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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주운전으로 선수 생명은 물론 생사조차 불투명했던 전 두산 투수 김명제가 휠체어 테니스 선수가 돼 나타났다. 한순간의 실수가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김명제는 직접 얘기하고 싶었다고 한다.(사진=이영미)>
“아직도 날짜를 잊지 않고 있습니다. 2009년 12월 28일 밤이었죠. 대리 기사를 불러 놓고 차 안에서 깜빡 잠이 들었어요. 눈을 떠보니 새벽이었고, 휴대폰에는 부재중 전화로 대리 기사님 번호만 잔뜩 떠 있었어요. 잠들어서 전화를 못 받은 거였죠. 몇 시간을 잔 것 같았고, 술도 어느 정도 깼다고 생각했습니다. 다시 대리를 부를까 하다가 그냥 운전대를 잡았습니다. 그리고 도로를 질주했고, 어느 다리를 건너다 갑자기 앞이 안보였어요. 앞이 안 보인다고 생각하는 순간 차가 어딘가에 부딪히더니 다리 밑으로 떨어지는 거예요. 눈을 떠보니 중환자실이었습니다. 온 몸을 움직일 수 없었어요. 12시간 넘게 수술을 받았다는 의사의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러다 다시 깊은 잠에 빠졌습니다.”
2005년 계약금 6억 원을 받고 프로에 데뷔했던 두산의 오른손 투수 김명제. 그는 2009년 말 음주 교통사고를 당해 생사의 갈림길을 오갔다. 경추 골절상을 입은 나머지 대수술을 받았지만 팔, 다리를 온전히 사용할 수 없었다. 당시 김명제의 혈중 알콜농도는 면허취소에 해당하는 0.172%. 김명제는 결국 야구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고, 팬들의 비난 속에서 서서히 잊혀졌다.
2014년 9월, 김명제란 이름이 뉴스에 다시 등장했다. 사고 난 지 5년 만이었다. 그런데 김명제는 야구선수가 아닌 휠체어 테니스로 다시 세상 밖으로 나왔다. 음주 교통사고로 사경을 헤맸을 정도의 중상을 입었던 그가 테니스로 새로운 인생을 찾은 것이다.
2016년 5월 중순, 기자 앞에 김명제가 앉아 있다. 어렵게 인터뷰 약속을 잡고 약속 장소에 나갔는데 그는 휠체어가 아닌 자신의 다리로 걸어서 커피숍 안으로 들어왔다. “어? 걸을 수 있는 거예요?” “네. 뛰지를 못할 뿐이지 절룩거리며 걷는 건 괜찮아요.”
먼저 밝히지만 기자는 김명제의 음주운전 사실에 동정심을 얹으려는 생각, 추호도 없다. 그는 분명 엄청난 잘못을 저질렀다. 그 대가로 혹독한 고통도 겪었다. 자신이 가장 좋아했던 야구를 그만둬야 했고(야구할 수 있는 몸도 아니었지만), 수년 간 어둠 속에서 인생을 허비했다. 부모에게 씻을 수 없는 아픔을 안기며 그는 점차 폐인이 되었다. 여러 차례 극단적인 생각도 했었지만 사고 당시의 악몽이 떠올라 행동으로 옮기지 못했다는 얘기를 들려준다. 그렇게 암흑같은 생활 속에서 만난 게 휠체어 테니스였다.
사고 후 이렇게 길게 인터뷰한 건 처음이라면서요.
“휠체어 테니스와 관련해서만 인터뷰했어요. 다시 이전 일을 들춰내는 게 싫었고, 팬들의 비난이 다시 시작되는 게 두렵더라고요. 그런데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건 음주운전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그리고 죽을 고비를 넘긴 장애인이 어떻게 해서 다시 세상으로 나오게 됐는지 제 입으로 직접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욕 먹을 각오 단단히 하고 나왔습니다.”
기사가 나가면 어떤 반응이 나올지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그래도 용기를 내신 만큼 저도 김명제 선수의 얘기를 잘 담아보겠습니다.
“네 고맙습니다.”
그동안 야구장에 가본 적이 있나요?
