 죽음을 맞이하였다. Y씨는 굳었 던 온몸이 풀린 다음날 부인에게 자신의 통장과 도장, 비밀번호 등과 함께 자신의 재산 상태를 알려주었으며 조용히 있고 싶다고 하여 다른 친구가 원장으로 있는 개인 병원으로 병실을 옮겼다. 일주일 후 방문하였을 때는 처음보다 안정되어 보였으며 통증은 잘 조절되고 있었으나 腹水(복수)가 약간 차 있었다. 정기적으로 성직자와 상담 을 하고 있었으며 환자가 편안해 하자 부인도 안정이 된다고 하였다. 1시간 정도로 방문을 마치려 하자 『다음에 한 번만 더 와 주세요』 했다. 그리고 그 다음부터는 회사의 중역들을 오라고 해서 회사 경영에 대 한 지침과 권한 이양 및 정리를 하였다고 한다. 1주일 후 세 번 째로 방문하였을 때 Y 씨는 『이제 그만, 됐어요. 감사합니다』라고 했다.
사실 Y씨의 진행정도로 보아 아직 시간이 조금 더 있다고 생각했는데 Y씨 자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있는 것이 아닌가 여겨졌다. 그래서 『이제 시간이 없다는 뜻인가 요?』하고 물어보자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었다. 혹시 알 수 없어서 부인에게 『일 주 일 뒤에 방문할 예정인데 그 동안에 무슨 일 이 있으면 연락해 달라』고 당부하였다. 그런데 그 다음날 Y씨는 평소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을 오라고 해서 마지막 인사를 하고 부인을 잘 부탁한다고 당부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성직자를 청하여서 자신이 떠난 후에도 부인을 위하여 가끔씩 방문해 달라고 부탁하였으며 부인에게는 먼저 갈 테니 나중에 만나자고 하고 장례식에 대한 내용 도 미리 원하는 방식을 이야기한 후 『빛이 보인다』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고 한다.
전화를 받고 장례식에 참석한 필자에게 Y씨 의 부인은 『地獄에 안 가는 방법을 알려 주어서 너무나 감사하다는 말을 꼭 전해달 라고 하였다』면서 고맙다고 하였다. J부인 역시 우리에게 많은 감명과 가슴 아 픔을 주었던 경우였다. J부인은 美國에서 공부하던 중에 현재의 남편을 만나 결혼하였고 두 아들을 낳아 행복하게 살아왔다. 乳房癌 末期로 癌이 肺에 轉移된 상태였는 데 의학적으로는 조금 더 치료해 보았으면 하고 담당 의사가 아쉬워하였으나 본인이 더 이상 항암 치료는 하지 않고 호스피스 치료를 받겠다고 하였던 경우였다.
來世觀이 있는 사람의 경우
그녀는 초등학생인 아이들에게 자신의 추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여 臨終過程을 시작할 무렵에 병원에 입원하였다. 그녀는 자녀들에게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신의 죽음에 대해 알리고 「인간이 원하는 대로가 아닌 삶의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 다」, 「지금은 이해할 수 없지만 그분의 어떤 뜻이 있을 것이다」, 「아빠와 장차 오실 새어머니 말씀 잘 듣고 훌륭하게 자라서 이 다음에 다시 만나자」는 내용의 遺書를 남겼다. J부인은 종교인이었는데 돌아가시기 3주 전 부터는 몸이 점차 쇠약해져 가면서 「왜?」 라는 질문을 많이 하였다. 곰곰 생각하는 시간을 많이 가졌으며 잠시 종교적 신념이 흔들리는 듯한 시간도 있었으나 같은 종교를 가지고 있었던 看病人(간병인)이 信仰( 신앙)의 원리와 來世에 대해 말해주자 확신 속에서 평안하게 소천 하였다. 남편에게는 자신의 무덤을 平土葬(평토장)해 줄 것과 결혼식 때 입었던 웨딩드레스를 입혀서 관속에 넣어 달라는 부탁의 말을 남기고 천국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한 후에 편안한 모습으로 臨終하였다고 한다.
