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9월 14일 금요일
[(홍) 성 십자가 현양 축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전례
이날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죄를 속죄하시려고 몸소 지신 십자가를 묵상하고 경배하는 날이다. 이 축일의 기원은 정확히 알 수 없다. 전승에 따르면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어머니 헬레나 성녀의 노력으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찾게 되었고, 황제는 이를 기념하고자 335년 무렵 예루살렘에 있는 예수님의 무덤 곁에 성전을 지어 봉헌하였다. 그 뒤로 십자가 경배는 널리 전파되었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에 축일이 9월 14일로 고정되었다.
말씀의 초대
주님께서는 모세에게 불평을 하던 이들에게 불 뱀을 보내시고, 구리 뱀을 만들어 뱀에 물린 사람들이 그것을 쳐다보면 살아나게 하신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고 하신다(복음).
제1독서
<뱀이 사람을 물었을 때, 그 사람이 구리 뱀을 쳐다보면 살아났다.>
▥ 민수기의 말씀입니다. 21,4ㄴ-9
4 길을 가는 동안에 백성은 마음이 조급해졌다.
5 그래서 백성은 하느님과 모세에게 불평하였다.
“당신들은 어쩌자고 우리를 이집트에서 올라오게 하여,
이 광야에서 죽게 하시오?
양식도 없고 물도 없소.
이 보잘것없는 양식은 이제 진저리가 나오.”
6 그러자 주님께서 백성에게 불 뱀들을 보내셨다.
그것들이 백성을 물어, 많은 이스라엘 백성이 죽었다.
7 백성이 모세에게 와서 간청하였다.
“우리가 주님과 당신께 불평하여 죄를 지었습니다.
이 뱀을 우리에게서 치워 주시도록 주님께 기도해 주십시오.”
그래서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였다.
8 그러자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불 뱀을 만들어 기둥 위에 달아 놓아라.
물린 자는 누구든지 그것을 보면 살게 될 것이다.”
9 그리하여 모세는 구리 뱀을 만들어
그것을 기둥 위에 달아 놓았다.
뱀이 사람을 물었을 때,
그 사람이 구리 뱀을 쳐다보면 살아났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또는>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드높이 올리셨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필리피서 말씀입니다. 2,6-11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6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7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8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9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드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분께 주셨습니다.
10 그리하여 예수님의 이름 앞에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자들이 다 무릎을 꿇고
11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모두 고백하며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게 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3,13-17
그때에 예수님께서 니코데모에게 말씀하셨다.
13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
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15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16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17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십자가를 곳곳에 두고 살다 보니 무덤덤하여졌습니다. 길거리를 다녀도 곳곳에서 어렵지 않게 십자가를 볼 수 있는 세상입니다. 성당이나 수도원 안에는 거의 방마다 십자가가 있고, 어떤 경우는 장식품처럼 놓여 있기도 합니다. 그런데 고대 로마나 이스라엘 사람이 현대에 와서 이 모습을 보면 몹시 놀라고, 어쩌면 눈을 뜨고 다니지 못할 것입니다. 그들에게 십자가는 고통을 뜻하기도 하였지만, 무엇보다 수치를 뜻하였습니다.
그래서 사형의 여러 방법 가운데서도 십자가형은 특수한 형벌로 여겨졌고, 유다인은 나무에 매달려 있는 것 자체를 하느님께 저주받은 표지로 여겼기에,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께서는 메시아이실 수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요한 복음서에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는 사건을 ‘현양’이라고 봅니다. 그분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는 순간이 그분께서 영광스럽게 되시고 모든 이를 당신께 모으시는 때입니다. 그분께서 높이 들어 올려지는 그때가, 당신을 믿는 이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때입니다.
수치를 피하려 하고 다른 사람의 눈앞에서 자신을 드러내려고 하는 수많은 사람에게 예수님께서는, 그 반대의 방법으로 하느님께서 세상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보여 주십니다. 우리를 위해서 온 세상을 정복하시고 모든 통치자를 굴복시키시는 것이 아니라 가장 수치스러운 죽음까지 끌어안으심으로써, 하느님께서 우리에 대한 사랑으로 어디까지 가시는지를 알려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우리의 영광이고 구원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 세상 어느 임금에게도 바치지 않을 깊은 경배를 드립시다.(안소근 실비아 수녀)
십자가는 그리스도인들의 이마에 깊이 새겨져 있는 트레이드 마크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성 십자가 현양 축일에 십자가라는 화두로 묵상을 해봅니다. 우리 모두 십자가 없는 평안하고 안락한 삶을 꿈꾸지만, 우리네 인간 현실 안에서는 불가능합니다.
