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 미조(上)
개여울
당신은 무슨 일로 그리합니까
홀로이 개여울에 주저앉아서
파릇한 풀포기가 돋아 나오고
강물이 봄바람에 헤적일 때에
가도 아주 가지는 않노라시던
그런 약속이 있었겠지요
날마다 개여울에 나와 앉아서
하염없이 무엇을 생각합니다
가도 아주 가지는 않노라심은
굳이 잊지 말라는 부탁인지요
가도 아주 가지는 않노라시던
그런 약속이 있었겠지요
활발한 활동을 벌이며 중견 화가의 길을 걷고 있는 정미조. 그녀는 ' 개여울', ' 휘파람을 부세요', '불꽃' 등 가창력이 돋보였던 히트곡으로 1970년대 대중의 사랑을 듬뿍 받았던 인기 가수였다. 당시로선 보기 드물게 170cm의 큰 키와 시원한 이목구비, 그리고 서글서글한 미소가 매력적인 ' 비디오형 가수'로 평가 받았다. TV의 가수 선발 노래 경연 대회 프로그램을 통해 더욱 유명해진 그녀는 각 방송국에 다양한 신인 가수 선발 대회 프로그램의 활성화를 불러왔다.
정미조는 경기도 김포에서 극장과 양조장을 운영했던 정민해씨의 3남 3녀 중 막내로 1949년 9월 14일에 태어났다. 부친은 사교춤 선생을 집으로 불러 어머니와 함께 배웠을 정도로 풍류를 즐기셨던 분이셨고 모친은 학창 시절에 매스 게임 지휘자를 했던 적극적인 여성이었다. 귀여움을 독차지했던 막내 정미조는 부모님으로부터 예능쪽에 특출한 재질을 이어 받았다. 헌데 부모님께 물려받은 재주와 끼 때문에 진로를 결정할 때마다 행복한 선택의 고민을 했다. 그녀는 무용, 그림, 노래에 특히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어린 시절부터 타고 난 ' 끼'가 넘쳤던 그녀는 초등학교 때는 무용에 관심이 많아 화려한 발레리나를 꿈꿨다. 중학교 때 무용과 더불어 그림 쪽에도 두각을 나타냈다. 이 당시 무용과 사생 대회에서 참가하면 입상을 독차지했을 정도였다. 원래 그녀는 화가가 되겠다는 꿈을 지녔다. 배화여고에 진학해서는 교내 음악 콩쿠르에서 입상 할 정도로 음악 쪽에도 두각을 나타냈다. 이때부터 막연하게 노래를 부르고 싶은 마음을 품기 시작했다.
1968년 화가의 꿈을 안고 이화여대 서양화과에 입학했다.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장기 자랑 시간은 그녀에겐 중요한 행사다. 행사를 앞두고 특기가 뭐냐고 묻는 선배들의 질문에 선뜻 '노래'라고 대답한 것이 가수의 길로 들어서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 무대에서 시원한 창법으로 팝송을 노래한 미대 신입생 정미조는 장기자랑대회를 휩쓸 만큼 대단한 가창력을 뽐냈다. 곧 교내의 모든 행사에 참여해 노래를 부를 만큼 학내에서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화여대생 20명으로 조직된 파월 장병 위문 공연단에 선발되어 베트남에도 다녀왔다. 이후 ‘ 노래 잘 하는 이대생 정미조를 모르면 간첩’이란 말이 돌 정도로 소문이 나면서 축제 무대에 출연요청이 밀려 들었다. 당시 그녀의 레퍼토리는 프랑크 시나트라의 ' 마이 웨이'와 카펜터즈의 ' 슈퍼 스타' 등 대부분 외국의 팝송이었다.
그녀는 전설적인 여대생 포크 가수 방의경과 더불어 이화여대 미대의 노래 잘하는 ' 쌍두 마차'로 떠올랐다. 대학가의 인기 가수로 소문이 나면서 음반사에서 관심을 보여왔다. 졸업 전부터 음반제작 제의가 밀려 들어왔다. 엄격한 학칙으로 유명한 이대에서는 이 문제로 교수회의까지 열렸다. 망설였지만 그녀의 미적 재능을 아끼는 지도 교수까지 “그림은 다음에 그리고 한 번 해 보라”며 부추키자 프로무대에 서고 싶었던 그녀는 미대 은사들에게 “ 곧 돌아 오겠다”'는 약속을 하고 1972년 졸업과 동시에 데뷔를 결정했다.
