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행문 >
동남아시아 사찰 순례기- 라오스 편
첫번째 라오스사찰 방문기 (3)
탁발의 도시 루앙프라방
(Luang Prabang) (2)
미국에는 모든 아시아 전통불교 국가에서 건너 온 스님들이 신자들이 활동하고 있다. 또 미국에는 위빠사나 수행을 지도하는 기관도 많고, 수행하는 사람들도 많다. 한국에서도 위빠사나 관련 책도 많이 나오고 미얀마로 수행을 하러 갔는 사도람 많다. 필자는 2017년 말 부터 동남아시아 태국을 여러차례 방문하면서 태국지역의 유명사찰을 많이 소개하였다. 태국에서 치앙라이 지역과 태국 남부의 붓다다사 스님이 거주했던 ‘수안 모크(Suan Mokkh), 그리고 포틸락 스님이 이끄는 ‘아속’ 공동체를 방문하려고 하였지만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여행을 할 수가 없어서 우선은 태국불교 기행문은 치앙마이 사찰 소개로 끝낼 수 밖에 없었다. 기회가 되면 못다 한 태국 사찰 소개를 더 하려고 한다. 이번 호 부터는 2019년 11월에 라오스의 루앙프라방, 방비앵, 비엔티앤을 방문한 것을 토대로 라오스 불교를 소개한다. |
글 | 김형근 (본지 편집인)
탁발과 중앙박물관
탁발
루앙프라방의 상징과도 같은 탁발 때문에 나는 여기에 왔다. 태국의 여러 도시에서 수 십 차례 탁발을 한 경험이 있지만 탁발을 한다는 생각 때문에 흥분이 되었다. 탁발 가기 전날에 미리 가게에서 탁발할 물과 과자도 사서 준비해 두었다. 루앙프라방에서 탁발은 5시 30분에 시작되니까 그 전에 나와서 미리 자리에 앉아 준비를 해야 한다. 이 도시의 큰 거리인 싸싸왕웡 거리로 갔다. ‘왓 쌘 수까함 Vat Sensoukharam’ 사찰 담벽 아래에 탁발을 할 사람들을 위한 의자가 쭉 놓여 있었다. 탁발음식은 찰밥(카오냐오라고 함)을 비롯하여 과자, 물 등 여러 가지가 있는데 이 준비된 자리에 앉으려면 자리를 놓은 사람에게서 탁발음식을 사야한다. 관광객들이 탁발을 하기에는 편리한 점이 있지만 세속화 되는 현장이기도 했다. 탁발을 할 때 공양하는 사람들은 탁발하는 스님들 보다 높은 위치에 있으면 안된다. 반듯하게 앉아 공손하게 해야 한다. 이것은 아주 중요하다.
5시 조금 넘어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새벽에 탁발하러 나갔다. 탁발 음식을 파는 사람들이 드문 드문 보였다. 5시 30분 바로 옆 ‘왓 쌘 수까함 Vat Sensoukharam’
사찰에서 동자 스님이 북을 쳤다. 조금 지나자 탁발하는 스님들이 나타났다. 태국사람들이 단체로 왔고, 서양인들도 조금 있었다. 탁발이 시작되자 탁발하는 스님들, 탁발 음식을 파는 사람들, 음식을 스님들에게 주는 사람들, 사진 찍는 사람들로 거리가 매우 붐비고, 날이 밝아오기 시작했다. 그 모습도 볼 만 했다. 스님들은 사찰별로 오는데 스님들이 줄지어 오는 경우도 있었고, 몇 명만 오는 경우도 있었다. 탁발하는 동안에는 말을 하지 않는다. 분홍색 승복에 신발은 신지 않았다. 금강경에 ‘편단우견 우슬착지’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편단우견’이란 상대방에게 공경의 뜻을 나타내는 예법(禮法) 중 하나로 왼쪽 어깨에 웃옷을 걸치고 오른쪽 어깨는 드러내는 의식행위이다. 불교의 착의상(着衣上) 예법에서 양쪽 어깨를 모두 감싸는 것을 통견(通肩)이라 하는데 이는 인도의 전통예법에서 전래된 것으로 본다고 한다. 대부분 스님들은 ‘편단우견’이었는데 아주 가끔 통견한 스님들도 있었다.
