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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암 성자 李空 소개 하고 싶은 것
2009/03/15 19:57
http://blog.naver.com/mamuli0/120065182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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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월 15일 오후 2시에 전남 화순군 도암면 등광리 이공 기도 터에서 67주년 추모 모임이 있었다.
실천신학자 박근원씨가 기독교 사상지에 쓴글을 옮겨본다.
'한국 개신교 영성의 뿌리 어느 면으로 보나 주류를 이루고 있는 신앙생활의 표출은 이세종 이현필로 이어지는 신앙생활의 운동이었다. ...이 분들은 전형적인 한국 사람으로서 외부의 신학적인 영향을 거의 받지 않고 다만 성서의 예수 그리스도를 그대로 받아 들이면서 체험한 신앙적 영성의 소유자들이었고 그들의 영성이 그리스도교 전통의 영성 대가들의 신앙생활과 맥을 같이 한다는 점에서 주목할만 하다.'
이세종이 남긴 유산이라고는 가마니 한 장도 없었다. 일생 사진 한 장도 안 찍었다. 추운 겨울 언 땅을 파고 그들은 스승을 땅에 묻었다. 그러나 거기에는 그의 껍데기인 육신만 땅에 묻혔을 뿐 그의 혼과 얼은 제자들의 가슴에 묻혀 한국 기독교의 토착적 영성의 뿌리가 되었다. 후에 맨발의 성자라 불리었던 이현필을 비롯한 그의 제자들의 공동체인 동광원이 바로 그것이다. 이세종의 운동을 이현필은 조직과 운영으로 정인세는 이 운동을 서울로 끌어 올리는 중추 역할을 하였다. 그 영향으로 김병로와 같은 이는 대법원장으로 있을때 판결을 내리기 전에 먼저 기도하고 성경 위에 두 손을 얹고 판결을 내렸다고 한다. 이세종의 영향을 받은 이로서는 전 검찰총장 원택연 장로가 있고 정치가로서는 장면과 김상돈이 있다. 학계에는 전남대 농대 교수인 김준과 명예교수인 신귀남이 있다. 철학자로는 유영모가 있고 사회 운동가로는 현동완 YMCA 총무가 있었다.
한국 기독교 백년사에 이세종 선생 같은 독특한 인물은 없었다. 청빈의 길 사랑의 길 순결의 길 초월의 길 고난의 길등 그것을 생명처럼 강조하며 몸소 그렇게 산 사람도 없었고 철저한 자기비움을 통해 자기완성에 이르려 애쓴 인물도 드물다. 우리는 이세종을 통해 고난의 예수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살다가 간 비천한 예수 청빈의 예수를 본다.
'주여 나는 당신 밖에는 아무 것도 원하지 않습니다.' 라고 기도한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 처럼 이세종은 요란한 대로변 가시밭에 한 송이 백홥화 고요히 이름 없이 지나갈 고독한 들꽃으로서의 짧으나 굵은 삶을 마쳤다.
[출처] 도암 성자 李空|작성자 연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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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제목 : ‘도암의 성자’ 고(故) 이세종 선생 74 - 조회
- 작성자이름 : 이훈영 2007/02/20 - 등록
** 하루아침의 깨우침, 모든걸 나누고 비웠다
- ‘도암의 성자’ 고 이세종 선생…60여년 지나도 큰 빛 -
[한국 기독교 120년 숨은 영성가를 찾아… 개신교가 우리나라에 전해진 지 120년이 지났다. 특히 올해는 1907년 1월 평양에서 일어난 회개운동이 들불처럼 번지면서 개신교가 급격히 우리나라에 뿌리내린 지 꼭 100년이 되는 해다. 개신교의 토착은 이 땅을 세계 종교·정신문명사에 독특한 위치로 부상시켰다. 우리나라를 유·불·선으로 대표되는 동양 종교들과 기독교가 비슷한 세력으로 양립해 조화를 이루는 세계 유일의 나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개신교는 지금 ‘부흥’과 ‘전도’, ‘성전 건축’ 등 외형 확장을 위한 구호가 가득하다. 그러나 초기 개신교는 유교가 기득권의 이데올로기로 바뀐 뒤 핍박받고 소외당하던 여성, 노약자, 빈자, 상민, 장애인, 고아 등 약자들에게 구원의 빛이었다. 그것은 봉건의 땅을 깨운 정신 혁명이었다. 그런 정신 혁명은 말보다는 행동, 승리보다는 사랑, 외형보다는 빛으로 사람들의 가슴을 울린 ‘숨은 예수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 시리즈는 동서양 어디서도 찾아보기 쉽지 않은 이 땅의 기독교 영성가들을 통해 한국 현대사의 주요 버팀목이 된 ‘토착적 기독교인상’을 재발견하기 위해 마련했다.]
