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전현중 객원기자가 운영하는 '전현중테니스교실'에 한 회원이 작성한 글을 테니스코리아 네티즌들에게 도움되고자 보낸 내용이다.
윔블던 대회 주최측은 인근 여학교들에 공문을 보내야만 했다. 학생들을 좀 자제시켜 달라고. 록스타도 아닌 일개 테니스 선수가 여학생들에게 이처럼 인기를 끈 것은 전무한 일이었고 앞으로도 있을성 싶지 않은 일일 것이다.
오픈 시대 이후 테니스를 대중에게 가장 강력하게 어필 시킨 영웅은 누구보다도 비외른 보리이다. 그는 1970년대 중반 이후로 테니스 경기의 범위를 넘어서는 하나의 사회적 현상이 되었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언론의 항상적인 추적을 받아야만 했고, 그의 결혼식은 세계의 주요 사건으로 보도될 정도였으니까.
보리 이후로 남자 테니스 선수로 대중적인 인기를 끌었던 경우는 보리스 베커나 존 매캔로, 안드레 아가시 정도를 들 수 있지만 이들은 보리의 인기 수준에 비할 바는 전혀 되지 못한다.
그는 인기를 끌기 위해 많은 말을 할 필요가 없었다. 사실 말을 많이 하려고 해도 당시에는 영어가 서툴었던 관계로 쉽지 않았겠지만. 그의 인기를 증명해 주는 것은 당시 그가 스포츠 선수 사상 (당시 모든 스포츠를 통털어서) 최고의 광고 수입 기록을 연일 갱신했다는 사실이다.
테니스가 원래 점잖고 보수적인 운동이라서 운동복도 하얀 색이어야만 했고 운동복에 광고를 하는 것도 엄격하게 통제되고 있었으나 보리의 옷에 글자 몇개 새겨 넣으려고 업자들은 항상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이유로 그가 이렇게 사람들을 열광시킬 수 있었던 것일까?
긴 금발 머리. 테니스 선수로서는 그다지 크지 않은 외소해 보일수조차 있는 체격. 미끈하게 잘 빠지기는 했지만 안짱 다리. 수줍고 내성적인 성격. 사람마다 견해가 다를 수는 있지만 내가 보기에는 최소한 그의 외모가 그의 인기의 주된 이유는 아니었다.
그가 남녀를 막론한 인기를 구가했던 이유는, 주관적인 생각이니 장담은 못하지만, 혹 그가 풍기고 다녔던 모순적인 천재의 아우라 혹은 분위기 아니었을까?
사실 그는 좀 모순적인 구석이 많은 사람이었다. 우선 사람들로부터의 인기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점점 더 자신 속으로 숨으려 들었다. 당시 테니스계의 대표적인 선수였으면서도 테니스 관료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는 1년에 4개월은 반드시 철저히 비밀스러운 휴식을 취하기를 원했고 대부분의 경우는 이를 관철시켰다. 아마 호주 오픈은 이 휴식 기간에 끼어있었던지 74년 한 번 참가한 것을 제외하고는 은퇴할 때까지 다시는 참가하지 않는다.
테니스 코트에서도 모순은 여지없이 드러난다. 동시에 우승하기 가장 어려운 그랜드슬램 대회 두개를 꼽으라면 아마 롤랑가로스와 윔블던일 것이다. 하지만 그는 3년 연속 롤랑가로스와 윔블던을 우승했다. (1978-80).
그가 출전한 나머지 한 그랜드슬램 대회인 US오픈에서 이 기간동안 받았던 성적은 준우승, 8강, 준우승이다. 이 뿐이 아니다. 단지 3년 연속 두 대회 동시 우승 기록을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는 두 대회 모두 역사상 가장 압도적인 챔피언으로 남아있다. 롤랑가로스 6회 우승(4연속 우승 포함), 윔블던 5연속 우승이 바로 그것이다.
코트에서의 그의 별명은 미스터 아이스 혹은 아이스 보그이다. 그는 자신의 불같은 투지와 근성을 굳이 얼굴 표정으로 나타내거나 고함으로 나타내지 않았다. 그와 동시대의 선수이던 코너즈나 매캔로는 사람들의 비난을 받을 정도로 감정 표현이 많았던 반면 보리가 코트에서 보여준 얼굴은 딱 한가지였다. 무표정.
그의 승부 근성은 속으로는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있었는지 모르지만 겉으로는 오직 그의 발과 숨소리를 통해서만 확인할 수 있었다. 그는 어떤 공도 포기하지 않는다. 그는 이기고 있을 때나 지고 있을 때나 한결같이 공 한개에 목숨을 걸기라도 한 사람처럼 공을 ?았다. 불끓는 승부 근성과 냉혹하게 보이기조차 했던 무표정 또한 충분히 모순적이라 할 만하지 않을까.
▲ "winner loses all" - 보리의 평전 부제(출처: 타임즈) 70년대 후반 "스웨덴의 대표적인 수출품 세가지는 볼보자동차, 가수 아바, 테니스선수 보리이다".라는 말이 유행할정도로 보리의 인기는 상상을 초월했다. 경제적 어려움으로 윔블던 우승 트로피들과 우승 당시 사용했던 라켓들을 런던 경매에 내놓았다가 철회하기도 했다.
