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나가던 인천시청 사무관 생활 접고,
영월에 최대 규모 조선민화박물관 차린 오석환 관장
김삿갓면 와석리 김삿갓계곡 기슭에는 오석환(58) 관장이 설립한 국내 최대 규모의 조선민화박물관이 있다.
눈부신 겨울, 저 혼자 풍경이 되어 춤추는 계곡 사이에 미송으로 지은 박물관은 솔향이 가득하다.
영월읍에서 30여분 거리인 이 깊은 산골에 박물관이 있는 것도 놀랍지만 전국 각지에서 연간 4만여명의 관람객들이 입장료 4,000원을 내면서까지 그림을 보기 위해 찾아오는 것은 더 신기하다.
■ 민화, 김삿갓을 만나다
오 관장의 삶은 기인열전에 나올 법하다. 수백억원대의 가치를 호가하는 민화 4,000여점을 구입해 소장하고 있지만 늘 그림을 찾아 떠돈다. `무소유의 삶'은 일찌감치 버린 셈이다.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사는 그의 삶은 민화처럼 자유롭다. 김삿갓이 묻힌 강원도 깊은 산골에 터를 잡고 전 재산을 털어가며 우리 문화유산인 민화를 세계에 알리겠다는 그의 당찬 포부는 그래서 몽환적이다.
오 관장이 인천시청 사무관 생활을 접고 김삿갓계곡에 민화박물관을 차리겠다며 들어온 것은 1998년. 이때 그동안 쌓은 부와 명예도 덤으로 벗었다. 산속 생활을 하며 직접 건물을 지어 2000년 7월29일 박물관을 개관했다.
김삿갓계곡과의 만남은 운명이었다. 친구가 와석리 미사리골에 농촌주택을 갖고 있었다. 와석리는 난고 김삿갓 시인의 방랑벽을 잠재운 곳으로 그의 무덤이 있다. “5월에 휴가를 내 찾아와 보니 계곡에 흐르는 투명하고 맑은 물이 너무 좋았어요. 계곡사이로 빨간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죠. 가까이 가서 보니 멍석딸기였어요. 집사람이 이런 곳이라면 나도 살 수 있을 것 같다고 해 18억원을 들여 땅을 사고 박물관 건물을 지었죠.” 민화박물관의 시작이었다.
민화와의 인연은 그의 취미벽에서 시작됐다. 인천공고와 방송대 행정학과를 졸업한 그는 공직생활중 술을 너무 좋아해 건강이 극도로 나빠졌다. 일주일에 2~3일은 밤새 술을 마시느라 만성 위궤양이 생겼다. 아내가 술을 끊어야 살수 있다며 취미생활을 권했다. 처음에는 분재를 시작했다. 한 8년간 분재에 빠져들어 수집하다 보니 수석이 눈에 들어왔다. 연출을 해야 하니 고가구에 눈이가고 고서화랑을 드나들게 되면서 민화를 접하게 됐다.
“한 번 느낌이 오면 헤어나오지 못하는 성격이에요. 고가구점을 드나들다 어느날 우연히 작호도(鵲虎圖)라고 하는 까치와 호랑이 그림을 보게 됐습니다. 주인이 의미를 설명해 주는데 운명처럼 다가오는 느낌이었습니다.”
민화병이 시작된 것이다. 이때부터 전국 고물상과 고서점을 드나들며 본격적인 수집에 나섰다. “지금까지 모은 민화는 단 한 점도 판 일이 없습니다. 돈이 된다고 생각해 본 적도, 내 것이라고 생각한 적도 없습니다. 그냥 민화가 좋을 뿐입니다.”
민화에 빠지자 몇천만원을 호가하는 작품도 밥을 먹듯 구입했다. 집안은 사다 모은 민화천지였다. 부인이 인천서구에서 가장 큰 한우식당을 운영해 먹고살 걱정이 없었던 것도 민화병을 부채질했다. 과감히 회사를 그만둔 계기도 됐다.