스님들 중에는 동자승들이 많았는데 아마도 라오스 전통에 따라 단기 출가를 한 스님들 같았다. 그 중에는 귀걸이를 한 스님도 이었다. 태국과 루앙프라방 탁발의 다른 점은 음식을 공양받은 스님들이 탁발이 끝나면 공양한 신도들에게 축원을 하지 않았다. 나중에 알았지만 비엔티엔 등 다른 지역에서는 축원을 하였다. 그 다음 날도 탁발하러 나갔다. 이번에는 스님들과 가이드와 함께 온 한국인들이 단체로 왔다. 나의 고향 김제 금산사 신도들이라고 한다. 탁발이 끝나고 바로 옆의 절에 가서 함께 아침 예불을 했다. 그 신도들 중에 내가 아는 사람들은 없었는데 이 단체는 월주스님이 이끄는 ‘지구촌 공생회’ 현장을 갔다가 성지 순례로 이곳에 오게 되었다고 한다. 루앙프라방이 탁발의 도시로 널리 알려져서 탁발이 없는 한국불교인들이 이곳에 오는 것은 이해가 가지만. 태국인들은 단체로 왜 이곳에 와서 탁발을 하는 것이 약간 궁금했다. ‘미전도종족선교연대’라는 개신교 선교 단체의 글을 보니 태국인들은 태국 탁발이 태국인들이 스스로 세속화 되었다고 생각하여 주말에 공덕을 쌓기 위해 이곳에 와서 탁발을 한다고 한다.
루아프라방은 다시 가고 싶은 곳이다. 다시 가게 되어 탁발공양 하러 온 태국인들 만나면 꼭 그 이유를 물어보고 싶다.
탁발승들을 기다리는 사람들 탁발이 끝난 후 기념촬영하는 태국 사람들
탁발하는 공양물을 파는 라오스 여인 탁발하는 사람들이 앉을 의자. 공양물을 파는 사람들이 준비한 의자이다
싸싸왕웡 거리 ‘왓 쌘 수까함 ’ 사찰 담벽 아래 모습. 탁발하려는 사람, 구경하는 사람, 공양물 파는 사람, 사진찍는 사람들로 가득찬다 루앙프라방에서 새벽에 탁발하는 필자
김제 금산사 스님과 신도들이 새벽 탁발이 끝난 후 왓 쌘 수까함 사찰에서 함께 예불을 하고 있다 왓 쌘 수까함 사찰에서 금산사 스님들과 신도들 예불 장면
중앙박물관
루앙프라방은 도시의 규모가 작고, 높은 건물이 없다. 유네스코가 루앙프라방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면서 높이 17~20미터에 이르는 사원을 가리지 않도록 새로 짓는 건물 높이를 9미터로 제한했다. 이 도시 한 가운데에 있는 푸시 산에서 보면 이 국립박물관이 아주 가까이 보인다. 싸싸왕웡 거리를 통해 이 박물관을 들어가면 중앙에 왕궁이었는데 이제는 박물관으로 사용하는 건물이 보이고, 왼쪽에는 라오스 전형적인 건축물인 호 파방(Ho Pha Bang)이 있고 왼쪽에는 싸싸웡왕 왕의 동상과 국립극장이 있다. 동상에는 라오스어와 영어로 “이 동상은 1975년 러시아에서 주조되어 1976년 루앙프라방에 도착했고, 그 무게가 5톤”이라는 안내문이 있었다. 국립극장 옆에는 연못이 있었는데 관리가 좀 아쉬웠다. 박물관 건물은 한때 라오스를 식미지로 삼았던 프랑스와 라오스 건축양식이 결합된 양식이라고 평가를 받는다. 호빠 방은 전형적인 라오스 루앙프라방식 건축양식이다.
루이 파라방 박물관에서 본 호 파방 호파방에서 본 루앙프라방 박물관모습. 싸싸왕웡 왕의 동상이 보인다
이 박물관에 싸싸웡왕 왕과 프랑스 그림자가 짙게 배어있다. 거기에는 라오스 과거 역사가 그대로 투영되어 있다.
라오스 고대 왕국인 통일 란쌍 왕국이 18세기초에 급격히 몰락하여 란쌍 왕국은 3개로 분열되고 친 태국 세력과 친 베트남 세력의 대립으로 나라가 어지러워졌다. 이때 비엔티안 왕국의 차오아누 왕은 영국이 태국을 공격한다는 소문을 듣고 태국 정벌에 나섰다. 하지만 1828년에 태국이 비엔티안 왕국을 공격하여 멸망시키고 심지어 국왕도 태국에 끌려가 감옥에서 살았다. 비엔티안 왕국의 왕 차오아누는 1829년 감옥에서 죽었다. 결국 분열된 라오스는 태국의 지배를 받게 된다. 루앙프라방 왕국은 비엔티엔 왕국과 달리 타이에 협조적이어서 속국이긴 하나 란상 왕국을 잇는 단 하나의 살아남은 왕국이 되었다. 19세기 말(1893) 중국의 비적 패인 장족 출신 흑두당무리가 루앙프라방을 침입해 약탈을 자행하자 프랑스는 이로부터 보호를 명목으로 루앙프라방을 인도차이나의 속지로 만들게 된다. 그 후 뒤이어 옛 비엔티엔 왕국과 참파삭 왕국 지역도 프랑스령 보호지역으로 편입되게 되어 분열된 3 왕국이 하나로 되었다. 옛 란상 왕국 전지역이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식민지에 속하게 된 것이다. 프랑스인들에 의해 비엔티엔이 폐허에서 복구되어 수도로서 역할을 할 만큼의 도시로 재건되었고 타이 왕국에 의해 파괴되었던 기념비적 건축물인 파 타 루앙 사원과 하우 프라 케우(Haw phra Kaew )사원을 비롯한 많은 유적지가 복구 되었다. 1904년 라오스에서 제일 아름다운 빌딩이라는 루앙파르방의 현재 박물관인 라오스 왕궁(하우 캄-kaw kham) 또한 이 때 지어진 기념비적 건축물이기도 하다.
