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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아프리카 전역과 보급문제
Martin L. van Creveld
Professor, Hebrew University of Jerusalem
[정서] 신수기
ssn668@hitel.net
[교열] 채승병
webmaster@panzer.pe.kr
이 글은 Martin van Creveld 교수가 저술하고 1977년에 캠브리지 대학 출판부에서 펴낸 "Supplying War: Logistics from Wallenstein to Patton"이라는 책의 제 6 장, Sirte to Alamein 부분을 번역한 것이다. 문서 정리에는 하이텔 군사동호회 및 2차대전사연구 작은모임 톰과제리(wwii) 등에서 활동 중이신 신수기 님께서 수고해주셨다. 신수기 님에 의하면 이 책은 우리나라 육군 병참학교 전투발전부에서 내부자료로 1982년에 번역-출간하였으며, 이 번역판본을 참고로 하여 번역상의 오류를 수정-정리하신 것이라고 한다. 수고해주신 신수기 님께 다시금 감사의 말씀을 올리는 바이다.
지난 번 이 책의 5장을 번역한 "바바롯사 작전과 보급문제" 글을 읽어보신 분들께서는 아직 수적으로 부족했던 자동차와 제대로 가동이 되지 못했던 러시아의 철도망 하에서 독일군이 얼마나 보급에 곤란을 겪었는지 느끼셨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보급 문제가 가장 첨예하게 대두되었던 곳은 역시 북아프리카 전역이라고 볼 수가 있다.
북아프리카 전역은 상대적으로 우리나라에도 롬멜과 관련된 몇몇 번역서들이 소개되면서 어설프게나마 어느 정도 알려진 전역이다. 하지만 국내에 소개된 번역서들 대부분은 너무 일방적으로 롬멜을 미화하고 북아프리카에서 독일이 실패한 이유를 히틀러를 위시한 독일군 수뇌부의 무능함에 그 책임을 돌리고 있다. 그리고는 롬멜이 사상 최고의 명장인양 치켜세우면서 그의 전술적 행동이 기동전의 표본이라는 식으로 장점만을 부각시키다보니 정작 그 이면에 숨겨진 문제들에 대해서는 전반적인 인식이 매우 부족하다.
그러나 롬멜이 그렇게 장점만 있던 장군이었을까? 그는 영광의 가도를 쫓아 달리는데는 특출한 감각이 있었으며, 전장에서 일신의 안위를 따지지 않는 용장이었다는 점에서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겠지만, 그의 전략적인 안목이라든가 대 부대의 지휘관으로서의 소양에는 부족한 점 또한 매우 많았다. 특히나 그가 북아프리카에서 독단적으로 취한 행동들은 독일군 수뇌부의 북아프리카에서의 기본 전략을 뒤흔드는 월권 행위였던 것들이 많았으며, 결과적으로 그러한 행동들은 일시적인 승리의 기쁨을 맛보게는 해주었으나 장기적으로 북아프리카에서 독일군의 존립 기반을 뒤흔들고야 말았다. 우리는 1개 기갑군의 사령관으로서는 적합하지 않게 지나치게 사령부를 내팽개치고 최전선을 헤매느라 적시의 조치에 미비했던 점, 후방의 적 전투력을 확실히 소멸시키기도 전에 성급히 내달려서 과도한 손실을 유발시켰던 점, 작전적인 부분에 지나치게 집착하여 보급과 같은 지원문제를 깡그리 무시했다는 점 등 많은 롬멜의 과오 또한 명확히 인식하고 냉정히 평가할 수 있어야만 북아프리카 전역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롬멜의 작전적인 측면에서의 여러 단점이야 앞으로 북아프리카 전역의 전투들을 분석하는 글에서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하고, 여기서는 그가 무시하고 오도했던 북아프리카 전역과 보급 문제의 상관관계에 주목해보기로 하자. 정말 그의 말처럼 독일 수뇌부가 2개 정도의 기갑사단만 더 지원했더라면 모든 중동문제가 해결될 수가 있었는지, 몰타 섬이 말썽을 부린 것이 그 아닌 다른 사람들의 책임이었는지 등등 일반적인 2차대전사 팬들이 잘못 알고 있는 부분들에 대해 새롭게 되새겨 볼 여지가 많다고 여겨진다.
참고로, 이 책은 이미 번역문을 올린 제 5 장 바바롯사 작전 부분, 이하에서 살펴볼 롬멜의 북아프리카 전선에 대해 언급한 제 6 장, 패튼의 북프랑스 전선에 대한 언급한 제 7 장 등 3개 장에서 2차대전과 보급전의 문제에 대해 논하고 있다. 이들 모두는 상당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글들로서 마지막 제 7 장까지 앞으로 계속 신수기 님의 협조를 얻어 모두 올려보고자 기획 중이다. 그리고 2차대전사 부분 이외에도 이 책 자체가 상당히 재미있으며, 세간의 평가도 매우 좋다. (아마존에 가보시면 별 다섯 개의 평점을 얻은 것을 확인할 수 있다.) 2002년 현재에도 온라인 서점들에서 쉽게 영어판을 구할 수 있는만큼 관심있는 독자 분들은 구입해서 완독해보실 것을 아울러 권한다.
1. 사막의 난점들
추축국의 중동전략이 히틀러로 하여 전쟁에 이기게 할 수 있었는가 하는 문제는 제 2 차 세계대전사에서 아직도 논란이 되고 있는 문제 중의 하나이다. 초기의 평론가들은 리비아에서 이집트를 거쳐 팔레스타인-시리아-이라크 그리고 페르시아만에 이르는 롬멜의 공격 계획을 히틀러가 지원했더라면, 그는 영국과의 전쟁에서 승리에 일보 더 가까이 갈 수 있었으리라고 주장하는 반면, 최근의 많은 연구가들은 이러한 견해에 의문을 제기하고 결론적으로 히틀러가 지중해 지역을 단순히 부차적 전구로 본 것은 옳았다고 주장한다. 이들 양자의 견해 차이야 어떻든 이 문제가 히틀러의 선택에 달린 것이었다는 데에는 의견이 일치하고 있다. 즉, 히틀러가 지중해 지역에 병력을 증파할 수 있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병력을 증원했어야 옳았는가의 문제이다. 그렇지만 이는 결코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 롬멜은 그의 비망록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보급 문제의 해결에 실패한 점을 비난한 반면, 보급에 관한 조정을 책임지고 있던 로마주재 독일대사관 무관[1]은 그 문제는 당초부터 해결될 수 없는 것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롬멜의 비망록이나 무관의 보고서는 모두 확증없는 조잡스러운 것이었고, 두 사람 모두 보급에는 무관심하였기 때문에 앞서 말한 공격의 목표가 추축동맹군의 도달범위 내에 있었는가 아닌가 하는 문제는 아직 해답이 나오지 않았다.
우선 이 문제 자체를 명백히 정의해야 한다. 첫째로, 히틀러와 그의 참모들이 지브롤터 점령계획과 프랑스령 서북부 아프리카(인접 도서를 포함해서) 점령 계획을 실제로 구상한 것은 사실이지만, 만약 독일이 영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면 그것은 기껏해야 지중해 동부지구에서였다는 것을 가정해야 한다. 둘째로, 추축국의 중동지역 진출은 남부 리비아와 이집트에 한정되었으리라는 점도 가정해야 한다. 왜냐하면 터키를 경유하는 공격계획은 소련의 저항을 받게 되고 그것은 독소전쟁으로 발전될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었다.[2] 이상의 두 가지 가정을 받아들인다면 독일,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 터키와의 협력관계에 관련된 대부분의 정치-외교적 문제점들을 무시할 수 있으며, 또한 과연 독일과 이탈리아의 군대가 리비아에서 이집트와 중동으로 연결되는 진격을 감행하는 것이 군사적으로 가능했는가 하는 문제에 초점을 맞출 수 있게된다.