전남 화순군 도암면. 천불천탑 이야기가 전해오는 운주사가 가까워오자 왼쪽에 올림픽 성화 같은 모습의 개천산이 우뚝 솟아 하늘을 향하고 있다. 개천산. ‘하늘문이 열렸다’는 산이다.
그 산만을 바라보고 가니 맑은 물이 고요한 등광저수지가 거울처럼 개천산을 비춰주고 있다. 호수 옆 마을 사람들은 옹기종기 모여 음식을 나눠 먹다가 처음 본 나그네조차 손짓으로 불러 한입을 권한다. 바로 이세종(1880~1942)의 마을 사람들이다.
등광리 산길을 따라 개천산으로 한참을 오르니 외딴 산기슭에 조그만 집 한 채가 서 있다. ‘이세종수양관’이다. 수양관을 홀로 지키는 심상봉(71) 목사와 어린 시절 이세종을 보았던 이원희(75) 장로, 이세종의 삶을 좇아 독신수도자로 살아온 한영우(78) 장로가 그의 삶을 전해준다.
삼형제의 막내로 태어나 일찍 부모를 잃은 이세종은 남의 집 머슴살이를 했다. 가난에 한이 맺힌 그는 전답과 집을 마련해 남보란 듯이 살아보는 것이 소원이었다. 그래서 주위에 인정을 두지 않고, 자린고비로 살며 악착같이 재산만 그러모았다. 마흔살이 넘자 그는 어느새 100마지기에 이르는 전답을 지녀 마을에서 가장 큰 부자가 되었다.
하지만 그는 열여섯살이나 어린 아내와의 사이에 자식이 없었다. 자식을 얻기 위해 무당이 잡아준 터에 산당을 지었다. 산당을 짓던 목수는 기독교 신자였다. 목수는 일하면서 찬송가를 불렀고, 쉬는 시간엔 성경을 보았다. 이를 지켜보던 이세종은 어느 날 그에게 성경을 빌렸다. 그러나 그는 까막눈이었다.
마을 사랑방에 가 글자를 아는 사람에게 성경 첫줄을 읽어달라고 했다. 창세기 1장 1절이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였다. 그 한 구절을 새기며 개천산을 오르던 이세종의 눈에 하나님이 창조하신 창조물이 펼쳐졌다. 호수와 산과 나무와 풀…. 그 모든 것이 나와 다름없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나의 형제요, 천지가 바로 우리의 집이었던 것이다. 그는 갑자기 춤을 추었다. 펄쩍펄쩍 뛰는 폼이 영락없이 미친 사람이었다. 그러나 오직 ‘나’와 ‘내 것’에만 집착해 눈동자를 덮던 안개가 걷혀버려 눈이 훤해진 개안(開眼)과 개천의 기쁨을 억누를 길이 없었다.
그 기쁨으로 밤을 밝혀 글을 깨친 그는 성경의 정신을 꿰뚫었다. 고리대금업자처럼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챙겨온 그는 그 자리에서 모든 빚문서를 태워버렸고, 재산을 팔아 걸인과 빈자들에게 나눠주기 시작했다. ‘영원히 사는 것’을 알게 된 그에겐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자식에 대한 미련도 없었다.