또한 肺轉移(폐전이)와 骨轉移(골전이)가 있었던 乳房癌 말기의 P부인의 경우도 특이 한 감동을 준 사례였다. 그녀는 항암제 치료를 중단한 대부분의 환자가 그러하듯이 그 동안 빠졌던 머리카락이 다시 자라기 시작하여 스포츠 머리 정도로 자라 있었다. 臨終이 가까워지자 집에서 임종하기 위하여 퇴원하기로 결정하였으므로 집에까지 모셔 다 드리게 되었다. 집으로 가는 앰뷸런스 안에서 산소 마스크를 한 P부인은 눈을 감 은 채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으므로 함께 동행하는 필자의 마음도 안타까웠다. 아직 청소년인 두 자녀를 두고 떠나야 하는 그녀를 바라보며 무거운 마음이었는데 옆에 앉아 고개를 푹 숙이고 눈물을 떨구던 남편이 기어이 아내의 짧은 머리를 쓰다듬으며 『이 머리 자라면 파마해 주려고 했는데… 』 하면서 울부짖고 말아서 함께 있던 필자 의 눈에도 눈물이 맺혔다.
집에 도착하여 방 한가운데 이불을 펴고 P 부인을 눕혔다. 남편과 고등학생인 딸, 중학생인 아들이 울면서 P부인을 바라보고 있었고 급하게 연락을 받고 달려 온 敎友(교우)들은 둘러앉아 조용히 기도를 올리고 찬송을 불러 주었다. 산소 마스크를 떼고 나니 체인 스톡 호흡을 하는 P부인의 얼굴은 흙빛에 가까웠다. 그때 나이 많은 여자 교우 한 분이 『○○ 야, 이제 곧 주님을 만나게 된다. 이제 곧 그분을 만나게 될 거야』라고 하였는데 그 순간 흙빛이던 P부인의 얼굴이 환하게 빛을 내면서 코로 긴 한숨을 한 번 길게 내쉬고는 끝이었다. 조금 전의 어둡던 흙빛과는 대조적으로 환하게 밝아진 채로 잠든 P부인의 얼굴은 아주 평화스러워 보였다.
남은 시간도 信念에 따라 달라
반면 來世가 없으며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 라고 생각하는 患友들 중에는, 괴로워하고 두려워하면서 마지못해 떠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런 이들 중에는 지금까지 자신이 쌓아 놓은 것을 자신의 死後에 누군가가 대신 사용하며 잘 먹고 잘 살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꽉 막혀서 실제 疾患(질환)의 진행상태보다 빠른 속도로 갑자기 死亡하는 경우도 있었다.
子宮癌(자궁암) 末期였던 A부인은 집안에 연못과 정자가 있는 크고 호화스러운 집에 서 사는 부잣집 마나님이었다. 특실에 입원 해 있다가 퇴원하면서 가정 호스피스에 가입하였다. A부인 역시 來世에 대해서는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던 분으로 이 땅에서의 삶이 전부라고 믿고 살아 온 분이었다 . 그래서 의사가 더 이상 병을 고치기 어렵 다고 하자 삶을 연장하기 위해 좋다고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해보고자 하였다. 호스피스의 목적은 「人間이 자연스러운 자 기 壽命을 다할 수 있도록, 또 그때까지 편안하게 살 수 있도록 全人的으로 돕는 것」 이다.
그래서 이것저것을 억지로 하기보다 身體的, 情緖的, 靈的, 社會的으로 환자와 가족에게 가장 편안하고 도움이 되는, 그러면서도 환자가 원하는 대로 살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하지만 對象者의 信念體系에 따라 남은 시간을 어떻게 쓰느냐 하는 내용이 달라지는 것을 보아 왔다. A부인은 호스피스에 가입하기는 하였지만 한편으로 두 달만 치료하면 낫게 된다는 속칭 「도사」의 말을 믿고 온 몸에 밀가루 칠을 하고 지름 2~3cm 정도의 쑥뜸을 등과 팔, 다리 등에 여러 군데 뜨는 일을 매일 하였다. 호스피스에서 방문하였을 때 도사가 치료(?)중인 경우도 있었는데 끝난 후 들어가 보면 A부인은 기진한 상태로 엎드려 있고 몸의 여기저기에 있는 쑥뜸 자리는 분화구처럼 움푹 패인 채 연기를 내뿜고 있었다. 그런 식으로 계속하다가는 敗血症(패 혈증)에라도 걸릴 것 같아 보였다. 그런 일이 한 달쯤 계속된 후 보다 못하여 『효과가 있다고 생각하느냐』고 물어보았 더니 A부인이 고개를 옆으로 젓는 것이었다 . 『그럼 왜 그렇게 매일 하고 있느냐』고 묻자 『다른 방법이 없지 않느냐, 낫게 해 주겠다고 장담을 하니 믿어보는 것인데 이 젠 힘이 들어서 이것도 더 이상은 못하겠다 』고 하였다. 그러면서 자신은 『죽고 싶지 않다, 죽는 것이 무섭다, 무슨 일이 있을 지 모르는데 어떻게 눈을 감는가, 빛이 없 는 깜깜한 세상에 어떻게 가겠나』고 하면서 하염없이 울었다.