2. 롬멜의 첫번째 공세
전쟁사를 분석해볼 때 사막작전은 종종 독특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고 일컬어진다. 특히 보급 분야는 더욱 그러하였다. 일반적으로 보급의 역사란, 군대로 하여금 현지징발에 의존하는 체제에서 점차로 탈피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변천은 걸코 간단하고 단순한 일이 아니라는 실례를 우리는 많이 보았다. 러시아전선에서의 구데리안 장군이나, 프랑스에서 기계화부대를 지휘한 패튼 같은 인물들도 최소한의 현지징발을 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두 장군의 뒤에 대규모의 행정기구들이 따라다녔는데 그 목적은 병참지대를 편성하여 그것을 총괄적인 전쟁수행을 위해 이용하는 것이었다. 사막에서 전투를 하는데는 영국이나 독일 모두 낙타의 똥오줌 말고는 이용할 만한 것을 발견할 가능성이 전혀 없었다. 그러나 영국군은 불충분하긴 해도 이집트에 상당한 기지를 가졌던 반면에, 독일군은 최소한의 기본적인 필수품마저도 해상수송에 의존해야 했다. 실로 2년 남짓한 기간 동안 롬멜군이 소비한 물자는 모두 이탈리아에서 일일히 나무상자에 포장되어 지중해를 건너와야만 했다. 탄약, 유류, 식품 등 모두가 이러한 방법으로 수송되었고, 사막의 상태는 급수조차도 수천 마일 떨어진 곳에서 운반해와야만 했을 정도였다.
문제를 더욱 심각하게 만든 것은 엄청난 거리였다. 그것은 독일국방군이 유럽에서 직면했던 거리를 훨씬 능가하는 것이었다. 폴란드의 독소 접경선 상의 브레스트-리토프스크에서 모스크바까지의 거리는 1000km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은 대략 트리폴리에서 벵가지까지의 거리와 비슷하고, 트리폴리에서 알렉산드리아까지의 거리의 반밖에 되지 않는다. 95cm 폭의 협궤 철도선을 제외하면, 이 광활한 공간을 지나기 위해선 도로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으며 그 도로마저도 1개 뿐이었다. 해안을 따라 끝없이 뻗은 발비아(Balbia) 가도가 그것이다. 그런데 이 도로는 때로는 우기의 홍수로 차단되기도 하고, 항상 머리 위에서 배회하는 비행기의 좋은 목표가 되기도 하였다. 이 도로를 예외로 친다면, 부득이 사막길을 무리해서라도 이용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결국 왕복하는 차량 때문에 이 사막길의 손상은 매우 심하였다.
사막전에는 거의 익숙해 있지 않던 독일군은 그들의 경험부족에서 오는 여러 가지 추가적 난관에 직면하였다. 예를 들면, 독일군의 식량은 지방분이 많았기 때문에 더운 아프리카의 풍토에는 적합치 못하였다. 이와 같은 이유 등으로 인하여 병사들이 리비아에 2년 이상 주둔하는 경우에는 평생 건강에 치명타를 받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독일제 엔진, 특히 오토바이의 경우 과열되기 십상이었으며, 전차 엔진의 경우는 그 수명이 2000~2500km에서 500~1500km로 줄었다. 더위와 도로 조건의 미흡에서 오는 몇몇 악영향들은 철저한 정비로 예방되었으나, 롬멜이 이러한 일에 특별한 신경을 쓴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정비 문제는, 독일과 이탈리아의 장비가 표준화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어려웠다. 롬멜은 몇 년 후에 회고하기를, 장군이란 보급에 관하여 개별적인 주의를 기울여 군수 참모로 하여금 자발적이고 독창적인 일을 하도록 독려하여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작전상의 전망과 보급의 가능성을 비교할 경우 종종 보급 쪽이 무시되어 왔다.
독일국방군의 북아프리카 파병문제는 1940년 10월 초순에 처음 본격적으로 검토되었다. 독일군 참모장교인 리터 폰 토마(Ritter von Thoma) 장군이 현지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이집트로 진격하는 이탈리아군에 파견되었다. 10월 23일 그는 사막에서는 오직 기계화부대의 투입만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보고하였다. 성공적인 작전을 위해서는 4개 기갑사단으로 충분할 것이며, 또 이 병력은 사막을 지나 나일강 계곡까지 진격하는데 있어서 보급적 측면에서 지탱할 수 있는 최대 한도였다. 폰 토마 장군은 또한 이 소수의 병력은 최정예부대여야 하므로 리비아의 이탈리아군은 독일군으로 교체시켜야 한다고 했는데, 이에 대하여 뭇솔리니가 결코 동의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히틀러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아무런 결단도 내려지지 않은 채로 그 문제는 당분간 언급되지 않았다. 1941년 1월, 또다시 이 문제가 거론되었는데 이 때에 이탈리아군은 이집트로 더 진격하기는커녕, 웨이블(Wavell)의 나일군에 의해 키레나이카(Cyrenaica)로부터 퇴각하였다. 히틀러는 비록 북아프리카 전체를 잃어도 추축국은 "군사적으로 감내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와 같은 사태가 발생할 경우, 뭇솔리니의 입장에서 정치적 반발이 있을 것을 크게 염려하여 영국군에 대항하기 위한 반격부대를 파견하려 하였다. 그의 참모들이 지적했듯이 그와 같은 지원부대의 파견은 러시아 침공에 대비해서 준비된 부대 중에서 차출되어야 하기 때문에 총통은 그 규모를 가능한 한 최소단위로 편성하려고 결심하였다.
사실 이와 같은 소규모 부대를 유지하는데 있어서도, 처음부터 문제점이 드러났다. 약간의 병력과 소량의 보급물자는 비행기로 수송가능하였으나(1942년 초 상당수의 수상 비행기를 포함한 360대 정도의 비행기가 차출되었다), 대부분의 물자는 해상으로 수송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탈리아에서 해상수송하기 위한 적재항구 문제에 있어서는(비록 철도망이 부족하여 대부분의 수송이 나폴리로 집중되었지만) 나폴리 및 바리, 브린디시, 타란토 항을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어려움이 전혀 없었다. 그러나 1941년 이탈리아군이 키레나이카에서 퇴각함으로써 아프리카에서 보급물자를 내려놓을 항구가 단 하나로 줄어들게 되었다. 그곳은 바로 트리폴리였다. 트리폴리는 리비아 최대의 항구로서 이상적인 조건하에서는 5척의 화물선과 4척의 병력수송선이 동시에 정박할 수 있었다. 그 능력은 불의의 사고에 의한 파괴나 공습에 의한 노동력의 분산이 없는 한, 한달에 4만 5천톤에 달하였다.
그러나 트리폴리 항은 북아프리카군에게 보급지원을 제공하는 단순한 초기 기지에 불과하였다. 작전적 동기를 이유 삼아서 히틀러는 현명하게도 다음의 조건 하에 아프리카에서 뭇솔리니를 지원하는데 합의하였다. 즉, 이탈리아군이 바라는 것과 달리 이탈리아군의 수비 범위는 트리폴리 및 그 주변지역이 아니라, 기동작전을 전개할 수 있고 공습으로부터의 방어도 가능한 넓은 지역으로 한다는 것이었다. 이 결정에 더해 처칠이 웨이블 군을 그리스로 보내기 위해 철수시키지 않을 수 없었던 사실도 한 원인이 되어, 트리폴리 동쪽으로 500km 떨어진 시르테(Sirte)에 전선을 형성하게 되었다. 하지만 트리폴리에서 동쪽으로 연결되는 철도가 불충분하였기 때문에 독일군은 가장 유리한 조건 하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동차 수송에 의해 보급할 수 있는 적정 거리의 1/2의 제한된 범위에서 작전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뭇솔리니는 그의 참모들의 조언에 의하여 이러한 사실에 관해 로마주재 독일대사관 무관 폰 린텔렌이 주의를 기울이도록 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독일군은 뭇솔리니를 무시하기로 하였으며, 그 결과 보급과 작전 사이의 의견 충돌이 발생하여 아프리카에서의 독일군 작전을 끝까지 괴롭히게 되었다.
