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날씨는 대체로 꾸무리한데 오늘 아침은 드물게 화사하니 맑다. 40년 전 기억을 더듬어 아라 가야의 본산 함안을 가기로 했다.
예전처럼 자가용도 없던 시절처럼 구포역에서 무궁화 열차를 타고 느릿느릿 추억 여행을 해보기로 한 날이다.
야트마한 산성이 있고 조선시대 조성된 고풍스런 정자도 운치 있으려니와 버드나무 휘드러진 주변 풍경이 멋진 곳이다 함안들 자체가 저지대라 산성 자체도 높지 않아 산책 삼아 나서기에도 무리가 없다.
무진정은 조선 초 생육신 조여를 기리는 손자 조삼의 후손들이 조상의 뜻을 기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여는 계유정난 때 정식으로 생육신으로 추존된 바는 없지만 학계에서는 그에 준하는 것으로 보고 있는 인물이다.
정자 위쪽 집수지에서는 통일신라시대 목간이 여럿 발굴된 곳으로 매스컴을 장식한 곳이며 그 이전엔 아라가야의 본산지로 과거엔 의령이 되려 함안의 속현이었던 적도 있었다
주변을 휘휘 두르고 삼면이 뷰로 트인 2층 카페에 앉았다. 산 더 깊숙한 곳으로 스며든 이를 거기서 기다릴 작정이었다
자리에 앉자 갑자기 카페 창밖이 짙고 텁텁한 안개로 덮였다 맑고 창창했던 날씨에 웬 안개인가 싶어 주변을 두리번거렸지만 날씨는 여전히 맑았으나 날 에워싼 근방만 안개지천이었다.
기이한 일이다. 주문한 차를 마시려 잔시울에 입술을 대는 순간 떠올랐다 40여년 전 이곳 무진정에서 읽었던 책이 김승옥의 소설 '무진기행'이었던 것을.
소설 공간적 배경은 순천만 대대포였으나 이 소설을 읽었던 곳 무진정만 부각돼 황량한 겨울 들판만 그려졌으며 끝없이 밀려오는 적의 무리같은 안개가 떠올랐던 것이다.
"여행을 가면 반드시 읽고 싶은 한 권의 책을 지참하세요 책꽂이에 꽂힌 그 책만 보면 여행지 향내가 묻어나올 겁니다"
강의 중 수강자들에게 자주 하던 말이다.
그런데 평소 내가 하던 말과 다른 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여행했던 곳을 다시 가면 그 때 읽었던 책이 떠오르다니!!
안개는 40년 그 때 묻혔던 무진기행의 안개였던 것이다.책과 여행과의 역학 관계를 두고 이전에 했던 나의 말은 새삼 고쳐져야한다.
"여행을 가고자 한다면 한 권의 책을 지니고 가세요 여행지에서 돌아온 후 그 책엔 그 곳의 내음이 배여있을 겁니다 아울러 그 곳에 다시 긴다면 언제든 그 곳에는 그 때 읽었던 책 한 권이 되살아나 당신에게 걸어와 말을 걸겁니다."
오늘 무진정에서 읽은 은희경 소설은 또 언젠가 이 곳에서 온 내게 어깨를 툭툭 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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