하지만 풍류를 알았지만 완고했던 부친은 가수활동을 반대했다. 그때 정미조는 “ 절대로 스캔들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며 만일에 신문지상에 스캔들이 한 건이라도 실리면 그 날로 가수를 그만두겠다”고 부친에게 서약을 하고 간신히 허락을 받아냈다. 1972년 3월, 결국 졸업과 동시에 아세아레코드회사와 계약을 맺고 직업 가수로 사회에 첫 발을 내디뎠다. 후라이보이 곽규석씨가 진행하던 TBC ‘쇼쇼쇼’가는 첫 무대였다. 패티김을 연상시킬 만큼 시원한 외모와 노래솜씨를 뽐내는 정미조의 등장은 신선했다. 이후 그녀는 피아트 승용차를 상품으로 건 KBS TV의 신인 가요제 우승, 동아방송의 노래 경연 프로 10주 연속 우승 등으로 승승장구하며 짧은 시간에 대중에게 폭 넓게 알려졌다.
1972년 7월, 몇 개월 동안의 녹음 작업이 끝나고 데뷔음반 <그리운 생각/불타는 사랑-아세아.AL-7082>이 세상에 나왔다. 1면에는 타이틀 곡 그리운 생각과 '개 여울' 등 5곡을 수록하고 뒷면에는 팝송 번안 곡 5곡을 수록했다. 이중 ' 개 여울'과 ' 그리운 생각'이 동반 빅 히트를 터트렸다. 특히 김소월 시 이희목 작곡의 ' 개 여울'은 그敾?대표 곡이 되었을 만큼 큰 반응을 몰고 왔다. 단숨에 가요계의 신데렐라로 떠 오른 정미조는 가창력 있는 대형 가수로 인정 받으며 정상의 가수로 발돋음 했다. 인기가 높아지자 우려하던 일이 터졌다.
한국일보사에서 발행하던 ' 주간 여성’에 '가수 정미조와 디자이너 앙드레 김이 깊은 관계’라는 기사가 실린 것. 스캔들을 내지 않겠다고 집에다 약속 하고 가수활동을 시작했던지라 정미조씨 집안에서는 스캔들 기사 때문에 난리가 났다. “ 다른 남자와 스캔들 기사가 났다면 사실이 아니더라도 참을 수 있겠어요. 그런데 앙드레 김하고 스캔들이라니 이건 말도 안돼요. 지금도 분해 죽겠어요." 이후 더욱 주목을 받게 된 그녀는 TV 출연만 한달 28회를 했을 정도로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그녀는 무려 13장의 앨범을 연속으로 발표했다. ' 휘파람을 부세요', ' 불꽃' 등 히트곡이 이어지면서 김추자, 이수미와 더불어 여성 트로이카로 불릴 만큼 정상의 가수로 우뚝 섰다.
정 미조(下)
화가의 꿈 위해 돌연 은퇴, 충격
인기가수 정미조는 75년 8월 선배가수인 김상희, 장미화 등과 함께 재미교포위문 공연을 다녀오는 등 활발한 활동을 이어갔다. 1978년 11년에는 '78년 야마하 동경국제가요제'에 참가하기 위해 동경으로 갔다. 한복을 단정하게 입은 그녀는 김기웅 곡 '아 사랑아'를 시원한 가창력을 자랑하며 불렀다. 결과는 우수가창상 수상. 데뷔 7년째를 맞이한 그녀는 국제가요제에서 수상자가 되는 영광을 이뤄내자 미뤄두었던 화가의 꿈이 되살아났다.
"처음엔 제대로 된 무대에서 좋아하는 노래를 실컷 부를 수 있다는 사실이 그냥 좋았어요 헌데 어느 날 갑자기 붓을 쥐고 있어야 할 손에 마이크가 잡혀 있는 게 낯설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너무 오래 다른 길을 가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미련 없이 은퇴를 결심했지요. 어릴 때부터 키워온 화가의 꿈이 꿈틀거렸습니다." 1979년 10월, 돌연 은퇴와 유학 선언을 했다. 인기절정의 순간이었지만 프랑스 파리로 미술공부를 떠나기 위해 그녀는 미련 없이 가수활동을 접었다. 하지만 급작스런 은퇴선언은 많은 팬들에게 충격을 안겨주었다. "사실 유학을 앞두고 2년여 동안 활동을 줄여나가면서 틈틈이 불어를 배우는 등 나름의 준비를 했었기 때문에 갑작스런 은퇴는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노래를 사랑했던 팬들을 뿌리치고 찾아간 파리 몽마르트 언덕에 있던 아파트. 팬들의 환호가 대단했던 화려한 가요계 생활에 익숙했던 그녀는 유학 초기 견디기 힘든 고독감에 힘겨운 자신과의 싸움을 벌어야 했다. 파리생활은 곧 '꿈에서 깨어나는 과정'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랑드 쇼미에르 학교와 몽마르트르 언덕에 있던 8층 아파트만을 오가며 묵묵하게 그림에만 전념했다. '한국의 톱 가수'였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된 프랑스 친구들의 강권에 못 이겨 가끔 노래를 부르기는 했지만 노래에 대한 갈증은 더 이상 느끼지 않았다. 화가로서의 제2의 인생이 시작된 것이다.
