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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권 1기 (1960 ~ 1961)
대통령이 된 윤보선은 구파의 당론에 따라 국무총리로 구파 출신 김도연을 지목했으나, 민주당 신파의 반발로 장면으로 교체한다. 8월 16일 윤보선은 구파의 집권계획을 따라, 구파인 김도연을 국무총리로 지목하였다. 8월 17일 인준 투표에서 김도연은 의원재석 224명 중 찬성 111표, 반대 112표, 무효 1표로 부결되었다. 18일 윤보선은 2차로 장면을 국무총리 후보로 지명하였다. 16일 표결에서 재석 225명 중 찬성 117표, 반대 107표, 무효 1표로 겨우 인준되었다.장면은 훗날 이일을 놓고 도의상 신파인 자신을 지명하는 것이 도의적인 태도가 아니었느냐고 비판하였다. 8월 26일 경무대에서 장면 국무총리 등 3부 요인과 각료들로부터 제63회 탄신일 축하 인사를 받았다.
내각출범 20일 뒤, 국무총리 장면은 개각을 단행하여 5명의 장관직을 구파로 교체했다. 그러나 윤보선은 내각책임제에 개입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으나, 내각인사에 개입 구파에게 준 자리는 빈탕이라고 비아냥댔다. 8월 경무대에서 생일 기념 축하 파티를 주관하였다. 파티에는 장면 총리 외에 윤치영, 윤치왕, 윤치창, 윤일선, 윤영선 등 일족들이 초청되었다.
1960년 8월 29일 이른 아침, 휴가 겸 민정시찰을 나갔다. 비서실을 통해 전갈을 전달하자 총리 장면을 비롯한 각료들이 서울역에 집결하였다. 관 1호차를 탄 윤보선 부부는 서울역에 도착, 8시에 특별열차 편으로 서울역을 출발하여 전국을 순회했다. 이 일이 정치권에 알려지자 '내각책임제인데 대통령이 각료들에게 전송 나오라고 지시한 것은 무엇이며, 이에 군말없이 따르는 장면은 뭐냐'는 비판이 나왔다. 이는 윤보선은 대통령직에서 월권을 한 것이고, 장면은 자기 밥그릇도 지키지 못한다는 비판이었다. 1960년 12월 30일 청와대를 경무대에서 청와대로 직접 이름을 개칭하기도 하였다.
10월 10일 장면 국무총리는 허정 과도수반 때 임명된 시도지사를 경질했다. 그러자 윤보선은 구파 입장을 대변하는 '유감' 성명을 발표했다.장면 내각에서 정치에 왜 관여하느냐며 비판하자, 윤보선은 국가적인 큰 잘못에 대해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말했다고 대응했다.60년 10월 12일 신정부수립 기념식에 참석하였다.
그동안 윤보선은 많은 사람들에게 무난한 인물로 비춰졌기 때문에 신파도 대통령직에는 윤보선이 적임자라 생각하였으나, 대통령이 된 뒤에는 전혀 다른 모습을 취하였다. 윤보선은 민주당 구파 정치인들을 청와대로 자주 불러들여 모임을 가졌다. 모임에서 장면 내각의 정책과 반대되거나 장면을 비난하는 성명을 내고는 했다. 장면은 청와대를 갖은 정략을 꾸미는 구파들의 참모본부로 여겼다.민주당 구파의 지도자였던 그는 제2공화국 정부가 각계에서 분출된 자유화 요구로 정권 초기 현상을 겪고 있을 때 당시 의원내각제 헌법 하에서 대통령은 명목상, 의전상 국가 원수임에도 불구하고, 공공연한 간섭으로 장면 정부에 다소 부담을 주었다. 나아가 1961년 5·16 군사정변 당시 이를 방조했다는 논란도 있다.
한편 그는 군통수권을 행사하려 하였다. 그러나 1960년 6월 15일에 제정된 제2공화국 헌법 61조 1항에 '대통령은 헌법과 법률이 정하는 바에 따라 국군을 통수한다.'라고 되어 있었으나 장면 내각 출범 후에도 내각은 법률을 정하지 않았다. 1960년 가을 윤보선은 비밀리에 대한민국 국군 통수권이 누구에게 있는가를 비밀리에 국방부장관실에서 의논하였다.
2월 27일 국토건설단 창단식에 국무총리 장면과 함께 참석하였다. 1961년 3월 윤보선은 장면에게 거국내각 구성을 제의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3월 23일 청와대 요인회담을 하였다. 3월 23일 대통령 윤보선은 장면에게 사퇴하라는 권고를 하였다. 그러나 장면은 나의 총리직은 헌법에 의해 보장된 직책이므로 사퇴할 수 없다고 받아쳤다.
장면 내각에서 민주당 신파 인사들만 채용한다는 불평불만이 터져 나오자 그는 국무총리 장면의 권한이던 인사권 문제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민주당 구파 인사들은 주로 그가 머무르고 있던 청와대 대통령 관저에 모였고, 신파 인사들은 국무총리 장면의 관저인 반도 호텔을 중심으로 모여서 각자 자파의 정책을 의논하였다.
4월 19일 4·19 혁명 1주기 추도식에 참석하였다. 장면내각은 그의 참견이 지나친 간섭이라 비판했고 그는 이를 대통령으로서 할 수 있는 충고라며 맞받아쳤다.
군사 정변 직후 청와대에 나타나 위스키와 소주를 찾는 군인들의 무례함을 질책하였다. 이때 바로 장도영 중장이 사과를 하여 넘어갔다.
5·16 군사정변 후 정변 당시 정변주체세력들의 계엄령 사후 추인과 정변지지성명 발표 요구를 모두 거절했으며, 매그루더 유엔군 사령관과 그린 미국 대리대사의 군사정변 진압을 위한 병력 동원에 대한 요구 역시 국군간의 교전과 이로 인한 북한의 남침을 우려해 거절했다. 그가 일면으로는 싸움을 피하기 위해, 다른 일면으로는 장면 내각에 대한 적개심 때문에 진압 행동을 거부했다는 분석도 있다.
1961년 5월 19일 햐야선언을 하였으나 5월 20일 번복하였다. 1961년 5월 19일 윤보선은 대통령직 사퇴를 발표했다. 그의 사퇴 성명은 오후 8시 30분 방송을 통해 공표되었다.
금번 군사혁명이 발생하면서 나는 무엇보다도 귀중한 인명의 희생이 없기를 바랐으며 순조롭게 수습되기를 희망하였습니다. 다행히 하늘은 우리를 도와서 무사하게 이 나라의 일을 군사혁명위원회의 사람들이 맡아서 보게 하였으며 국민 여러분이 또한 커다란 기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나는 지금 안심하고 이 자리를 물러나겠습니다. 아무쪼록 군사혁명위원회의 사람들은 그 소신과 충성을 다하여 이 나라를 발전시키고 이 국민을 하루속히 궁핍에서 건져내 주기를 바라며 나의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이 적극적으로 이에 협조해주실 것을 간곡히 부탁하는 바입니다.