그리고 쑥뜸 자리에 염증과 통증이 생겨서 호스피스에서 치료를 해 주었는데 그런 다 음부터 A부인은 그 도사를 오지 못하게 하 고 대신 S교회의 담임 성직자를 청했다. 그 이유는 이분이 병을 잘 낫게 한다는 소문 을 들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와서 자신의 병이 낫도록 기도해 줄 것을 기대하며 중간에 사람을 넣어 請(청)을 드렸다 는 것이었다. 그러나 어렵게 모셔온 그분은 A부인의 기대와는 달리 병을 낫게 해 주겠다는 말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대신에 영 원한 세계에 대한 이야기와 내세가 있음을 이야기하고 종교적 믿음을 가질 것을 권유하였다는데 이에 실망한 A부인은 몹시 낙심 한 모습이었다. 초조하고 불안해하던 그녀는 『귀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고 허깨비 같은 게 보여요. 무서워요』 하더니 악액질(惡液質․ cach exia․오랫동안 먹지 못해 뼈와 가죽만 남 은 상태-注) 상태에서 허공에 손을 저으며 눈을 부릅뜬 채 숨을 거두었다.
안타까운 죽음
B부인은 43세의 乳房癌 환자였다. 왼쪽 유방 절제수술을 하였으며 항암 치료로 효과를 보아 4년 정도 잘 지내다가 再發된 경우였다. 病況은 아직 치료 가능성이 남아 있는, 그래서 호스피스에 의뢰하기에는 조금 이르다고 보여지는 상태였다. 그러나 환자가 두 번이나 불안이 아주 심할 때 나타나 는 發汗(발한), 호흡곤란, 心悸亢進(심계항 진․심장의 고동이 빨라지고 세어지는 현상 -注) 등의 증상을 보여 응급실로 실려왔던 경험이 있어서 도움을 요청한 경우였다. 외형상으로 B부인은 발병한 지 5년째이므로 자신의 죽음에 대비를 잘 해놓고 있는듯이 보였다. 집안 정리도 세 번이나 하였다 고 하였으며 응급실에 실려 올 때마다 녹음기에 遺言도 녹음을 하였다. 심지어는 자신 의 死後에 남편이 혼자 살수는 없다고 생각하여 친구의 동생 중 한 명을 선택하여 자신이 죽고 나면 남편과 결혼해 주도록 부탁해 놓은 상태였다.
남편에게도 확답을 받았다고 하였으며 그 여성도 처녀이지만 B부인이 간절하게 요청을 하므로 심사숙고한 후에 그러기로 응낙을 하였다고 하였다. 문제는 여기에 있었던 것으로 보였다. B부인의 남편은 나이에 비해 승진을 빨리 하였으며 B부인 역시 남편을 잘 내조하여서 어느 정도 재산을 모았으며 사랑하는 두 아들 과 남편과 함께 재미나게 살아가고 있을 때 에 癌이라는 진단을 받았던 것이었다. 사실 乳房癌은 5년 이상 생존 가능성이 높은 癌 으로 조기에 발견하기만 하면 根治率(근치 율)도 높다. 그러나 再發하게 되자 B부인의 마음에 「이제는 죽었구나」는 생각이 들었으며 나름대로는 죽음을 준비한 것인데 막상 남편의 미래 再婚(재혼)상대까지 정해 놓고 나자 마음이 불편해지지 시작한 것이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자신이 일구어 놓은 이 모든 것을, 이것을 위해 전혀 힘쓰거나 애쓰지 않은 제3의 여성이 와서 자기 대신 누리고 살 것을 생각하니 그만 숨이 가빠지고 곧 죽을 것같이 느껴진 것이었다. 죽으면 끝이라고 생각하는 그녀에게 있어서 자신의 삶은 끝나는데 사랑하는 가족들이 다른 사람과 함께 즐길 것이라고 하는 것은 상상만으로도 기가 막히는 일이었다. 어떻게 보면 精神生理障碍(정신생리장애․심리 적 불안이 원인이 되어 실제로 생리적인 문제가 발생하는 일종의 정신질환-注)라고도 할 수 있는데 이는 환자 자신에게는 위협 이 될 정도로 심각한 문제였으며 주변 사람에게도 힘든 일이었다. 호스피스에 가입한 후 몇 번의 정서적 상담 을 통해 결혼 약속을 되 물리고서 증상이 호 전되는 듯하였다. 그러나 죽으면 모든 것이 그만 이라는 기본적인 신념에는 변함이 없었는데 어느 날 밤에 다시 발작과 호흡곤란 을 일으켜 응급실로 실려 갔다가 다음날 아 침에 『안돼, 안돼』라고 외치다가 그만 운명하고 말았다.
