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비평] BBK검찰 무리수 드러난 날 수면 위로... 연예인은 삶이 공개된 개인일 뿐.
- 이안. 영화평론가 I angela414@paran.com
'밀리 바닐리' 사건은 세계 대중 음악계에서 희대의 사기 사건으로 기억된다.
기가 막히게 매력적인 흑인 남성 듀오가 대중 음악계에서 권위 높기로 세계 최고인 그래미상에서 신인상을 수상했다가 알고 보니 잘 짜여진 음악에 맞춰 입만 벙긋대는 립싱크 가스였다는 게 우연히 방송사고로 드러나면서 상이 취소되고,
그래미도 체면 구기고, 기획자의 의도대로 기막힌 춤 솜씨에 몸매로 대중 음악계를 주름잡던 멋진 젊은 춤꾼들을 영영 묻어버렸다. 1990년의 일이다.
그리고 이태 뒤, 한국에서는 <난 알아요>라는 곡으로 대중 음악계에 랩 댄스를 선보이는 아이돌 그룹이 등장했다.
격렬하게 춤추다보니 호흡이 버거워 노래는 립싱크로 소화했던 그들, '서태지와 아이들'이 첫 선을 보인 방송에서 한국 대중문화 아이돌의 원조라 할 수 있는 전영록에게 평가를 요구하자 그는 이렇게 얘기했다.
"평가는 시청자 여러분에게 맡기겠습니다"
그렇게 대중에게 맡긴 평가는 놀라운 결과를 낳았다.
'서태지와 아이들'은 그저 스타가 아니라 대중문화의 패러다임을 바꾸면서 그룹의 리더인 서태지는 '문화 대통령'이라는 어마어마한 칭호와 더불어 부와 명예를 누리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 안 되어 <난 알아요>는 밀리 바닐리의 '소녀여, 너는 그게 진실이라는 걸 알아 (Girl You Know It`s True)'의
표절이라는 의혹이 제기되었고, 서태지는 그건 표절이 아니라 곡을 만드는 샘플링의 참조 자료였다고 밝혔다.
대중은 그런 해명을 받아들였고, 그래서 그 후로도 오랫동안 서태지와 아이들은 승승장구 했으며, '서태지와 아이들'이 해체하고, 리더 서태지는 은퇴를 선언했다가 다시 컴백 의사를 밝히며 새로 음반을 발표할 때마다 매번 표절 시비에 휘말리거나 립싱크 논란으로 시끄럽더라도 지금까지 거쳐온 행보에는 거칠 것이 없었다.
서태지-이지아가 뭘 잘못했나
그런데 요즘 갑자기 그가 지금까지 쌓아온 모든 것에 대해 의혹이 불거지고 있다.
명색이 뮤지션인데 음악이 문제가 아니라 사생활의 일부가 밝혀졌다는 이유로.
사생활에 대한 비난의 촉은 엉뚱한 방향으로 비껴가고 있다.
결혼 사실을 밝히지 않았다거나, 이혼 소송을 다투는 예전 배우자가 다른 사람과 만나는 것이 문제라거나, 그 배우자가 연예인이 된 것조차 문제라거나 하는 식으로.
심지어 꽤나 진보적인 논객이라는 사람조차 논란의 중심인물 가운데 하나가 된 여성 연예인이 자신이 서태지와 이혼했다는 것을 밝힐 법적 의무는 없으되 적어도 현재 연인에게는 알렸어야 할 도덕적 의무는 있다는 견해를 밝히는 지경까지 왔다.
왜? 어린 나이에 결혼을 했다가 그 결혼생활이 행복하지 못해 이혼을 했고, 이혼 과정에서 미심쩍은 부분이 있어서 법으로 좀 시시비비를 가려보려는 것이 뭐 그렇게 내세울 일이라고 세상에 알려야 한다는 말인가?
열여섯 성춘향이 이몽룡과 세상 모르게 백년가약 맺어 희희낙락했다고 남원 고을, 조선 천지에 떠들어 댄 적이 있었던가? 몽룡이 춘향을 미리 '내 아내요' 했으면 겪지 않아도 좋았을 고초를 피칠갑되게 겪게 하고서야 정절을 인정하고 공식적인 아내로 공표한 건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조선 대중의 판타지다.
그런 춘향 판타지도 이런 세상에서는 참 버티기 힘들겠다.
어린 나이에 동경하던 아이돌 스타를 만나 자기 존재를 감추고 살다가 철들어 세상에 나서자니 감추는 것도 많고, 가리는 것도 많은 거야 당연한 일이다. 그러다 어른 되어 보니 풀어야 할 개인사가 있을 것이고, 그래서 남들 모르게 법으로 좀 따져 보려고 했던 일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게 그렇게 잘못된 일일까?
진실을 밝히는 것은 중차대한 공익이 아니라 한 개인의 실존을 압살하는 족쇄가 된다면 굳이 세상 다 알게 들추지 않고 조용히 해결하려던 것이 죄가 되는 일일까?