모든 것을 버리고 비운 이세종은 그 뒤 빌공(空)자를 써서 스스로를 이공이라고 했다. 그가 철저히 부인한 것은 이름만이 아니었다. 육신을 가진 인간이 탐할 수 있는 재산욕, 명예욕은 물론 식욕, 색욕, 수면욕도 철저히 극복해 초월했다. 그때부터 아내를 누이로 대했고, 죽는 순간까지 잠자리를 함께하지 않았다. 결혼한 몸으로서 인도의 간디보다 앞선 금욕의 선언이었고, 그보다 더욱더 철저히 이를 지켰다.
하루아침에 탈속해버린 이공을 가장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그의 아내였다. 여전히 젊은 욕정을 잠재울 길이 없던 아내는 참다 참다못해 새서방을 얻어 집을 나가버렸다. 그러자 이공은 아내의 짐을 지게에 져 날라다주었다. 그리고 틈나는 대로 찾아가 “살다 살다 못 살면 언제든 다시 오라”고 말했다. 얼마 뒤 아내는 돌아왔으나 다시 다른 서방을 얻어 떠나갔다. 수년 뒤 다시 돌아온 그의 아내는 이곳보다 더 깊은 화학산 외진 산골에서 걸인처럼 살던 이공의 곁을 떠나지 않았고, 이공이 죽자 산나물을 뜯어 먹으며 3년간 시묘살이까지 했다.
이공이 개안 후 가장 변한 것은 자연에 대한 태도였다. 그는 “피는 생명”이라며 일체의 육식을 하지 않았다. 독에 빠진 쥐를 건져주고, 자기를 문 지네를 풀숲에 놓아주었다. 그는 혹여 개미를 밟을까봐 길을 걸을 때도 조심스러워했고, 나무와 풀이 꺾인 것을 보고도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 그런 모습을 한심하게 쳐다보는 사람들에게 이공은 말했다.
“세상엔 버릴 것이 없지라. 잡초만이 아니라 사람도 그렇지라우. 버린 돌이 집 초석이 되곤 한당께요.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어째서 그것을 모른다요.”
이공은 죽음이 가까워오자 석 달 동안 곡기를 끊었다. 화학산 골짜기에 찾아온 다섯 명의 제자들이 마른 장작처럼 말라 거지 옷을 입고 있는 그를 둘러메자 그는 “올라간다 올라간다 올라간다”고 춤을 추듯 노래하며 눈을 감았다. 큰 재산가였던 그가 죽을 때 남긴 것은 땅 한 평은커녕 옷 한 벌도 없었다.
그의 유산은 말이 아니라 오직 행동으로만 전도하라 했던 그를 따랐던 ‘맨발의 성자’ 이현필, 성녀 수락기댁, 소록도를 세운 나환자들의 아버지 최흥종 목사, 걸인들의 아버지 강순명 목사 등 수많은 제자들의 ‘삶’ 속에서만 살아서 숨쉬고 있었다.
조연현 / 한겨레 종교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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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훈련 보고 (이진용)
이진용 전도사
삼남연회 진주지방 합천 초계중앙교회
6월 19일(월) 벌교 강대인씨 댁
합천에서 순천(먼저 진주), 그리고 벌교를 향해 버스를 세번이나 갈아타고 설레임을 안은채 길을 떠났다. 동행할 팀과의 만남보다 3시간이나 먼저 도착하여 긴 시간을 더위와 싸우느라 지쳤다. 저녁 7시 30분 경 드디어 합류했다. 7명의 정주목회훈련 일정이 시작된 것이다.
첫 방문지는 강대인씨 댁으로 '우리원'이라는 곳이었다. 입구를 들어서며 마당을 가득 채운 항아리들, 황토흙집 등이 정겹게 다가왔다. 이어 저녁 만찬 후 이어진 대화 중에 새겨 들을 만한 것을 몇자 적어본다.
'의무적 농업교육이 필요하다' 알고 만 있는 것이 아니라 직접해 보는 것이 중요하다.'
