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한다고 말하면 사랑하는 것인가
제네바 주교인 성 프랑수아 드 살에게 완전함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여쭈었다. 그는 ”온 가슴으로 신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해야 한다네.“라고 대답하였다.
나는 ”완전함이 어디에 있는지를 여쭈어 본 것이 아니고 거기에 도달하는 방법을 여쭈었습니다.“라고 다시 끼어들었다. 그는 다시 ”최고의 사랑은 수단이자 목적이라네. 그것은 우리가 완전함에 도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며, 결국 최고의 사랑뿐이라네.. 영혼이 신체의 생명이듯이 사랑은 영혼의 생명이라네.“라고 대답하였다.
나는 ”그 모든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제가 알고 싶은 것은 어떻게 온 마음으로 신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가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는 다시 ”우리는 온 마음으로 신을 사랑하고 이웃을 우리처럼 사랑해야 한다네“라고 대답하였다. 나는 ”한 발자국도 진전이 없습니다. 그런 사랑을 획득할 수 있는 방법을 말해주십시오.“라고 대답했다.
”온 마음으로 신을 사랑하는 최선의 방법, 가장 빠르면서도 쉬운 방법은 그분을 완전히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이라네!“ 그는 그 외에는 어떤 대답도 주지 않았다. 그러나 마침내 주교가 말했다.
”완전해지는 방법, 시스템, 비밀스런 길을 내게 알려달라고 한 사람이 자네 말고도 많았네. 그들에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대답은 신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이 유일한 비밀이며, 그런 사랑에 도달하는 유일한 길은 사랑하는 것을 통해서라는 것이네. 자네는 말을 함으로써 말하는 걸 배우고, 공부함으로써 공부하는 걸 배우고, 달리기를 함으로써 달리기를 배우고 일함으로써 일하는 걸 배우지 않나. 그와 마찬가지로 사랑함으로써 신과 사람을 사랑하는 걸 배운다네. 다른 방법으로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스스로를 기만하고 있는 것이네. 신을 사랑하고 싶다면 계속해서 점점 더 많이 그분을 사랑하게나. 순수한 초보자로 시작하면 사랑의 힘이 자네를 예술의 대가로 만들어 줄 걸세. 진전을 가장 많이 보이는 사람은 계속해서 앞으로 밀고 나아가면서 스스로는 목적지에 도달했다고 믿지 않는다네. 왜냐하면 최고의 사랑은 우리가 마지막 숨을 쉴 때까지 계속해서 커져야만 하기 때문일세.“
「영원의 철학」 중에서 <장 피에를 카뮈>
*관념적인 사랑과 실존적인 사랑
주교는 관념적인 사랑을 말하고 있고, 질문자는 실존적인 사랑을 말하고 있으니 서로 통하지 못한다. 주교는 머리 속으로만 사랑을 하고 있고, 질문자는 실제로 어떻게 하는 것이 사랑하는 것인가를 묻고 있으니 둘은 동문서답을 하고 있다.
머리 속으로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어떻게’가 있을 수 없다. 다만 계속 머리 속으로 사랑하고 있을 뿐이다. 실제로 사랑을 실천해야 하는 사람에게는 ‘언제 어떻게 무엇을’이라는 과제를 안게 된다.
주교는 기도할 때마다 ‘하느님 사랑합니다. 제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 사랑합니다.”하고 하루에도 수 백 번을 되뇌일 것이다. 그에게는 하느님을 사랑하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이란 기도뿐이기 때문이다. 평생 기도만 하는 사람과 기도하고 실천하는 사람의 차이이다.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은 자신이 한 일들이 사랑이라는 것조차를 의식하지 못한다. ’사랑‘을 입에 달고 사는 사람의 삶 속에 사랑이 없다면 그 기도는 공허해지고 자기 위선에 불과하다. 사랑함으로써 사랑을 배울 수 있다고 했다. 마치 걸음으로써 걸음마를 배울 수 있듯이 말이다. 사랑은 배우는 것도 가르치는 것도 아니다.