토마스 하디의 19세기 소설 <테스>는 어린 날 겪었던 내력을 밝히는 것이 얼마나 비극적인 결과를 가져오는 지를 보여주는 고전이다. 그 비극은 영화로도 재현되어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더랬다.
어여쁜 소녀가 철들기 전 권력자와 인연을 맺고, 나중에 정말 사랑하는 이를 만나 그와 결혼하면서 자신의 과거를 밝히는 순간 사랑했던 이는 떠나버리고, 그래서 지옥같은 삶을 살다가 우여곡절 끝에 다시 사랑을 확인하는 순간, 세상이 옭죄어 들면서 살인과 사형으로 끝맺은 테스 이야기는 지금까지 잔혹하게 남아있다.
과연 솔직하다는 것이 누구를 향한 것인지, 어린 날의 미숙한 이성 경험이 평생을 좌우하는 잣대가 되는 것이 옳은 것인지, 사랑하는 이에게 드리운 과거가 지금 내 앞에 있는 현재보다 중요한지를 남이, 세상이 어찌 판단할 것인가?
그런 과거를 세상으로부터 존중받는 상대를 위해 감추노라면 <테스>(로만 폴란스키 감독, 토마스 하디 원작)처럼 권력의 노리개가 되어 번듯하게 부는 누리지만 속 깊은 행복은 포기하거나, <주홍글씨>(빔 벤더스 감독, 너데니얼 호손 원작)의 주인공 헤스터처럼 사랑했던 이의 명예를 지켜주기 위해 평생 자신의 내력을 손가락질 받으며 살아야 할 수도 있다.
지금 스캔들의 주인공이 된 한 여배우가 겪어야 할 일은 이미 고전에서 극단적으로 드러난 상황이며, 그래서 그 여배우가 감출 수 있을 때까지 감추려고 한 속내는 굳이 파헤치지 않아도 알 만한 사정이다.
미디어 폭로전에 진정 알아야 할 뉴스 묻혀, 진짜 공인은 세금 받는 사람
여기서 문제 삼아야 할 것은 그들이 왜 속사정을 밝히지 않았느냐가 아니다.
한 개인이 겪는 구구한 내력을 법적으로 가려보려 하는 민사 사건이 하필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건이 문제가 되는 시점에서 사건을 맡은 공식적 법률 대행자가 있는 마당에 느닷없이 왜 초특급 스캔들로 까발려졌는지가 더 문제다.
사제는 죄를 고백한 자를, 의사는 환자를, 변호사는 의뢰인을 지켜야 하는 것이 원칙인데 어디서 비밀이 새어나간 것일까? 어쩌다 언론이 호들갑을 떨며 대중에게 분노하라고 부추긴 것일까?
지켜져야 할 가장 기본적인 원칙은 유명 연예인이 사생활을 숨긴 것을 밝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개인이든 사생활을 보호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대중들은 이미 서태지가 밀리 바닐리를 참조하고, 현란한 댄스를 위해 라이브를 포기하고, 신비주의 라는 명목으로 사생활을 차단했을 때 동조했다.
실체보다 이미지가 전복적이라고 환호하고 승인했더랬다.
뮤지션보다 스타를, 스타 중에서도 아이돌을 지지했다.
아이돌은 원래 우상이고, 우상은 허상이다.
허상을 넘어서서 보자.
대통령이 관련된 경제범죄사기 BBK사건을 맡은 곳이 서태지 이혼 상대 담당 법률회사인데, 판사도 실명을 몰라 충분히 지켜졌어야 할 의뢰인의 신원이 어떻게 세상에 알려졌는지 그것도 하필 BBK사건에서 검찰의 무리수가 드러난 날.
민주주의의 근간인 삼권분립의 원칙에서 사법부가 어떻게 허술하게 무너져 있는지를
그렇게 민주주의 원칙이 망가지는 것보다 연예인 사생활에 주목하는 동안,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테스는 교수형을 당할 것이고, 헤스터는 가슴에 주홍글씨를 달고 세상을 경멸할 것이다.
어차피 사랑은 인력으로 안 되는 것, 각자의 뜨거운 가슴에 맡겨두라.
연예인은 공인이 아니라 삶이 공개된 개인일 뿐이다.
진짜 공인은 공적 자금인 세금을 받아가며 공적인 업무를 하는 사람들이다.
누가 누구에게 사과를 하든, 사랑을 하든, 결별을 하든 그건 그들의 가슴 아픈 개인사로 좀 내버려 두자.
진짜 공인들, 대통령부터 국회의원, 법관들까지 세금으로 임금에다 권력까지 받아먹는 이들에게 제대로 책임을 묻고 따지는 게 먼저다.
첫댓글 헉..헉...ㅋㅋㅋ....딴데서 본 기사라 스크랩 못하구 일일이 타이핑을...ㅋㅋㅋ...멋져요...완전 동감...읽어들 보시라구요..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