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1. 8. 주일예배 설교
마태복음 11장 2-19절
광야(廣野)에서
■ 광야(廣野)는 자연 그대로의 미(美)를 갖고 있지만 문명화/도시화된 사람들에게는 불편한 곳입니다. 인위적(人爲的)/가공적(架空的)인 것에 익숙해진 사람들에게 광야는 여행지지 주거지는 아닙니다. 사람의 손이 닺지 않은 자연 그대로에 감탄은 하지만 정착하여 사는 것에는 손사래를 칩니다.
그러나 광야는 글자 그대로 인위적 가공이 없는 곳이므로 하나님의 손길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곳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소리를 자연친화적(自然親和的)으로 들을 수 있는 곳입니다. 인위적 가공이 된 건물 안에 들어온 예배당과는 전혀 다릅니다. 마이크, 스피커, 조명, 스크린, 벽, 창문, 바닥, 천장 등을 이용하거나 통해 소리를 듣는 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오히려 인위적 가공이 된 곳에서는 하나님의 소리가 굴절(屈折) 또는 변형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사람의 소리가 하나님의 소리로 둔갑됩니다. 하나님의 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소리보다는 사람의 소리에 관심을 갖고, 심지어는 하나님의 소리에는 관심을 두지 않게도 합니다. 건물 안의 각종 기기들을 통해 들려지는 사람의 소리가 하나님의 소리보다 더 멋있게 들리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건물 안 예배당에 있는 교회는 ‘하나님 없는 교회’가 될 수도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혹시 비전교회는?’이라는 질문을 던지며 본문 말씀에 주목하고자 합니다. 본문은 세례 요한이 예수께 예수의 신분에 대해 확인하는 것을 두고 답하신 내용, 그리고 세례 요한의 삶의 태도와 당시 사람들의 삶의 태도를 견주며 비판적 도전을 하신 내용 등을 담고 있습니다.
■ 세례 요한은 제자들을 예수께 보내 질문을 합니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3절) “오실 그분이 당신이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새번역)
세례 요한은 그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을 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예수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길을 예비하는 그에게 누가 예수인지를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그런데 의문이 드는 것이 있습니다. ‘요한이 누가 예수인지 왜 모르지?’입니다.
사실 두 사람은 이미 각각의 모친의 복중(腹中)에서 만난 적이 있습니다. 요한은 엘리사벳의 복중에서, 예수는 마리아의 복중에서 만났습니다. 서로 알아보고 복중에서 반가워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모른다? 좋습니다. 복중에서였으니 모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운명적으로 예수를 위해 태어난 사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모두가 예수를 몰라봐도 요한만은 알아볼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하나님이 그에게 그 정도의 능력은 주셨어야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요한은 누가 예수인지를 알아내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왜 이렇게 하셨을까요? 우리식으로 표현하자면, 왜 이렇게 불친절하셨을까요? 이는 세례 요한도 사람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가 특별한 임무를 갖고 있었으나, 특별한 존재는 아니라는 점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한은 존경의 대상은 되나, 숭배의 대상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존경의 대상과 숭배의 대상을 구분 못할 때가 있습니다. 신앙지도자는 존경의 대상은 될 수 있지만, 숭배의 대상이 되면 안 됩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 이런 일이 비일비재(非一非再)합니다. 최근에는 이런 일이 목사직 세습(世襲)으로 나타납니다. 세습은 독재의 전형적(典型的) 행태입니다. 권력을 재생산하는 것이므로 비성서적 행태입니다. 이러한 세습은 신앙지도자를 제왕적으로 이해하고 숭배함으로 인해 오는 비성서적, 비윤리적 작태입니다.
한국교회는 세례 요한 정도의 권위를 보이면 신적 추앙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추종자가 생기고, 숭배의 행태들이 뒤따릅니다. 바로 이러한 몰지각한 태도에 쐐기를 박는 것이 세례 요한을 대하는 본문의 태도입니다.