당초 독일군이 리비아에 보낸 기계화부대는 1개 사단당 물을 포함하여 하루에 350톤의 물자를 필요로 했다. OKH가 계산한 바에 의하면 350톤의 물량을 사막지대에서 500km 이상 수송하자면 각 부대소속의 차량 및 예비 차량과는 별도로 각각 2톤 트럭 30대로 구성된 39개의 수송대가 필요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였다. 롬멜은 트리폴리에 도착하자마자 증원군을 요청하기 시작하였으며 히틀러는 OKH 총장 할더의 반대를 묵살하고 그에게 제 15 기갑사단을 증파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결정에 의해 독일아프리카군단(DAK)의 보급에 필요한 자동차수송 능력은 6천톤으로 늘어났다. 이는 러시아 침공을 준비하고 있던 1개 군단당 배당된 수송부대 양의 10배에 해당하였으므로 롬멜의 무리한 요구가 바바롯사(Barbarossa) 작전에 차질을 가져오지나 않을까 염려하는 OKH 병참감의 거센 항의를 받았다. 게다가 롬멜이 더 많은 증원부대를 받거나 혹은 500km의 한계를 초과하여 진격한다면 차량의 부족이 계속 일어날 것은 당연하였다. 또한 해안을 통한 연안해상수송도 문제 해결에는 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란 사실도 인식되고 있었다. 따라서 히틀러는 롬멜에게 트럭들을 보내주면서, 더 이상의 지원을 필요로 할 어떠한 대규모의 공격도 취하지 말 것을 명백히 지시하였다.
그러나 롬멜은 공세를 취하고 있지도 않으면서도 두 번째의 사단 증파를 요구하였으며 이 사실이 벌써 보급상황을 위험에 빠뜨리게 하였다. 이탈리아군과 합치면 리비아 내의 추축동맹군은 7개 사단이 되었으며, 공군부대와 해군부대를 합친다면 한 달에 7만톤의 물자를 필요로 하였다. 이것은 트리폴리 항의 하역능력을 초과하는 양이었다. 그 때문에 만약 프랑스가 튀니지의 비제르타(Bizerta) 항을 통한 한 달 2만톤의 보급물자의 통과를 허용하지 않는다면 위기가 발생할 것은 틀림없었다. 롬멜은 항상 명목상의 상관인 이탈리아인들과 사이가 나빴지만 이번에는 합의에 도달하였다. 왜냐하면 뭇솔리니는 오래전부터 튀니지 침공의 기회를 엿보아왔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비제르타 획득이라는 롬멜의 요구는 적극적인 지지를 받았다.
이리하여 비시(Vichy) 정권과의 교섭이 시작되었다. 최초에 프랑스 수상인 다를랑(Darlan) 제독은 아프리카에 배치된 프랑스의 트럭을 독일에 매각할 것을 요구받았는데 그는 이에 즉각 동의하였다. 히틀러는 이러한 성공에 용기를 얻어서 5월 11일 직접 다를랑을 만나 회담을 열었다. 여기에서 그는 트리폴리항의 양륙시설은 최대능력으로까지 사용되고 있으며, 비제르타 항 사용허가를 얻고 싶다고 말하였다. 다를랑은 이 요구에 동의하였고 5월 27일과 28일에는 파리에서 독일-프랑스 의정서가 조인되어 독일의 비제르타 항 입항권이 인정되었다. 또한 이 의정서에 의해 추축국에 의한 프랑스 선박의 사용에 관해서도 결정되었으며, 나폴리가 폐쇄될 경우 툴롱(Toulon)항을 적재항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아울러 허용되었다. 그러나 바로 이때 비시 정권은 영국의 시리아 침공에 의한 경고를 받게 되었다. 또한 독일도 다른 이유로 인해 프랑스와 합의한 것을 후회하게 되었으며, 결국 그 해 여름이 다 가도록 추축국의 물자는 비제르타 항을 통해서는 하나도 하역되지 못하였다.
한편 롬멜은 히틀러의 명령을 어기고 4월 초에 공격을 개시하였다. 그는 영국군에게 기습을 가하여 그들을 리비아에서 축출하고 토브룩(Tobruk)을 포위하였다. 제 1 차 공격에서 독일군은 영국군을 토브룩에서 축출하지 못하였으며, 다른 한편에서는 이집트 국경 끄트머리에 있는 솔룸(Sollum)에서 도달해서야 진격을 멈추었다. 롬멜의 이러한 전격적 돌진은 전술적으로는 훌륭하기는 하였지만, 전략적으로는 대실패였다. 왜냐하면 결정적 승리도 거두지 못한 채, 그러지 않아도 늘어나 있는 병참선에서 1100km가 더 추가되었기 되었기 때문이다. OKH가 예언한 대로 그 결과로서 발생한 부담은 롬멜의 후방부대가 견딜 수 없을 정도로 큰 것이었다. 그리하여 5월 중순경 롬멜을 처음으로 그의 보급에 대해 불평을 하기 시작하였으나 불평은 이것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가 직면한 곤경은, 지금까지 종종 주장된 것처럼 보급지원을 방해하는 몰타(Malta) 섬의 적군을 격멸시키는데 실패한 데 기인하는 것은 아니었다. 지원 물량이 가장 많았던 5월조차 아프리카로의 수송도중에 손실된 것은 선적한 보급물자의 9%에 불과하였다. 2월에서 5월에서 이르기까지 롬멜 및 이탈리아군은 평소 소비량보다 4만 5천톤이나 많은 32만 5천톤의 물자를 공급받았다. 그러나 일단 공격을 취하자 예하의 수송수단만으로는 트리폴리에서 전선까지의 거리를 연결하기가 힘들어졌다. 그 결과 항구에서는 물자가 쌓여가는 한편 전선에서는 물자 부족의 상태가 발생하였다. 그 양은 얼마 되지는 않았으나(예를 들면 5월 6일, 긴급히 필요하게 되었던 대전차포탄 재고는 수 톤에 불과하였다) 중요한 품목들이었다. 동시에 이탈리아군은 더욱 심각한 곤란을 겪고 있었다. 즉, 그들은 22만 5천명의 병력에 대하여 트럭은 고작 7천대 밖에 보유하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따라서 6월에는 위기가 닥쳐왔다. 12만 5천톤의 기록적인 물자가 하역되었으나 정세는 나날이 위험스러워졌고, 롬멜은 하루하루를 겨우 연명해가야만 하였다. 6월 4일 추축동맹군은 이집트 국경에서 불과 500km 밖에 떨어져있지 않은 벵가지 항을 재점령하였으나 이것에 의해서도 사태는 그다지 개선되지 못했다. 왜냐하면 한 달에 5만톤의 해상수송을 계획하였으나, 불과 1만 5천톤밖에 수송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벵가지항은 이론상 하루 2천 7백톤을 처리할 수 있으리라 예상되었지만 영국 공군의 비행거리 내에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공습을 받고 있었다. 겨우 하루 7백에서 8백톤의 화물을 양륙할 수 있었으나, 그 때문에 트리폴리에서는 보급물자가 적체되는 반면 롬멜군의 상황은 점점 심각해져갔다. 롬멜은 돌풍과 같은 진격으로 인해 자기 자신을 궁지에 몰아 넣었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벵가지 항의 능력이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다는 것은 참패를 의미하였다. 그러나 만약 퇴각한다면, 그를 "미친 군인"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OKH가 옳았다는 것을 시인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곤경을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토브룩항을 공격하여 그곳을 점령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롬멜은 이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최초에 폰 토마가 예상한 대로 4개 사단 이상의 기갑사단이 필요하였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것은 불가능한 요구였다. 독일은 이미 대 소련 전쟁에 완전히 돌입하고 있었으며 그뿐 아니라 롬멜의 요구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독일 아프리카군단(DAK)이 한 달에 2만 톤의 보급물자를 더 필요로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반해 그것을 위해 하역조치를 취할 항만 설비가 없었다. 겨우 이탈리아군과의 논의가 진행되어, 롬멜의 현재의 병력만으로 밀고 나간다는데에 합의가 이뤄졌다. 그를 위로해주기 위해 리비아 주재 추축동맹군은 7월 31일부로 아프리카 기갑군(Panzerarmee Afrika)으로 개명되었고, 상급대장으로 진급한 롬멜은 이제 독일과 이탈리아군을 모두 떠맡게 되었다.