「인간은 靈物」
많은 이들이 來世와 같은 보이지 않는 세계 에 대해 증명할 수 없을지 모르지만 호스피스에서 이는 엄연히 존재하는 현상이다. 그 리고 필자가 체험한 바에 따르면 「인간은 靈物(영물)」이라는 것이다. 장갑을 낀 채 오랫동안 손을 움직이다 보면 손이 아닌 장갑이 움직이는 것으로 착각할 수 있으나 장갑을 벗으려 할 때 비로소 손 이 움직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 마찬가지로 건강할 때는 움직이는 몸이, 눈에 보이는 세계만이 전부라고 착각하였을지라도 막상 臨終過程이 시작되어 靈이 몸에서 빠져나가려 하는 시점이 오면 서로 다른 두 세계 가 보이게 되고 자신을 움직였던 것이 장갑이 아니라 손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손이 빠져나간 장갑이 스스로 움직이지 못 하듯이 영혼이 빠져나간 몸도 움직일 수 없으며 우리는 그 몸을 屍體(시체)라고 부르고 壽衣(수의)를 입혀 장례식을 치르게 된다. 靈魂이 몸에서 빠져나가는 과정은 신비로운 데 2~3일간의 臨終過程을 통해 몸이 서서 히 기능을 정지하면서 체인 스톡 호흡을 하 다가 때가 되면 코로 긴 한숨을 쉬듯이 빠져나가 버린다. 코로 들어간 生氣가 코로 나가는 모습을 목도하노라면 實存하는 靈을 확인하는 느낌이다.
臨終過程에는 身體的인 측면과 情緖的, 靈的 측면이 있다. 身體的으로는 손발이 차가워지고 점차 잠자는 시간이 길어지며 의사소통하기가 어렵고 반응하지 못하게 된다 . 시간, 장소, 사람에 대한 혼돈이 생기게 되고 불안정해지며 근육이 무력해짐으로 인해 失禁(실금)이나 失便(실변) 현상이 나 타난다. 수분섭취가 적어지고 정상적인 분비물을 기침으로 내보내는 능력이 적어지면 서 가슴에서 돌 구르는 듯한 소리가 나기도 한다. 수분과 음식의 섭취량 및 소변 량이 줄고 호흡하는 양상이 변화된다. 情緖的, 靈的으로 는 對人관계가 감소되고 위축되며 아직 끝마치지 못한 일이 있으면 안절부절 하게 된 다. 또한 이미 죽은 사람과 이야기하거나 다른 이에게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았다고 하는데 이는 이 세상으로부터 분리되기 시작하는 것이고 전환되려고 준비되어지는 중이다. 이때 환자의 죽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한데 「당신이 떠나고 싶을 때 언제든지 떠나도 좋다」고 허용해주고 마지막 인사를 나누는 것이 필요하다.
죽음을 도와주고 나의 죽음을 준비하는 자세 / 호스피스의 歷史 / 한국의 호스피스 조직
人間이 보이는 세계만을 확신하고 이 세상에서의 삶만 존재한다고 믿는다면 이 마지막 인사를 어떻게 나누어야 할까? 죽음이 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중 일부는 B씨처럼 이미 돌아가신 친지를 보게 됨으로 인해 희미하게나마 저 세상을 감지하고, 싫지만 「포기」하는 이들이 있었다. 그런가 하면 A부인이나 B부인처럼 안 죽으려고 발버둥치다가 제대로 「안녕」을 못하고 떠나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한편 來世가 있다고 확신하는 사람들의 경우에는「먼저 가서 미안하다. 그곳에서 만나자」고 하는 마지 막 인사를 남기는 모습을 보았다. 비록 얼마간의 이별로 인해 눈물을 흘리기는 하지 만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기대가 그들에게는 있어 보였다.
