南磵集選序[任焴]
-남간집선서(임육 지음)-
글/ 나주목사 임육
번역과 해설 / 나천수
○ 任焴의 자는 汝輝, 1736년 병진생으로 본관은 豊川, 거주지는 서울이다.
부는 任恒周이며, 영조(英祖) 50년(1774) 갑오(甲午) 식년시(式年試) 생원 2등(二等) 23위로 합격하였다.
○ 나주목사 선생안에 보면 임육은 정조 19년(1795년) 9월3일부임하여 정조24년(1799년) 4월24일 이임하여 서울로 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임육의 문과합격 내역은 없으나, 국고문헌의 기록으로 보면 벼슬길에 나아가 활동하였음을 알 수 있다.
-정조 52권, 23년(1799 기미) 10월 24일(기유) 3번째기사 /목사(牧使) 임육(任焴)
-순조 2권, 1년(1801 신유) 3월 29일(을사) 1번째기사 /임육을 승지 자리에 결원이 생기면 제수하라 명하다
-순조 3권, 1년(1801 신유) 7월 21일(을미) 3번째기사 /임육(任焴)을 의주 부윤(義州府尹)으로 삼았다.
-국역일성록 > 정조2년 무술(1778년) > 1월24일(을유) >임육(任焴)을 조경묘 참봉(肇慶廟參奉)으로 삼았다.
-국역일성록 > 정조6년 임인(1782년) > 9월5일(기해) >임육(任焴)을 인제 현감(麟蹄縣監)으로 삼았다.
○崇禎紀元後三己未孟夏는 1799년 음력 4월쯤이므로, 나주목사 임기를 끝내고 서울로 올라간 시기에 이 글을 쓰고 나주를 떠난 듯하다.
○ 목사 임육으로부터 남간집선서를 받았는데, 왜 국역 남간집에는
이 글이 없는 것일까. |
<원문>
錦城。古稱多奇傑烈烈士。若金健齋,羅忠烈是已。繼有聞風而興者。姓羅。諱海鳳。號南磵。昏朝時。以正論見枳于凶徒。達虜入寇。孤城髮危。公憤不顧身。約同志糾義旅。行到淸州。聞盟成。遂罷兵而歸。念絶世路。終身嘯詠於林皐。遺風餘芬。至于今不沫。鄕人尸祝之。若公者。與二公迹殊而志同也。余宰于錦。公之六世孫學愼愼之。持公遺書。問序于余。不獲辭。則得詩文若干。付之剞劂。噫。公之詩精造理到。絶無蹈襲。公之文奇崛淸高。得古體。而最是義檄一篇。炳如日星。使尊周敵愾之義。凜然風動於海隅遐土。天經地緯。賴而不墜。益知公之忠義。根於天性而平日充養。盖可知已。百歲之下。又聞風而起者。其在斯歟。公與張谿谷爲同門。相友善。有酬唱錄一卷。附于下云。
崇禎紀元後三己未孟夏西河後人任焴謹撰。
<필자의 재벌번역>
錦城。(금성)/나주는
古稱多奇傑烈烈士。(고칭다기걸렬렬사)/예로부터 이르기를 호걸, 열녀, 열사들이 많았으며
若金健齋,羅忠烈是已。(약김건재,나충렬시이)/김건재와 나충열이 이와 같은 사람으로
繼有聞風而興者。(계유문풍이흥자)/이러한 풍채와 태도를 계승하여 분발한 자가 있으니
姓羅。諱海鳳。號南磵。(성나。휘해봉。호남간)/성은 나씨요, 이름은 해봉이며 호는 남간이다.
昏朝時。以正論見枳于凶徒。(혼조시。이정론견기우흉도)/광해군 때에
흉도들에게 정론으로서 저지함을 보였다.
達虜入寇。(달로입구)/오랑캐 군사들이 침입하자
孤城髮危。(고성발위)/외로운 남한산성은 매우 위태로웠다.