“몇 년 동안 모든 사람들과 연락을 끊고 지냈어요. 선수들과는 더더욱. 그래도 친구들은 지치지 않고 부모님 통해 연락해주더라고요. (최)정이, (정)의윤이, (민)병헌이 등 많은 선수들이 안부를 궁금해 했습니다. 지금은 그들과 잘 만나고 있지만 그때는 아무도 보고 싶지 않았어요. 친구들도 충분히 이해했죠. 작년에 의윤이가 SK로 트레이드 되면서 정이랑 한 팀이 됐잖아요. 그때 사고 후 처음으로 인천문학경기장(인천SK행복드림구장)을 방문했어요. 정이가 티켓을 마련해주더라고요. 전광판 라인업에 3,4,5번으로 정이, 의윤이, (이)재원이가 나란히 이름을 올렸는데 모두 2004년 세계청소년대표팀에서 같이 뛰었거든요. 기분이 묘했습니다. 그날 정이가 3안타를 쳤을 거예요.”
잠실야구장은 방문해봤어요?
“아니요. 아직까진 잠실야구장을 가볼 자신이 없어요.”
사고 직후 어떻게 지냈는지 궁금해요. 당연히 힘든 시간을 보냈겠지만요.
“거의 은둔하며 지냈죠. 밖으로 나가지도 않았고. 저를 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느끼면 미칠 것 같더라고요. 불쌍하게 볼까봐, 안타까워해 할까봐, 또는 욕할까봐 병원가는 거 외엔 거의 외출을 하지 않았습니다. 강원도에서 1년가량 요양하며 지낸 적도 있어요. 그 덕분에 삶에 대한 의지도 생기고, 뭔가를 해볼 생각도 했고. 그래서 직업훈련소를 찾았어요. 일을 배우고 싶어서. 지원서에 이름 생년월일을 적어가다 경력 적는 곳에서 제 손이 멈췄습니다. 옛날에 야구했던 것 말고는 경력이 하나도 없는 거예요. 야구선수란 타이틀을 떼고 나오니 그동안 제가 살아온 삶도 사라진 듯 했어요.”
<두산에서 선발 투수로 활약했을 때의 김명제.>
돌리지 말고 바로 물어볼게요. 그 날, 술을 마시고 운전대를 잡은 이유가 뭔가요.
“사연이 좀 긴데, 길게 말씀드려도 괜찮을까요?”
그럼요.
“당시 겨울 동안 조계현 코치님이 절 전담해서 훈련을 시키셨어요. 그때 약속했던 게 있습니다. 운동하는 동안 절대로 술을 마시지 않겠다고. 투구 밸런스가 흐트러져 그걸 잡고 있는 상황이었고, 운동도 잘 되고 있어서 자신과의 약속을 넘어 코치님과도 자신있게 약속을 했던 거예요. 그래서 휴대폰도 잠시 중지시켰고, 아예 갖고 다니질 않았어요. 프로 입단 후 단 한 번도 제 공에 대해 만족한 적이 없었는데 코치님과 운동하면서 처음으로 제 공에 만족했고, 안 좋았던 버릇들이 다 고쳐지는 걸 느끼며 운동에 대한 자신감이 커져만 갔습니다. 제 일상은 집에서 요가학원 가서 요가 받고, 조 코치님과 운동하고, 헬스클럽 가서 웨이트트레이닝하는 순서의 반복이었어요. 그리고 그때 공황장애를 앓고 있었어요.”
공황장애요? 무슨 일이 있었나요?
“불면증으로 고생 많이 했었거든요. 정신과 상담을 받으니까 공황장애라고 하더라고요. 비시즌 동안 훈련하면서 심리 치료도 동반했었어요. 제 휴대폰을 정지시켜놨다고 말씀드렸잖아요. 그래서 외출할 때는 어머니 휴대폰을 들고 다녔어요. 2009년 12월 29일 오후, 그날도 병원에서 심리 치료를 받고 나오는 중이었습니다. 전화벨이 울리더라고요. 친한 친구였습니다. 안 받으려다 계속 전화가 와서 받았고, 친구가 어디냐고 묻기에 병원에 있다고 말하면서 주차장으로 향하던 중 주차장 옆에 있는 카페에서 저랑 전화 통화 중이던 친구와 딱 눈이 마주친 겁니다. 정말 기막힌 우연이었어요. 당시 친구가 개인적인 일로 무척 힘든 상태였어요. 제게 술 한 잔 하자고 하기에 ‘난 지금 운동 중이라 술을 마실 수 없다’고 말하고선 친구와 함께 볼링장을 찾았어요. 술 대신 볼링이나 치자면서. 볼링을 치고 나니까 친구가 ‘딱 맥주 한 잔만 하자’고 사정하더라고요. 친구가 어떤 일을 겪고 있는지 알고 있기에 두 번째 청은 뿌리치지 못하겠더라고요. 그래서 ‘간단히 마시고 나오자’고 약속하고선 술집을 찾았습니다. 그렇게 친구랑 맥주만 마시고 나왔다면 아무 일도 생기지 않았겠죠. 술자리에 친구들이 하나 둘씩 늘어났고, 나중에는 자리를 옮겨서 술을 더 마신 거예요. 밤 11시 정도 돼서 집에 가려고 대리 기사님을 불렀어요. 아까 말씀드린 대로 기사님 불러놓고 잠이 든 바람에 전화를 못 받았고, 술이 깼다고 착각한 나머지 운전대를 잡았다가 그 사고를 당하게 된 겁니다.”