죽음은 더 이상 남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 모두의 문제인 죽음을, 그리고 보이지 않지만 實在하는 靈의 세계를 미리 보고 준비하며 사는 것이 새 천년을 사는 지혜가 아닐까? 길을 걸어가면서 발 밑만 쳐다보면 부딪치기 쉽고 하늘만 바라보면 돌부리에 채이기 쉽다. 두 눈을 가지고 양쪽 세계를 다 보면서, 마음을 넓히고, 너의 죽음을 도와주며 나의 죽음을 준비하는 자세로 사는 사람들이 많았으면 한다.●
호스피스의 歷史
호스피스(Hospice)의 어원은 라틴어의 Hospes(손님) 또는 Hospitum(손님접대, 손님을 맞이하는 장소)에서 기원한다. 1900년 英國의 빈민가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을 돌보던 「자비수녀회(Sisters of Charity of St. Vincent de Paul)」가 5년 뒤 「성 요셉 호스피스(St. Joseph Hospice)」를 창설해 독립된 건물에서 임종환자를 돌보기 시작 한 것이 시초다.
현대적 의미의 호스피스는 영국인 여의사 시실리 손더슨이 1967년 성 크리스토포 호스피스를 설립하면서부터였다. 韓國은 196 3년 강원도 강릉에서 「마리아의 작은 자매 회」 수녀들에 의해 갈바리아 의원이 세워 져 임종환자를 돌보기 시작한 것이 시초가 된다. 현재는 경제적 어려움으로 병상 운영은 하지 않고 가정방문 호스피스를 시행하고 있는 실정이다.
가톨릭대학교 의과대학과 강남 성모병원에 서도 1982년부터 호스피스 활동이 시작되었 고 1987년에는 성모병원과 강남 성모병원에 서 10개의 호스피스 병동이 신설 운영되고 있다. 1988년에는 세브란스 암센터에서도 가정간호 호스피스 활동 프로그램을 시작했다(崔華淑 박사는 이때 미국인 선교사 출신의 왕매련 당시 연세대학교 간호대학 교수와 함께 호스피스 팀을 창설했다). 이화여대는 1992년 5월부터 가정호스피스 간호사업을 시작했다. 현재 한국에서 약 6 0여 호스피스 단체가 활동중이지만 의료보험 등 제도적 지원체계가 전무한 실정이어 서 조직적인 활동을 시도하는 기관은 예상외로 적다.●
한국의 호스피스 조직
후원자들의 후원금을 통해 팀별로 운영한다. 실무책임자(팀장)와 의사, 간호사, 사회 복지사, 성직자 및 자원봉사자(2~3명)로 구성된다. 이화여대 호스피스의 경우 3백여 명이 교육을 받았고 이 중 50여명이 활동중 이다. 호스피스 한 팀당 10명의 환자를 간 호한다. 그 이상은 관리능력이 따르지 못하 기 때문이다. 환자당 평균 3~6개월간 간호를 받으므로 연간 50명 이내의 末期환자를 간호할 수 있다. 비용은 형식적으로 연회 비 2만원을 정해 두고 있지만 가난한 환자 는 무료이다.●
>>주간 독자의 편지 [독자의 편지] 月刊朝鮮을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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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죽음에 눈뜨게 한 호스피스 체험기
저는 서울 송파구 문정동에 사는 이은진이라고 하며, 25세의 유치원 교사입니다.
3월호에 나온 최화숙 박사님의 호스피스 체험수기 「인간은 어떻게 하면 아름답게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를 감명 깊게 읽고 감사의 글을 보냅니다. 저 는 개인적으로 가까운 친지나 가족 중에 死別(사별)을 해본 경험이 없기 때문에 「죽음」에 대해서는 막연하게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실린 최화숙 박사님의 글은 한 마디로 충격적이었습니다. 박사님의 글은 저에게 또 다른 세상을 보게 해 주었고, 새로운 삶의 인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내세관을 가진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고, 용서받고 , 『먼저 가 있을 테니, 나중에 다시 만나자』는 희망의 말을 남기고, 결과 적으로 남겨지는 가족들에게도 『좋은 곳에 갔다』는 확신과 희망과 위로를 주는, 참으로 아름다운 죽음을 맞는 것을 보면서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 『사람은 누구나 한 번은 죽는다』는 말을 당연한 것처럼 알고 있지만, 정작 『나도 언젠가는 죽는다』 『어떻게 죽음을 맞을 것인가?』하는 생각 은 전혀 하지 않고 사는 사람들이 많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박사님의 글을 읽는 동안, 시종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해서 생각했고, 지금 건강하게 살아있을 때 보이지 않는 그 세계를 의식하며, 하루하루 성실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유언장도 써 보았습 니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 죽음 이후에 또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희망의 메시지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이은진․서울 송파구 문정동>
한 脫北者의 편지
저는 북한에서 나와 산동성에 살고 있는 脫北者입니다. 이곳에 와서 한국에 서 발행한 출판물들을 많이 보지는 못했어도 저희들을 위하여 힘이 되는 글 을 많이 써주시는 月刊朝鮮은 정말 사막의 오아시스와 같이 방황하는 저희들에게 힘이 됩니다.
