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룡알 화석
그거 있잖아요, 참을 수 없는 존재, 그거, 세 번 읽었거든요, 첫 번째 도대체 무슨 소린지, 두 번짼 재미가 조금, 이번 세 번짼 정말 놀라웠어요, 어쩜 그렇게 잘 짜인 그물 같은지, 촘촘하게, 인생이 다 그렇고 그런 거겠지만, 지저분하고 고상하다가 뜬금없이, 이내 뜨물처럼 흘러가는 거,
자꾸 말 끊지 말아요, 난 농담이 더 좋던데, 말 한마디 툭 던진 게, 가벼운 농담, 우리도 그냥 아무 생각 없이 한마디 툭, 가볍게 그냥 농담, 그게 한 사람 일생의 무게를 뒤집잖아요, 아니다, 쪼그라들게, 아니다, 씨를 말리게, 아니다, 삭아서 쭉정이만 남게 만드는데,
이번에 왜 가즈오 이시구로 있잖아요, 날 버리지만가, 네버렛미곤가, 하여튼, 또 다른 내가 나를 위해 산다면, 어딘가에서 내 몸을 갖고 산다면, 삶에 희망이 있는 건지, 모두 삭아서 허공만 남기는 건 똑같은데 말이에요, 겨우 일억 년도 못 살면서, 화석도 못 되면서,
그런데, 이게 갈대예요, 아니다, 삘긴가, 어렸을 때 하얗게 꽃이 피면 뽑아서 빨아먹었는데, 아니다, 꽃은 아닐 거야, 그런데 알이 어디 있죠? 겨우 몇 개뿐, 죽음이 너무 단순화되었네요, 추상화라고 해야 하나, 멸종될 것이고 어둠이 내리겠죠, 우리에게도,
있잖아요, 아무리 가벼운 것이라도 농담처럼 그냥 사라지지 말자고, 기념으로 우리 알 한 개씩 낳아요, 복제해요, 지금, 여기.
《정한용 시인》
1980년《중앙일보》신춘문예 평론 당선, 1985년 《시운동》시 등단. 시집으로『천 년 동안 내리는 비』『얼굴 없는 사람과의 약속』『슬픈 산타 페』『나나 이야기』『흰 꽃』『유령들』『거짓말의 탄생』등이 있다.
밀란 쿤데라의 대표적인 장편소설『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언제쯤 읽었는지 기억나지는 않지만, 읽고 난 뒤에 든 생각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결국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무거움’이구나. 였다. 가벼움과 무거움은 동의어였던 것이다. 한때 나는 내 존재가 무거워 못 마시는 술을 많이도 마셨던 적이 있다. 술도 자주 마시니 반병이 한 병이 되고 한 병이 두 병이 되고, 다용도실에 술병이 쌓여갔다. 그것은 나 나름의 저항의 방식이거나 혹은 감당하기 힘든 세상을 건너는 방식이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세상을 술잔으로 마음껏 조롱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세상에 이겼는가. 세상은 끄떡없이 그대로였는데, 나는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아픔은 항상 나의 것이었다.
세상을 건너는 저마다의 방식이 있다. 무거운 세상을 가볍게 띄엄띄엄 건너려는 사람과 가벼운 세상을 무겁고 진중하게 건너려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이 두 가지 방식이 결국은 같다고 생각한다. 이렇게나 저렇게나 세상은 아프고 고통스럽고 딱 그만큼 덧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시인은 말한다. “난 농담이 더 좋던데, 말 한마디 툭 던진 게, 가벼운 농담, 우리도 그냥 아무 생각 없이 한마디 툭, 가볍게 그냥 농담, 그게 한 사람 일생의 무게를 뒤집잖아요, 아니다, 쪼그라들게, 아니다, 씨를 말리게, 아니다, 삭아서 쭉정이만 남게 만드는데,// 이번에 왜 가즈오 이시구로 있잖아요, 날 버리지만가, 네버렛미곤가, 하여튼, 또 다른 내가 나를 위해 산다면, 어딘가에서 내 몸을 갖고 산다면, 삶에 희망이 있는 건지, 모두 삭아서 허공만 남기는 건 똑같은데 말이에요, 겨우 일억 년도 못 살면서, 화석도 못 되면서,” 삶이란 “가벼운 농담”이고 그 “농담” “한마디”가 “한 사람 일생의 무게를 뒤집”기도 한다고, 그렇게 맥락 없이 가볍고 가벼운 것이 삶이라고 또 그렇게 무겁고 무거운 것이 삶이라고. 가벼움과 무거움 모두 “허공만 남기는 건 똑같”다. 고.
그러니 우리 모두 “농담처럼 그냥 사라지지 말자고,” 이 세상을 살다간 “기념으로 우리 알 한 개씩 낳”자고 시인은 말한다. 시인은 그냥 사라지진 않을 것 같다. 그가 낳은 “공룡알”처럼 큰 수많은 시집과 수많은 그림들이 그가 사라진 뒤에도 “공룡알 화석”처럼 “지금, 여기.”에서 반짝이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농담처럼 그냥 사라지지 말”고, “기념으로 우리 알 한 개씩 낳아”서 “지금, 여기.”에 우리들을 “복제해요”. 세상에 쫄지 말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아요. 가엾은 우리! 가볍고 무거운 우리! 무겁고 가벼운 우리! (홍수연)
< 정한용 시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