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지 터너
조 용 휘
눈에 띄지 않는 사람이 있다. 실내악 또는 피아노 반주에서, 공연 내내 무대에 있으면서도 청중에게 잘 보이지 않는 ‘페이지 터너’이다. 말 그대로 ‘책장(page)을 넘겨주는 사람(turner)’인 그는 피아니스트가 연주하면서 직접 악보를 넘기기 어려울 때 옆에서 그 일을 대신해 준다. 쉽고 간단한 일처럼 보이지만 악보에 대한 전문 지식을 갖추는 것은 물론, 연주자와도 호흡이 맞아야만 하기에 아무나 할 수 없다.
이들에게는 몇 가지 수칙이 있다. 연주자보다 화려한 옷을 입거나 연주자를 건드려서도 안 되며, 적절한 타이밍에 악보를 넘겨야 한다. 특히 악보를 넘길 때 소리를 내어서도 안 된다. 일명 '무대의 숨은 연주자' 로 통하는 그들은 원활한 공연을 위해 꼭 필요한 일을 하지만, 자신을 드러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연주자 옆에 가만히 앉아, 피아니스트가 원하는 시점을 맞춰 주다가 공연이 끝나고 연주자가 인사할 때면 슬며시 피아노 뒤로 숨는 것은 보통이다. 주목 받지는 못하지만 그 역할이 결코 작지 않음은 때로는 연주자보다 그들로 인해 연주의 성패가 갈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세상은 이처럼 빛나는 이들이 이끌고 가는 것 같지만 오히려 작은 일에 충실한 이들이 성패를 좌우할 수도 있다.
우리가 즐겨 보는 영화나 드라마도 마찬가지다. 주인공인 주연 배우의 연기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조연의 역할이다. 그들은 약방의 감초처럼 맛깔스럽게 연기함으로써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고 재미를 더해 준다. 등장하는 배우들과 달리 얼굴 없는 페이지 터너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기획, 극본, 연출, 감독, 무대 장치, 음향 효과, 분장, 조명 등 다양한 분야를 맡고 있는 사람들이다.
살다 보면 스스로를 내세우기는 쉬워도 스스로를 낮추기는 어렵다. 알아주지 않는데 자기 일에 충실하기란 더더욱 어려운 일이다. 그래도 주위를 유심히 살펴보면 열악한 여건 속에서도 힘든 일을 묵묵하게 수행하는 사람들이 좋은 여건에서 편안하게 일하는 사람보다 훨씬 더 많다. 세상이 깊은 잠에 빠진 새벽을 보라! 거리를 청소하는 미화원이나, 조간신문 배달원, 잠을 잊은 채 운전하는 기사 등……. 특히 3D 업종이라 일컫는 각종 산업체에서 땀 흘리며 일하는 산업역군이 바로 인생의 페이지 터너들이다.
그들이 있기에 나라가 발전하고 사회가 원활하게 굴러갈 수 있으리라. 비록 스포트라이트를 받진 못할지라도 우리에게 꼭 필요한 존재이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연주자와 청중이 몰입할 수 있도록 돕는 페이지 터너, 오늘의 시대 에 우리가 가져야 할 마음가짐이 아닐까 싶다. 이렇게 뒤에서 돕는 사람들이 많아진다면 이 세상은 살만 해질 것이다. 나도 페이지 터너의 마음으로 남은 시간을 걸어가고 싶다. 좀 더 아름다운 세상을 남겨 주기 위하여 작은 힘이라도 보탤 것이다.
(2013. 11. 13)
첫댓글 멋진 사람들입니다. 새로운 단어를 참바세님 덕에 또 알았네요. 늘 새로운 정보를 찾고 공부하시는 교장님 존경합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좋은 글 감사, 하루를 책 한 쪽으로 보면 모두가 페이지 터너인 것 같군요. 피아니스트는 가까이 있는 사람이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