'자라나는 시기에 우리 농산물을 먹어야 우리의 맛을 잊지 않는다.'
'얼마나 팔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좋은 쌀을 낼 것인가이다.'
'내 지역, 내 땅에 맞는 농사를 짓자.'
'하늘에서 농사를 짓는다. 하나라고 여길때 산다.'
6월 20일(화) 도암 이세종 기념관
아침 일찍 일어나 숨고르기를 하고 논으로 나섰다. 모내기에 들어가 3시간여를 땀내는 동안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땀, 바람, 햇살.... 내 안으로 들어와 하나가 되는 감각. 참으로 고마웠다.
점심을 먹고 다음 장소인 화순군 도암에 위치한 이세종 선생 기념관을 찾아가 심상봉 목사님을 뵈었다. 참으로 비탈진 언덕 위에 이공이 직접 명상하여 지낸 곳을 심 목사님께서 2년 전 부터 찾아와 지키고 계신 것이다. 긴 시간 대화의 출발은 '영혼의 대화'를 하자였다. 참 나를 찾아 하나님 앞에 서야 한다. 분주히 무언가를 한다며 움직이는 것은 내가 완성되지 않고서는 불질없다. 숙소는 이 공이 머물며 하나님의 뜻을 구했다는 어둡고 좁은 방이었다.
7명이 어깨를 부딪히며 간신히 잠을 청한 비좁은 곳이었으나 내 영혼의 공간은 넓어진듯 하였다.
6월 21일(수) 이세종 성지순례 및 동광원
7시 30분, 산행차림을 하고 일행은 이세종 님의 발자취를 찾아 심목사님과 화순 YMCA 김목사님의 안내로 길을 나섰다.
마당 바위, 각수바위, 수래기 집..... 오후 6시 까지 오랜시간이 걸려 따라간 길은 내 몸과 영혼을 흔들었다. 무엇이 이공을 이토록 거친 산속으로 이끈것일까? 또 지금 우리들을 이끌고 있는 힘은? 몸이 무척이나 지쳤다.
하지만 차츰 가벼워지는 내 마음을 느낀다. '이공의 묘'앞에서는 흘리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산을 내려와 도암 동광원, 이세종 님의 제자들이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두 언니들을 만났다. 언니.
6월 22일(목) 동광원
오전에는 김춘일 언니를 만나 귀한 말씀을 접할 수 있었다.
차목사님의 이야기로는 '언니'란 사람과 사람을 어질게 이어주는 사람이라 한다. 춘일언니에게서 흘러나온 말씀들....
" '묵상 -> 명상 -> 관상'에서 잘못하면 망상, 범뇌만 남는다."
"100년을 살아봐도 인생은 유치원, 연습장이다."
"복음은 극악 극선이 하나되는 것이다. " (오장로님)
"개체(나)의 완성이 우주의 완성이다." (이현필 선생의 좌우명)
"평안을 빌어줄 수 있는 실력을 갖추어라."
"가짜 젖꼭지"
"식색이 하나 --- 배부르면 성욕으로"
"말도 안되는 얘기가 이 공의 영성" -> 진리는 역설
"만물은 내 지체요, 인류와 이웃은 내 몸이다." (이공의 유언)
6월 23일(금) - 백운교회, 한마음공동체
충격.....
열정, 이성, 지혜 (빨강, 파랑, 노랑)
백운교회, 한마음 공동체에서의 세명의 목사님과의 만남에서 얻은 정리이다.
20여년의 남상도 목사님의 열정과 현 백운교회 담임 백 목사님의 차가운 이성, 그리고 기대 이상의 갈등을 , 날카로운 지적을 주신 오목사님.
그중에서도 오 목사님의 이야기로 정리해 본다.
"숨은 일꾼과 함께하는 리더가 되라."
"많이 앞서가지 말고 반 발짝만 앞서 이끌어 주고 가끔은 못 이긴척 어깨 동무도 하며 가 주면 좋을 것이다. "
"대중의 필요를 듣고 함께 가는"
"목회자가 있는 그곳이 어디든 관리할 줄 알아야 한다. "
"현장을 가지고 일하라."