사고 났을 때의 기억이 있어요?
“아니요. 눈을 떴는데 숨을 못 쉬겠더라고요. 다시 기절했을 때는 호흡이 정지돼 심폐소생술을 했다고 하더라고요. 수술하기 전 의사가 부모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대요. 수술 받고 깨어난다 해도 목 밑으론 감각이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그런데 수술이 잘 된 건지 상체는 움직일 수 있었어요. 다리는 전혀 꿈적도 하지 않았죠. 8개월 정도 누워 있다가 재활센터에 다니며 지독하게 운동했어요. 그때 결심한 게 있었어요. 두 발로 걷기 전까진 아무도 안 만날 것이라고.”
재활은 어디서 한 거예요?
“재활센터를 찾은 곳마다 절 받아주지 않았어요. 몸 상태가 도저히 회복 불능이라고 판단 내린 거였죠. 두산 트레이너님의 소개로 용인에 있는 노인요양소의 재활센터에 들어갈 수 있었어요. 거기서 지루하고 고된 재활을 시작했어요. 만약 제가 일반인이었다면 재활을 했어도 이렇게 걷는 건 불가능했을 거예요. 전 그래도 운동했던 몸이라 회복 속도가 매우 빨랐습니다.”
지금은 다리가 어떤 상태인가요.
“오른쪽 다리는 아직도 당기는 신경이 살아나질 못했어요. 천천히 걷는 정도예요. 수술직후에는 혼자 휠체어에 올라타질 못했어요. 다리에 전혀 힘이 없었으니까요. 4명이 들어줘야 간신히 휠체어를 탈 수 있었습니다.”
용인의 재활센터에서도 힘든 나날들이었겠네요.
“1년간 그곳에서 죽기 살기로 재활에만 매달렸어요. 1년 후 나와서 절 수술해준 병원을 찾았죠. 담당 의사한테 제가 걷는 모습을 보여주니까 완전 깜짝 놀라시더라고요. 말도 안 된다면서.”
하반신 불구를 당했다고 생각했을 텐데, 그런 환자가 병원에 찾아와서 걷는 모습을 보여주니, 담당 의사로선 놀랄 수밖에요.
“그러니까요. 정말 많이 놀라셨어요. 제게 ‘수고 많았다’고 하시더라고요. 제가 얼마나 지독하게 재활을 했을지 아신 거예요. 제 몸 상태를 보고.”
사실 그렇게 큰 사고가 나면 몸도 몸이지만 마음도 이전 상태로 회복하기 어려웠을 텐데요.
“수술 후 3개월은 꼼짝 않고 누워만 있었어요. 목을 움직이면 안 됐으니까. 그때 아주 잠깐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야구하지 못하는 내가 이렇게 살아서 뭐할까 싶은. 용인에서 재활하면서 병든 마음도 조금씩 치유됐던 것 같아요. 노인요양소였잖아요. 가족들과 떨어져 홀로 지내는 할아버지, 할머니들과 많은 대화를 나누며 병든 마음이 치유됐어요. 제가 잘 살아야 할 이유가 생기더라고요.”
<휠체어 테니스 선수 김명제. 국가대표에 뽑힐 정도로 실력도 뛰어나다. 그의 목표는 국제대회에서 메달을 획득하는 것이다.(사진=대한테니스협회)>
그럼 재활 후, 걷기 시작하면서부턴 친구들도 만나고 일반인들처럼 생활했나요?