푸시산에서 본 호 파방 모습 호파 방의 화려한 내부 모습
박물관 건물은 1904년부터 1909년에 걸쳐 지은 왕궁이었다. 싸싸왕웡 왕은 1904년부터 1959년 까지 재위한 왕이다. 싸싸왕웡 왕은 왕위를 계승한 후 프랑스의 보호하에 1931년부터 옛 란상 왕국영토를 하나 하나 통일시켜 1942년 비엔티엔, 1946년 참파삭 지역을 포함한 과거 란상 왕국의 모든 고토를 되찾게 된다. 이로서 루앙프라방 국왕 싸싸왕웡 왕은 과거 통일 란상왕국의 영토를 아우르는 프랑스령 통일 라오스 왕으로서 명목상의 최고 지도자가 되었고, 루앙프랑방은 왕도로, 프랑스에 의해 재건된 비엔티앤이 통일 라오스의 수도가 되게 된다.
프랑스의 식민 통치 하이긴 했지만 오랫동안 그들을 괴롭혀왔던 주변의 타이, 버마, 베트남 그리고 중국의 비적의 위협에서 벗어나 3국이 통일되는 결과를 가져 왔다. 전화위복이라고 볼수 있다.
세계 2차 대전 중 잠시 일본 점령 하에 있은 후 1945년 10월 독립을 선포하였으나 드골 정권 당시의 프랑스는 라오스의 지배를 재 주장하여 1950년 프랑스 연방의 준 연방국으로 남게되었고, 그 후 1953년 10월 22일에 와서야 입헌 왕국으로 실질적인 독립을 이루게 된다.
그 기간 중 라오스 독립파들은 공산당(라오일싸)를 조직하여 월맹과 연대를 맺고 독립을 위해 투쟁하였다. 냉전의 영향은 이 구석진 나라에도 미쳐 우리 근대사와 같이 왕국의 총리를 중심으로 한 우파와 좌파와의 갈등과 대립이 심화된다.
왕궁으로 사용되었던 이 건물은 1975년 베트남 전쟁이 끝나고 그 여파로
라오스 인민민주공화국을 수립하면서 이 왕궁은 국립박물관이 되었다.
박물관에사 사진 촬영이 엄격하게 제한되었다. 이 박물관에는 왕들이 사용했던 침대, 세 명의 왕의 흉상, 불상, 도자기, 의자, 검, 신발, 악기. 병풍 등 많은 유물들이 있었다. 특히 침대가 많았던 것이 기억에 뚜렷하게 남는다. 내가 이 많은 유물 중에서도 사진을 꼭 찍고 싶은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라오스와 베트남의 관계를 잘 보여주는 베트남 호지명 주석과 라오스 지도자가 함께 찍은 기념사진이었다. 그 사진을 꼭 찍고 싶었지만 찍을 수가 없었고, 그 사진과 유물 사진을 인쇄한 박물관 도록도 판매하지 않은 것은 매우 아쉬운 대목이다.
이 박물관 뒤 쪽에는 왕이 사용하던 차들이 있었는데 1950년대와 1960년대 생산된 링컨 컨티넨탈, 1950년대 포드 차가 눈에 띄었다.
이 박물관에서 왕들의 유물보다도 더 유명한 것은 호 파방(Ho Pha Bang)이다. 이 호파 방에 라오스에서 가장 신성하게 여기는 불상인 ‘프라 방’이 모셔져 있고, 안에서 사진은 찍을 수가 없다. 경비원이 눈을 크게 뜨고 감시하면서 엄격하게 제한한다. 호파 방 안은 매우 화려한 문양으로 장식되어 있었고, 서양인들의 관람객들이 줄지어 들어왔다. 1356년 스리랑카에서 이 도시로 옮겨 온 황금불상 프라 방을 기려 루앙프라방이라는 이름을 쓰기 시작했다.
싸싸왕웡 왕 동상 라오스 박물관 호파방에 모셔져 있는 파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