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수 감사절에 드리는 한 줄 감사
우리 교회에서는 이해 추수감사절을 일주일 앞두고 매주 새벽 5시 30분에 새벽기도를 통해 감사에 대한 메시지를 듣고 각 개인은 매일 “한 줄 감사”를 찾아 각자 노트한 것을 교회에 제출하기로 했다. 많은 교회가 11월 셋째 주일을 추수감사절로 지키면서 예배를 드리는데 강대상에 가을걷이 과일과 쌀들을 쌓아놓고 추수 감사헌금을 드리는데 사실 도시교회에서는 직접 농사를 짓고 과수원 경영을 하는 사람이 많지 않아 ‘추수 감사헌금’을 드리는 것 외에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도 없는 형식적인 행사에 그치기 때문에 각자 일주일간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를 묵상하고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자는 뜻으로 이렇게 새벽 기도를 시작한 것이다.
미국 같은 나라는 실제로 1620년 영국에서 102명의 청교도가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신앙의 자유를 찾아 북미 대륙으로 이주했다. 그러나 그들은 혹독한 겨울 추위로 하루에 2, 3명씩 죽어 나가고 생존자는 50명뿐이었으나 원주민이었던 인디언들의 도움으로 농사법을 익히며 이듬해 가을, 풍성한 곡식을 추수할 수가 있었다. 그래서 추수에 대한 감사 축제와 기도를 드린 게 추수감사절의 기원이 되었다고 한다. 그것이 1863년 16대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에 의해 11월 넷째 주 목‧금요일로 통일되어 그것이 미국에서는 국가적인 축제 기간이 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기독교인만이 드리는 주일날의 감사 예배가 되었다. 우리나라도 처음엔 미국처럼 11월 마지막 목요일을 감사일로 정한 적도 있었지만, 요즘은 많은 교회가 11월 셋째 주 일요일을 추수 감사 주일로 지키고 있다.
나는 새벽기도에 나가지 못했지만 한 줄 감사는 적기로 했다. (월) <믿음의 자녀들을 주신 것, 감사>라고 적었다. (화) <부부가 건강하게 해로하게 하시며 힘든 분들을 위해 기도하게 하심, 감사>라고 적었다. 그런데 셋째 날 나는 아내와 안과 병원을 다녀오면서 우리가 친히 지내던 거기서 가까운 이비인후과 병원을 방문하기로 하였다. 내비게이터를 믿고 갔는데 목적지에 도착했다는데 병원이 보이지를 않았다. 차를 길가에 세우고 알아본 뒤 다시 오던 길로 나가려 했으나 일방통행이어서 차를 빼서 나가려는데 주차해 놓은 앞차의 문짝을 긁었다. 그런데 그것이 외제 차였고 새 차였다. 보험처리를 했지만 언짢고, 속상하고, 운전에 짜증이 났다. 이러다 운전에 트라우마가 생기면 큰일이다. 아내는 버스도 기차도 타지 못하며 내 차 아니면 병원도 갈 수 없기 때문이다. 다음날 한 줄 감사에 어떻게 쓸 것인지 고민이 되었다. “하나님, 왜 이러십니까? “운전하고 나오기 전 기도까지 하고 오지 않았습니까?”라고 항의하고 싶었다. 그러나 (수) “더 조심하라고 이런 작은 실수를 하게 해 주셔서 감사”라고 적었다. 성경엔 “범사에 …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라.”(엡 5:20)라고 씌어 있기 때문이었다. (목) “우리 교회에 좋은 목사님을 보내주셔서 감사”라고 적었다. 노자의 도덕경에는 太上下知有之(최고의 지도자는 아랫사람에게 있다는 존재만 느끼게 한다)라는 말이 있다는데 아랫사람을 끌고 가려 하면 너무 힘들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교인들을 그리스도의 제자를 만들어 세상에 내보내고 싶어 새벽에 수고하는 목사를 존경할 수밖에 없다. 가난하고 병들었을 때 “다오다오 하는 거머리의 두 딸”(잠 30:15)처럼 하나님께 매달렸던 노안들만 모이는 교인들을 ‘받기보다 감사를 먼저 하는’ 예수의 제자를 만들려면 어쩔 수 없는 새벽예배라는 생각을 한다. … (일) “우리나라에 정치적 경험이 전혀 없는 대통령을 주신 것을 감사”라고 적었다. 곳곳에 운동권 정치인이 득세하고 강성 노조가 거대 야당을 등에 업고 칼을 갈고 있는 곳에 말실수도 잘하는 대통령을 국민을 통해 하나님께서 대통령으로 주셨으니 어떻게 하겠는가? 가난한 나라도 아니요, 세계 강대국과 어깨를 겨루는, 세계가 부러워하는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되었는데 그의 국가적 위상은 누가 지켜줄 것인가? 우리가 기도할 수밖에 없다. 사이버 공간에는 거짓이 편만하고 거리의 아우성은 날로 높아져 그 소음 속에서 하나님의 진리인 신호는 분간할 길이 없다. 그래도 우리는 범사에 항상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할 수밖에 없다. 감사한 뒤 주께서 하시는 은혜에 만족하고 살 수밖에 없다.
주여, 범사에 …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주의 뜻을 이루시며 우리가 주와 동행하는 삶을 살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