“3년 반 동안 방에서 게임만 했어요. 머리도 안 자르고, 수염까지 기르면서 방에서만 지내니까 아버지가 하루는 저녁 식사하시다가 제 모습을 보고 숟가락 내려놓고 나가시더라고요. 제가 정신 못 차리고 살았던 거죠. 그러다 사고 후 결정적인 사건이 생겼어요. 그 일로 제가 게임을 안 하고 새로운 삶을 찾고자 했으니까요.”
또 무슨 일이요?
“수년 동안 절 돌봐주셨던 어머니가 2013년 겨울 자궁암 수술을 받으신 거예요. 어머니가 수술실로 들어가시는데 몇 년 동안 참았던 눈물이 한꺼번에 쏟아졌어요. 가족에 대한 고마움을 갖고 있지만 가족은 공기처럼 항상 그 자리에 존재하잖아요. 어머니도 항상 그 자리에 계실 줄로만 알았는데 암 수술을 받으러 들어가시니까 갑자기 어머니의 공백이 크게 느껴졌습니다. 더욱이 어머니가 수술 받고 마취에서 깨어나 제 손을 잡고 처음 하신 말씀이 뭔 줄 아세요? ‘밥 먹었니?’였어요.”
(김명제는 한참동안 말을 잊지 못했다. 그가 다시 속마음을 꺼낼 때까지 조용히 기다렸다. 잠시 후 김명제가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됐던 2013년 겨울 얘기를 이어갔다.)
“그 겨울에 어머니를 돌보며 결심한 게 있었어요. 새해에는 무조건 직업을 갖고, 체중도 두 자리 숫자로 줄이자고요. 당시 체중이 130kg 넘게 나갔거든요. 직업을 구해서 첫 월급 받으면 모두 부모님께 드리자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때 같은 헬스클럽에 다니던 아는 형이 제게 테니스 해볼 생각 없느냐고 묻더라고요. 그 형은 휠체어 테니스 선수였어요. 제 몸 상태와 운동했던 경험을 살리면 휠체어 테니스 선수로 성공할 수 있다고 본 거예요. 사실 전 그때까지도 밤에 잠자리에 들면 악몽에 시달렸어요. 매일 밤 똑같은 꿈을 꿨습니다. 마운드에 선 제가 공을 던지고, 뛰어 다니며 수비를 하고. 그러다 잠에서 깨면 다리가 안 움직이는 꿈을 반복해서 꿨던 거예요. 야구에서 벗어나고 싶었어요. 그 꿈을 안 꾸려면 다른 걸 해야 하고, 테니스라면 해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때 처음으로 테니스를 접한 거예요. 휠체어 테니스를.”
보행이 가능한데 휠체어 테니스 선수로 뛸 수 있는 건가요?
“제가 정상적인 선수들과 함께 뛸 수는 없는 몸 상태이잖아요. 휠체어 테니스 선수라고 모두 휠체어 타고 다니진 않아요. 저처럼 보행이 불편한 선수들 중에도 휠체어 테니스 선수로 뛰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리고 전 오른손 엄지에 힘을 줄 수가 없어요. 테니스 칠 때는 테이프로 라켓을 손에 붙여서 쳐요. 휠체어 테니스 선수로 뛰기 전 대만에 가서 삼지 이상의 장애인 판정을 받고 쿼드그룹으로 뛰고 있어요.”
<절룩거리며 걷는 상태이지만 여전히 오른쪽 다리가 불편한 김명제. 그는 삼지 이상의 장애인 판정을 받고 휠체어 테니스 쿼드 부문 선수로 뛰고 있다.(사진=대한테니스협회)>
그냥 테니스도 힘든데, 휠체어를 타면서 테니스를 치는 건 더 어려웠겠어요.
“테니스를 치는 건 고사하고 코트장 한 바퀴 도는데도 오랜 시간이 걸렸어요. (최)정이는 처음에 제가 휠체어를 타고 테니스하는 걸 반대했어요. 사람들한테 또 상처받을까봐, 사람들 시선을 의식할까봐서요. 그런데 제가 테니스하겠다고 했을 때 누구보다 부모님이 기뻐해주셨어요. 그러면 된 거예요. 사고 후 처음으로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렸는데 뭘 더 바라겠어요.”