선사시대에 엄마는 어린 아이에게 젓을 먹이고, 아빠는 숲에서 사냥한 동물을 어깨에 메고 보금자리로 돌아온다. 이들에게는 사랑이라는 말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길을 가던 나그네가 우물 가에서 놀던 어린 아이가 우물 속으로 빠지려 하자 손을 뻗어 아이를 잡았다. 그는 사랑을 실천하려고 한 것도 아니었다. 그는 매일 기도 속에서 사랑하겠다고 다짐하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사랑하는 데 어떤 방법이 있다고 여기고 그것을 알기 원하는 것은 또한 어리석은 일이다. 좋은 방법을 알려주면 그는 평생 그것만 실천하려고 할 것이다.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남을 도와야 한다고 여기는 사람은 자꾸만 밖으로 나가려고만 한다. 먼 길을 가기 위해서는 가까운 곳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입으로 사랑한다고 말하면 사랑하는 것인가. 아침저녁으로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입맞춤까지 열심히 하던 부부는 몇 년 못가 이혼을 하고, 사랑한다는 말 한 마디 해본 적도 없는 부부는 평생을 함께 산다.
「소록도의 마리안느와 마가렛」
우리 곁에 사랑이 머물던 시간 ---
마지막 책장을 덮고 한참동안 묵상했다. 마리안느와 마가렛 두 간호사님들을 따라서 그 분들이 걸어온 삶을 함께 여행한 기분이다. 스물여덟 꽃처럼 어여쁘던 시절에 한센병 환우들이 모여 사는 소록도에 들어와서 칠십 하나가 될 때까지 43년 동안 봉사하고 헌신하는 삶을 살았다. ‘그 분들이 일심으로 거의 평생을 환우들을 돌보는 삶을 살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이었을까’가 이 책을 읽는 동안 나의 화두였다.
첫째는 한 곳을 바라보며 마음의 흐트러짐 없이 성심성의로 살았다.
둘째는 아무런 욕심 없이 하루하루를 감사하고 자기 일에 만족하며 살았다.
그 분들이 모두 크리스챤이라고 해서 오직 하느님의 말씀대로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만이 살아온 것은 아니었다. 그것만을 위함이라면 자기 공덕을 쌓기 위한 이기적 행위였다고 봐야 하는데 그런 언급을 어디서도 찾을 수 없다.
2015년 11월 22일, 마리안느와 마가렛 두 간호사는 편지 한 통을 달랑 남기고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소록도를 떠났다. 40여 년 전 왔을 때처럼 가방 하나만 들고 나룻터에서 배를 탔다. 연로하다보니 이제부터는 남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나이가 되었다는 이유였다.
마리안느는 은퇴 후 마지막 인터뷰에서 말했다.
“걱정도 하지 않았어, 하루하루 그냥 열심히 살면 되니까. 그냥, 밝은 줄 생각하면 돼요. 그걸 따라가면 하느님 부름이에요.”
하느님의 말씀에 순명하기 위해서 산 것이 아니라 올곧은 마음으로 하루하루 열심히 살다보면 그것이 결국은 하느님의 뜻이라는 말이다.
마가렛은 오스트리아로 귀국 후 인스부르크 요양소에서 어렵사리 이렇게 말했다.
“소록도? 아주 좋았어요. 근디 부끄러워, 나는 간호 일했지 그거 말고는 특별히 한 일이 없어요. 언제나 우리 행복 있었어요. 환자들 치료해주는 거 같이 사는 거, 다 좋았고.” 특별한 일을 한 것이 아니고 그래서 상 받을 일도 아니라는 마음이 그 분들의 삶이었다.
밝은 곳을 좇아서 하루하루 정성으로 살다보면 그것이 하느님을 기쁘게 하는 길이라는 것이다. 어떤 것이 하느님이 원하는 길인가를 평생 동안 생각하면서 아무 일도 제대로 못하다가 결국은 알지도 못하고 죽어가는 것이 보통의 삶이다.