그러나 1942년의 상황으로 보아 이때 토브룩을 점령했다 하더라도 롬멜에게 도움이 되었을 것인가는 확실치 않다. 토브룩항은 이론적으로는 하루에 1,500톤의 양륙이 가능했으나 실제로는 하루 600톤이 약간 넘을 뿐이었다. OKH가 토브룩항의 이용에 관하여 의논해오자 독일 해군은 이곳은 대형선박의 양륙에는 적합치 못하다고 거절하였으며, 롬멜에게 보급하기 위해서는 오로지 트리폴리나 벵가지 항에 의존하는 것이 옳다고 OKH에 회답했다. 이 시기(1941년 7~8월)에는 해안선을 따라서 운행되는 연안운반선도 벵가지를 충분히 이용할 수 있을 정도로 그 수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토브룩 점령을 통해 보급문제를 해결하려고 한 롬멜의 안은 실현 불가능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는 동안에 롬멜 배후에 있는 지중해의 전황이 더욱 악화되어 갔다. 이제까지 아프리카행 호송선단을 시칠리아의 적 기지로부터 보호해왔던 독일의 제 10 항공군단(Fligerkorps)이 6월 초 대부분 그리스로 이동했다. 그 때문에 몰타나 기타 지역에 기지를 둔 영국 해군과 공군이 서서히 행동의 자유를 회복하였다. 따라서 지금껏 경미했던 해상 손실은 놀랄만큼 증가하기 시작하였다. 7월에는 리비아행 보급물자 중 19%(중량 기준)가 손실되었다. 8월에는 9%, 9월에는 25%, 10월에는 다시 23%를 잃었다. 게다가 9월에는 벵가지가 크게 폭격당하여 선박들이 트리폴리로 방향을 바꾸었기 때문에 병참선은 400km에서 약 1600km까지 늘어나게 되었다. 그래서 관련된 여러 사령부들은 서로를 비난하게 되었다. 항상 반 이탈리아 감정이 강했던 롬멜은 이탈리아군 최고사령부의 비능률성을 비난하며 독일국방군이 모든 보급조직을 인수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독일해군은 이에 동의함과 동시에 이탈리아가 트리폴리 항으로의 보급에 집착하는 것은, 전후에 대비해 그들의 상선을 보호하려는 의도 때문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표명하였다.
OKH는 독일공군이 동부 지중해의 여러 목표 공격보다 우선적으로 호송선단의 보호를 충실히 이행하지 않았다는 의심을 가지고 전황을 검토했다. 동시에 보급물자를 그리스에서 직접 키레나이카로 보내는 방안이 검토 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하면 베오그라드에서 니시(Nish)에 이르는 단선철도에 의존해야 하는데 이 선은 항상 폭격을 받고 있었다. 한편 이탈리아측은 트리폴리를 계속 이용하는 것이 "적을 분단시키는 데"에 필요하다는 주장했다. 그러나 자국 해군은 몰타의 영국군과 대적하는 데 필요한 연료가 충분치 못하므로 독일 공군이 그 임무를 맡을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OKH사령관이 이탈리아군에게 리비아의 항구들이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독일해군 인력을 파견하겠다고 제안하였을 때 이는 정중히 거절당하였다. 10월 초 아프리카 기갑군에게 가장 긴급히 필요한 물자를 공수하기 위한 간단한 시도가 행하여졌다. 그러나 항공기 부족 때문에 이런 시도는 실패로 돌아가 또 한 차례의 비난과 반론을 불러 일으켰다. 롬멜은 때때로, 자제력을 잃고 환상 속의 영국 호송선단이 지중해를 떠다니는 것을 상상하기 시작하였다. 그 때문에 그는 OKH로부터 거센 질책을 받았다.
이 모든 혼란 속에서도 한 가지 사실이 간과되었다. 어떻게 하였든지 간에 이탈리아군은 72,000톤의 물자(롬멜군의 당시 소비량을 약간 상회하는)를 7월에서 10월에 이르는 4개월 동안 지중해를 통해 보내는 데에 성공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롬멜이 직면하고 있던 어려움은 유럽으로부터의 보급 부족에 기인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아프리카내에서 지나치게 확장된 병참선에 원인이 있는 것이었다. 예를 들면, 전체 연료의 90%를 수송하기 위해서는 10%의 연료를 소비해야 한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만일 아프리카 기갑군용의 모든 필요물자(물과 인력을 제외한) 중에서 연료가 약 1/3을 차지한다고 하면, 북아프리카에 수송된 모든 연료의 30%-50%가 트리폴리와 전선 사이에서 소비된다고 하는 추측이 당연히 성립될 것이다. 편도 1600km의 사막을 주행해야 했기 때문에, 차량의 35%는 항상 고장나 있었다. 그런 조건 하에서는 어떠한 보급부대라도 붕괴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11월이 되자 필연적으로 위기가 발생하였다. 1월 9일 밤 20,000톤의 물자를 싣고 가던 5척의 호송선단이 케이프 본(Cape Bon)에서 영국 함대에 의해 모두 격침되었다. 그 후 이탈리아군은 트리폴리항이 "실질적으로 폐쇄되었다"고 선언하였다. 11월에 건너온 보급물자는 30,000톤이라고 하는 참담한 숫자로 떨어졌고 한편 해상에서의 손실은 30%로 증가하였다. 그러나 롬멜의 주력전투부대를 구성하는 독일군 2개 사단은 한 달에 약 20,000톤을 소비하고, 게다가 약간의 보급물자가 남아있었기 때문에 위의 해상 보급 감소는 직접적으로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정말 중요한 문제는 11월 18일에 개시된 영국군의 공세로 인해 아프리카 내부의 보급 루트가 위험하게 된 것이었다. 영국 비행기들과 장갑차들은 트럭 수송대에 막대한 손실을 입혀 그 수송력을 절반으로 저하시켰다. 보급부대들은 야간밖에 이동할 수 없었다. 11월 22일 이후 며칠간은 2개 사단 모두 후방을 차단당하여 호위되는 수송대만이 간혹 가다가 도착하였을 뿐이었다. 이와 같은 상황 하에서는 전선의 유지가 불가능하여 12월 4일 롬멜은 총퇴각을 명령하였다. 이상하게도 같은 날 아프리카군 병참참모의 일지에는 보급 상황은 "모든 관점으로 보아 유리하다."고 쓰여 있다.
처음에는 퇴각으로 인해 상황이 더욱 악화되었다. 해안가의 도로가 서쪽으로 이동하는 사람과 차량들로 막혀버렸을 뿐만 아니라, 비축물자를 철거하기 위한 차량의 부족 상황이 점점 악화되었다. 그 차량을 호위하는 전차가 없었기 때문에 아프리카 기갑군의 수송트럭 중 50%가 영국군의 전차에 의해 분쇄되었다. 그러나 퇴각으로 인해 단연 보급 거리는 단축되었다. 12월 16일 롬멜은 벵가지 근처에서 철수 준비를 하면서도, 각 사단 모두 원활히 보급을 받고 있기 때문에 "아프리카군 병참장교들은 아무런 걱정도 하지 않고 있다"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말한다면 아프리카 기갑군은 결코 만족할 만한 상태에 있지 않았다. 11월 14일 독일의 압력에 의해 이탈리아군은 트리폴리까지의 해상 수송을 재개하였다. 그러나 초기에는 이 조치에 의해 손실이 늘어날 뿐이었다. 특히 연료가 부족하여 12월 중순 경에는 아프리카 주둔 독일 공군은 하루 1회의 출격만이 가능할 뿐이었다. 물론 이와 같은 상황을 영구히 계속 할 수는 없었다. 히틀러는 해군의 반대를 물리치고 U-Boot의 지중해 파견을 결정하였으며 더욱이 12월 5일에는 러시아로부터 부대를 차출하여 지중해의 독일공군을 서둘러 증강한다는 조치가 발표되었다. 그동안의 임시변통책으로 프랑스에 압력을 가하여 3,600톤의 연료를 팔도록 하였다.