너나할 것 없이 각자 등에는 저마다의 십자가 하나씩 짊어지고 때로 헐떡이며, 때로 용기를 내며,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특별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십자가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입니다. 십자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이마에 깊이 아로새겨져 있는 트레이드 마크입니다.
우리네 삶에서 기쁨과 슬픔, 고통과 행복은 언제나 동전의 양면 같습니다. 돌아보니 행복과 불행이 끝도 없이 교차해온 나날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도 영광과 승리로 가득했던 출애굽은 찰나의 순간이었습니다. 즉시 그들에게 다가온 것은 척박한 사막과 기약 없는 대규모 공동체 생활, 배고픔과 갈증이었습니다.
“당신들은 어쩌자고 우리를 이집트에서 올라오게 하여, 이 광야에서 죽게 하시오? 양식도 없고 물도 없소. 이 보잘것없는 양식은 이제 진저리가 나오.”(민수 21,5)
보십시오. 우리네 지상 인생 여정은 그 누구든 어쩔 수 없습니다. 결핍과 고통 투성이입니다. 근원적 갈증과 배고픔의 연속입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너그러운 마음이요, 고개를 들어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관대함입니다.
가끔 기가 막힌 이웃을 만납니다. 세상에 어떻게 이렇게 꼬인 인생이 다 있는지? 저런 상태로 어떻게 살아가는지? 아무리 둘러봐도 사방이 높은 벽으로 가로막힌 힘겨운 삶을 살아가는 분들 앞에 뭐라 위로의 말을 드리기도 쉽지 않습니다.
기도 열심히 하면, 주님께 매달리면서 신앙생활 열심히 하면 뭔가 상황이 달라질 줄 알았는데, 아무리 발버둥 쳐 봐도 삶은 여전히 거기서 거긴 분들 앞에 그저 송구스럽기만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잘 되기만을 바라시는 분이요 우리를 축복하는 하느님이라 믿었는데, 삶 자체가 고통의 연속이요, 십자가 투성이인 우리네 삶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제게는 하나의 큰 숙제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답을 가르쳐 주시더군요. 우리 그리스도교는 근본적으로 만사형통, 승승장구, 지속적인 현세 축복을 외치는 종교가 아니라는 사실을 당신의 지상에서의 삶 전체를 통해 잘 가르쳐주셨습니다.
우리의 신앙과 추종의 대상인 예수님부터 고난의 인간, 배척당하는 인간, 십자가 죽음을 넘어서야 하는 인간으로서의 운명을 타고 나셨음을 스스로 밝히셨습니다.
그렇다면 사람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스승으로 모신 우리 그리스도교인들의 운명 역시 별반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분처럼 이 세상에서 고난을 겪고, 때로 배척을 받고, 때로 죽음과도 같은 현실을 감내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가 부활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그리스도교는 고통과 십자가 없는 부활을 절대로 외쳐서는 안 됩니다. 희생과 시련은 거부하고 달콤함과 안락함만을 보장하는 교회여서도 안 됩니다. 우리에게 매일 다가오는 고통과 십자가를 소중히 여기며 고통과 십자가에 담긴 가치와 의미를 지속적으로 찾아 나가는 것이 정말 중요한 과제입니다.