"지역의 어른이 되어라."
6월 24일(토)
전주로 장이 선다고 한여 부안이 아닌 전주로 갔다.
소비자 정보센터 앞에서 유기농산물, 친환경 농산물을 펼쳐 놓고 길거리 홍보와 판매를 경험했다. 많은 사람들이 오지 않아 아쉬움을 남긴채, 정경식씨와 이덕자 한울생협 이사와 인터뷰 시간을 가졌다. 서로 이해 차이로 갈등이 있어 지금까지의 수고와 노력이 아쉽게 보였다.
이것이 현실에서 마주할 수 있는 경우라 하니 남 얘기가 아니었다. 이어 전주 한울 생협을 찾아가 매장과 공동체를 둘러 보았다. 평소 원하던 친환경 물품들은 정겨웠고 한울 생협의 활동이 소개된 사진들에 눈이 갔다. 이후 대전으로 자리를 옮겨 마지막 평가회를 가졌다. 많은 불편과 아쉬움도 깨끗이 사라지는 대화의 기산은 의미 있었다. 이번 1차훈련은 '나'를 돌아보는 귀한 시간이었다. 이제 남은 2, 3, 4차 훈련을 잘 준비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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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수기] 도암의 숨은 성자 李空 이세종의 영성 2008-08-24 07:56:29
◆ 목회수기(795)/이상호 목사
도암의 숨은 성자 李空 이세종의 영성
한국 개신교회에 때 묻지 않은 순수한 영성을 전해준 한국적 토착적 영성인 李空 이세종 선생을 소개한다. 그는 복음을 말로서가 아니라 삶으로 실천하고 증언한 한국적 영성의 뿌리와 같은 존재였다. 결코 그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러기에 1930년대의 조직신학자 정경옥은 이세종을 가리켜 ‘도암의 숨은 성자’라고 하였다.
출생과 예수 영접
이세종은 1880년 무등산 자락의 화순군 도암면 등광리에서 출생, 원래는 영찬이었다.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그는 3형제 중 막내로 가난한 형님 댁에 얹혀살았다. 그는 28세에 남의 집 양자로 들어가 머슴살이를 하였다. 드디어 머슴살이 10여년 만에 마을에서 제일가는 부자가 되었다. 100여 마지기의 논을 소유한 큰 지주가 되었다. 이런 이세종이 어찌된 영문인지 돌연 나이 40세에 예수를 믿게 된다. 그가 결혼한지 10년을 넘어서도 자식이 없는 것을 고민하다 병을 얻어 죽게 된 지경에 산골 동네에 미친 여자(?)가 나타나 “예수 믿어야 산당께! 예수 믿어야 살아!”하며 외치고 지나갔다. 다행이 무명의 전도인이 뿌리고 간 전도지 한 장을 구하였다. 예수를 자세히 알고 싶으면 성경책을 구해 읽으라는 말에 성경을 구해 독학으로 글을 깨우쳐 성경을 읽고 기독교인이 되었다.
예수 믿고 이세종은 “억조창생 만민들아! 다 회개하고 예수를 믿으라!” 며 미쳤다(?). 그리고 자식을 낳게 해달라거나, 집안이 잘되게 해달라고 비는 모든 것은 부질없는 것임을 깨달았다. 그에게 있어서 참된 복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의 삶을 본받아 가는 청빈과 자기희생, 그리고 사랑의 길이었다.
그는 어렸을 적에 남의 밭에서 오이 하나 따 먹은 것까지도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모두 갚아 주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이요, 내 것이라곤 하나도 있을 수 없다고 깨달은 그는 빚진 자들을 불러 모아 놓고 그들에게서 담보로 잡았던 집과 땅 문서들을 모두 불살라 버렸다. 그들의 채무를 탕감해 준 것이었다. 피땀으로 마련한 땅들은 구제에 써 달라고 면사무소에 몽땅 바쳐 버렸다.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구제한 선행을 고맙게 여겨 그의 선행을 기리는 송덕비를 큰 나무에 조각해서 마을길에 세워 주었다. 그러나 그는 “산 사람에 대해 무슨 비를 세웁니까?”하며 비를 없애달라 하여 파묻었다고 한다.