公憤不顧身。(공분불고신)/공은 울분하여 자신의 몸을 돌아보지도 않고
約同志糾義旅。(약동지규의려)/동지들을 묶어 의병을 규합하여
行到淸州。(행도청주)/행군하여 청주에 도착하였다.
聞盟成。(문맹성)/오랑캐와 화의가 이루어졌음을 듣고
遂罷兵而歸。(수파병이귀)/의병을 파하여 끝내고 돌아왔다.
念絶世路。(염절세로)/세상살이 생각을 끊고
終身嘯詠於林皐。(종신소영어림고)/죽을 때까지 숲 언덕에서 시 읊었으며
遺風餘芬。(유풍여분)/향기만 남은 가풍은
至于今不沫。(지우금불말)/지금에 이르기까지 지워지지 않았다.
鄕人尸祝之。(향인시축지)/고을 사람인 尸童이나 祝官이
若公者。(약공자)/만약 공과 같은 분으로 말한다 하면서
與二公迹殊而志同也。(여이공적수이지동야)/더불어 둘은 공의 흔적이 뛰어나다는 뜻이 같았다.
余宰于錦。(여재우금)/내가 나주목사를 맡게 되니
公之六世孫學愼愼之。(공지륙세손학신신지)/공의 6세손 학신이 삼가 하여
持公遺書。(지공유서)/공의 남긴 글을 가지고 와서
問序于余。(문서우여)/나에서 서문을 써 달라고 묻기에
不獲辭。(불획사)/요청을 사양할 수 없었다.
則得詩文若干。(칙득시문약간)/시문 약간을 얻어서
付之剞劂。(부지기궐)/목판에 글자를 새겼다.
噫。公之詩精造理到。(희。공지시정조리도)/아, 공의 시는 정결하고 이치에 이르러야 시구에 이르니
絶無蹈襲。(절무도습)/절대로 모방할 수 없다.
公之文奇崛淸高。(공지문기굴청고)/공의 글은 웅장하면서 맑고 고결하여
得古體。(득고체)/고체의 시를 얻었는데,
而最是義檄一篇。(이최시의격일편)/바로 이러한 의병 격문 1편으로
炳如日星。(병여일성)/해와 별같이 빛났다.
使尊周敵愾之義。(사존주적개지의)/오랑캐를 섬기려 할 제 오랑캐 대한 분노와 증오심이 분발한 의(義)로서
凜然風動於海隅遐土。(름연풍동어해우하토)/서울에서 먼 바닷가 지역에서 늠름한 바람 일으켜
天經地緯。(천경지위)/영원히 변하지 않을 떳떳한 이치에
賴而不墜。(뢰이불추)/힘입어서 무너지지 않았으니
益知公之忠義。(익지공지충의)/더하여 공의 충정을 알았다.
根於天性而平日充養。(근어천성이평일충양)/본성의 뿌리는 평소에 덕성을 함양하였으니
盖可知已。(개가지이)/대개 알 수 있다.
百歲之下。(백세지하)/백세후에도
又聞風而起者。(우문풍이기자)/ 또 소문을 듣고 분기하는 자 있어
其在斯歟。(기재사여)/아마도 이네들이 할 수 있으리라.
公與張谿谷爲同門。(공여장계곡위동문)/공은 더불어 장계곡과 동문으로
相友善。(상우선)/서로 잘 지냈으며
有酬唱錄一卷。(유수창록일권)/수창록 1권이 있다.
附于下云。(부우하운)/아래 운처럼 붙이노라.
崇禎紀元後三己未孟夏 西河後人 任焴謹撰。(숭정기원후삼기미맹하 서하후인 임육근찬)/1799년 4월 서하후인 임육 삼가 찬술하다
- 필자 주 -
西河後人은 西河君 任子松의 후인이란 뜻
※임자송(任子松)은 고려 충숙왕(忠肅王)-충혜왕(忠惠王) 때의 문신. 본관은 풍천(豊川). 어사(御史) 임주(任澍)의 아들로, 1342년(충혜왕 복위 3) 조적(曺頔)의 난 때 왕을 호종(扈從)한 공으로 1등공신의 호를 받음.