이왕이면 져야 할 십자가라면 기꺼이, 관대하게 지고 갈 때 생기는 한 가지 특별한 현상이 있습니다. 십자가가 가볍게 느껴집니다. 그리고 언젠가 그 십자가가 십자가가 아니라 기쁨이요 은총이요 축복으로 변화되는 느낌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샤워기의 밸브가 헛돌았습니다. 자세히 살펴보니 밸브에 틈이 벌어졌습니다. 틈이 벌어졌으니 조이는 힘이 약해졌고, 그래서 헛돌았습니다. 더 벌어지기 전에 새로운 밸브를 구매해서 교체했습니다. 새롭게 밸브를 교체하니 잘 열리고 잠겼습니다. 요즘은 자동차도 자동차의 상태를 화면으로 알려주고 있습니다. 엔진오일의 교체 시기도 알려주고, 타이어 압력 상태도 알려주고, 자동차의 건강 상태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교구에서 1년에 한 번은 ‘건강검진’을 하도록 배려하고 있습니다. 위내시경과 장내시경도 하도록 권하고 있습니다. 한국에 있을 때는 성모병원에서 건강검진을 했는데, 미국에 와서는 기회가 없었습니다. 내년에 한국 가면 건강검진을 한번 받아보려고 합니다. 건강검진의 목적은 혹시 모를 몸의 이상을 점검하는 겁니다. 이상이 있다면 더 나빠지기 전에 조처하는 겁니다. 이상이 없다면 감사하는 마음으로 다음 일 년을 기다리는 겁니다. 신앙인은 ‘양심 성찰’을 통하여 신앙을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기도는 정해진 시간에 하는지, 선행은 하고 있는지, 영적 독서는 하고 있는지, 말씀은 가까이하고 있는지, 미사 참례는 잘하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오늘은 ‘십자가 현양 축일’입니다. 이 축일은 40일 전에 있었던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과 함께 묵상하면 도움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데리고 타볼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대표하는 모세와 예언을 대표하는 엘리야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과 계명을 완성하는 분이심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얼굴이 거룩하게 빛났고, 예수님의 옷도 하얗게 빛났습니다. 하늘에서 '이는 내 마음에 드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다.'라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주님 여기에 천막 3개를 만들겠습니다. 하나는 주님, 다른 두 개는 모세와 엘리야를 위해 만들겠습니다.' 베드로는 거룩한 변모의 의미가 영광과 기쁨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율법학자와 대사제들에게 끌려가서 고난을 받아야 한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야한다.' 그러자 베드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베드로는 십자가 없는 영광을 원했습니다.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한다.’
그렇습니다. 거룩한 변모는, 하느님의 영광은 사람의 일을 통해서는 성취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를 때 은총으로 주어지는 겁니다. 하느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자기에게 주어지는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가는 겁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면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시면서 십자가는 구원과 부활의 표징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셨고,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지만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사제는 미사의 정점인 성찬의 전례에서 이렇게 선포합니다. “신앙의 신비여!” 교우들은 사제의 선포에 이렇게 응답합니다.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주님의 죽으심을 전하며 부활을 굳게 믿나이다. 십자가와 부활로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 영원히 경배 받으소서.” 십자가의 길 기도에서 우리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로 온 세상을 구원하셨나이다. 예수 그리스도님, 경배하며 찬송하나이다.” 그렇습니다. 우리 신앙의 정점에는 십자가가 있습니다. 십자가 없는 구원은 씨 뿌리지 않고 열매 맺으려는 욕심입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은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사막의 신기루일 뿐입니다.
십자가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십자가의 수직면은 하느님과 사람의 일치를 의미합니다. 십자가의 수평면은 사람과 사람의 일치를 의미합니다.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은 바로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게 하는, 사람과 일치를 이루게 하는 ‘문’이라고 하겠습니다. 오늘 십자가 현양축일을 지내면서 나에게 주어지는 십자가를 충실하게 지고 갈 수 있도록 용기를 청하면 좋겠습니다.
<이루어야 할 꿈>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요한 3,14)
살리는
십자가를
바라보다가
살리려
십자가를
짊어집니다
오늘의 성인
성녀 노트부르가(Notburga)
활동년도 : 1265-1313년
신분 : 하녀
지역 : 티롤(Tyrol)
같은 이름 : 노뜨부르가, 노뜨브르가, 노트브르가
독일 남부 티롤 지방의 작은 마을인 라텐베르크(Rattenberg)에서 가난한 직공의 딸로 태어난 성녀 노트부르가는 어릴 때부터 그 지방의 백작의 집에서 하녀로 일하였다. 열심한 그리스도인이던 그녀는 가끔씩 음식을 불쌍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는데, 이것이 주인에게 들켜 쫓겨났다. 그 후 그녀는 에벤(Eben)의 어느 농장에서 일하는 동안에도 계속하여 선행을 베풀었는데, 자신은 거의 굶다시피 했던 것이다. 이러한 그녀의 소문이 널리 퍼지자 백작 부인은 그녀를 다시 불러 들였다. 여생을 하녀로서 지내다가 1313년 9월 14일에 세상을 떠난 성녀 노트부르가는 하녀들의 수호성인으로 그녀의 유해는 에벤에 있는 성 루페르투스(Rupertus) 성당에 안장되었다. 그녀에 대한 공경은 1862년 3월 27일 교황 비오 9세(Pius IX)에 의해 허용되었다. 그녀의 상징은 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