한편 이탈리아군은 롬멜을 구원하기 위하여 총력을 기울였다. 전함을 이용하여 롬멜의 퇴각을 돕고, 잠수함을 동원하여 데르마(Derma)에서 벵가지까지 연료를 수송하고 이어서 전력을 기울여 4척의 전함, 3척의 경순양함, 20척의 구축함으로 12월 16일-17일간 리비아로 향하는 보급선단을 호위케 하였다. 전함 리토리오(Littorio)가 손상을 입었을 뿐 작전은 성공적이었지만 그것은 북아프리카의 추축국을 괴롭히는 또 다른 문제를 야기시켰다. 항만의 양륙 능력이 매우 낮았기 때문에 실제로는 겨우 4척의 선박을 호송하게 되었을 뿐이고 게다가 그중 한 대가 호송선단을 떠나 트리폴리 대신 벵가지로 향해야 했다. 합계 20,000톤의 수송대를 호위하기 위하여 10만 톤의 호위함을 동원함으로써 그 연료비용이 엄청나게 들었다. 이러한 대규모의 작전은 1월 초에 다시 한번 반복할 수 있었을 뿐이며 그 후로는 또다시 없었다.
뭇솔리니는 마음 속에 품고 있던 프랑스령 튀니지의 정복구상을 부활시키기 위하여 이러한 위기를 이용하려 하였다. 11월 2일~3일 그는 정세를 완화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대책을 제안하였다(그중에는 독일 석유를 이탈리아 해군에게 공급할 것과 독일 수송기의 대규모 사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비제르타 항 획득만이 문제를 명확히 해결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히틀러는 최초의 두 가지 대책에는 동의했지만 과중한 압력은 프랑스의 비시 정권을 영국측으로 돌아서게 할지도 모른다고 우려하여 뭇솔리니의 튀니지 계획을 거부했으며, 여하튼 비제르타에서 리비아까지의 거리는 너무 멀다고 말하였다. 따라서 12월 8일 이탈리아 최고사령관은 튀니지 합병계획이 수포로 돌아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12월 24일에 롬멜이 벵가지에서 철수하자 뭇솔리니는 다시 이 문제를 들고 나와 독일이 프랑스에 양보할 것을 요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더욱이 그는 필요하다면 "전 이탈리아 해군력의 사용도 불사하겠다"고 말하였다. 이에 놀란 히틀러는 비시정권과의 교섭재개에 동의했으나 교섭은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하였다.
비제르타 항을 활용할 수 있었다면 롬멜을 크게 도울 수 있었을 것인가 아닌가 하는 점은 의문이나 아프리카의 항만능력 문제는 일거에 해결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800km라는 새로운 거리가 이미 과도하게 늘어난 병참선에 다시 추가되었을 것이다. 800km 중 500km 정도는 2개의 철도에 의해 유지될 수 있었지만 나머지 가베(Gabès)에서 주아라(Zuara)까지의 200km는 자동차로 수송해야만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자동차도 매우 부족한 상태였다. 트리폴리까지의 전 루트는 물론 비제르타 자체도 몰타 섬으로부터의 공습권 내에 있었고 철도선도 영국공군의 좋은 표적이 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에서 생각해볼 때, 전 이탈리아 해군은 몰타 점령에 사용하는 것이 더 유리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였다 하더라도 롬멜을 괴롭히고 있는 두 가지 근본적인 문제, 즉 항만의 하역능력과 아프리카 내륙에서의 수송거리 문제를 해결해주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러는 동안 아프리카 기갑군 병참참모의 일지가 말해주듯이 사태는 점차 개선되어가고 있었다. 해당 기간 동안 단지 39,000톤의 물자가 지중해를 건너 보급되었는데 이런 반응이 나온 것이었으므로 사태가 개선되었다 하더라도 해상수송로의 안전성 향상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오히려 그것은 트리폴리 근처에서 예상치 않게도 이탈리아군의 비축연료 13,000톤을 발견하였기 때문이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롬멜이 엘 아게일라(El Agheila)로 철수함에 따라 병참선이 750km 정도의 감당하기 쉬운 거리로 단축되었다는 사실이다. 1942년 1월 6일 6척의 보급선을 호위한 두 번째의 전함호송선단이 도착하였기 때문에 상황은 한층 더 호전되었다. 비록 1월 중 아프리카에 도착한 보급물자는 50,000 톤을 넘지 않았지만 아프리카 기갑군, 특히 독일아프리카군단은 매우 좋은 기분으로 새해를 맞이하였다.
3. 1942년: 재앙의 해
1941년 초 히틀러는 권력의 정점에 있었으며 전유럽을 지배함과 동시에 발칸반도에까지 그 세력을 뻗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로부터 1년 후 독일지배 하의 영토는 거대하게 불어났으나, 사태는 완전히 바뀌어 이미 제 3 제국에는 암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1941년 12월 10일 미합중국은 정식으로 대독전쟁에 참가하였다. 일부 평론가들이 주장하듯이 그때 이미 독일이 승전의 희망을 포기하였는지 아닌지는 아직도 의문이다. 분명히 독일에게 남아 있던 기회 중 하나는 서부의 적이 모든 자원을 집중시키기 전에 사용가능한 전 병력을 집결시켜 동부의 적을 격파하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이 한가지 목적에 쏟아야만 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상황하에서 북아프리카에서 새로운 공세를 취하는 것이 옳았는지의 여부는 의심스럽다. 1942년 1월 롬멜은 여전히 광대한 방어지역을 맡고 있었다. 병참선이 짧아짐에 따라서 롬멜의 보급상황은 호전되고, 수백 km에 걸친 사막 위에서 병참기구를 유지한다고 하는 곤란한 일은, 지금은 오히려 적들을 괴롭히고 있었다. 케셀링(Kesselring)의 제 2 항공전대(Luftflotte)의 도착으로 중부 지중해의 정세는 매우 완화되었지만, 트리폴리에서 전선까지 철도가 건설되지 않는 한 보급은 정말로 안전하게 되지는 못할 것이었다. 그 유명한 롬멜도, 공격을 재개한다면 곧 보급상의 곤란한 일들이 다시 나타날 것임이 틀림없다고 하는 사실을 모르고 지나칠 리는 없었다. 그런 까닭에 롬멜은 보급부대에 8천 대의 트럭을 증강하도록 요구했다. 그러나 이것은 말도 안되는 이야기였다. 왜냐하면 당시 러시아에서 작전했던 독일의 기갑군(Panzerarmee) 4개 군을 전부 합한다고 하더라도 1만 4천 대의 트럭밖에 모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OKH, 폰 린텔렌, 더욱이 뭇솔리니조차도 이 요구를 거부하고 롬멜에게 또다시 공격할 경우 보급상황은 엉망진창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렇지만 롬멜은 계속해서 두 번이나 경고를 무시하고 재차 전격전을 감행한 후, 1월 29일 벵가지에 재입성했다. 다행히 거기에서 예전의 저장물자를 약간 획득할 수가 있었다. 그 후의 경과는 롬멜 직속의 독일 아프리카군단(DAK)의 일지에서 알 수 있다. 2월 9일 이미 전투부대에 100%의 보급을 보장할 수 없게 되었고, 다음날에는 전술적 전개 때문에 보급능력은 더욱 저하되어, 드디어는 엄청난 수송거리와 차량의 만성적 부족 때문에 탄약은 이미 전진한 부대에 도착할 수 없게 되었다. 2월 12일 DAK의 보급장교는 화를 내며 롬멜과의 긴급한 면담을 요청하였다. 2월 13일, 진격은 트리폴리에서 1500km 떨어진 엘 가잘라(El Gazala)에서 정지한다고 발표되었다.