윤보선의 사퇴발표가 있자 군정 측은 그의 사퇴를 만류하였다. 5월 19일 밤 박정희와 장도영이 청와대를 찾아와 윤보선의 사퇴를 만류했다.그러나 그 만류는 시늉이었다. 장도영에겐 윤보선이 좀더 필요했던 것 같으나, 박정희는 윤보선의 사퇴를 속 시원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때 사퇴를 고사한 일로 후일 민주당 신파 계열에서는 그가 군사정권에 협력했거나 내통, 또는 매수했다며 공격하였다.
결국 윤보선은 오후 6시 예정돼 있던 고별회견 대신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하야하겠다는 나의결정이 국제적, 국내적으로 영향이 크다 하므로 나라 일을 해친다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하여 만부득이 이 나라 형편을 생각하여 번의해야 할 것 같다며 하야를 번복, 번의 회견을 하였다. 1961년 6월 6일 국가재건 최고회의와 현충일 행사에 참석하였다.
이후 윤보선은 경제정책의 틀을 수립하고 정책을 추진하려 하였으나, 그를 명목상의 대통령에 앉히고 실권을 쥐려는 5.16 군부와 수시로 충돌하게 되었다.
군사정변 이후에도 1년 이상 대통령직을 계속 유지했으나, 정치정화법이 제정되자 정변주체세력과의 의견 차이로 결국 1962년 3월 하야했다.서중석에 의하면 '윤보선이 아무리 더 하고 싶어도 할수 없게 된 것이라고 했다. 하야의 배경에 관련되어서는 박정희의 구정치인 활동금지법에 반발했다는 주장도 있다. 퇴임후에는 안국동 사저에 칩거하였다.
윤보선은 대통령을 사퇴한 후 박정희 정권에 대해 맹렬한 비난을 퍼부었다. 박정희 정권에 대한 야당 공격의 선봉에 선 윤보선은 대통령(권한대행)과 공화당 의장이 집권을 연장하기 위해 나라를 팔아먹는 역적이라고 맹렬히 비난하였다. 1962년 6월 29일 반공유격전적비 제막식에 참석하였다.
1963년 3월 박정희가 군정연장을 발표하자, 윤보선과 허정은 각각 측근들을 데리고 산책데모를 하였다. 1963년 3월 16일 오후 2시 55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박정희의 초대로 전 국무총리 장택상, 신민당 위원장 김도연, 초대 국무총리 이범석 등과 함께 박정희와 면담하였다. 김희덕(金熙德) 외무 겸 국방위원장, 유양수 재경위원장, 홍종철(洪鍾哲) 문사위원장 등이 3.16 성명을 발표하게 된 동기를 번갈아가며 설명하였다.
'3.16 성명이 박의장의 깊은 사려에서 나온 줄은 모르는 바가 아니나...세상 만사가 그렇게 박의장이 제안한 것처럼 척척 될는지도 의문이고 또 내가 아니면 안된다는 식은 바로 이승만 박사의 사고방식과 같다. 인간 개조라는 것은 하루 이틀에 되는 것이 아니고 20년이고 30년이고 점진적으로 이룩되어야 할 줄로 압니다.' 이어 군인의 사명은 국방에 있으니 만큼 군인들은 군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하였다. 윤보선의 말을 듣던 박정희는 노하며 오죽 당신네들의 과오를 못 참았으면 군인들이 일선에서 돌아 왔겠느냐 며 응수했다. 논쟁이 격화되자 장택상이 화제를 돌려 논쟁을 막았다.
3월 20일 허정 등과 함께 서울시청과 을지로 주변, 주한미국 대사관 주변 등을 활보하며, 박정희의 군정연장에 반대하는 '산책시위'를 했다. 3월 30일부터 윤보선과 함께 3차례 박정희와 조야영수회담을 개최하여 박정희의 군정연장을 철회시켰다. 이후 그는 박정희를 군정의 실질적인 지도자라며 박정희의 퇴진을 공개 요구하기도 했다.
한편 야당이 난립하게 되니까 통합해야 한다는 요구가 많았다. 그러나 통합야당으로 국민의당을 만들게 되지만 바로 깨저버렸고, 아주 난장판이 되었다. 통합야당 국민의당 붕괴에는 민주당 구파의 실력자 유진산의 역할이 대단히 컸다. 이 당시 유진산은 윤보선의 오른팔 노릇을 하고 있었다.
3월 22일 윤보선·변영태·박순천 등의 재야지도자들은 '민주구국선언대회'를 열어 군정연장봉쇄를 결의하고 가두데모에 나섰다. 1963년 초 윤보선은 대통령 후보에 출마를 선언하였다. 1963년 5·16 군사 정변 이후 해체되었던 신민당 및 민주당 구파 세력을 규합하여 5·16군사정변 세력이 참여한 민주공화당에 맞서기 위해 민정당(民政黨) 창당에 참여하였다.
63년 7월 제5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다. 그러나 허정은 본래 야당 단일후보로 김병로가 지목되면 양보하겠다는 의사를 보였으나 해위(윤보선)라면 양보할 용의가 없다고 강하게 밀어붙였고, 윤보선은 대통령 후보직을 사퇴하였다. 대통령 후보 윤보선의 사퇴로 대통령 후보는 허정과 김도연의 2파전으로 압축되었지만 사전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자 김도연이 포기를 선언해 후보경쟁은 다시 윤보선과 허정의 대결로 전환되었다.
허정은 5·16 군사 정변 당시의 그의 묵인을 지적하며 처신문제를 질타했다. 매그루더 사령관과 마셜 그린 주한미국 대사 및 미국무성 관리들로부터 '군사혁명의 저지를 위해 UN군 병력을 동원할 허가를 받으려고 혁명이 일어난 직후 대통령 윤보선을 찾아갔다고 한다. 그때 장면 총리는 은신 중이어서 윤 대통령을 찾아갔던 것이다. 그러나 3시간 여에 걸쳐 병력 동원을 허가해주기를 간청했으나 윤 대통령은 끝내 허락해주지 않았다고 한다. 그린 주한미국 대리대사는 '국헌 준수를 서약하고 대통령에 취임한 만큼, 지금 병력 동원을 허락하지 않는 것은 의무의 포기가 하닌가'하고 힐난까지 했다는 것이다. 허정은 그가 장면에 대한 적대심 때문에 정변을 묵인했다며 그의 자질을 의심했고, 윤보선은 자신이 군사 정변을 추인하지 않은 점과, 장면 내각 당시 데모와 부정 부패가 심했음을 들어 반박, 심한 말싸움이 벌어졌다.
허정은 그가 5.16 군사 정변에 호응한 점과 혁신 세력의 반발을 들어 김병로에게 후보자리를 양보하라고 종용하였으나 윤보선은 양보할 이유가 없다며 거절했고, 허정은 그가 독단적이고 고집에 세다며 질타했다. 윤보선이 대통령 후보로 지목되자 허정은 양보할 수 없음을 들어 끝까지 경선에 나서 경합하였으나, 결국 야당 후보 단일화를 위해 허정이 자진 용퇴하면서 윤보선은 야당의 범야권 대통령 후보로 추대되었다.