그는 밤이면 성경을 암송하고 낮에는 인근 마을의 처녀, 총각들을 모아다가 성경을 가르쳤다. 최흥종 목사가 그의 영향을 깊이 받았고, 노라복 선교사도 그를 지지했고, 강순명 목사도 그의 집회에 빠짐없이 참석했으며, 백영흠 목사도 늘 참석해서 감동을 받았다.
“파라 파라 깊이 파라. 얕게 파면 너 죽는다. 뿌리도 깊이 팔수록 좁다. 좁은 길이다. 깊이 파고 깊이 깨닫고 깊이 믿으라. 어설프게 파면 의심 밖에 나는 것이 없다.”며 가르칠 때 이세종의 강의를 제대로 필기한 이는 이현필 뿐이었다. 이현필은 스승 이세종의 정신을 그대로 따라 사는 영의 사람이 되었다. 공부 시간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음식을 먹지 않았다. “성경공부는 공사요, 음식 먹는 것은 사사다”라고 하였다.
李空이란 흔한 李公이 아니라 빌공(空)자로 철저한 자기부인의 정신이 들어있다. 그는 돈 들여서 지은 산당도 버리고 모든 소유도 버리고 도구박골과 각시바위 너머 깊은 산중에서 수도생활을 하였다.
구제하다가 당연하다는 듯 가버리는 거지를 보고 깨달았다. “오, 주님! 주님의 이름으로 구제한답시고 주님의 영광을 가로채려 하다니! 오, 내가 아직도 살아 있습니다. 아직도 이 죽을 놈이 살아있습니다.”
거지 철학 - 청빈생활
예수 잘 믿으려면 “빌어먹으라!”는 말도 했다. “예수 잘 믿으려면 거지 오장치 짊어지듯 믿으라. 물에 빠지듯 풍덩 빠져 믿으라!” 그는 예수를 믿고부터는 믿는 일에 아예 퐁당 빠지려 했다. 거지가 되려 하고, 남 보기에 미친 사람 같아 보이기도 하였다.
“도인은 화려해선 못 쓴다”는 영음을 세 번이나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거지복장에 맥고 모자를 쓰고 다녔는데 친한 어느 장로가 그 모자를 아궁이에 던져 불 질러 버렸다. 그리고 새 모자를 대신 걸어 놓았다. 이세종은 그 장로와 절교하고 그동안 그에게서 신세진 것을 돈으로 계산해 갚고 관계를 끊어버렸다.
이공은 거지에게 “입은 옷과 내 옷을 바꿔 입으면 어떻소?”하여 거지가 입던 다 떨어진 옷을 자기가 입고 자기의 새옷을 거지를 주니 이세종의 큰 몸집에 거지의 옷은 너무 작아 남 보기에 그야말로 우스꽝스러운 꼴이었다.
유영모 선생도 이현필과 함께 이세종이 살던 화순군 도암면 등광리를 둘러보고는 이세종을 성자라고 부르기에 서슴지 않았다고 한다. 유영모는 말했다. “성인이 무엇이냐? 물질에 빠지고 미끄러지는 나를 물질을 차버리고 깨끗해 보려는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박영호/다석 유영모(하), 150쪽)
청빈은 절제된 아름다움이며 삶의 미덕이다. 단순과 간소는 텅 빈 공의 세계이다. 텅 빈 충만의 경지이다. 모든 것을 포기할 때 진정으로 거기서 영혼의 메아리가 울린다. 다 텅 비었을 때 그 단순한 충만감 그것이 바로 하늘나라가 아니겠는가? 그래서 이세종은 이공(李空)이라 하였다.