그는 18세 때부터 성인 무대에 본격적으로 뛰기 시작해서 25세 때 실질적인 은퇴를 한다. 8년의 짧은 커리어. 그리고 이 속에서도 매년 4개월의 휴가. 그렇지만 그는 62회 우승 기록을 지니고 있다. 샘프라스가 14년에 걸쳐 거둔 64회 우승 기록과 횟수로도 그리 차이가 나지 않는다. 굳이 오늘날의 선수와 비교해 보자면 보리가 8년 동안 거둔 기록은 페더러가 데뷔 후 현재까지 약 7년간 거둔 기록의 딱 두 배 정도 되는 기록이다. (잊지 말것! 보리는 매년 4개월 휴가를 즐겼다.). 이정도면 보리가 얼마나 압도적인 커리어를 보냈는가를 충분히 감 잡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이게 이야기의 끝이 아니다.
오픈 시대 이후로 무실 세트 우승이 나온 경우는 총 5회인데 이 중 3회가 보리의 것이다. 1회전부터 결승전까지 단 한 세트도 내주지 않고 우승하는 것 자체가 수십년간 5번 밖에 없었는데 이 중 3회가 보리가 작성한 기록인 것이다. (76 윔블던, 78, 80 롤랑가로스).
단일 대회 우승 중 가장 높은 게임 승률을 보여준 것도 역시 보리이다. (보리는 이 분야에서 1,2위의 기록을 지니고 있다). 게임 승률이 높다는 말은 상대의 서비스 게임을 많이 잡았다는 말일 것이다. 보리는 1978년 프렌치 우승 당시 79.9%의 게임 승률을 보였으며, 80년 우승 당시 76.8%의 승률을 보였다.
두 기록은 공히 역대 1,2위 기록이다. 참고로 이 분야에서 아가시의 기록(역대 5위)은 2003 호주 오픈 우승때의 71.6%이며, 페더러의 기록은(역대 38위) 2004 호주오픈 우승때의 65.2%이며, 샘프라스는 94년 윔블던 우승 때 64.2%를 보였다.
흔히 아가시를 최고의 리턴이라고 격찬하곤 하는데 보리의 통계를 살펴보면 과연 그런 말이 가능할지 의문이 든다. 아가시의 5위 기록은 탁월한 리턴 기술과 이론 때문이라고 하더라도, 보리의 터무니없는 기록은 그의 발과 근성 그리고 천재성 말고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보리는 심지어 윔블던 대회에서도 멀찌감치 서서 있다가 강서브들을 받아넘기는 다소 불가능해 보이는 전술을 사용하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윔블던 우승자 게임 승률 역대 2위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윔블던 게임 승률 역대 1위는 매캔로). [단일 그랜드슬램 대회 우승 당시 총 게임 승률 79.9%는 정말 터무니 없는 기록이다. 이를 페더러의 최고 기록인 65.2%와 비교해 보면 그 차이를 알 수 있다. 단순하게 환산해 보면 (오해의 소지가 있기는 하지만) 보리의 기록은 매 세트마다 평균 6: 1.5 의 승리를 기대할 수 있다는 말이며, 페더러의 기록은 평균 약 6:3으로 승리를 기대할 수 있다는 소리다.]
한 때 마이클 창이 건전지 선전에 나와서 건전지하고 지구력 내기를 하던 장면을 기억할 것이다. 터프 가이의 원래 뜻이 '질긴 놈'인데 테니스 계에서 이 표현을 차지할 수 있을만한 사람을 꼽으라면 코너즈, 보리, 마이클 창이 될 것이고 이 중에서도, 내 생각에는, 보리가 첫 손가락이다. 한때, 보리의 스태미너가 너무 초인적이어서 스포츠 과학자가 그의 심박수를 검사했더니 40회 언저리가 나왔더라는 풍문이 그럴싸하게 돌기도 했다. 보리야말로 원조 건전지맨이라 할 만하다.
윔블던 5연패와 프렌치 6회 우승은 단지 발과 근성만으로 이뤄질 수는 없는 대기록이다. 당연히 보리는 최고의 스트로크를 선보였다. 보리가 현대 테니스 기술 측면에서 지니는 의의는 아마 톱스핀의 위력을 사람들에게 깊게 각인시켜 줬다는데 있을 것이다. 보리 이전에도 톱스핀을 사용한 선수들이 있었지만 보리만큼 톱스핀을 최강의 무기로 사용한 선수는 없었다. 보리는 헤드 크기가 80인치 내외인 구형 나무 라켓을 사용해서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만든 천재였던 것이다. 물론 오늘날에는 톱스핀이 스트로크의 교과서가 되었지만.
보리를 묘사할 짧은 단어로 떠오르는 것은, 내 머리속에서는, 뜨거운 얼음, 천재의 오만, 모순이다. 천재만이 모순을 몸으로 통일시킬수 있다면 보리야말로 진정한 테니스 천재였다.
작성자 프리랜싱
자료제공 전현중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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