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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출발장소 : 순천 기적의도서관앞(금당 동명초등학교정문)
광양읍 승차 07시 40분(광양읍 로타리 국민은행 앞)
환희대 - 정상 - 정원석 - 봉황봉 - 장안사 - 장천재
6. 준비물 : 회비 15,000원
중식,간식,식수, 등
7. 개념도
천관산(天冠山)의 바위들은 천관사에서 남쪽을 바라보면 더욱 기이한데, 높이 우뚝 서 있는것은 갓바위요, 튀어나와 외로이 걸려 있는 것이 북바위다.... 이밖에도 이상하고 기괴한 것들이 많은데, 오똑한 것, 우묵한 것, 입 벌린 것, 울퉁불퉁한 것 이루 다 적을 수가 없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이렇게 산세가 묘사돼 있는 장흥 천관산은 지리산, 내장산, 월출산, 능가산(내소사 뒷산)과 함께 호남 5대 명산 중 하나로 꼽히는 명산으로 등산인들에게도 인기가 높다.
탐승지로서 천관산이 뛰어나다는 것은 무엇보다 무수한 기암을 멀리서 혹은 가까이에서 마음대로 돌아보며 감상할 수 있다는 점에서다. 호남에서 기암괴봉의 경관이 대단키로는 영암 월출산이 으뜸으로 꼽히지만 웅장하고 철옹성처럼 굳건하여 접근이 만만하지 않다. 반면 천관산은 월출산에 비해 결코 뒤지지 않는 형세의 기암괴봉이 수없이 솟아 있으면서도 산세는 순하기 이를 데 없다.
서쪽 사면 일부를 제외한 나머지 산세는 어느 쪽이건 능선이 부드럽고 완만한 데다 상봉을 비롯한 주능선 일대는 억새밭으로, 비단결같은 은빛 억새꽃과 황금빛 억새능선 곳곳에 온갖 공교한 바위들이 널려 있다. 그리고 그 널린 품은 흡사 돌아보기 좋게 누군가가 일부러 적당한 간격으로 늘어놓은 것 같은 모양새다. 특히 암봉 아홉 개가 하나의 암봉군을 이루고 있는 구정봉(九頂峰)은 마치 이집트의 석물을 모아놓은 듯 기기묘묘하다.
억새와 어울린 기암괴봉의 풍치와 함께 다도해의 조망이 어울리며 천관산 산행의 매력은 배가된다. 동쪽 능선 끝자락은 곧장 바닷속으로 빠져들 만큼 바다와 인접해 있어 천관산 능선 어디서든 다도해 풍경은 눈에서 벗어나는 일이 없다. 뿐만 아니라 천관산은 계절에 따라 변화무쌍한 모습으로 보는 이의 입을 벌어지게 하고, 조망은 전남 일원의 모든 산과 멀리 제주도까지 보일 정도로 뛰어나다.
뛰어난 산세 때문에 지제산(支提山), 천풍산(天風山), 풍천산(楓天山), 신산(神山)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려온 천관산은 이 산의 인문지리서라 할 수 있는 <지제지(支提誌)>에 이렇게 그려져 있다. “우리나라에 산이 많으니 큰 것은 수개 군에 걸쳐 있고 작은 것도 일개 읍을 뒤덮고 있는데, 이산은 예로부터 특히 영묘하고 기이한 것으로써 이름이 높아 비록 두류(頭流)나 서석(瑞石)같은 높고 큰 산으로도 능히 당할 수 없으니....”
천관산은 이 지역 주민둘이 오래 전부터 신령스럽게 받들어온 산이기도 하다. 때문에 광복 전까지만 해도 망종(芒種) 날이면 천관산 일대 4개읍 주민들이 산에 오르는 풍습이 있었고, 또한 가물 때면 능선의 억새밭에 불을 지른 후 구룡봉에 개(犬)를 제물로 바쳤다고 한다.