부모님이 감격하셨겠어요. 물론 아들이 다시 야구선수로 뛸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테니스로 복귀했으니 그걸 지켜보는 심정이 오죽했을까 싶네요.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내 상금을 받은 적도 있어요. 그건 모두 부모님께 드렸고요. 사지 멀쩡했을 때는 장애인들에 대해 별다른 관심이 없었어요. 저랑은 다른 세계라고 생각했으니까요. 제가 장애인이 돼 보니까 이전에 미처 보지 못했던 부분들이 다 보이더라고요. 후천적으로 장애를 갖는 분들도 정말 많으셨고요. 그분들에게 제가 조금이라도 희망을 안겨드렸음 좋겠어요. 이런 놈도 버티고 극복하고 세상으로 나올 수 있다는 걸 보여드리고 싶어요.”
그런데 최근 소속팀이 해체됐다면서요?
“네. 1년 사이에 두 번이나 (팀 해체를) 경험했네요. 처음 창단된 팀이 해체돼서 다른 팀에 들어갔는데 그 팀도 또 해체되고. 저보단 같이 운동했던 선수들 형편이 너무 안 좋아요. 현재 전 대표팀에서 뛰고 있는데, 오갈 데 없어진 선수들 보면 마음이 편치 않아요. 당장 대회가 다가오는데 훈련조차 못하고 있으니 정말 안타깝죠.”
당장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겠어요.
“여기저기 알아보고 있으니까 좋은 소식 있으리라 믿어요. 그래도 전 복 받은 사람이에요. 야구를 떠난 지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 아직도 절 챙겨주는 선배님들, 선수들이 있어요. 특히 김선우 선배님은 절 보러 일부러 올림픽공원 테니스 코트까지 찾아오셨어요. 건강 목걸이, 장갑 등 물품 등을 챙겨서 예고 없이 깜짝 방문을 하신 거예요. 사람들이 알아보고 사인 받고…. (최)정이는 제가 대회에 출전했을 때 직접 코트장에 와서 제가 테니스치는 걸 지켜봤어요. 가슴 많이 아팠을 거예요. 그래도 진심으로 박수쳐주더라고요. NC 김경문 감독님이 얼마 전에 아버지가 운영하는 식당에 찾아와서 절 만나고 가셨어요. 제가 선수 때는 감독님 아들이라고 소문났었는데…. 사고 후 감독님한테 제일 많이 죄송했어요. 너무 죄송해서 연락을 드리지 못했는데 감독님이 먼저 전화를 해주셨더라고요. ‘언제 한 번 내가 널 만나러 갈게’하셨는데 진짜 식당으로 찾아오신 거예요. 좋은 말씀 많이 해주셨습니다. 두산의 김태룡 단장님과는 지금도 연락을 주고받아요. 팀에 피해만 끼쳤는데 몸 회복하는 게 우선이라며 많은 도움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제 사고로 그때 같이 술 마셨던 친구가 오랫동안 괴로운 시간을 보냈어요. 얼마나 자신을 탓했겠어요. 서로 위로 많이 해줬습니다. 지금도 우린 잘 지내고 있고요. ”
얘기만 들어도 훈훈해지네요. 휠체어 테니스 선수로 이루고 싶은 꿈이 있다면 뭐가 될까요.
“아직 아시안게임이나 올림픽에선 메달이 전무해요. 2018년 장애인 아시안게임에 출전하게 된다면 쿼드 부문에서 메달을 따는 게 꿈이에요. 메달을 딴 다음 꼭 하고 싶은 일이 있거든요.”
그게 뭐죠?
“두산 팬들이 허락한다면 메달을 목에 걸고 두산 마운드에 올라 시구하고 싶어요. 그때 진심으로 팬들 앞에서 사죄하고 싶습니다.”
음주운전이 얼마나 무서운 건지, 그 후유증 또한 얼마나 깊고 처절한지, 김명제의 얘기를 통해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새로운 도전을 꿈꾸며 살아가는 그를 만날 수 있어 반가웠다.
<더 이상 야구를 할 수 없다는 좌절감을 극복하고 김명제는 세상 밖으로 나왔다. 자신의 실수를, 과오를 수천 번 더 곱씹으며 가슴을 쳤다는 김명제. 그는 기회가 된다면 휠체어 테니스 선수로 두산 마운드에 올라 팬들에게 직접 용서를 구하고 싶어했다.(사진=이영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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