저는 이곳에서 북한에 대한 한국의 입장이 무엇인지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습니다. 북한은 한국의 동족이며 찾아야 할 국토입니다. 그러나 북한은 주체사상이라는 잘못된 사상으로 인해 아니해야 할 것을 하다가 만 가지 병이 겹친 악성환자입니다. 물론 한국은 독일의 경우를 보아 통일비용이 엄청나게 들기 때문에 북한의 경제를 일정한 정도 회복․성장시킨 다음에 통 일을 하겠다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그런 식으로 북한을 회복․성장시키려면 엄청난 시간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 시간 동안 남북은 軍費를 계속 유지․증강해야 하며 통일․외교분 야에서 엄청난 재정적 비용을 들여야 할 것입니다. 결국 이 비용은 통일비 용과 맞먹을 것이며, 경제적으로 볼 때 한국은 엄청난 시간낭비를 하는 셈 일 뿐입니다.
악성환자인 북한을 수술할 나라는 오직 한국뿐입니다. 미국이나 일본, 러시 아, 중국은 의사(한국)의 조수에 불과합니다. 중이 제 머리 못 깎고, 무당 이 제 굿 못한다는 속담처럼 북한은 자체로 蘇生(소생)할 능력도 없고 할 생각조차 하지 않습니다. 지금 주변국 및 유엔을 비롯한 국제기구에서 북한 에 주는 각종 원조는 환자에게 주는 치료제가 아니라 고통만을 잠시 덜어주 는 진통제일 뿐입니다. 환자는 수술이라는 근원적 치료를 받지 않고 있기 때문에 점점 병이 심해만 갑니다. 한국은 이대로 2000만 동포를 고스란히 죽이려 합니까?
「독도는 우리땅」이라는 노래는 북한에서도 20대와 30대 사이에서 널리 불리고 있습니다. 자그마한 섬과 그것이 산출해 내는 바다를 얻기 위해서 뛰 는 한국인이 11만㎢의 그 엄청난 국토가 황폐화되어도 관계치 않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통일을 앞당기는 것은 모진 시련 속에서 피땀 흘려 지금의 한국경제 기반을 닦아온 기성세대에게 줄 수 있는 최대의 선물이며, 통일조국은 新세대들이 활동할 무대가 될 것이며, 당겨진 시간은 유라시아 대륙 동쪽 끝 한반도를 경제대국으로 부상시킬 수 있는 최대의 기회입니다. <石哲亨․탈북자>
공직자의 윤리의식이 더욱 절실한 때
月刊朝鮮이 창간 이래 꾸준하게 다루고 있는 소재 중 하나가 정치권이나 공 직사회의 부정을 고발하고 비리 근절을 위해 노력해 온 것이다. 이러한 편 집태도는 언론의 소임에 충실한 것이라고 믿는다. 복잡다기한 사회구조 중 어느 한 부분이라도 삐끗하면 사회 전체가 균형을 잃고 특히 공직사회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을 경우 폐해가 엄청나다는 것은 수없이 경험해 본 일이다. 권위적이고 이기적이며, 사사로운 영달을 위해 수단방법 안 가리며 비리나 저질러온 집단이 사회지도층을 형성한다고 생 각해 보면 아찔한 마음이다. 지난 2월호의 「기성세대는 깨끗한 나라를 후손에게 물려줘야 할 책임이 있 다」라는 한 공기업 사장의 일화를 보면서 모든 공직자들이 이를 귀감으로 삼았으면 하는 것이 간절한 소망이다. <김섭업․전북 정읍시 상동>●
투표 결과 (총투표 : 3841)
◉ 앞으로 귀하가 살 수 있는 시간이 24시간밖에 남지 않았다고 가정한다면 어떤 일을 꼭 하고 싶으십니까.