■ 그림 찾아 삼만리
한창 잘나가던 40대 사무관이 직장을 그만두고 산속에 들어와 박물관을 짓겠다고 하자 그를 아는 모든 사람은 이상한 듯 쳐다봤다. 직장을 그만둘 때 동료들은 “언젠가는 후회할 거다. 박물관은 은퇴 후 열어도 된다”며 뜯어말렸다. 그러나 민화에 푹 빠진 그의 마음을 돌리지는 못했다.
오 관장이 가장 아끼는 그림은 채용신(1850~1941년)이 그린 삼국지연의도(三國志演義圖)다. 총 8폭으로 한폭의 그림이 가로 2m 세로 1.9m나 되는 대작이다. 1999년 가을 인천에서 업자 소개로 샀다. 민화를 처음 본 순간 그는 전율했다. 두말 않고 4억원을 줬다. 그러나 표구를 해주겠다는 친구가 그림을 들고 잠적했다.
그림을 찾아 온 사방을 돌아다닌 끝에 사채업자에게 3억원에 저당이 잡혀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친구가 그림을 담보로 돈을 빌린 뒤 잠적한 것이다. 다시 3억원을 주고 그림을 되찾았다. 친구에게 배신당했다는 분노보다는 그림을 되찾았다는 안도감이 더 컸다.
삼국지연의도는 명나라 나관중이 지은 삼국지연의를 그린 그림이다. 이 그림은 조선이 망하고 일제 통치가 시작되던 1912년에 제작됐다.
“채용신은 연예인 채시라의 5대조입니다. 조선 말기에서 일제강점기에 걸쳐 초상화가로 이름을 떨쳤죠. 전라도 완산군에서 작품 활동하던 중 왕의 초상을 그리는 어진 도사에 발탁되었습니다. 삼국지연의도는 아마 고종황제가 관우 신앙의 도움을 받아 일제에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채용신에게 제작하게 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오 관장은 최근 삼국지연의도를 국가보물로 지정하는 작업을 추진중이다. 전문가들의 평가로는 한 폭당 최하 15억원은 호가한다고 하니 100억원이 넘는 보물인 셈이다.
그가 수집한 작품 가운데 서포 김만중의 소설 구운몽의 내용을 그린 병풍 구운몽도(九雲夢圖)도 빼놓을 수 없는 명품이다. 원래 10폭이었던 것으로 추정되지만 현재는 8폭만 남았다. 1997년 소더비 경매에서 1억8,000만원을 들여 구입했다. “조선시대 왕실 유물로 추정되는 구운몽도가 영국 소더비경매장에 나왔다는 소식을 들었죠. 상태도 좋았습니다. 직접 갈 수 없어 경매대리인에게 `얼마를 줘도 좋으니 구해 달라'고 부탁해 사들였습니다.”
민화박물관에는 눈이 번쩍 뜨이는 한국과 일본, 중국의 `19금' 춘화도(春畵圖) 200여점도 있다. 성인 관람객들이 `좀 더 재밌고 자극적인 그림이 없냐'고 해 그동안 수집한 춘화도를 전시할 별도의 춘화방을 마련했다. 양반, 기생, 하인, 하녀, 노부부, 여성 동성애 등 등장인물도 다양하고 체위도 요사스럽다. 그림의 배경도 안방, 사랑방, 마루, 마당 등 다채롭고 농밀하다.
“조선시대 춘화도는 당시 플레이보이 잡지이기도 했지만 양갓집 규수가 시집갈 때 혼수에 넣어 보냈던 성교육 지침서였죠. 풍속화의 대가인 김홍도와 신윤복도 춘화를 많이 그렸습니다. 성도 삶의 일부분으로 본 거죠.”
■ 민화 대중화의 꿈
그의 말은 거침이 없어 재밌다.