고찰도 여럿 있었다, 특히 천관산 북서쪽 기슭에 위치한 천관사(天冠寺)는 <동국여지승람>에 통일신라 때 통영화상이 창건했다고 기록돼 있는 고찰이다. 이 사찰은 오랫동안 폐찰로 버려져 있었으나 1963년 장한택 스님이 극락보전을 세우고 천관사라 칭한 다음 신도들이 요사채를 짓고 주위의 3층석탑(보물 제795호). 석등(지방유형문화재 제134호). 5층석탑(지방유형문화재 제135호) 등의 유물을 모아놓으면서 다시 사찰로서의 모습을 되찿았다.
또한 천관산 자락의 방촌리(傍村里)는 전라남도가 지정한 전통문화마을로 고인돌 집단지인 방촌지석묘군을 비롯, 전통가옥이 여러 채 있는 곳이다. 방촌은 곁에 있는 마을이라는 의미의 ‘곁마실’의 한자음으로 고려 때 수령의 치소(治所)가 생기자 그 곁에 들어섰다는 마을이다. 이 마을은 장흥 군민들에게는 장흥 위(魏)씨 마을로 잘 알려져 있다.
방촌마을 일대에는 선사시대부터 사람들이 살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내동, 신기, 산저, 호동 등 방촌리 일대의 여러 부락에서는 청동기 거석문화를 대표하는 고인돌이 390여 기나 발견되고 신기마을 위백규 묘 뒤에 위치한 패총에서 반월형석도와 무문토기가 출토되는 등 2,500여 년전에 사람들이 살았던 흔적이 발견되었다. 고인돌 아래 석관에서 민무늬토기를 비롯, 돌화살촉, 돌그물추, 돌도끼, 돌칼 등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당시 방촌마을 사람들은 농사와 사냥, 고기잡이로 생활했고, 마한의 소국과 연관있는 세력집단이 부족을 이루어 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전라남도는 뛰어난 자연미를 갖추고 보물 1점과 문화재 2점을 가지고 있는 천관사와 도지정문화재인 장천재(長川齋)가 들어서 있는 천관산을 묶어 1998년 10월 10일자로 도립공원으로 지정했다. 전남도는 앞으로 천관산을 개발과 보전의 조화를 통한 이상적인 공원으로, 또한 고인돌 집단지구인 방촌지석묘군(도기념물 제134호)와 위계환 가옥(중요민속자료 제161호), 위성룡, 위성탁가옥(민속자료 제6,7호) 등을 한데 엮어 방촌 전통문화마을로 보호 발전시켜 나아갈 계획이다.
천관산은 산악인들에게도 인기높은 만큼 등산로도 여러 가닥 나 있다. 그중 가장 많이 찿는 코스는 장천재에서 금강굴~구정봉~억새능선~연대봉~정원석~장천재로 이어지는 원점회귀형 코스다. 관산읍 소재지에서 남쪽(대덕 방향)으로 500m쯤 떨어져 있는 방촌리 탑골마을에서 산 안으로 걸어들면 영은동천(靈隱洞天)으로 들어서게 된다. 사계(四戒)동천, 당번(幢幡)동천, 옥계(玉溪)동천, 청학(靑鶴)동천, 연화(蓮花)동천과 함께 천관산의 여섯 골짜기 가운데 경관이 가장 뛰어나다는 골짜기다.