이세종은 자비심이 강물처럼 넘쳤다. 걸음마다 눈물이었다. 자비 충만하여 걸음마다 눈물을 흘리면서 남의 영혼을 생각하며 하나님께 호소하였다.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끼치고 다니는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영혼이라고 말하면서 차마 먹을 것을 입에 넣지 못했고, 남이 죄를 짓는 것만 보고도 울었고, 남이 불행을 당하면 함께 울어주었다. 자기 속에 사랑이 없으면 그 집에 들어가지 않고 되돌아갔다.
그는 밥을 먹을 때도 땅바닥에 차려놓고 먹었다. 걸인들에게 일일이 상을 차려줄 수가 없어서 자기도 땅에서 밥을 먹는다는 것이다. 모든 생명가진 것들을 경외하고 넘치는 자비심으로 대하였다. 이나 빈대도 죽이지 않았다. 자기 집 구정물 통에 쥐가 빠지면 나뭇가지를 꺾어 사다리를 놔 주어 쥐가 도망치게 해 주었다. 자연과 인간을 포함한 온갖 생명에 대한 사랑, 여기에 이세종의 토착적 영성의 핵이 있다.
결혼생활 - 한국판 호세아
이세종이 30세 때 14살 짜리 시골처녀를 아내로 맞았다. 문순희는 무식하고 생각이 좁고 답답한 여자였다. 남매처럼 지냈다. 건강하고 무식한 아내는 참다못해 남편을 버리고 딴 남자에게 두 번이나 시집을 갔다. 아무 때든지 회개하고 돌아오라고 간곡히 타일러 주었다. 이세종은 구정물 세례를 받으면서도 부인을 향해 “예, 하나님을 잊어버리지 마시오. 살다 살다 못살겠으면 또 나를 찾아오시오!” 하고 간곡히 권면 하였다. 이세종은 참으로 호세아를 닮은 사랑의 성자였다. 이세종도 능주로 시집간 아내의 집을 또 찾아 다녔다. 한국판 호세아였다.
결국 문여사는 “나는 세상에 와서 그렇게 잘 믿는 남편을 만난 행복자이다.”하면서 감사했다. 자기 같은 여자가 좋은 남편 만난 덕에 예수 믿고 구원얻은 것을 감사하였다. 무차별 사랑의 무제약성은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고 사랑하는 삶으로 나타나 고멜과 같은 아내를 완전히 변화시키고 만 것이다.
임종 : 예수 믿는 길은 좁은 문이다
이세종은 말년에 보다 더 깊은 산으로 들어갔다. 깊은 산에 숨어 철저한 고독과 침묵 속에 살았다. 고독과 침묵은 모든 수도자들이 영성을 길러가는 두 가지 방편이다. 좁은 문이었다. 허리를 굽혀야 들어갈 수 있었다. 십자가를 지고 좁은 문을 들어가야 한다. 진리는 언제나 좁은 길이다. 이 세상에서 진리는 소수의 사람에게 환영받는다. 세속적 기독교는 넓은 문이다. 나사렛 예수의 길은 바로 이 좁은 길이다.
미이라 같이 마른 몸을 한 이세종은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만나기를 예비하라!”(아모스 4장12절)는 말씀을 읽게하고 입힐 수의를 새로 마련할 필요도 없고 늘 입고 있는 거지 옷 그대로 땅에 묻어달라고 부탁하고는 “올라간다! 올라간다! 올라간다!”하고는 숨져갈 때 아내가 통곡하니 “내가 예수님을 따라가는데 울어서야 되겠소!”하며 영원한 잠에 들었다. 63년의 지상생애를 마감한 것이다. 바로 1942년 2월이었다. 그의 혼과 얼은 제자들의 가슴에 묻혀 한국 기독교의 토착적 영성의 뿌리가 되었다. 이세종의 운동을 이현필은 조직과 운영으로, 정인세는 이 운동을 서울로 끌어 올리는 중추 역할을 하였다. 그 영향으로 김병로와 같은 이는 대법원장으로 있을 때 판결을 내리기 전에 먼저 기도하고 성경 위에 두 손을 얹고 판결을 내렸다고 한다. 전 검찰총장 원택연 장로, 장면과 김상돈, 김준, 신귀남, 철학자로는 유영모가 있고 사회 운동가로는 현동완 YMCA총무가 있었다.