자신이 한 일이 대단할 게 없다는 생각은 자신도 모르게 해야 할 일을 해온 사람들의 참마음이다. 그 분들은 종교적인 신념을 실천해 나가야 한다는 자의적인 소명보다는 당장 눈앞에서 고통 받는 이를 위로하고 도와야 한다는 일념만으로 살아왔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측은하게 여기고 힘껏 돕는 것은 그것이 바로 사랑의 출발점이다. 두 분은 40년이 넘도록 월급을 받은 적이 없고, 도리어 고국에서 모금한 후원금으로 환자들을 도왔다.
마리안느와 마가렛 두 분이 소록도를 조용히 떠나 고국인 오스트리아에 가고 나서야 멀리 소록도의 삶이 보이기 시작했다. 자신들이 일방적으로 남들에게 주기만 한 삶이 아니라 그에 못지않게 받은 것도 많았다는 것이고 그것이 그동안 알지 못했던 힘이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그리하여 줄 데도 없고, 받을 데도 없는 고향에서의 삶은 따뜻한 가족들이 곁에 있어도 인스부르크의 겨울 날씨 만큼이나 차갑게 느껴지기 시작하였다.
나는 책상 앞에 수신정심修身正心이라고 붓으로 써서 붙여놓고 매일 바라보았다. ‘몸을 닦는 것은 마음을 바르게 함에 있다’는 맹자에 나오는 말을 숙지하려고 함이다. 맹자에는 또 이런 말도 있다. “선한 마음을 보존하고, 선한 본성을 기르는 것은 하늘을 섬기는 일이다. 存其心 養其性 所以事天也.”
선함에서 떠난 삶이 결코 하느님이 원하는 삶은 아닐 것이다. 하느님은 인간의 세속적인 섬김을 원하는 존재가 아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면 그것이 하느님을 섬기는 길이 된다. 다른 방법으로 하늘을 섬기겠다고 하는 것은 모두가 하늘이 원하는 바가 아닐 것이다.
그런데 마음을 바르게 한다는 정심은 과연 무엇일까? ‘마음을 똑바르게 한다‘는 개념이 머리속에서는 잘 정리가 안 된다. ’正‘은 어느 쪽으로 벗어나지 않고 바른 길로 똑바르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바른 길은 밝은 길이고, 하느님이 우리에게 가기를 원하는 길이다. 그 길을 하루하루 정성스럽게 똑바로 가는 게 사는 거다.
이것을 <대학>에서는 성의정심誠意正心(뜻을 정성스럽게 하고 마음을 바르게 하는 것)이라고 했다. 또한 마음을 바르게 한 곳을 향해 가려면 가장 긴요한 것이 욕심을 줄이는 것이라고도 했다. 욕심을 많이 가지면 마음을 바르게 하기 힘들고 따라서 길에서 벗어나기 쉽다는 뜻이다.
마리안느와 마가렛의 삶에는 내가 찾고자 했던 정심正心의 본디 모습이 살아있었고, 욕심 없이 맑게 살았기에 그 길을 기쁜 마음으로 갈 수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루하루 열심히 살았고 간호했고 다른 일 한 것도 없다. 우리가 무슨 대단한 일을 했다고 하는 건지 모르겠다.’는 것이 그 분들의 생각이다. 준 것을 잊으라고 했지만 주었다는 사실 자체를 삶 속에 녹여 놓아 의식하지 못한다.
두 분은 소록도에 있는 동안 병든 사람들을 돌보았고, 떠난 후에는 그들의 삶을 통해서 멀리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깨달음을 얻게 하고 있다. 정심正心으로 살아가는 삶의 길에는 갈래가 아주 많다. 모두가 간호사가 되어야만 하는 것도 소록도로 가서 병자를 돌보아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 각자의 길에서 바라보는 밝은 빛은 하나이다. 그 빛을 정면으로 향해서 살아가면 된다.
마리안느와 마가렛이 살아온 삶 앞에서 우리는 어떤 철학도, 어떤 교리도, 입으로 사랑을 말하는 어떤 외침도 모두 빛을 잃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전남 고흥군에서는 두 분을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