① 가족에게 편지 혹은 유서를 쓴다. 815 (21%) ② 임종을 알리고 가까운 사람들과 만나 주변을 정리한다. 894 (23%)
③ 마음의 빚을 정리하거나 미워했던 사람과 화해한다. 292 (7%) ④ 맛있는 음식을 먹고 술을 마신다. 65 (1%)
⑤ 자신의 삶을 정리하는 회고록을 쓴다. 163 (4%) ⑥ 혼자 죽기 억울하다는 생각에 사고를 저지른다. 63 (1%)
⑦ 기도를 하거나 종교에 귀의한다. 310 (8%) ⑧ 고향이나 추억의 장소를 찾아 여행한다. 449 (11%)
⑨ 사랑하는 사람(혹은 첫사랑)을 만난다. 446 (11%) ⑩ 부모님이 안계실 경우, 묘소를 찾아 인사를 한다. 308 (8%)
⑪ 기타 36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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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하는 죽음] "치열하게 살다 하늘 뜻에 따른다" [준비하는 죽음] 예술작품속에 나타난 죽음의 의미
[준비하는 죽음] 죽음은 신비로워야 한다 [준비하는 죽음] 끝? 시작?...각 문화권의 사생관
[죽음] 언제 어디서든 죽을 준비를 하고 삽시다
질병사고 등 위험 가득한 속에서 근거없는 낙관주의 만연
보험이나 유서쓰기 등 남은가족 위한 평소의 주변정리 필요
한국인들은 하루 하루 목숨을 내놓고 살고 있다. 비명횡사의 위험이 도처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길을 걷다가 간판이 바람에 떨어지거나 가스가 폭발하고 멀쩡하던 한강다리가 출근길에 끊어지고 백화점이 무너져 창졸간에 목숨을 잃는 게 한국 사회다.
▲ 모든 조문객은 언제든지 영정의 주인공이 될 수 있는 게 우리 삶의 현실이다.
1999년 한해 동안 한국에선 9353명이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보잉 747기(정원 378명) 25대가 바다에 추락해 몰사한 것과 비슷한 수치다. 1999년 전체 사망자 수는 인구 10만명당 20.0명으로 OECD 회원국 중 2위다. 일일 평균 25.6명. 한국 남자의 주요 사망 원인은 위암, 간암, 교통사고의 순서다. 1998년을 기준으로 이를 주요 국가와 비교하면 간암 사망률 인구 10만명당 30.3명으로 세계 1위, 위암 사망률은 30.8명으로 일본(50.2명), 포르투갈(35.9명)에 이어 3위, 교통사고는 38.5명으로 포르투갈(42.1명) 다음이다. 최근 몇년 사이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민을 많이 가는 캐나다는 어떤가. 위암은 8.6명, 간암 2.0명, 교통사고 16.7명이다. 사회 안전도 하나만 놓고 보더라도 이민을 가는 사유가 된다.
■순직 소방관 중 보험 든 사람은 2명뿐
강남대학교 방명하(40경영학부) 교수는 8년간의 미국 유학생활에서 무엇보다 ꡐ만일의 경우에 대비하는 모습ꡑ에서 깊은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같은 아파트에 사는 미국인들은 화재가 났을 경우 우선 무엇을 가지고 나갈 것인지, 또 누가 무엇을 들고 나갈지를 가족간에 사전에 분담해 놓고 있었다. 방 교수 부부도 이런 이웃들에게 배워 불이 났을 경우 누가 먼저 내려가 자동차를 안전한 곳에 빼놓고 현금, 보험카드와 같은 중요한 것을 누가 들고 나갈지를 도상연습까지 했다고 한다.
급사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한국인들은 만일에 대한 대비가 어느 정도 되어 있는가? 한국인의 의식 속에는 근거없는 낙관주의가 자리잡고 있다. 위험한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조차 [나는 괜찮겠지]라든가 [별일이 있겠나]하는 생각을 너무도 쉽게 한다.
신문에 등장하는 흉악범이나 불우한 인생을 사는 사람들의 지나온 길을 보면,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구절이 있다. ꡐ아버지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가세가 기울어…ꡑ하는 대목이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것이, 졸지에 생계가 막막해지자 어머니가 생업 전선에 나서는 바람에(혹은 집을 나가는 바람에) 돌볼 사람이 없어 공부를 못해 비뚤어지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이렇듯 생계를 떠맡은 아버지의 갑작스런 죽음은 자녀들의 인생에 부정적인 쪽으로 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많다.
ING생명보험 세일즈 매니저 변기천(41)씨는 고객과 상담을 하다가 끝내 고객이 보험 가입의 필요성에 동의하지 않을 때 1999년 7월 20일자 모신문 사회면에 실린 짤막한 사건 기사 사본을 보여준다고 한다. 은행에서 퇴출된 뒤 계약직으로 근무해 온 30대 여자 은행원이 남편마저 교통사고를 당해 뇌사 상태에 빠지자 두 아들을 살해하고 자신은 승용차를 몰고 김포대교로 가 한강에 투신했으나 구조됐다는 내용이다. 변씨는 이 기사를 읽은 고객에게 ꡒ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으면 선생님의 사랑하는 가족에게도 이런 상황이 올 수도 있다ꡓ고 말한다. 이렇게 말하면 대개는 고개를 끄덕인다고 한다.