그뒤 최종 지명되어 출마, 유세 도중 박정희의 공산주의 활동을 지적, 비판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963년 9월 24일 실시된 대통령 선거 지방 유세에서 그는 '여순 반란 사건의 관련자가 정부안에 있으며 박 의장의 민족주의 사상을 의심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사상 논쟁은 더욱 치열하게 되었다.윤보선의 유세는 언론에 의해 사상 논쟁으로 묘사되었다. 공화당은 윤보선을 미국 상원의원을 역임한 존 매카시 의원의 사상에 사로잡힌 과격분자로 규정하고, 그의 주장은 얄팍한 술책이며 중상모략이라고 비난하였다.박정희는 매카시즘이라며 맞받아쳤고, 윤보선은 그가 친일파, 공산주의자라며 조국을 두 번이나 배신했으며 검증이 필요하다고 맞받아쳤다.
5대 대선 유세에서 그는 빈익빈이 민주화냐, 썩은 정치 뿌리뽑자고 호소하였다. 한편 유세중 기자들이 경제정책에 대한 공약을 집요하게 물어오자, 아직 시기상조라고 판단한 그는 당선된 뒤에 밝히겠다고 하고 구체적 언급을 회피하였다.
선거 운동이 한고비에 이르렀을 무렵, 9월 28일 윤보선 후보는 다시 전라북도 전주에서 "여순 사건의 관련자가 정부 안에 있다." 는 연설을 통해 박정희 후보가 여순 사건에 관련됐다는 시사를 했다. 이로써 전국은 발칵 뒤집혔다. '여순반란 사건의 관련자라면 박정희는 공산주의자였단 말인가, 박정희가 말하는 민족적 민주주의는 그럼 공산주의를 가리킨 것이냐'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박정희에게 적의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고의로 공산주의 의혹을 부풀려 올리려고 박정희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분격을 금치 못했다. 김형욱을 필두로 하는 충성파와 공화당의 추종자들은 윤보선에게 강경한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고 서둘러 즉각 고발조치를 취했다.
1963년 여름 김준연은 박정희가 공산주의자는 아니냐며 공개적으로 의혹을 제기하여 파문을 던졌다. 속히 윤치영 등이 그를 박정희의 전향은 확실하며 내가 내무장관 때 사상을 보증했다고 했지만 그가 다시 박정희의 사상 의혹을 제기하면서 논란은 확산되었다. 김준연은 박정희에게 사상 검증을 하자고 하였다.
1963년 9월 23일 윤보선은 전라남도 여수, 순천, 광양 지역을 돌며 선거 유세를 하였다. 그런데 9월 23일 박정희는 KBS 방송을 통해 윤보선을 공격, "이번 선거는 개인과 개인의 대결이 아니라 민족적 이념을 망각한 가식의 민주주의 사상과 강력한 민족적 이념을 바탕으로 한 자유민주주의 사상의 대결"이라고 하였다. 63년 9월 24일 그는 전라북도 전주에 도착하였다. "기아·부패·실업·분열 등 군정의 5악을 몰아내고 민정으로 새 질서를 수립하자고 외치던 윤보선은 9월 24일 전주 유세에서 정면으로 반박했다.
윤보선은 "내가 할 말 그사람이 했다."라고 서두를 꺼내고, "지금은 민주주의와 가장된 민주주의, 즉 이질적 민주주의와 대결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문제는 이 '이질적 민주주의'가 무엇을 가르키느냐인데, 윤보선은 이어서 "9월 23일의 여수 강연에서 특별히 느낀 것은 여순 반란 사건의 관계자가 지금 정부에 있다는 것을 상기했다."라고 말했다.박정희가 여순 사건 관계자이기 때문에 그의 민족 사상이나 민주주의 사상을 의심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1963년 9월 윤보선은 공화당과 박정희 후보 측으로부터 피소당하였다. 공화당 측으로부터 고발당하자 윤보선 후보는 "그렇다고 해서 박 의장이 공산주의자라고 말한 것은 아니다" 라고 해명하곤 "하지만 그의 민주주의 신봉 여부가 의심스럽다."고 덧붙이기도 했다.뿐만 아니라
박 의장의 저서 '국가와 혁명과 나' 라는 것을 보면 '구민주주의는 대한민국에 맞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또 러셀을 찬양하고 히틀러도 쓸 만한 사람이라고 했는데 이 사람이 과연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사람인가 의심하지 않을수 없다.
고 했다. 이에 대하여 박정희는 9월 28일 "구석구석에 박혀 있는 용공주의 세력을 혁명으로 일소하여 대한민국의 공산화를 막은 나를 공산주의자라고 하는 것은 당치도 않은 일"이라고 반박했다. 한편 윤보선의 가까운 친척이었던 윤치영은 윤보선의 경쟁자인 박정희의 선거사무장이기도 했다. 9월 30일 윤치영은 "썩은 구정치인이 집권하면 또다시 혁명이 일어날 것이다."라고 주장하였다. 일각에서는 윤보선의 의혹을 사상공세라고 비난하였고, 숙질간의 싸움이라며 비판하기더 했다.
9월 28일 윤보선의 지지 유세를 하던 김사만(金思萬)은 '박정희는 여순반란사건에 관련되어 사형 선고까지 받았던 공산주의자였다'는 발언을 인용하면서 "일제에 항거하다가 사형선고를 받았다면 몰라도, 우리의 주적인 공산당 혐의를 받았던 사람에게 어떻게 믿고 투표할 것이냐"라며 박정희를 공격했다. 김사만은 "여순반란 사건의 관련자가 정부 안에 있는 듯하다"라고 한 윤보선의 전주 발언이 "(김준연의 폭로에 비교하면) 그 얼마나 점잖은 표현이냐"며 윤보선을 옹호하고 "박정희씨는 그렇게 민족을 사랑하고 아낀다는 사람이 일본제국주의의 군인이 되겠다고 만주군관학교를 거쳐 더 출세하겠다고 일본에 가지 않았느냐"며 맹비난을 가했다. 바로 공화당에서 김준연을 고소하겠다고 선언하자 김준연은 고소 할테면 해보라며 답변할 가치가 없다고 응수한다.
윤치영이 박정희의 선거사무장으로 선거관리를 총괄하면서 야당인사인 허정, 김준연과 야당의 대선 주자인 윤보선과도 갈등하였다. 윤보선의 어머니이자 윤치영의 형수인 이범숙이 윤치영의 안국동 집에 찾아와 통곡하는 사태까지 가게 되었다. 그러나 윤치영과 윤보선의 갈등은 해소되지 않았고, 화가 난 윤보선은 윤치영을 만났을 때 악수를 거절한다.
야당의 후보단일화를 위해 10월 2일 국민의 당 허정이 대통령 후보직을 사퇴했고, 10월 8일에는 자민당의 대통령 후보 송요찬이 사퇴함으로써 윤보선은 사실상의 야당의 단일 후보로 공화당의 박정희와 맞서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상 논쟁은 윤보선 후보에게 오히려 불리한 결과를 가져왔다. 공화당에서는 윤보선을 매카시스트로 몰아붙였고, 대부분의 지식인들은 그를 극우적인 정치가의 전형으로 간주하여 그의 정견에 동의를 표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지식인과 도시민은 그의 사상 논쟁을 과거 보수 정치가들이 정적을 제거하기 위하여 공산당의 스파이로 매도하는 전형적인 방법으로 간주하였다. 야당인사들의 폭넓은 지지를 확보하기 위해 1963년 10월 대통령 후보인 윤보선은 박순천, 이범석, 김병로, 장면의 자택을 각각 방문하였다. 허정과 변영태의 집 역시 방문하였으나, 이들은 만나지 못했다.