장안사 갈림길을 지나 오른쪽 계곡길로 들어서면 곧 장천재가 나타난다. 갈림길에서 장천재 사이의 계곡은 청풍담(淸風潭), 백설뢰(白雪瀨), 도화량(桃花梁), 세이담(洗耳潭), 명봉대(鳴鳳臺), 추월담(秋月潭), 청령뢰(淸泠瀨), 와룡홍(臥龍泓) 등 존재선생이 장천팔경이라 일컫는 명소가 들어서 있는 골짜기다. 산길은 장천재 위 체육공원에서 계곡코스, 금수굴 코스, 금강굴~구정봉 코스 등 세 가닥으로 나늰다. 금수굴 능선 왼쪽 계곡은 사계동천으로 이 계곡에 들어서면 모름지기 부귀, 공명, 식색(食色), 생사 네 가지에 대한 망상을 경계해야 한다고 한다. 세 코스 가운데 천관산 특유의 바위군을 제대로 보려면 금강굴~구정봉 코스가 가장 적합하다. 체육공원에서 오른쪽 산길을 타고 능선과 계곡을 가로지른 다음 두 번째 능선을 따르면 금강굴로 오르게 된다. 잡목에 가려 한동안 답답하게 느껴지지만 선인봉(仙人峰) 암부에 닿으면 눈앞에 기묘한 형상의 구정봉이 솟구치고 등뒤로 남해바다가 한눈에 들어오는 등 천관산의 진면목이 펼쳐진다.
구정봉은 맨 왼쪽에서부터 대장봉(大藏峰), 천주봉(天柱峰), 문수보현봉(文殊普賢峰), 대세봉(大勢峰), 선재봉(善才峰), 관음봉(觀音峰), 신상봉(神象峰), 홀봉(笏峰), 삼신봉(三神峰) 등 각기 기묘한 형상을 하고 솟구친 9개의 암봉을 통틀어 일컫는 명칭이다.
신선봉에서 조금 더 오르면 종봉 아래 금강굴에 닿는다. 금강굴 위에는 지금도 깨진 기왓장이 널려있는 암자터가 있다. <지제지>에 따르면 삼국시대 때 명승과 도승들 가운데 진불(眞佛)에 귀의하고자 하는 자는 반드시 천관산에 머물러 사암(寺庵)을 차지하고 그것이 여의치 않으면 낭떠러지나 토굴 또는 후미지거나 으슥한 곳에 암자를 세우는 바람에 그 사암의 수가 89개에 이르렀다 전한다. 암자터를 지나면서부터 길이 헌난해지지만 위험 구간마다 안전로프가 설치돼 있어 문수보현봉 앞까지 수월하게 오를수 있다. 문수보현봉을 100여m 남겨두고 오른쪽으로 내려서는 길은 자연휴양림과 천관사로 이어지는 산길이다. 문수보현봉 바로 앞에서 산길은 두갈래로 나늰다. 왼쪽 길은 구정봉 남사면을 타고 환희대(歡喜臺)를 거쳐 연대봉(煙臺峰)으로 가는 길이고 곧장 오르는 길은 구정봉 북사면 길로 역시 환희대로 이어진다. 길은 남사면, 전망은 북사면 길이 좋다.
환희대는 책을 쌓아놓은 듯하다는 대장봉 정상의 평평한 석대를 말한다. ‘구정봉. 구룡봉. 연대봉’ 등산로 안내판이 서 있는 환희대 삼거리에서 남동쪽 주릉을 따르면 정상인 연대봉이 나오고 남서쪽으로 가면 구룡봉에 닿는다. 구룡봉쪽으로 향하면 탑산사 또는 부처상을 거쳐 대덕쪽으로 내려가는 산길이 나 있다. 탑산사는 저녁 노을을 감상하기에 뛰어난 장소로 알려져 있다. 또한 삼거리에서 구룡봉으로 향하다 오른쪽 능선을 따르면 천관산 자연휴양림으로 내려선다. 환희대에 이르면 천관산은 사방팔방이 터진다. 동쪽과 남쪽은 남해바다가 펼쳐지고 북으로는 월출산에서부터 제암산, 팔영산에 이르기까지 영암, 강진, 장흥, 보성, 고흥 등 남도 일원의 크고 작은 산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천관산 억새능선은 환희대에서부터 펼쳐진다. 특히 정상인 연대봉 능선은 매년 10월 초순 억새제가 열릴 정도로 장관을 이룬다. 능선 남쪽 사면에는 샘이 두곳 있다.