<해설>
○문풍(聞風)은 소문을 들은, 風度를 듣고, 풍문을 듣고,
○혼조시(昏朝時)는 광해군 때를 말함,
○枳는 탱자 지, 탱자 기 두 개의 뜻이 있는데, 탱자 기로 사용할 경우 “저지하다”란 뜻이 있어 여기는 이 뜻으로 해석해야 한다.
○염절(念絶)은 생각을 끊고
○세로(世路)는 세상살이
○기궐(剞劂)은 板刻,
○이도(理到)는 이도구도(理到句到)라는 말로 이치가 이르러야 시구가 이른다는 뜻.
○도습(蹈襲)은 모방,
○시동(尸童)은 옛날에 제사 지낼 때에 신위(神位) 대신으로 교의(交椅)에 앉히던 어린아이
○축관(祝官)은 제사 지낼 때 축문(祝文)을 읽는 사람
○존주(尊周)는 직역하면 주나라를 높이다, 높은 주나라이지만 여기서는 오랑캐를 섬긴다의 뜻
○海隅은 바닷가
○遐土은 시골, 하방(遐方/서울에서 먼 지역)
○天經地緯는 하늘이 정하고 땅이 받드는 길이라는 뜻으로, 영원히 변하지 않는 진리나 법칙을 이르는 말.
<글의 음미>
○得古體。(득고체)/고체의 시를 얻었는데,
而最是義檄一篇。(이최시의격일편)/바로 이러한 의병 격문 1편으로
炳如日星。(병여일성)/해와 별같이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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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재 이서구의 척재집 속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而丁卯詩亦在其中。(이정묘시역재기중)/그중에 정묘년의 시가 역시 있었다.
甞爲宋文正先生所激賞。(상위송문정선생소격상)/일찍이 문정공 송시열 선생이 격찬하는 바
眞可寶重也。(진가보중야)/참으로 귀중한 보배로다.
余方承朝命。(여방승조명)/나는 방금 조정의 명을 받고
撰次丙丁以來忠臣烈士之事。(찬차병정이래충신렬사지사)/丙丁이래 충신열사의 일을 순서를 매겨 편집하는데
特表公大節。(특표공대절)/공의 큰 절개를 대표로 삼으니
使後世知公之賢。(사후세지공지현)/이 일로 후세에 공의 현명함이 알려지고
不獨以一詩人自命者如此云。(불독이일시인자명자여차운)/한 시인으로서 이름 지을 수 없는 분임을 이렇게 밝히는 바이다.
○鄕人尸祝之。(향인시축지)/고을 사람인 尸童이나 祝官이
若公者。(약공자)/만약 공과 같은 분으로 말한다 하면서
與二公迹殊而志同也。(여이공적수이지동야)/더불어 둘은 공의 흔적이 뛰어나다는 뜻이 같았다.
위 글은 尸童과 祝官의 말을 크게 보는 말인데,
축관의 축문은 사전에 준비된 원고를 낭송하겠지만, 시동(어린아이)의 말은 소위 “신 내림” 말인 듯하다.
그래서 신 내리는 시동의 말에 의하면 남간의 행적이 뛰어나다라는 표현 같다.
필자도 이 부분의 해석이 가장 어려웠다.
나주목사 임육이 하필이면 尸童의 말을 인용하는지, 그 당시의 문화를 꿰뚫지 못하기에 이해가 되지 않은 부분이다.
나주목사도 후손 學慎이 제공한 자료에 의거 이 글을 지었으니, 시동과 축관의 관련된 문서가 그 당시에는 모두 존재했었다는 반증이다.
오늘날에는 이러한 자료를 전혀 찾을 수 없으니 향토사 연구 차원에서도 매우 안타까운 심정이다.
니재공이 소장한 남간공의 (정묘詩)는 남간집p119,~121에 실려 있음을 확인함
(문노적입구술회봉정계곡)원문은 계간수창 책 p48에실려 있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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