사상 논쟁에서 윤보선이 손해를 본 것으로 분석한다. 서중석에 의하면 당시 경상도 · 전라도 쪽이 좌익이 강했는데, 그렇기 때문에 한국전쟁을 전후해서 그 지방에서 얼마나 많은 희생이 있었느냐는 것이다.보도연맹원 학살은 1950년 7월~8월에 일어난 것이기 때문에 이 선거 13년 전 일이어서 그때까지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그렇게 좌익으로 몰려 많이 죽고, 또 살아남은 가족들은 연좌제에 묶여서 몹쓸 고생을 하고 있던 터라, "윤보선 같은 사람이 대통령 되면 큰일 나겠다. 여순 관계로 저렇게 몰아세우는 사람이니....." 하는 소리가 나왔다. 이 때문에 막판에 박정희 지지로 돌아섰다.
감옥소에 들어가 있는 혁신계 일부도 한민당 간부였던 윤보선을 지지하지 않았다고 한다. 혁신계는 당시까지만 해도 한민당을 굉장히 미워하였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한민당에 대한 혁신세력의 혐오는 지속되어 차라리 윤보선이나 민주당 구파 계열을 지지하느니 박정희를 지지하겠다는 여론이 지속되었다. 6대 대통령 선거 때에도 그는 박정희의 전력과 사상이 전혀 민주주의적이지 못하다고 공세를 했다. 이 때에도 박정희의 공산주의 경력이 공격 대상이 되었다.
선거 결과 박정희가 46.6%에 해당하는 4,702,640표를 받았고 민정당의 윤보선은 45.1%에 해당되는 4,546,614표를 받아 불과 15만 표차로 윤보선이 패배하여 제5대 대통령 선거에서 낙선하였다. 그러나 윤보선은 공화당이 모든 불법적인 수단을 동원한 불법적인 선거로 규정하였다.대통령 선거 유세 과정에서 위협을 받기도 하여 경호원을 대동하고 다녔고, 미국 대사관의 직원이 윤보선 내외를 위한 차량을 비밀리에 마련하기도 했다. 1963년 11월 제6대 국회의원 총선거에 출마하여 당선, 12월 17일 다시 국회로 복귀했다.
한편 그의 숙부인 윤치영은 박정희를 지지하고 그의 선거사무장을 지냈는데, 그는 끝내 수인사 조차 나누지 않았다. 윤치영과의 관계는 1980년대 초반이 되어서야 개선되었다.
5대 대통령 선거당일 저녁 선거 결과가 중개될 때, 초반전에는 윤보선 표가 많이 나왔다. 서중석은 서울쪽을 먼저 해서 그랬을 것이라고 봤다. 10월 15일 선거 다음날인 10월 16일 새벽 3시경까지만 해도 윤보선이 이기고 있었다. 그런데 마지막에 가서 아슬아슬하게 박정희가 추격해서 이겼다. 이 뒤부터는 박정희는 개표할 때 박정희 표가 많이 나올 쪽을 먼저 하고, 야당 표가 많은 데는 나중에 했다는 말도 있다.
선거 결과 박정희가 4,702,640표, 윤보선은 4,546,614표로 15만여 표 차이였다. 경상남북도와 전라남북도, 제주도에서는 박정희가, 충청남북도와 서울, 경기도, 강원도에서는 윤보선이 이겨서 남북선거 양상을 띄게 되었다. 서중석은 이를 두고 경상북도는 이때만 해도 몰표가 아니어서 박정희가 83만여 표였고, 윤보선 표도 54만 표나 나왔다. 충청북도도 그렇고, 두 지역은 여당 표가 많이 나오는 곳이라고 지적했다.
선거가 끝난 직후 윤보선은 스스로 "나는 정신적 대통령"이라고 했다.사상 논쟁은 얘기할 것이 없었고, 윤보선 측에서는 막판에 개표 부정이 있지 않았겠느냐고 추측했지만 증거는 없었다. 서중석에 의하면 그 당시 선거에서 공무원 가족, 경찰관을 포함해 관권에 의해 좌우되는 표를 10퍼센트 내지 20퍼센트로 보고 있었는데, 그것을 생각하면 윤보선이 정신적 대통령이라고 말한 것도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라고 하였다.
대선 기간 중 윤보선은 암살 위협에 시달리기도 했다. 1967년 5월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은 육군 중령 방준모를 직접 불러 놓고는 ‘이 선거가 아무래도 위험해. 백중지세야. 까닥하다간 지겠어. 박 대통령의 혁명과업 완수와 경제계획을 완수하려면 할 수 없소. 암살할 준비를 하시오’라고 윤보선 암살을 명령했다. 표 대결에서 박 대통령이 패배한다면 ‘윤보선씨를 총으로 저격한다’는 암살 명령이었다. 방준모는 김형욱의 이 지시에 따라 개표 날 장총을 든 저격수와 함께 윤씨 집 안방이 내려다 보이는 서울 종로구 덕성여고 2층에서 비밀리에 대기했으나, 실제 개표 결과 박 대통령이 승리하는 바람에 그냥 철수하게 되었고 후일 방씨의 이런 폭로는 책으로까지 출판됐지만 국내 일간지에는 윤보선에 대한 암살미수 관련 기사가 한차례도 보도되지 않았다.
그러나 같은 민주당 구파를 함께 이끌어오던 유진산과의 갈등 끝에 1964년 8월 유진산과 결별했다. 1964년 8월 윤보선과 유진산이 결별한 이후 민주당 구파는 양분되었다. 신언론법안 제정을 쟁점으로 야당 내에서도 윤보선과 유진산간의 갈등이 표면화되었다. 윤보선은 유진산이 이 법안을 통과시키자, 그가 공화당으로부터 거액의 자금을 수뢰하였다고 비난하였다. 박정희 정권에 대한 야당의 공격의 선봉에 서게 된 그는 '대통령 박정희와 공화당 의장이 집권을 위해 나라를 팔아먹는 역적'이라고 맹렬히 비난하였다. 박정희에 대한 노골적인 비난 이후 그의 주변에는 중앙정보부의 감시요원이 그림자처럼 붙어다녔다. 그러나 윤보선은 자신의 발언을 철회할수 없다며 고집하였다. 또한 미국의 월남전 파병에 박정희가 호응할 것이라는 설이 정가에 돌자 그는 월남 파병은 한국 젊은이들의 피를 팔아먹는 매국행위, 젊은이들을 사지(死地)로 몰아넣고 박정희 자신이 정치적 이익을 취하려는 행위라며 비판하였다. 그는 이후 장준하와 함께 월남 파병 반대 운동도 준비한다.