옛날 옥정봉(玉井峰)이라 불리기도 했던 연대봉은 고려 의종 때 봉화대를 설치했던 곳이니만큼 당연히 전망이 뛰어나다. 날씨가 좋을때는 제주도 한라산까지 보인다. 정상에서 하산은 남쪽 능선을 타고 불영봉을 거쳐 외동쪽으로 내려서거나 북동쪽 능선을 타다가 능선 갈림길에서 북릉을 타고 장안사로 내려선다. 자연휴양림에서 비로봉으로 올라 연대봉까지 간 다음 다시 구정봉으로 되돌아와 인천이씨 사당~휴양림으로 이어지는 코스도 요즘들어 많이 찿는다. 천관산 산행은 어느 코스를 택하든 5시간 정도면 충분하다. 정상 능선에 샘이 두곳 있으나 억새철 사람이 붐빌 때는 산행기점에서 준비해 올라가는 것이 확실하다.
9. 주변의 명소
(1) 천관사(天冠寺)
천관사(天冠寺)는 창건 연대는 정확히 알기 어려우나 동국여지승람에 통일신라시대 통영화상이 세웠다고 하는 절로 천관산 중턱에 자리하고 있다. 천관사의 옛 이름은 화엄사라 하였고 옛날에는 89암자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폐찰되었다.
현존하는 법당은 1963년도에 장한택 스님이 극락보전을 그 터에 다시 세우고, 다시 천관사라 칭하였고, 신도들이 요사채를 짓고 산재해 있는 탑등의 유물을 모아 옛모습을 지키고 있다.
<천관사 3층석탑> - 보물 제795호(1984.11.30.지정)
이 탑은 천관사 법당에서 약간 떨어진 좌측에 자리잡고 있다. 탑의 구조를 보면 이중 기단에 3층 석탑으로 상륜부(相輪部)가 갖추어져 있는데 여러장의 지대석 위에 중석을 놓았으며 각 면에 모서리 기둥이 표출되어 있고 중앙에 탱주(撑柱)가 생략되어 있다. 그 위로 하대 갑석은 두꺼운 편이며 상면은 가벼운 경사를 이루고 2단의 괴임을 주어 상층단(上層壇)을 받고 있다. 상층단은 4매의 면석으로 각 면에는 모서리 기둥이 모각되고 역시 중앙에는 탱주가 없다. 갑석은 하면에 부연(副椽)이 생략되었으며 상면은 수평인데다 2단의 괴임으로 탑신부를 받고 있다. 탑신부는 탑신(塔身)과 옥개석(屋蓋石)이 각 1석씩인데 각 면에 모서리 기둥이 각출(刻出)되고 옥개석 층급 받침은 3층까지 모두 4단이다. 상륜부는 노반(露盤)과 구슬모양의 보주(寶珠)가 놓여 있다.
이 탑은 양질의 화강암에 이중 기단의 일반형으로 매우 안정감 있는 석탑으로서 특히 옥개석 상면에 추녀 끝의 전각이 밋밋하고 중후(重厚)하여 전체적으로 담담한 작풍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정제된 면과는 달리 이 탑의 여러 수법에서 일부 퇴화현상이 여실히 나타나고 있다. 즉 상하 기단의 중앙에 탱주와 상층 갑석 부연(甲石副椽)의 생략 등이 그 예이며 또한 옥개석의 각 층에서 보인 층급 받침이 얇게 조식된 점 등이라 하겠다. 이러한 현상은 모두가 고려 석탑의 양식이 일부 지방화 되는 과정에서 나타난 것이라 할 것이다. 이런 점으로 보아 이 탑의 조성연대는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로 이행되는 시기로 봄이 무리가 아닐 것 같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장흥도호부조에 의하면 천관사는 영통화상이 창건하였다고 하며, 존재 위백규(1727~1798)가 쓴 지방향토지인 「지제지」(支提誌)에는 신라 애장왕(哀莊王)(800~809)때 통영화상(通靈和尙)이 창건했다고 했다. 영통과 통영으로 두 기록이 각기 다르긴 하나 동일 인물로 추정되며 같은 경내에 9세기경으로 추정되는 5층석탑과 석등이 있어 천관사의 창건이 신라 애장왕 때라는 기록은 매우 주목된다 하겠다.