이세종 선생같이 청빈의 길, 사랑의 길, 순결의 길, 초월의 길, 고난의 길, 철저한 자기 비움을 통해 자기완성에 이르려 애쓴 인물도 드물다. ☺
“주여, 나는 당신 밖에는 아무 것도 원하지 않습니다.” - 성 프렌시스 -
서부동산교회 최종욱 목사
무릎 꿇고 눈을 감아 보아라
눈 앞에 한 가닥 오솔길이 보인다
꼬불꼬불한 길
찔레와 잡초
억새풀에 덮여있는 길
자갈과 돌들 널려있는 험한 길
가는 사람이라고는 그림자도
보기 힘든 무척 외로운 길이다
우리도 ‘주님 가신 길이라면’을
노래하며 이 한줄기 길을 가자
주위에서 누가 뭐라고 하든
머뭇거리지 말고
엎드린 그 자리에서 흔들리지 말고
주님과 십자가만 갈망하고 사모하자
우리 마음에 감격이 오고
통곡이 올 때까지 밤을 새우자
이제 그만 밀실로 들어가서
주님과 사랑을 속삭여 보자
예수를 바로 믿는 길은 이것이다
이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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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속의 수도와 영성 운동 연구 :호남지방을 중심으로
저자명양홍석 학위수여기관감리교신학대 신학대학원 학위수여일2001 전공분야역사신학 문서유형석사학위논문 발행국가한국 발행언어한글 청구정보275.1 ㅇ231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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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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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제지
감사의 글
목차
I. 서론
A. "한국교회사속의 수도와 영성 운동"에 대한 문제 제기
B. 연구의 범위와 방법
II. 기독교 역사를 통해본 수도원 운동
A. 수도원 제도를 통해 본 수도생활의 특징들
1. 세계 기독교사를 통해 본 수도생활의 기원과 역사
1) 수도원의 기원
2) 수도원운동의 역사
B. 수도원 영성의 특징
1. 고행과 금욕
1) 금욕의 형태
2) 금욕의 동기
III. 호남지역의 기독교회사
A. 기독교 수용이전의 호남지역사
B. 호남지역의 기독교 수용
C. 수도원적 영성운동 형성
IV. '도암의 성자',이세종
A. 도암의 성자, 이세종
1. 도암의 지주
2. 이세종의 복음수용
3. ´이공´, 이세종
B. 이공의 토착적 영성
1. 자기 비움, 무의 신앙
2. 순결사상
3. 생명 외경의 정신
V. 동광원 운동과 이현필
A. 동광원운동의 모태
1. 이현필의 생애
1) 출생과 이세종과의 만남
2) 금욕적 수도생활
3) 생을 마감, 파계
2. 이현필의 사상
1) 순결사상
2) 고난사상
B. 동광원운동의 발전
1. 현동완, 정인세, 유영모와 이현필의 조우
2. 동광원운동의 발전
C. "한국 개신교 토착 수도원"으로서 "동광원"
1. 동광원(남원소재)의 설립 및 활동
2. 귀일언(광주소재)의 설립 및 활동
VI. 호남지방에 나타난 자주적 신앙운동가들
A. 오방 최흥종의 생애와 사상
1. 출생에서 나환자 구명운동까지
2. 나환자의 아버지 최흥종
3. 수도사적 삶의 여정
B. 영암 강순명의 생애와 사상
1. 강순명의 생애
2. 회심과 농촌계몽운동
3. 독신전도단과 강순명목사
4. 말년, 수도사적 삶
VII. 한국교회사속의 수도와 영성운동들에 대한 평가
VIII. 결론
A. 한국교회사속의 수도와 영성운동의 역사적 의의
B. 수도공동체운동으로서 한국적 영성운동에 대한 제안
IX.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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