그는 군정의 연장으로 간주되는 박정희 정권의 정통성에 대해 인정하기를 거부했다. 윤보선은 박정권 자체가 국민의 진정한 의사를 대변하지 못하는 불법 정부이므로 박정권에 의해 추진되는 한일정상화조약은 무효이며 취소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 정책은 박 대통령의 그 자신의 집권을 연장하기 위해 애꿎은 젊은이들의 피를 팔아먹으려는 수단이므로 단호히 반대해야 된다고 주장했다.서중석에 의하면 당시 윤보선과 장준하만 베트남 파병을 맹렬히 비난했다 이후 장택상, 장준하, 함석헌 등과 함께 한일굴욕외교 반대 활동을 적극 전개했으며, 1965년 6월 한일협정이 체결되자 즉시 무기한 단식투쟁을 감행하다가 국회의원직을 사퇴하였다. 윤보선은 박정희의 경제개발 정책 역시 국민을 쥐어짜는 경제 정책이라며 비판하기도 했다. 또한 베트남 전쟁 파병 역시 젊은이들의 피를 팔아 집권에 이익을 주려는 행위라며 월남 참전을 적극적으로 반대한다.
정부가 한일 교섭을 비밀리에 추진, 조속 타결하려는 움직임을 64년 벽두부터 표면화되었다. 곧 동경에서 정치협상을 하겠다고 서둘렀고 2월이 되자 정부와 여당은 3월 중 대일 교섭의기본 방침을 밀고 나가겠다는 결정을 발표 하였다. 64년 2월 22일 민정당에서는 당론으로 확정된 한일 교섭에 관한 대안(代案)을 발표했다. 박정권은 일반 여론의 추세를 무시한 채 3억불의 청구권 보상으로 만족하면서 우리 어민들의 생명선인 평화선을 일본에게 내주기로 작정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윤보선은 학생 대표자들과 면담, 박정희 정부가 일본과의 협상을 서두르자 재야 세력이 총궐기하여 구국의 봉화를 들어야 한다는 데 의견을 모으고 시위 준비 작업을 독려하였다.
1964년 3월 정부는 3월 5일 정부와 여당 연석회의를 열고 3월 10일부터 농상회담, 12일부터 본회담, 4월에 외상회담을 개최한다는 한일 협상 스케줄을 발표하였다. 3월 6일 민정, 민주, 자민, 국민의 당 등 재야의 전 야당과 사회 종교, 문화단체 대표 등 저명 인사 200명이 주축이 되어 대일굴욕외교반대 범국민 투쟁위원회를 결성하였다. 3월 9일 서울 종로예식장에서는 각계 정치인, 재야 인사 등이 모여 구국선언을 채택하고 반대투쟁에 전심전력으로 총궐기할 것을 다짐했다. 대일굴욕외교투쟁위 의장의 책임을 맡은 윤보선은 구국선언문을 낭독하였다. 장택상은 한일회담을 한·일 합방에 비유하였다. 장택상은 한·일 합방은 저들의 뜻대로 될 리가 없다.고 비판하였다.
5월 30일 서울대학교 문리대생들이 교정에서 자유쟁취궐기대회를 열어 한일회담 성토와 박정희 정권 성토식을 한 다음 단식 농성에 들어갔다. 이는 6.3사태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학생회장인 김덕룡(金德龍, 후일 국회의원)은 '오늘의 단식투쟁은 내일의 피의 투쟁이 될 지도 모른다'는 선언문을 낭독하고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윤보선은 서울대 문리과 학생회장 김덕룡의 선언문을 비장한 선언문이라며 예찬하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단식농성에 참여하는 학생들 수가 점점 늘어갔다. 무저항적인 학생들의 농성 현장에는 교수들과 시민들이 줄을 이어 찾아와 그들을 격려하고 먹을 것을 놓고 갔다. 윤보선과 함석헌은 함께 농성현장을 찾아갔다. 윤보선은 이를 두고 정치적인 목적이라기 보다는 차라리 자식 같은 학생들의 애처로움을 위로해 주기 위한 마음이 더 컸던 것이다라고 하였다. 윤보선과 함석헌은 현장을 돌며 학생들을 위문했다. 단식하다 지쳐 쓰러진 학생들은 들것에 실려 서울대 문리대 앞에 있는 서울대 의대로 옮겨졌다. 의대생과 간호학과 학생들은 교대로 철여하면서 단식학생들을 보살펴주기 위해 대기하고 있었다. 현장에서 목격한 윤보선은 그들 의대생, 간호학과 학생들도 단식농성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96]고 보았다. 사건을 주동한 이명박 등은 피신했고[97] 주동자를 찾지 못하고 학생들 348명을 기소한다. 이후 중앙정보부는 시위의 배후로 윤보선, 장택상 등을 지목했다. 시위의 배후로 지목된 윤보선과 장택상은 정부가 보낸 사복경찰과 중앙정보부 요원들의 감시를 당했다.
1965년 6월 22일 윤보선의 민정당과 박순천의 민주당이 민중당으로 통합하였다. 이때 윤보선은 통합 민중당의 당대표로 경선에 나왔으나 유진산은 박순천 쪽을 밀어서 박순천이 당수가 되었다. 대한민국 최초의 여자 당수가 출현한 것이었는데, 이는 전에 민주당 구파였던 유진산이 신파와 손을 잡은 결과였다.
한·일 협정 비준 반대투쟁에 나섰는데, 박순천은 한·일 협정 반대 투쟁에 적극적이 아니었고, 더군다나 박정희와 단독회담을 한 뒤로는 이상하게 돼버렸다는 얘기를 들었다. 한일 협정 반대 시위에서 그는 정신적 대통령을 자처하였다.
민중당 내에는 강경파와 온건파로 구별되는 뚜렷한 대립 노선이 노정되었다. 윤보선으로 대표되는 강경 노선은 군정의 연장으로 간주되는 박정희 정권의 정통성에 대해 인정하기를 거부했다. 윤보선은 박정희 정권 자체가 '국민의 진정한 의사를 대변하지 못하는 불법 정부'이므로 박정희 정권에 의해 추진되는 한일정상화조약은 무효이며 취소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한국군의 월남 전쟁 파병 정책은 박정희가 그 자신의 집권을 연장하기 위해 애꿎은 젊은이들의 피를 팔아먹으려는 수단이므로 단호히 반대해야 된다고 주장했다. 한일회담에 대한 비판과 동시에 윤보선은 다시 1963년의 제5대 대통령 선거를 불법선거라며 비판했다. 윤보선은 1963년 대통령 선거를 공화당이 불법적인 수단을 동원한 불법적인 선거로 규정하였다.
65년 7월 22일 윤보선은 민중당 탈당을 선언했다. 7월 28일 윤보선은 정당생활을 청산할 뜻을 비치면서 대표최고위원 박순천에게 탈당계를 제출했다. 윤보선의 탈당계 제출로 민중당은 의원직을 사퇴하고 원외투쟁을 벌여야 한다는 강경파와 원내투쟁이 국회의원으로서 책임을 다하는 것이라는 박순천 중심의 온건파의 대립으로 대여투쟁에 막대한 차질을 가져오게 되었다.박순천은 윤보선의 탈당계를 반려했고, 윤보선은 자신의 탈당계가 대표최고위원 박순천에 의해 반려되자 정당법에 따라 소속 지구당인 종로구지구당에 탈당계를 제출, 의원직이 상실되었다.9월 장택상, 함석헌, 이범석, 장준하, 박순천 등과 함께 서울 용산의 효창공원에서 열린 한일협상 반대집회에 참석하였다. 한일 협정 반대 시위에서 그는 정신적 대통령을 자처하였다.