<천관사5층석탑> - 도유형문화재 제135호(1986.2.7.지정)
이 석탑은 천관사 극락전 앞 왼쪽 계단 앞에 있는데 석등과 같은 선상에 있다. 양식을 보면 4매의 긴 큰석재로 지대를 구축하고 그 중앙에 기단부를 두었는데 단층기단으로 하대석은 호각형(弧角形)의 2단 괴임을 하고 그 위로 4매 판석으로 면석을 짰으며 각 면에 모서리 기둥과 중앙에 탱주(撑柱) 1주를 두었다. 갑석은 두꺼운 편이며 하면에 1단 괴임을 하고 상면 중앙에도 1단 괴임을 각출하여 몸체를 받치고 있다.
탑몸체부는 탑몸체와 지붕돌 각 1석씩이고 탑몸체 각 면에 모서리 기둥을 모각하였는데 그 조식은 5층까지 같은 양식이며 지붕돌의 층급받침은 1층에서 5층까지 3단이다. 이 탑에서 특이한 형식은 지붕돌이라 하겠는데 지붕돌이 매우 두꺼운 편으로 이는 탑의 조성연대가 떨어지면서 발견할 수 있는 예일 것이다.
특히 지붕돌 처마로 내려오는 전각의 반전도 심한 편으로 이러한 현상도 고려후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특징이다. 특히 층급받침이 3단이면서도 그 단면이 매우 얕고 지붕돌이 전체적으로 보아 두껍고 평박하여 탑이 중후하게 보인다. 같은 경내에 있는 석등의 정제(整齊)되고 균형잡힌 조각 솜씨나 3층석탑(보물 제795호)의 준수(俊秀)하고 우아한 기법과는 판이한 형식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점 등으로 보아 조성연대는 고려후기로 내려올 것 같다. 천관사는 지방향토지인『지제지(支提誌)』에 의하면 애장왕(哀莊王, 800~809)때에 영통화상이 창건하였다고 전하고 있으며 경내에 수준급인 석등과 3층 석탑 등의 귀중한 석조물이 있어 천관사의 통일신라시대 사격(寺格)을 말해주고 있다.
(2) 탑산사지 석등 - 문화재 자료 제196호(1994.12.5.지정)
탑산사 절터는 천관산(天冠山) 남쪽 중허리에 있는데, 거의 정상에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다. 현재 절터에는 근년에 세운 법당과 요사 등이 있으며 1985년 경에는 이 절터에서 청동사리탑과 흙으로 빚은 불상편 등이 발견된 바 있다.
이 석등은 탑산사 절터에서 정상을 향해 약 1km쯤 더 올라가는 산 비탈에 있으며 이곳 역시 높이 6?7m되는 돌축대와 건물지가 남아 있다.
이 석등은 현재 앙연석(仰蓮石)과 화사석(火舍石)이 유실된 상태여서 전체의 규모가 파악되지 않고 있으나 하단에 복연(伏蓮)의 8엽을 장식하고 있는 연화문의 양식과 옥개석 윗면에 나타난 밋밋한 곡선등에서 어느 정도 전체의 외모와 연대를 추정할 수 있다.
돌의 재질은 천관산 북쪽에 있는 천관사 석등(지방유형 134호)과 같은 것이나 그 양식면에서는 약간 다른 점을 보이고 있다. 즉 천관사 석등은 보림사 석등과 같은 계통으로 4각방형의 하대석과 그 위로 8각의 중석과 원형의 복연석이 이어지는, 이를테면 우리나라 전형적인 석등양식을 취하고 있으나 탑산사지 석등은 4각방형 하대석 위에 8각의 중석을 생략한 채 바로 8엽의 복연이 한돌로 연결되고 있으며 그위로 다시 8각의 간석(竿石)이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양식은 통일신라시대의 합천 백암리 석등(보물 381호), 실상사 백장암 석등(보물 40호), 충남 무량사 석등(보물 233호), 운문사 금당앞 석등(보물 193호) 등에서 확인되고 있다.