2월 중순부터 5월까지의 아프리카 기갑군과 OKH 사이의 방대한 교신 내용은 병참상황에 대한 불평과는 별로 관계 없는 것이었다. 이것은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왜냐하면 병력 증강에 따라 롬멜군은 10개 사단(독일군 3개 사단, 이탈리아군 7개 사단)으로 늘어났고, 그 때문에 필요한 물자는 1개월에 10만 톤으로 늘어난 데 반하여 실제로 롬멜이 보급받았던 것은 4개월에 걸쳐서 월 평균 6만 톤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양은 부대규모가 더 작았을 때 기갑군의 보급사정이 나빴던 1941년 6월에서 10월 사이에 받았던 양보다도 오히려 적은 양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롬멜은 먼저 공격을 개시할 수 있었고, 다시 대규모의 새로운 공격을 준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얼핏 보아 이해할 수 없는 사실도 다음과 같은 고찰에 의해서 설명이 가능하다. 첫째, 1개월에 10만 톤이라는 요구량은 매우 과장된 수치이다. 즉 이 숫자는 완편된 독일군 10개 사단에게 필요한 양이었지만, 실제로 롬멜의 휘하에 있던 부대는 훨씬 소규모였다. 둘째로, 지난 해의 공격 때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못했던 벵가지가 이번에는 모든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기 때문에, 아프리카 기갑군이 트리폴리에서 1500km 떨어진 지점에 있다 하더라도, 보급은 계속 할 수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 결과 보급물자 중의 3분의 1은(여전히 먼 거리이기는 하였지만) 450km라는 단축된 거리만을 수송하면 되었다.
그러나 벵가지 동쪽에는 전혀 항구가 없었기 때문에 공격을 속행할 경우 다시 위기에 빠지는 것을 피할 수 없는 것은 사실이었다. 뭇솔리니와 이탈리아군 총사령관 까발레로(Cavallero) 장군은 이것을 깨닫고 진격정지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롬멜은 토브룩, 리비아, 이집트 국경, 더욱이 그 너머에까지 돌진하기 위해 필요한 증원을 기다리는 동안만 정지할 생각이었다. 이탈리아군 최고사령부로부터 보급방법에 관해 질문을 받았을 때, 롬멜은 자신도 모르겠다고 대답하면서 하여간 보급업무는 전술적 상황에 "적응"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라고 말하였다. 이탈리아군은 롬멜을 단념시킬 수 없었기 때문에, 히틀러가 중부 지중해의 영국군 요충지인 몰타 섬을 점령하고 싶어하는 점을 이용하여 롬멜이 아프리카에서의 공격을 재개를 저지하려고 했다. 이탈리아군은 7월말 이전에는 실행할 수 없는 대규모의 상륙작전을 계획함으로써 롬멜로 하여금 가을까지 공격을 연기시키지 않을 수 없도록 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신임 독일군 남부총사령관(OB.Süd) 케셀링 원수는 이러한 의도를 알아차리고 기습작전으로 몰타 섬을 점령하도록 이탈리아군을 설득하려 하였다. 그렇지만 이탈리아군은 완고하였으며 이 문제는 4월 29일과 30일 추축국 수뇌회담으로 넘겨졌다. 이 회담에서 히틀러는 이집트가 "혁명의 적기에 접어 들었다"고 생각하였으며 조기 공격안을 지지하였다.[3] 결국 타협안이 모색되었다. 즉 5월 하순에 롬멜은 공격을 개시하여 토브룩을 점령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롬멜은 이집트 국경을 넘어서는 안되었으며 6월 20일까지 작전을 완료하도록 명령받았다. 그렇게 하면 독일공군은 몰타 섬을 점령하기 위하여 재전개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최근 30년 간, 이 결정이 합당하였는가는 끊임없는 논란의 대상이 되어왔다. 순수하게 전술적 견지에서 본다면, 이 결정은 옳은 것이었다. 키레나이카의 비행장이 영국군에 넘어가는 것을 막음으로써 몰타는 고립되었다. 한편 보급상의 문제는 훨씬 복잡하였다. 이미 살펴 보았던 것처럼 롬멜군의 보급은 몰타 섬에 의하여 좌우되었던 것은 아니고, 오히려 리비아 국내의 하역능력과 아프리카 내부의 병참선 거리 두 가지에 달려 있었다. 전자의 문제는 어쩌면 해결이 가능했을 것이지만 후자는 미해결의 상태로 두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아프리카 기갑군에게 편성되어야 할 차량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솔룸으로 전진한다면 전략적 승리를 거두지도 못할 것이면서 늘어난 병참선에 또다시 250km를 추가할 뿐이었다. 토브룩항의 하역능력이 매우 낮았기 때문에 몰타를 점령한다 하여도 롬멜의 보급문제는 해결될 수 없었을 것이다. 이것은 1941년 6월에 이미 명백해졌던 문제였다. 이 때 보급물자가 사실상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지중해를 건너왔음에도 불구하고 아프리카 기갑군의 병참선이 늘어났기 때문에 끊이지 않고 문제가 생겼던 것이다.
그러므로 추축국이 직면하고 있던 문제는 두 가지였다. 즉, 하나는 이탈리아로부터의 호송선단의 안전을 어떻게 지킬까 하는 것이며, 또 하나는 전선에서부터 적당한 거리의 후방에 위치한 항만(화물처리 능력이 충분한)을 어떻게 확보할까 하는 것이었다. 승리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이 두 가지 문제의 해결이 중요했다. 또한 이것을 별도로 해결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렇다면 두 가지 길이 추축국에 남아있었다. 하나는 이탈리아군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 즉 롬멜은 현위치에서 정지하면서 이탈리아군은 호기를 타서 몰타를 점령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이탈리아 해군용 연료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고, 벵가지 항을 확장할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에 롬멜은 영구히 지탱할 수 있었고, 후일 이집트로의 대공세를 준비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것을 대신하는 또 다른 방법은 충분한 증원부대 — 2개에서 4개의 독일기갑사단 — 를 보강하고, 또한 충분한 물자를 비축하여 롬멜로 하여금 일격에 알렉산드리아를 점령하게 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하면 할더가 1940년 초에 지적한 것과 같이 항만의 하역능력의 문제는 자연히 해결될 것이고, 동시에 몰타를 전략적인 후방의 고립지대로 몰아넣어 기아상태에 빠뜨릴 수 있었을 것이다.