1965년 8월 14일 윤보선을 중심으로 하는 그룹이 국회를 떠나고 민중당을 떠났다.[101] 윤보선 파는 민중당은 낮에는 야당, 밤에는 여당이라고 비난했고당내에서 배척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당내 온건파들의 반응은 미온적이었다. 그래서 한·일 협정 비준에 초강경투쟁을 벌이던 윤보선은 따로 나가서 당 하나를 만든다. 신한당이다.
1965년 한일 비준 파동이 발생한다. 이때 윤보선과 유진산은 갈등하게 된다.
민정당에서 윤보선과 유진산이 심한싸움을 벌이게 된다.갈등을 벌이는 것을 지적하였다. 윤보선 측은 유진산을 박정희 정권과 모종의 흑막이 있다고 해서 벚꽃의 일본말인 '사쿠라'라고 하면서 권력과 내통하고 있는 사쿠라를 당에서 축출해야 한다고 했다.유진산은 한편 그가 지나치게 고집이 세고 비타협적이라며 몰아붙였다. 윤보선과 유진산의 난타전은 계속되었고, 민주당 구파는 1965년말 6대 대선 준비기간 직전까지 양분된다.
민중당은 1967년 대통령 선거에 대비해서 박순천으로는 안되겠으니까 고려대 총장을 지낸 유진오를 당수로 영입하였다. 민중당은 유진오를 당수로 모셔서 대통령 후보로 내세우려고 해봤는데 실패하였다. 서중석은 '유진오를 국민들이 잘 알지도 못했[98]'고, 당시는 '어두웠던 시대라 유진오를 알 만한 유권자는 많지 않았다'는 단점을 지적했다. 윤보선이 대통령에 나올 것은 확실해졌다. 장준하는 주선을 해 윤보선, 유진오, 백낙준, 이범석 4자 회담을 주선했다. 회담 결과 당수에는 새로 통합야당을 만들어서 유진오가 차지하기로 했다. 이렇게 생긴 당이 신민당이다.
민중당을 탈당하고 1966년 3월 30일 선명 야당의 기치를 내걸고 신한당(新韓黨)을 창당, 총재에 취임하였다. 5월 26일 전라북도 남원에서 신한당 창당 및 대선 예비주자로 유세를 개회하려 하였으나, 유세장소허가가 취소되고 강연은 좌절되었다. 윤보선은 정부의 야당탄압이라며 비판, 윤보선 총재를 비롯한 100여 명의 당원은 침묵시위를 벌였다. 5월 26일 오후 윤보선 총재는 기자회견을 갖고 박정희를 비판하였다. "박정희씨의 소위 민족적 민주주의는 결국 월남전쟁의 청부행위에 그치고 말았다. 월남증파가 미국의 뜻을 승인한 것도 아니고 민주주의를 신봉한 때문도 아닌 어디까지나 우리 청장년의 피를 팔아 정권을 유지하고 정치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행동으로 밖에 볼 수 없다"라고 하여 박정희의 민족적 민주주의 주장 및 국군의 월남파병을 청장년의 피를 파는 행위라며 강도높게 비난하였다. 기자들이 기록을 주저하자 윤보선은 반복해서 재발언하였다.
윤보선의 발언은 화제가 되었고 국회와 검찰에서 다같이 문제가 되었다. 국회에서는 내무위원회와 본회의에서 집회불허사건에 대한 야당측의 비판이 제기됐고, 국회는 여야간 갈등으로 번졌으며 검찰은 윤보선총재의 발언에 대하여 '반공법' 위반혐의로 입건, 수사하고 검찰에 출두하도록 소환장을 발부하였다. 윤보선의 비판 발언은 국회의 1966년 6월 7일에 열린 법제사법위원회와 1966년 6월 15일 열린 본회의에서 집중적으로 거론되었다. 윤보선은 국회에 출두하였고, 과정에서 야당의원들은 북괴찬양이나 이적의 목적이 없는 정치적 발언에 법률적 추궁을 하는 것은 야당탄압이라고 주장하고, 정치집회나 정당활동을 부당하게 방해하고 있는데 대한 시정대책, 반공법적용의 남용문제 등에 관하여 질의가 있었다. 공화당에서는 윤보선을 구속, 처벌하라고 비난하였으나 처벌받지는 않고 비난은 곧 가라앉았다.
1966년 여름부터 윤보선과 여러 야당 지도자들은 야당 성향의 도시 지식인과 중소상공인들로부터 야당후보 단일화를 촉구하는 서한과 요청을 수시로 받았다. 이후 야당 후보 단일화를 요구하는 국민의 압력으로 1967년 2월 제6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범 야당 진영의 후보단일화를 위해 민중당과의 합당을 추진하여 신민당(新民黨)을 창당하였다. 그후 신민당 공천으로 6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다. 1967년 3월 그는 장준하 등이 주선한 야당의 후보단일화를 4자회담(백낙준-윤보선-유진오-이범석)에 참여하였으나 의견차이로 회담은 결렬되었다.
1967년 대통령 선거에서 여당은 박정희가 나왔고 야당은 윤보선이 대표주자를 하게 되었다. 윤보선이 출마하자 그의 주변에 자원봉사자들이 모여 그의 선거를 도왔다. 강원용은 5월 3일 대통령 선거에서 윤보선 후보가 당선되어 박정희의 재집권을 막아주기를 바라고 있었으므로 그를 돕는 일에 간접적으로 나마 나섰다. 강원룡은 윤보선 후보에게 직접 자금을 전해 주지 못하는 기업인들을 대신해서 자금을 받아 전달해 주는 일을 몇 차례 맡아 했다. 따라서 강원룡 자신의 회고로도 국민들에게는 '겉으로는 강원룡이 윤보선에게 자금을 지원하는 것'처럼 인식되었다.
1967년 5·3 대통령 선거의 유세에서 민주공화당의 박정희는 경제개발의 성과와비전을 내세우면서, 이를 지속하기 위한 정치적 지지를 호소했다. 반면에 신민당의 윤보선은 쿠테타 이후에 추진된 경제개발의 폭력성과 독재성을 규탄했다.신민당 진영에서는 박정희의 남로당 경력과 사회주의 사상 경력을 집중 부각, 지적하였다. 윤보선은 이때는 사상논쟁을 할 생각은 없었고, 박 정권이 부정부패가 심하니까 "부정부패 바로잡겠다", "썩은 정치 바로잡겠다." 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야당 일각에서는 다시 박정희의 남로당 관련 전력이 다시 불거졌고, 박정희가 배신자임을 들어 신의없음을 지적하는 의견까지 나왔다. 그러나 당시의 분위기를 서중석은 '윤보선 하면 낡은 정치인, 늙은 정치인이 연상되어서 신선한 맛을 느낄수 없었다고 평했다.