천관산 일대에 통일신라 9세기에 접근하고 있는 불교유적의 예는 천관사 3층석탑 및 석등을 꼽을 수 있는데, 아마 이 석등 역시 위와같은 불교유적의 조성과 함께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이 석등은 앙연석과 화사석이 유실된 것이 결점이긴 하지만 현재 해남 대둔사로 옮겨진 탑산사 동종(보물 88호)과 함께 옛 탑산사의 불교조형물을 규명하는데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조성연대는 고려초반기로 추정된다.
(3) 방촌리 지석묘군 - 도지정기념물 제134호(1990.12.5. 지정)
지석묘(고인돌)는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거석문화의 하나이며 무덤으로 주로 쓰이나 제단이나 기념물적인 의미의 묘표석등 다양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우리 나라 지석묘는 크게 두가지 형식으로 분류된다. 즉 탁자형의 북방식과 지상에 상석만 있고 묘실은 지하에 두는 남방식이 있다. 지석묘가 전국에서 가장 많이 분포하는 곳이 전남지방이며 암벽에서 채석한 것이 대부분이지만 자연석을 그대로 사용한 것도 있으며 지금까지 2,208개소에 2만기 이상이 알려지고 있다.
장흥군내의 지석묘도 210여군데 2,250여기가 확인되었는데 이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군집(群集)지역이 방촌리 지석묘군이다.
이 유적은 장흥-대덕간 도로에서 관산읍을 지나 남쪽으로 1.5km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방촌리 내동 마을 입구로「벅수골⌋이라 부르는 소나무 숲속에 93기의 지석묘가 남-북으로 타원형을 이루고 있다.
전체적인 수량이 많은데 비해 지석묘의 규모는 큰 편이 아니고 대부분 숲속에 이루어진 관계로 보존이 잘되어 있는 편이다. 이곳에서 남동쪽으로 1,500m떨어진 곳에 바다가 있고 북쪽으로 1,000m 떨어진 곳에 고읍천이 흐르고 있다. 그리고「벅수골」이란 왜적을 막아 주는 곳이란 뜻으로 이곳이 옛 성터처럼 왜적을 막아 주었다고 한다. 지석묘 주변에서 무늬없는 토기편과 석촉 등이 채집되었다
(4) 장천재(長川齋) - 도유형문화재 제72호(1978.9.22. 지정)
이 건물은 8단의 장대석으로 쌓올린 기단에 ㄷ자형 평면에 전면은 좌우양쪽에 1칸씩 누각(樓閣)형태로 한 것이 특징이라 하겠다.
덤벙 주춧돌을 놓고 기둥은 원형을 세웠는데 포작이 없는 주두(柱頭)와 창방(昌枋), 장혀를 올려 결구하였다. 지붕은 중간 동곡(棟曲)이 ㄷ자형 양익부(兩翼部)와 높이를 동일하게 하고 앞면에서는 팔작지붕으로 합각이 보이며 뒷면 에서는 맞배지붕으로 처리한 것이 특이하다. 문은 중앙 3칸에만 설치하였는데 3칸 모두 이분합이다.
원래는 이 자리에 영은암(후에 장천암이라고함)이란 암자가 있었다고 하는데 장흥 위씨들이 여기에 장천재를 세웠으며 지금의 건물은 조선후기(1870년경)에 중건하여 그간 수차의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또한 이곳은 존재 위백규(存齋 魏伯珪,1727~1798)가 강학(講學)했던 곳으로 전하고 있다. 위백규는 자(子)를 자화(子華), 호(호)를 존재(存齋) 또는 계암(桂菴)이라 하였다. 10세에 천문, 지리, 율력, 도불, 산수, 의학서를 열람하는 수재를 보였고 17세 이후에는 주로 장천재에 기거하면서 학문에 전념하였다. 70세의 노구에 옥과 현감의 벼슬을 지냈으며 목민(牧民)의 경륜(經綸)을 실천하는데 전력하였다.
