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탄지회에서 다섯명이 지부 특강에 다녀왔습니다. 최해숙, 이향숙. 김명희. 김인자. 김미아 이렇게 다섯명이 함께 갔다왔습니다. 더 많은 회원이 참석했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지 못해 많이 아쉬웠습니다.
어린이문학과 동화
강사: 김상욱 교수님
어린이문학을 말하려면 먼저 ‘어린이를 어떻게 볼것인가?’가 중요하다.
어린이는 어떤 존재인가?
인권 침해란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불이익을 당하는 것.
어리다는 이유로, 늙었다는 이유로, 여자라는 이유로 약하다는 이유로 불이익을 당하면 그것은 인권침해다.
근대 이후에야 ‘어린이’ 자체를 인식하게 되었다.
지금 어린이 문학에서는 어떤 어린이를 발견해야 하는가?
어린이는 어떠해야 하는가? 란 생각이 있어야 교육도 하고 아동문학도 나온다.
그러나 어린이를 이렇게 보면 안된다.
첫째 계몽의 대상으로 보면 안된다.
‘여생’이란 말이 있다. 여생이란 덤으로 남겨진 삶, 혹은 덤으로 살아가는 삶이란 뜻인데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또 어떤 삶도 덤으로 살아가는 삶은 없다.
마찬가지로 아이들의 삶도 생을 준비하는 기간이 아니고 순간순간 삶을 치열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아이들은 한 사람 한 사람 자신의 시간으로 살아야 한다.
그런데 동화를 읽으면서까지 가르침을 받아야하는가?
문학은 삶을 경험하게 해주는 것이고 거기서 독자는 스스로 깨우쳐 가는 것이다. 그 안에서 무언가를 끌어내는 것은 독자의 몫이다.
문학작품이 계몽적이어서는 안된다.
손에 든 스마트폰이란 머리와 우리 몸의 가장 위에 있는 머리.
이 시대는 이 두 머리로 산다. 손 안에 스마트폰이 앞으로는 정보를 운용하는 수준을 넘어 정보를 판단, 비판도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머리로 할 수 있는 건 뭘까?
마음으로 할 수 있는 일은 공감하고 경험하고 상상하는 것.
학교에 다녀와서 쉴 새없이 학원으로 뺑뺑이치는 일이 아니라 풍부한 경험을 하게 해야한다.
가르침은 학교에만 맡겨라.
어린이문학의 황금시대를 연 작품을 뽑으라면 채인선의 ‘학교에 간 할머니’를 뽑겠다.
그 작품에서는 계몽의 대상이 어린이가 아니라 어른을 향하고 있다.
둘째 아이들을 천사처럼 생각하는 것은 낭만적 발상이다.
어린이를 어른의 아버지라거나 어린이를 이상적인 인간으로 보는 것 또한 오류다.
동심은 너무 짧게 반짝일 뿐 그들은 철저히 본성을 따른다.
동화에서는 계몽과 낭만이 교묘하게 얽혀 함께 굴러간다.
그 예가 <내 짝꿍 최영대>다.
유은실의 <마지막 이벤트>, 와 ‘내 이름은 백석’을 보면 낭만적이지도 않고 계몽적이지도 않다. 그냥 삶의 자잘한 일상들이 잘 얽혀서 돌아간다.
동화의 객관적 척도는 리얼리티(현실성)다.
<내 짝꿍 최영대>는 리얼리티가 없다.
황선미의 <나쁜 어린이표>에서 나쁜 어린이표를 주는 선생님과 맞짱뜨는 주인공이 눈에 뜨인다. 하지만 이 작품을 끝까지 읽어보면 작가의식이 멈추는 시점이 있다. 아이와 선생님이 화해하는 부분인데 타협을 하려다 보니 낭만적이고 계몽적으로 흘렀다.
반면 박기범의 ‘독후감 숙제’는 작가는 어떤 문제도 해결하지 않는다. 읽는 동안 독자는 주인공 아이의 마음을 다 알게 된다. 그리고 독자는 이 작품 속에서 희망을 본다. 그런 면에서는 계몽적이고 낭만적이다. 하지만 주어진 틀 안에서 현실성이 흔들리지 않고 뚜벅뚜벅 걸어간다.
동화는 이야기가 쭉 진행되는 과정 속에서 현실성(리얼리티)가 있어야 한다.
인간은 질 것이 뻔한데도 싸워야할 때가 있다. 이것이 사람을 출렁이게 한다.
동화는 현실성(리얼리티)이 정점에 있어야 한다.
권정생의 ‘강아지똥’은 계몽적이고 낭만적이다. 환타지라도 현실성이 있다. 하지만 좀 낮다. 계몽성과 낭만성이 더 크다.
<몽실언니>도 낭만적이고 계몽적이다. 그러나 현실성이 탄탄한 작품이다. 우리의 할머니들이 그렇게 살아온걸 우리는 알고 그 힘이 오늘 우리를 있게 했으므로.
첫댓글 송탄지회 지회장님이 지부회원연수 김상욱교수님 강의내용을 잘 정리해주셔서 함께보려고 퍼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