6·3 세대로, 저명한 교수 한 분은 "유세기간 중 경제 정책을 발표할 때 윤보선은 ‘대통령이 되면 미국에 가서 어떻게든 원조를 더 받아와 나라살림을 펴겠다.’고 말했다. 박정희는 ‘산업을 발전시켜 나라를 일으켜 세우겠다.’라고 말했다. (한일회담 때문에) 박정희는 미웠지만 그의 말은 전율할 만큼 감동으로 다가 왔어. 박정희를 지지하게 되었다"라고 인터뷰에서 밝혔다.
윤보선은 박정희의 자립책이 비현실적임을 지적, 미국, 일본과 교류 없이 문을 닫는 것은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과 다른 점이 무엇이냐며 반론을 제기했다. 6대 대선에서도 박정희의 공산주의사상과 남로당 경력에 대한 비난이 제기되었다. 박정희의 사상을 의심하는 의혹들이 곳곳에서 터져나왔고 선거는 윤보선에게 유리해 보였으나 그해 2월 대선에서 박정희에게 116만 표의 근소한 표차이로 패하여 낙선했다. 박정희는 농어민과 영세민의 지지를 얻은 한편 윤보선은 도시와 지식인층의 지지를 받았다. 윤보선의 지지 지역은 수도권과 도심지역이었고, 박정희의 지지 지역은 농촌과 산촌 지역으로 나타났다.
이후 장준하와 함께 베트남 파병을 반대하였다. 당시에 다른 이들도 베트남 파병을 반대하는 정치인들이 있었다. 그러나 윤보선과 장준하는 특히 베트남 전쟁 파병을 맹렬히 비난했다. 윤보선과 장준하는 박정희의 월남파병 강행은 국익의 이름으로 젊은이들의 피를 파는 매국행위이며, 국민적 여론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는 기만술이라며 비판을 가한다.
윤보선 전 대통령은 유신독재정권 치하에서 3.1 구국 선언, YMCA 위장 결혼 사건 등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였기 때문에, 윤 전 대통령의 출석교회였던 안동교회(예장통합측의 장로교회. 안국동 소재)는 형사들의 감시대상중 하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71년 신민당 대통령 후보자에 김대중이 선출되자 신민당을 탈당하여 박기출·장준하와 함께 국민당(國民黨)을 창당하고 총재직에 취임했다.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그는 장준하와 함께 민족주의를 표방하면서 국민당을 만들고 청년학생들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주게 되었다. 71년의 대선에서 윤보선은 대통령 후보로 나섰다. 그러나 후보직을 사퇴하는 대신 다른 정치인에게 양보하기로 했다. 당시 범야권에서는 야당 후보 단일화라는 이름으로 야당 인사들은 그에게 후보단일화를 위한 후보자 용퇴를 계속 요청하였다. 장준하는 열심히 윤보선을 지지하였고 지원 유세를 다녔다. 한편 국민당의 총재였던 윤보선은 장준하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 한때 진보당에 참여했던 박기출을 대통령 후보로 지명하였다. 장준하가 한때 김구의 비서였다가 이범석의 족청을 거쳐 장면에 의해 발탁된 인사였다는 점 역시 윤보선이 장준하를 탐탁치 않게 보는 하나의 이유였다. 그러나 윤보선의 부정적인 시각에 관계없이 장준하는 열심히 윤보선을 도왔다.
그러나 국민당은 유신에 의해 1972년 강제 해산당했다. 72년 10월 박정희가 유신 선포를 하자 장기집권을 위한 음모라며 규탄성명을 발표하였고, 그가 발표한 긴급조치는 모두 무표라고 주장했다. 1973년 서울 YMCA에서 기도회 모임에 참석하였다. 서울 YMCA에서 기도회 모임에서 인혁당사건 관련 사형 집행자 추모예배가 문제되어 목요기도회는 중단되고 문동환, 이해동, 김상근 목사 등이 연행되었다. 모임 참가자들은 중앙정보부의 집요한 강요에 동아일보에 목요기도회를 하지 않는다는 광고를 게재하였다. 이때 윤보선은 그들에게 회의장소로 자신의 집을 내 주었다.73년 3월 23일 윤보선은 정구영, 지학순 주교 등 10명과 함께 민주구국헌장을 발표하였다.
1974년 전국민주청년학생연맹 사건(약칭 민청학련 사건)이 발생하자 윤보선은 비상군법회의로부터 민청학련사건 관련혐의자로 지목되어 기소당하였다.다른 연루자들은 구속·기소되었으나 윤보선은 전직 대통령인 관계로 가택수사를 받았다. 1974년 11월 27일 함석헌, 김대중 등과 함께 민주회복국민회의 동참을 선언하고, 함께 시국선언을 발표하였다.
1974년 8월 15일 박정희의 부인 육영수가 피살되었을 때, 일부 야당지도자는 박정희의 독재를 들어 육영수 암살을 조롱하였으나 윤보선은 재판중임에도 육영수 피격사건에 대한 애도와 유감을 표명하기도 했다. 1974년 7월 인혁당 사건 관련자에 대한 탄원서에 서명하였다. 그러나 인혁당 사건과 민청학련의 배후로 지목, 1974년말 윤보선은 민청학련 배후 지원혐의로 재판에 회부되어 재판 결과,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다.1975년 3월 8일, 동아일보의 대량 기자해고 사태가 발생하자 3월 14일 동아일보 사태를 우려하는 성명서를 발표하다. 또한 그날 방송에 기자회견을 열고 박정희 정권이 언론을 탄압한다며 공격하였다. 이어 같은날 3월 14일 단독으로 '3ㆍ1정신으로 구국대열에 서자 -3천 5백만 동포에게 보내는 호소문'을 발표하였다.
1975년 4월 11일 서울대학교 농대생 김상진이 대통령에게 드리는 공개장을 쓰고 할복자살했다. 윤보선은 김상진을 김상진군은 대통령께 드리는 공개장을 유서로 남겼는데, 그 내용이 논리정연하고 위정자의 오류와 잘못을 세련된 문장으로 지적하였다. 결코 감정을 앞세운 글이 아니라 사려깊은 논리와 투철한 민주주의 신념으로 가득찬 애국적 충고문이었다라고 평가하였다.
민주회복국민회의에서는 75년 4월 22일 오후 명동성당 문화관에서 김상진의 추도식을 갖기로 했다.4월 22일 윤보선은 김상진 추도식에 참석하려 하였으나 제지당하였다. 윤보선은 명동성당 추도식에 참석하여 민주학생의 명복을 빌어줄 예정이었다. 그런데 그날 아침 경찰관들이 그의 안국동 사저에 모여들더니 윤보선의 바깥 출입을 막았다. 윤보선은 추도식에 참석하지 못하게 불법적으로 연금시킨 것이라고 하였다.
1976년 봄 제2공화국에서 외무부 장관을 지낸 정일형의 부인 이태영이 윤보선을 방문했다. 윤보선은 이태영으로부터 일어서 행동을 할 때라는 의견을 듣고, 그로부터 이태영, 정일형, 김대중 셋이 정일형, 이태영 부부의 사저에서 3·1절에 구국선언을 하기로 했다는 소식을 접하였다.
윤보선은 이태영으로부터 김대중이 초안한 선언문을 입수하였으나, 선언문이 ‘온건하긴 했으나 독재를 비판하는 강도면에서는 약한 느낌.[120]’이라고 평가했다. 윤보선은 아내 공덕귀를 시켜 이태영을 만나, 서명문이 온건하다 하여 서명을 거절하였다.