몰타가 추축국의 수중에 있든 없든 간에 알렉산드리아 공격이 실행 가능하였을까의 여부는 의문이다. 히틀러가 증원부대를 보유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아프리카에 보냈다면 아프리카 기갑군의 물자 소요량은 벵가지와 트리폴리 2개 항구의 하역능력을 훨씬 초과하였을 것이다. 이것을 뒤집어서 말한다면 다가올 공격을 위해서 물자를 비축하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한편 아프리카 내륙에서 비축물자를 수송하는 데 필요한 차량의 수는 독일 국방군의 매우 한정된 가용자원으로는 지원할 수 없는 것이었다. 아마 문제해결의 유일한 방법은 아프리카 기갑군에서 이탈리아군이라는 쓸모없는 무거운 짐을 떼내는 것이며, 1940년 10월에 폰 토마 장군이 요구한 바가 바로 이것이었다. 그러나 만약 이에 응한다면 전쟁의 성격은 변했을 것이다. 또한 만약 몰타를 점령하고 있었다면 롬멜은 기지로부터 상당히 떨어진 곳에서 영구히 지탱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것이 원래 그에게 부여되었던 임무였던 것이다. 그 이상의 일을 하려고 하였다면 이탈리아군의 까발레로 장군과 독일무관 폰 린텔렌 장군이 수없이 지적했던 것처럼 보급상의 여건이라는 엄연한 현실 때문에 실패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 같은 상황하에서 현실화된 해결책은 최악의 것이었다. 5월 26일에 롬멜은 공격을 개시했다. 추축동맹군은 6월 22일에 토브룩항을 파괴되지 않은 채로 점령하였다. 그렇지만 추축동맹군은 이 성공을 이용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6월의 선박 손실량은 5월에 비해 거의 늘어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해군의 연료부족 때문에 아프리카행 선박의 톤수가 3분의 1로 떨어지고, 한편 양륙한 보급물자는 15만톤에서 3만 2천톤으로 떨어져 버렸다. 게다가 연료부족으로 이처럼 얼마 안되는 물자조차 벵가지가 아닌 트리폴리에서 하역해야만 했다. 롬멜군의 상황은 현재 위치에 머물러 있을 수 없던 데다가 이 문제가 겹치면서 롬멜은 퇴각하든지 아니면 현지 조달에 희망을 걸고 적진 돌파를 시도할 수밖에 없었다. 독일군 남부총사령관(케셀링)의 동의를 얻은 이탈리아군 최고사령부의 항의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롬멜은 토브룩에서 노획한 보급물자로 나일 강까지 갈 수 있다고 주장하고, 공격 속행을 결심하였다. 한편 히틀러는 몰타 작전에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롬멜의 의견을 지지했다. 추축국의 희망은 이제 2천 대의 차량, 5천 톤의 보급물자, 특히 토브룩에서 노획한 1천 4백톤의 연료에 달려 있었다. 그렇지만 이것만으로는 충분치 못하였다. 다시 650km를 전진한 후 피로와 격화된 저항과 그리고 "곤란한 보급사정" 등으로 인하여 아프리카 기갑군은 7월 4일 진격을 정지했다. 롬멜 자신이 후에 인정한 바와 같이 이 지점에서 정지한 것은 차라리 행운이었다. 만약 그렇지 않았더라면, 롬멜은 2개 대대와 전차 30대로 알렉산드리아에 도달했을지도 모르지만 병참선은 더욱 길어졌을 것이다.
엘 알라메인에서 저지당했지만 롬멜은 결코 단념하지 않았다. 그는 역시 수 일간의 휴식 후 공격을 재개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긴 병참선에서 오는 전면적인 영향이 바야흐로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1개월에 필요한 10만톤 중 토브룩 항이 — 그 자체가 전선에서 수백 km 후방에 있었다 — 취급할 수 있는 것은 겨우 2만톤이었다. 트럭은 여전히 부족하였고 솔룸에서부터 영국이 부설했던 철도선을 이용하여 하루에 1,500톤을 운반한다는 계획을 세웠으나 실제로 가능했던 것은 하루 300톤에 지나지 않았다. 더욱이 불행하게도 토브룩 항과 거기에 이르는 해상루트는 이집트에 기지를 두고 있는 영국공군의 공격에 절망적일 정도로 노출되어 있었다. 수송선을 직접 토브룩(혹은 더욱 규모가 작고 공격에 취약한 바르디아 항 및 메르사-마트루 항)에 보내는 것은 어려웠다. 한편 보급물자를 전선에서 각각 1300km 및 2000km 후방에 있는 벵가지 및 트리폴리에 양륙하는 것은 터무니 없는 낭비와 지연을 의미했다. 이와 같은 딜레마에 직면하여 이탈리아군 최고사령부는 망설였다. 7월, 이탈리아군은 아프리카 기갑군의 빗발치는 항의를 무시하고, 벵가지와 트리폴리에서 양륙시키는 쪽을 택하였다. 그 결과 손실 선박은 겨우 5%에 지나지 않고, 9만 1천톤이 바다를 건너왔지만 보급물자가 전선에 도착하기까지는 몇 주일간이나 걸리게 되었다. 롬멜 자신은 명확하게 이러한 딜레마를 알고 있으면서도, 그는 이탈리아군 선박에 대해 직접 토브룩으로 향하라고 요구했다. 그 때문에 8월에는 선박손실량이 4배로 증가하고 바다를 건너온 보급물자는 5만 1천톤으로 감소되었다.
이러한 사실로부터 얻어지는 교훈은 매우 명백하였다. 몰타가 추축국의 수중에 있든 없든 간에 트리폴리와 벵가지를 향한 선박은 안전하였지만 그 동쪽으로 향한 배는 허무하게도 토브룩 항을 이탈리아 해군의 묘지로 만들었을 뿐이었다. 그 때문에 8월 중순 이탈리아군은 롬멜의 요구를 무시하고 트리폴리 및 벵가지에 선박들을 집중시킨다는 결단을 내렸다. 이로 인한 아프리카 기갑군의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현재위치에 머무르는 것은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였다. 롬멜은 8월에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던 3만 톤의 연료 중에서 겨우 8천 톤밖에 보유하고 있지 않았지만, 모든 것을 운에 맡기고 나일강을 향해 최후의 돌파를 시도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는 케셀링의 지지를 얻었는데, 케셀링은 토브룩에 유조선을 보내주기로 약속하였다. 또한 그는 유조선이 격침될 경우 하루에 5백 톤의 연료를 공수해주겠다고 말하였다. 그런데 그가 약속한 비행기는 오지 않았다. 따라서 1만 톤이라는 귀중한 연료를 소비한 후 롬멜은 알람 할파(Alam Halfa)에서 4일간 격렬한 전투를 치른다음 결국 최초의 공격출발지점으로 되돌아왔다.