최근 서울 홍제동 화재 사건 당시 순직한 6명의 소방관들의 경우도 이런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사선을 넘나드는 직업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생명보험에 든 사람은 두 사람에 불과했다. 나머지 4명 가운데 두 사람은 각각 연금보험과 암보험 에 들고 있었지만 뒤에 남은 가족을 재정적으로 완벽하게 책임지는 보험이라곤 할 수 없다. ING생명보험 변기천 매니저는 [그동안 상담해본 많은 사람들 가운데 자신이 죽은 뒤에 가족을 재정적으로 지켜주겠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 50%가 되지 않은 것 같다]고 했다. 가장의 갑작스런 죽음이 모든 가정에서 자녀의 불행으로 직결되는 것은 아니다.
1989년 미국 UCLA 졸업식장에서 있었던 일이다. 그해 수석 졸업자는 여학생이었는데, 기자 회견 때 이런 질문이 나왔다.
- 아버지가 안계신 것으로 아는데요.
[아버지는 제가 여섯 살 때 사망하셨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저를 키우신 것은 아버지였습니다]
- 그게 무슨 말입니까?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시겠습니까.
[아버지께서 들어두었던 보험금으로 그동안 생활비와 학비를 충당했는데, 보험증서에는 아버지의 메모가 첨부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아버지가 보고 싶고 힘들 때마다 이 메모를 보곤 했습니다. [수잔, 네가 성장하는 데 나는 아버지로서 도리를 다 할 것이다. 하지만 불의의 사고나 질병으로 그 도리를 다 하지 못하게 되었을 때는 이 증서가 나 대신 너를 지켜줄 것이다. 그러니 너는 어떠한 상황에도 굴하지 말고 바른 사람이 되어주길 바란다. 사랑하는 아버지로부터]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출장 때마다 유서 남기기도
업무상 해외출장이 많은 회사원 강모(39)씨는 외국에 나갈 때마다 조그만 봉투를 아내에게 맡긴다. 아내와 아들을 데리고 해외여행을 갈 때는 처가나 친가에 이 봉투를 맡긴다. 이 봉투 안에는 불의의 사고로 강씨 부부가 사망했을 때를 대비한 여러가지 해야 할 일들을 적혀 있다고 한다.
ꡒ나는 죽음 이후의 삶을 확신하기 때문에 ꡐ죽음은 단지 삶의 형태의 변화일 따름ꡑ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죽음 그 자체에 대해서는 별로 두려움이 없다. 다만 죽음에 이르는 긴 투병 과정이나 사후(사후)에 발생할 가족들의 고통이나 괴로움이 두려울 따름이다. 그래서 그런 것을 최소화시켜주려고 이런 것을 만들었다. 해외출장에서 혹시 사고나 질병으로 사망하거나 아니면 제 정신으로 아내를 만나지 못할 경우를 대비해서다.ꡓ
강씨는 이 봉투 안에 네 가지가 들어있다고 공개했다. 그 네 가지는 아내와 아들에게 전해주는 간단한 메모 유서 비록 얼마되지 않지만 개인 비자금의 소재지를 비롯, 자신의 죽음 이후 집안의 경제적 문제를 어떻게 처리해나가야 할지에 대한 지침 비상사태가 발생했을 경우 반드시 알려야 할 연락처(친척, 회사, 친구, 카드 회사 등) 평소에 ꡐ미안했다ꡑ는 의사를 전해야 할 분들의 이름과 전화번호이다.
강씨가 무사히 해외출장에서 돌아오면 이 봉투는 밀봉된 그대로 강씨의 서랍으로 돌아온다.
30대에 이미 유서를 쓰기 시작한 강씨는 매우 특별한 경우지만, 올해 들어 우리 사회 일각에서는 유서 쓰기 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각계각층의 명사들을 중심으로 벌어지고 있는 이 운동은 물론 임종을 앞둔 유언장은 아니다. 그러나 유서나 유언을 금기시했던 과거와 비교하면 이것만으로도 놀라운 변화이다. 정신과 의사 이시형씨, KSS해운 회장 박종규씨, 연세대 교수 노정선씨, 목사 김항안씨, 한국수양부모협회 회장 박영숙(주한호주 대사관 문화공보실장)씨 등이 대표적 인물이다. 박종규 회장은 두 장의 유언장을 호주머니에 넣어두고 있다.ⓗ -월간조선에서 발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