이 선언문은 미온적이어서 서명하기가 곤란하다. 내가 별도로 선언문을 준비할 테니 서명할 인사들에게 알려주기 바란다.[120]
며칠 뒤 문익환이 서명을 작성하여 그를 찾아왔다.
- 문익환 : 해위 선생님, 말씀을 들었습니다. 며칠 전에 선언문 초안을 읽어보시고 너무 미온적이라 서명하지 않으셨다는 말씀 말입니다.
- 윤보선 : 그랬지. 서명 내용이 약하면 우리의 투쟁 의지가 너무 나약해 보여서 큰 효과를 거들 수가 없어요. 국민들에 대한 호소력도 약하고...(이하생략)...
문익환으로부터 봉투를 건네받은 윤보선은 내용을 읽은 뒤 ‘강도가 높고 할말을 별로 빠뜨리지 않은 것 같아 마음에 들었다’며 문익환이 초안한 선언문에 서명하였다.
1976년 3월 1일 새벽 윤보선은 명동성당에 도착, 앞자리에 앉아 700여명의 신자들과 함께 기도회, 김지하를 비롯한 구속 정치범을 위한 미사에 참석하고, 명동 3·1 민주구국선언에 참석하였다.윤보선의 주변에는 감시인이 따라붙었고, 정부 당국자와 박정희의 측근들은 계속 박정희에게 윤보선을 위험한 인물이라며 구속, 처벌해야 된다는 강경론을 펼쳤으나, 박정희도 그가 전직 대통령이자 야당의 지도자라는 이유로 파급효과를 두려워하여 그를 처벌하기를 주저하였다.
그러나 윤보선은 법정에 출두했다. 당시 삼복더위에도 단추 셋 달린 양복을 입고 젊은 판검사 앞에 부동자세로 서서 깍듯한 존댓말로 응했다.77세 노령에 전 대통령으로서 구태여 법정에 나가지 않아도 끌어갈 사람은 없었고 더구나 박정희와는 적대관계에 있었다. 그러나 ‘정권은 반대하지만 법은 지켜야 한다’고 고집하면서 법정에 출두한 것이다. 재판정 앞에 선 그의 당당함과 깎듯함에 군정 관계자들은 당황하였고, [[박정희]가 무리하게 고령자를 법정에 세웠다며 박정희 정권에 대한 반발 여론이 형성되었다.
윤보선은 이후 박정희의 장기집권을 독재행위라며 노골적으로 공격하였다. 1976년 3월 1일 정일형, 함석헌, 문익환 등 재야 민주지도자들과 함께 '3·1 명동민주구국선언'에 참여하기도 했다. 1976년 3월 문익환, 함세운 등과 함께 명동성당에서 700여명의 신자가 모인 가운데 유신헌법 철폐, 긴급조치 폐지 등을 주장하는 ‘민주구국선언문’을 발표했다가 가택수사를 당하였고, 뒤이어 '사실 왜곡 전파', '헌법 왜곡 비방 및 폐지 선동' 등의 혐의로 실형을 선고받아, 최고 징역·자격정지 5년을 선고받기도 하였다.[123] 그뒤 형량은 징역 8년으로 늘어나기도 했다.[117] 징역 8년을 선고받았으나 그는 전직 대통령이라는 이유로 집행유예로 석방되었다. 5월 김대중은 3.1 민주구국선언 혐의로 전격 구속되었고, 윤보선은 공덕귀 및 이희호, 김홍일 등과 함께 김대중 석방 농성을 벌였다.
1977년 이후 그는 일본의 후쿠다 수상에게 유신체제를 비난하며 독재 정권에 협조하지 말 것을 부탁하는 서신을 보내 화제가 되었다.[57] 이는 방송에 보도되었고, 정부와 여당에서는 다시 그를 친일파라며 비난을 퍼부었다. 한편 그는 계속 김대중 석방구명운동에 동참했고, 1978년 김대중은 석방된다.
1977년 3월 22일 3.1사건의 대법원 판결에 대하여 윤보선은 지학순 주교 등과 「민주구국헌장」을 발표하였다.[124] 1977년, 윤보선 전 대통령은 일본 후쿠다 수상에게 박정희 유신정권과 유착한 일본 정부를 비판하면서, 일본이 대한 정책을 시정할 것을 촉구하는 긴 글의 편지를 보냈다.[125] 그런데 오랫동안 윤보선의 서신발송을 묵살하던 한국 언론은 뒤늦게 편지의 내용을 입수, 그러나 거두절미하고 윤보선이 일본에 내정간섭을 요청했다는 식으로 왜곡해서 보도[125], 이 때문에 곤욕을 치렀다.
1977년 강희남, 문익환 목사 등 전주교도소에 수감된 인사들을 면회하러 공덕귀, 양일동, 이희호 등을 대동하고 전라북도 전주로 내려갔다가 거절당하고 되돌아왔다. 1977년 9월 광주 고법의 강희남 목사 첫 공판일에 방청객으로 참관하였으나, 재판을 연기하는 바람에 다시 되돌아와야 했다. 9월 김수환 추기경, 함석헌과 공동으로 '국민에게 드리는 글(청계피복지부 노동조합 탄압에 붙여)'를 발표하였다. 1977년 12월 성명서 '학생탄압을 중지하고 학문의 자유를 보장하라!-최근 학원 사태에 대한 우리들의 견해'를 발표하다. 1978년 1월 6일 재야인사들과 곧동으로 옥중에 수감중인 민주인사를 위문하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이때 반유신 운동의 해외홍보를 위해 해외인사들과의 연대를 하자는 의견이 제기되기도 했다. 1978년 윤보선은 일본에 체류중인 정경모를 통해 국민연합 일본지부를 세우려 할 때, 문익환은 '아직도 그의 사상을 믿을 수 없다'며 반대해버렸다. 스승 김재준 목사가 정경모를 강력히 추천했을 때도 문익환은 그 태도를 바꾸지 않았다. 결국 문익환의 반대로 국민연합 일본지부 결성 계획은 취소되었다. 그 해 10월 17일 윤보선은 함석헌, 문익환 등 야당 및 재야인사 402명과 12개의 시민 사회단체와 함께 10·17 민주국민선언을 발표하였다. 1978년 12월 7일 민주주의 국민연합과 함께 성명서 '12ㆍ12 선거에 대한 우리의 입장'을 발표하다.
1979년 3월 1일 민주주의국민연합이 체제를 개편하여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으로의 개편되었을 때 윤보선은 함석헌, 김대중과 공동의장으로 선출되었다.3월 4일 안국동 사저에서 함석헌, 김대중 등과 함께 기자회견을 하였고, 3. 1절 성명을 발표하였다. 1979년 5월 신민당 총재상임고문이 됐다. 이후신민당 총재상임고문을 지내다가 사실상 정계에서 은퇴했다.
김영삼 제명 파동 소식을 듣자 그는 독재정권이 최후의 발악을 한다며 박정희에 대한 비판을 가하였다. 10월 26일 그는 안국동 사저에서 박정희의 피격 운명소식을 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