여러 번의 시행착오 끝에 롬멜은 전쟁에 졌음을 깨달았다. 그는 아프리카에서의 철수도 생각해보았지만, 이때에는 히틀러가 개입하여 퇴각을 금지시켰다. 아프리카 기갑군의 항의를 무시하고 이탈리아군은 9월에서도 트리폴리와 벵가지에 물자를 하역하였다. 그 결과 바다를 건너온 보급물자는 7만 7천톤으로 늘어났고 10월에는 조금 줄었을 뿐이었다. 이러한 보급물자는 결코 롬멜의 필요량을 충족시켜주는 것은 아니었지만, 해상에서 선박이 격침당하는 피해에 기인한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9월의 선박손실은 7월 수준으로 저하되고, 10월에는 다시 늘어나기는 하였으나 여전히 8월의 수준을 훨씬 밑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롬멜이 직면한 어려움은 오히려 아프리카 항로를 왕복하는 선박이 급격히 감소한 데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것이 정말 선박의 부족 탓인지, 아니면 더이상 배를 잃고 싶지 않은 이탈리아쪽에 기인하는 것인지는 말하기 힘들다. 가장 믿을 만한 수치에 의하면, 이탈리아가 1940년 6월에 지중해에서 보유하고 있던 선박 1,748,941톤 중에서 1,259,061톤이 1942년 말까지 침몰했다. 그러나 그 동안에 582,302톤이 독일선박 또는 독일노획선의 제공의 형태로 추가되었고 게다가 약 30만 톤이 신규 건조, 침몰선 인양에 의해 추가되었기 때문에 1942년 말 사용가능한 선박은 약 1,362,682톤에 달했을 것이다. 이러한 양은 개전시 이탈리아가 보유하고 있던 양의 77%에 해당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까발레로 장군이 1942년 10월 중순의 시점에서도 그 해의 이탈리아군의 손실이 "경미"하다고 발표했다는 사실이다. 롬멜은 선박이 부족할 리가 없다고 말하면서 이탈리아군은 자신만을 중요시한다고 비난하였다. 정세가 악화됨에 따라 추축국 상호간의 싸움은 격렬해졌지만, 이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였다. 엘 알라메인의 전투가 시작될 때쯤에 롬멜의 부대가 보유하고 있던 것은, 연료는 기본휴대량의 3배수 — 아프리카 기갑군은 30배수가 필요하다고 주장했지만 — 탄약은 기본휴대량의 8에서 10배수 정도였다. 토브룩으로부터의 철도선은 화물로 넘쳤기 때문에 수송상황은 매우 어렵게 되었다. 사실 1만 톤의 수송물자는 여전히 토브룩에 있었으며 그곳에서 전선까지 운반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4. 결론: 아프리카에서의 보급과 작전
북아프리카에서의 전쟁이 끝난 후, 롬멜은 이 전쟁을 신랄하게 비판하며 만약 히틀러가 튀니지를 점령하기 위해 쓸데없이 투입한 병력과 보급물자의 일부를 롬멜군에게 보내주었더라면 영국군을 몇 번이라도 이집트에서 축출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주장은 그후 많은 저술가로부터 찬성을 받았다. 그러나 이 주장은 아프리카 주둔 추축동맹군의 입장이 롬멜의 퇴각과 연합군의 서아프리카 북부 상륙에 의해서 완전히 뒤바뀌어 버렸다는 사실을 무시하고 있다. 이제 추축동맹군은 프랑스 상선을 나포했을 뿐만 아니라 비제르타와 툴롱을 점령했기 때문에 아프리카 기갑군이 경험해보지 못한 속도로 아프리카에 증원대를 파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군대를 튀니지에서 오랫 동안 머물게 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리비아 작전에 국한시켜 이야기하자면 그 교훈은 확실히 다음과 같다. 첫째, 롬멜군의 보급곤란은 언제나 북아프리카의 항만 능력이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그 때문에 보급지원능력은 제한되어 있었고, 그것뿐만 아니라 호송선단의 규모도 한정되어 있었으며 연료소비와 사용선박의 동원면에서 볼 때 호송임무에는 엄청난 비용이 들었다. 둘째, "호송선단의 전투"(해상수송로를 차단하려는 영국과의)가 중요했다는 견해는 매우 과장된 것이었다. 아마도 1941년 11월에서 12월을 제외하면 중부 지중해에서의 (이탈리아)해군 대 (영국)공군의 전투가 북아프리카의 전황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 적은 한번도 없었다. 11월과 12월에 있어서도 롬멜군의 문제점은, 해상에서의 손실보다도 오히려 아프리카 내륙에서 과도하게 늘어난 (그리고 취약한) 병참선에 원인이 있었다. 셋째로, 몰타 섬을 점령하지 않기로 한 1942년 추축국의 결정은 북아프리카에서의 전투 결과에 대해 그다지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보다도 훨씬 중대한 것은 토브룩 항의 규모가 매우 작았으며 더군다나 이집트에서 오는 영국공군의 공격에 대해 절망적일 정도로 노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상의 요인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아프리카 내륙에서 주파해야만 하는 긴 수송거리였다. 이 거리는 러시아를 포함하여 이제까지 독일국방군이 유럽에서 경험했던 것보다 훨씬 긴 것이었으며, 더욱이 그 거리를 달려야 할 트럭 수송대의 수도 적었다. 물론 1942년에는 작은 규모의 연안해상수송이 실시되었으나 영국공군이 제공권을 쥐고 있는 한 그 효과는 제한되어 있었으며, 항구에 가까이 가면 갈수록 공습에 노출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볼 때 폰 린텔렌이 오직 철도만이 보급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지적한 것은 올바른 것이었다 (영국측에서는 철도에 의한 해결책을 일부 채택했다). 그러나 이탈리아군은 철도를 위한 수송자원을 동원하려고 하지 않았고, 롬멜도 그것을 기다릴 만큼 인내심을 갖고 있지 못했다.
1942년 여름과 가을에 있었던 롬멜군의 패배는 이탈리아에서 연료가 오지 않았기 때문이라든가, 절대적으로 중요한 유조선이 대량으로 격침되었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종종 있었지만, 사실 근거 없는 주장이다. 1942년 9월 2일에서 10월 23일까지 침몰한 배의 목록을 상세히 조사해보면, 총 23척 중에서 유조선은 겨우 2척뿐이었다. 마찬가지로 롬멜이 7월에서 10월 사이에 보급 받은 연료의 월 평균량은 2월에서 6월 사이의 평온한 시기에 보급받은 것보다 약간 많은 양이었다. 이것은 롬멜이 직면한 문제가 유럽과의 물자보급 단절에서 기인하기 보다는, 오히려 아프리카 내륙에서의 연료수송 불능에 기인하고 있다는 사실을 나타내주고 있다. 엘 알라메인의 전투기간중 아프리카 기갑군의 한정된 비축물자 중에서 1/3이 전선에서 수백 km 후방에 있는 벵가지에 머물러 있었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히틀러가 롬멜을 충분히 지원하지 못했다고 하는 주장은 옳지 않다. 사실 롬멜은 북아프리카에서 유지할 수 있는 최대한의 부대를 증원 받았으며, 또한 그 결과로 1942년 8월말에 그의 정보참모가 추정한 바에 따르면 아프리카 기갑군은 전차와 중포(重砲)에 있어서 영국군보다 사실상 우세했다. 이러한 부대를 유지하기 위해서 롬멜은 같은 수준의 규모와 중요성을 가진 다른 독일 군단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많은 트럭을 지원받았다. 만약 아프리카 내륙에서의 병참선 확보가(이제까지 말한 원인의 결과로 인해) 전부 불가능했다고 한다면, 대부분의 책임은 롬멜 자신에게 있는 것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깨달았지만 이미 때는 늦은 것이었다.
"군대가 전투의 긴장을 견뎌내고 전승에 대한 확신을 갖기 위해서 가장 필수불가결한 것은 무기, 석유, 탄약을 충분히 준비하는 일이다. 사실 교전이 시작되기도 전에 전투는 이미 보급장교에 의해서 수행되고, 승패가 결정되는 것이다. 아무리 용맹한 병사라 하더라도 총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총은 충분한 탄약 없이는 아무런 쓸모도 없다. 그리고 기동전에 있어서는 차량과 그것을 움직이는 석유가 충분하지 못하다면, 총도 탄약도 그다지 도움이 되지 못한다. 적군에 비해서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동등하지 않으면 안된다."[4]
독일국방군이 부분적으로만 차량화 되고, 또한 강력한 자동차 산업에 의해 지원되지 않는 한, 그리고 정치적 사정 때문에 "이탈리아"라는 쓸모없는 짐을 지고 있던 이상, 또 리비아의 항만의 하역능력이 저조하고 수송거리가 길게 늘어났던 상황에서는 롬멜이 아무리 전술의 천재였다 하더라도 추축동맹군의 진격을 지원하는 보급문제는 해결 불가능했던 것이 명백하다. 이와 같은 상황을 고려해보면, 북아프리카에서는 한정된 지역을 지키기 위해서 파병한다는 히틀러의 원래 결정은 옳았다. 따라서 롬멜이 여러 차례에 걸쳐서 히틀러의 명령에 도전하고, 기지로부터 적당한 거리를 넘어 진격을 시도한 것은 잘못이었으며 결코 묵인할 수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주(註)
1 에노 폰 린텔렌(Enno von Rintelen) 보병대장을 의미한다.
2 당시 1940년 중반에는 소련에 대해 확실하게 우선 전쟁을 벌인다는 방침이 선 상태가 아니었다.
3 이때 이미 나세르 등의 이집트 청년장교단과 독일측 사이에 영국지배 전복 모의가 깊이 진행되던 터였다.
4 B. H. Liddell-Hart (ed.), The Rommel Papers (New York, 1953), p.328
출처: 디펜스 코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