그의 저술로는 정현신보, 만언봉사, 지제지, 자회가, 환영지 등 다수가 전한다.
・정현신보(政絃新譜): 사회의 폐단을 논하고 개선하는 방법
・만언봉사(萬言封事): 선비는 국가의 원기요 천지의 바른 기운을 강조한 내용
・지제지(支提誌): 천관산(天冠山)을 설명하는 책
・자회가(自悔歌): 어버이 섬기는 도를 갖추도록 쓴 글
・환영지(寰瀛誌): 우리나라 최초로 만든 팔도지리서겸 세계지리서
(5) 공예태우 임씨(恭睿太后 任氏)
고려 17대왕 인종(仁宗)의 비(妃)이다. 1109년 장흥군 관산읍 옥당리 당동마을에서 태어났다. 성은 임(任)씨이고 중서령 원후(元厚)의 딸이며 문하시중 이위(李瑋)의 외손녀이다. 태후가 탄생하던 날 저녁에 이위의 꿈에 황색의 큰 깃발이 집의 중문에 세워져 깃발의 끝이 궁궐의 용머리에 걸쳐 나부끼므로 외조부가 태후를 몹시 사랑하였다. 태후가 15세에 이르자 평장사 김인규(金仁揆)의 아들에게 시집가게 되었으나 혼인하는 날 저녁 갑자기 중병에 들어 죽어가게 됨으로 혼인하지 못하였다.
이후 1126(인종4) 이자겸(李資謙)이 물러나고 그의 딸이 폐비가 되자 태후가 연덕궁주(延德宮主)로 추천되었다. 태후가 추천된 것은 폐비이씨가 친정으로 가던 날 인종왕이 꿈을 꾸니 폐비가 참깨(壬子) 5되와 노란 해바라기씨(黃葵) 3되를 주고 가더라는 것이다. 이에 축준경(拓俊京)에게 꿈 이야기를 하니 "후비(后妃)로 임씨를 들일 징조요, 다섯이란 아들을 말하고 누런 해바라기씨는 그중 세아들이 왕이 될 것"이라는 상서로운 꿈이란 해몽이 있어 태후로 추천되었다.
1127년 태후가 의종(毅宗)을 낳으니 왕이 기뻐하며 태후 집에 은기(銀器)들을 하사하고 태후를 극히 총애하여 1129년 왕비로 책봉하였다. 이후 왕자 경(暻)과 명종(明宗)을 잇따라 낳으므로 인종은 왕비를 위해 수시로 은전을 베풀었으며 왕비의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왕이 소복을 입는 예를 갖추었다.
태후는 의종(毅宗).경(暻).명종(明宗).충희(沖曦).신종(神宗) 다섯형제와 승경(承慶).덕령(德寧).창락(昌樂).영화(永和) 네공주를 낳았고 의종이 왕에 즉위하자 태후를 왕태후(王太后)로 삼았다. 75세를 일기로 생을 마치며, 순능(純陵)에 장사하고 시호를 공예태후(恭睿太后)라 하였다.
이듬해 금(金) 나라에서 사신을 보내와 제사를 지냈다. 인종왕은 왕자가 탄생될 때마다 태후에 대한 은전을 베풀어 고을 명칭도 "길이 흥할 고장"이라
하여 “장흥”이라 이름지어 하사했다고 전한다.
참석 하실분은 꼬리말에 메모나 전화예약 바랍니다.
선비산악회 (011-633-8193)
첫댓글 대장님.개인사정으로인한참석못함죄송합니다.유태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