이후 파리국립장식미술학교 석사를 거치고 박사논문을 위해 7년 동안 세계 각지를 돌아다니며 자료를 모아 파리 7대학에서 '한국의 무신도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82년 모나코 현대 미술 국제 그랑프리전 장려상, 83년 <보부르에서 바라본 지붕들>로 올해잡지사 상을 수상하며 프랑스화단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85년 첫 전시회를 연 그녀의 그림에 대해 파리의 비평가들도 '서로 융화되기 힘든 두 개의 문화를 조화시키는 독창적인 분위기를 지닌 화가'라고 평가해 주었다. 화가로 성공한 정미조는 86년 9월 잠시 귀국해 스캔들 기사로 인해 서먹했던 앙드레 김과 만나 서먹하던 감정을 풀기도 했다. 13년 간의 파리 유학 후 92년 2월 귀국전을 시작으로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그 해 3월 경남대에서 첫 강단에 섰고 한양대, 경희대 강사를 거쳐 93년 2월 수원대 정식 교수가 됐다. 요즘에는 분당 화실과 압구정동의 집, 수원대학교를 오가며 창작활동과 전시회에 여념이 없다. 귀국 후 개인전만도 9차례나 열렸다.
"강의하고 작업하는 시간이 많아 가수활동 재개는 꿈도 못 꿉니다" 하지만 그는 강의시간이나 전시회, 야유회 때 노래를 불러달라는 학생들과 그녀의 노래를 기억하는 팬들의 요청을 거절하지도 않는다. 변함 없는 노래사랑 때문이다. 그녀의 화실에는 그림과 화구 이외에 한때 정상의 가수였다는 사실을 추억하고 기억할 수 있는 그 어떤 기념물도 없다. 뒤늦게 행복한 가정을 갖게 됐음을 이야기해주는 가족사진도 한 장 없다. 실제로 그녀는 일과 그림에 몰두하다보니 40대 중반의 나이가 된 1993년 3월에서야 중소기업을 경영하는 사업가 원용계(60)씨와 결혼했다. 아직 자녀는 없다. 단 7년 간의 가수생활이었건만 그는 여전히 히트곡 '개여울'의 가수로 기억된다.
그래서 철저하게 무대를 외면하고 화가로만 살아온 정미조는 팬들의 요청에 응했다. 79년 고별 쇼였던 TBC의 '쇼쇼쇼’이후 22년만인 지난 2001년 10월, KBS 1TV ‘예술극장’에 출연, 75분 동안 자신의 노래와 예술세계, 삶과 인생에 대한 얘기를 털어놓아 관심을 끌었다. 또한 2003년 5월엔 프랑스문화원에서의 개인전 ‘시간의 흐름과 변모’오프닝 행사에서 히트곡 '개여울', '휘파람을 부세요' 등 8곡을 관람객 앞에서 불러 화제가 되었다. 또한 카나다 벤쿠버에서 한국과 캐나다 수교 40주년을 기념해 개최한 초대전에서도 본 행사에 앞서 노래를 불렀다.
2004년, 70~80년대 대중음악의 히트 곡 1백50곡을 cd 7장에 담아 인기를 모으고 있는 편집앨범 "미인시대". 정미조의 "개여울"이 타이틀곡으로 선곡되었다. "한동안은 저를 현직 화가가 아니라 전직 가수로만 보는 데 거부감이 있었는데 이젠 그게 사라졌어요. 오히려 이제는 그림, 노래, 춤에 대한 제 재능과 열정을 모두 고스란히 보여드리고 싶은 마음도 생겨납니다. 언젠가는 대형 무대에서 '종합 예술인'으로서 저의 끼를 마음대로 분출할 수 있는 전시회 겸 콘서트를 열고 싶네요" 하지만 '신보앨범을 내는 등 가수활동 재개는 결코 없을 것'이라고 못을 박는 그녀는 자신의 지난 음악들을 정리한 베스트음반을 내고 싶은 마음을 품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