“민화는 자유입니다. 조선시대 서민 생활상과 정서가 고스란히 밴 민속화죠. 작자 미상의 그림, 낙관 없는 그림, 격이 낮은 그림, 창의성이 부족한 그림이라는 이유로 홀대받던 그림들이지요. 이는 엄격한 장중함을 추구하는 궁중화나 격조를 지향하는 사대부화와는 전혀 다른 세계죠.” 그는 2000년에 우리나라 최초로 민화작가 양성을 위한 전국민화공모전을 시작했다. 박물관 설립과 함께 민화 대중화를 위해 나선 것이다. 수상한 작품들은 박물관에 별도의 전시실을 두어 공개하고 있다.
영월에는 박물관이 20개가 넘는다. 조선민화박물관은 그중 가장 먼저 해설을 시작했다. “박물관을 연 이듬해, 관람객 중 한명이 볼 것도 없는데 왜 돈을 받느냐며 시비를 걸었죠. 써 붙여놓은 그림 설명에 실감을 못 한겁니다. 이때부터 `그래 보는 눈이 없으면 가르치자. 관람객도 민화의 뜻은 알아야지'하는 생각에 해설을 시작했죠.” 오 관장은 관람객이 몇 명이 오든 연중무휴 해설사를 두고 그림을 설명한다.
“민화는 우리 선조의 꿈을 담은 뜻 그림입니다. 부자가 되고 싶은 꿈, 오래 살고 싶은 꿈 등 모든 것을 담은 뜻 그림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태어나서는 모란병풍 앞에서 백일잔치와 돌잔치를 하고 효행도 앞에서 천자문을 외웠으며, 화려한 화조 병풍 밑에서 설레는 첫날밤을 보냈습니다. 나이 들어서는 십장생도 앞에서 손자 재롱을 즐겼고, 죽어서는 사당도를 통해 제삿밥을 받아 먹었어요. 삶의 시작부터 사후까지 민화와 함께 한 것이지요.”
현재 영월박물관협회 회장을 맡고 있는 오 관장은 박물관의 관광자원화에도 앞장서고 있다. 이곳저곳 손벌리는 것이 구차해 보여 과거에 합격해 출세한다는 뜻을 담은 어변성룡도(魚變成龍圖)를 수험생용 부적으로 만드는 등 민화를 활용한 문화상품을 꾸준히 개발하고 있다.
그의 민화사랑이 깊어지는 만큼 집안의 재물도 사라졌다. 2010년에는 사들인 그림값만 7억6,000만원이나 됐다. 돈만 생기면 그림을 사들이느라 가지고 있는 부동산도 다 팔았다. 빚만 수십억원이 쌓였다. 그는 그래도 행복하다.
“기왕에 이런 좌판을 벌여났으니 많은 사람이 구경 오도록 하는 것이 꿈입니다. 사람들은 왜 이런 일을 하느냐고 묻지만 선택의 문제겠죠. 인생을 즐기다 보면 이것은 못합니다. 저는 좋은 작품을 만나면 반드시 예의를 지킵니다. 너의 그림이 세상에 진가를 발휘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다짐합니다. 다행히 딸 슬기(32)와 아들 솔길(31) 둘 다 대학원에서 미술사를 전공하고 있어 민화 보존에 대한 맥은 끊기지 않을 것으로 기대합니다.”
남들은 이해를 못 해도 분명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 있다. 모두가 똑같이 넓은 길을 가도 누군가는 좁은 길을 걸어야 한다. 그는 “누군가가 해야 할 일이라면 고통과 역경이 따를지라도 자신이 하겠다”며 박물관을 찾은 길손들을 배웅했다.
영월=김광희기자 kwh635@kwnews.co.kr
사진설명=◇인천에서 약 20여년간 공무원 생활을 한 영월군 김삿갓면 소재 조선민화박물관 오석환 관장은 취미로 민화 수집을 시작했다. 영월에 자리를 잡은 이후 수집품들을 모아 대한민국에서 유일한 조선민화박물관을 개관했다. 소장품 중 채용신의 `삼국지연의도'는 감정 가격이 무려 100억원나 된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오 관장이 박물관 내 병풍으로 제작된 민화 작품을 설명하고 있다. (사진 위) 영월=오윤석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