■ 특별한 임무를 부여 받았지만, 특별한 존재는 아닌 요한은 예수께 질문을 하였습니다. “오실 그분이 당신이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3절, 새번역)
이에 예수의 답변은 위트가 있으셨습니다. ‘그래, 나다.’로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4절~6절을 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너희가 듣고 본 것을 사실 그대로 전해라’ 이것이 예수의 답변이었습니다.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되는 것을 보면 내가 누군지 알지 않겠느냐’는 말씀이셨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이러한 ‘사실을 보고도 내가 누구인지 모른다면 문제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본 그대로 가서 전해라’ 이 얼마나 확실한 메시지입니까? 이처럼 예수는 위트 있게 말씀하실 때가 많습니다. 모두가 알아듣고 복음을 믿게 하려고 그러신 것입니다. 비전교회가 던지는 메시지는 늘 이런 위트가 있는 메시지면 됩니다. ‘본 그대로’ 비전교회는 보이는 모습 그대로가 메시지입니다. 말이 메시지가 아니라 모습이 메시지입니다. 설명이 굳이 필요하지 않은 모습, 그 자체로 설명이 다 되는 그런 교회면 됩니다. 그렇다면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요?
■ 예수께서 세례 요한의 제자들을 떠나보낸 후 당신과 가까이 있는 제자들에게 긴 이야기를 시작하셨습니다. 먼저 7절~9절을 봅시다. “그들이 떠나매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들은 왕궁에 있느니라. 그러면 너희가 어찌하여 나갔더냐? 선지자를 보기 위함이었더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 더 나은 자니라.’”
요(要)는, ‘너희가 광야에 있는 세례 요한의 무엇을 보러 갔더냐?’였습니다. 당시 사람들이 세례 요한에 대해 열광했습니다. 그의 메시지와 행동이 파격이었기 때문입니다. ‘회개하라, 독사의 자식들아!’와 같은 류(類)의 메시지, 광야에서 낙타가죽옷에 석청과 메뚜기로 연명하는 삶에 사람들은 열광했습니다. 더욱이 그가 지금 옥에 갇힌 이유가 헤롯왕을 향해 동생의 부인을 뺏은 부도덕한 왕이라고 지적한 것인데, 이런 정의로운 용기에 열광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열광 속에는 순수하지 못한 인간들이 등장하는 법입니다. 민중에게 열광 받는 그를 특별한 존재로 보면서 그의 숭배 지점을 찾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들은 왕궁에 있느니라.”고 하신 말씀은 일종의 야유(揶揄)입니다. 우~~ 선지자가 왕궁에서나 입는 부드러운 옷을 입을 수 없고, 광야에 사는 사람이 왕궁 스타일을 낼 수 없다는 것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광야에서 사는 그에게 왕궁 스타일을 기대한다면 이는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주의 길을 따르는 공동체이지만, 어떤 면에서 주의 길을 예비하는 공동체이기도 합니다. 이는 교회의 자리가 왕궁이 아닌 광장이고, 광야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특히 세례 요한의 자리인 광야가 교회의 자리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와 신앙지도자는 화려하고 웅장한 것과는 거리가 멀어야 합니다. 세례 요한과 똑같지는 못해도 비슷하게는 살아야 합니다.
■ 한국교회가 계속해서 <왕궁 스타일>을 성서적이라고 주장한다면, 더는 소망이 없습니다. 교회의 자리는 왕궁이 아니라 광야이기 때문입니다. 순수하고 단순한 행태로 ‘원시 복음’, 즉 예수께서 말씀하시고 사신 그대로의 복음을 살아내는 것이 <광야 스타일>입니다.
좀 더 광장을 위해 투자하고, 교회와 신앙지도자는 좀 더 가난해지는 광야로 가야합니다. 그 광야가 교회의 자리입니다.
그렇다면 그 광야에서 교회는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요? 16절과 17절에 메시지가 있습니다.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까?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① 피리를 부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악의 위험성에 대해, 선을 향한 격려를 해야 합니다.
② 춤을 추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민중을 흥겹게 하는 일에 앞장서야 합니다.
③ 우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회개의 중심에 있어야 합니다. 가장 먼저 회개해야 합니다.
④ 가슴을 치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불의에 분노하고 정의가 곳곳으로 흘러가게 해야 합니다. 항상 약자의 곁이 돼야 합니다.
■ 한국교회, 비전교회가 있어야 할 곳은 분명합니다. 어딥니까? 네, 광야입니다. 그리고 또 어디입니까? 네, 광장입니다.
우리는 광야 스타일로 광장으로 가야 합니다. 광장에서 궁중 스타일, 궁중의 권력에 놀아나고 착취당한 민중의 편이 되어야 합니다. 광장의 민중들이 기댈 수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 교회는 광야 스타일의 교회입니다. 이것이 비전교회이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