뭉크와 버려둔 그림들
퇴근길에 카오됴에서 뭉크가 나왔어 나는
웃음을 머금고 뭉크를 들었지 7분 정도
그 시간은 집과 일터 사이를 오가는 자동차 거리
그림이 팔려 나갔어도 원본인가 사본인가를 늘 간직했다는
뭉크 절규가 넉 장이래 어느 날 그가 그림을 그려놓고서
그걸 버리고 집으로 갔기 때문에 사람들은 궁금했다
왜 정성들인 그림을 버리고 가니 아깝게 말야
그때 뭉크 걔네들을 그냥 내버려두세요 햇살과 공기 마시며
재활하게요 그랬다나, 뭐 재활이 그럴 때 쓰이는 말이였니
뭉크가 버리고 간 그림처럼 햇살과 공기가 필요해 우리도
그래요 그러면 강가에 나가 그림들처럼 누울까요
박물관 벽에 걸려 있을 것들 그렇게 누울 확률은 드물잖아요
그러니 생명이 질긴가 실험했을까 뭉크는
어쨌든 고민과 즐거움 알 듯도 모를 듯도 하여 뭉크
보이지 않는 것들 본다고 하면서 당신도 강가에 한 점 그림이
되고 싶나 내 것이라 불렀던 분신들과 헤어지며 우리
부활은 생명을 믿는 소망의 현현顯現이라 부르기도 하네.
- 오정자
춘천 출생
백석대학교 신학과 졸업
월간 <신춘문예> "수필부문" 및 "시부문" 신인상 受賞
월간 신춘문예 동인 , 신춘문예작가협회 회원,
월간 <문학바탕> 회원
시마을 "커피예찬" 과 " 아름다운 포옹" 수필 우수작 선정
시집으로, <그가 잠든 몸을 깨웠네> 2010년 레터북刊
시마을 작품選集 <자반고등어 굽는 저녁> 等
퇴근 길의 <카 오디오>에서 흘러나온 '뭉크'.
아무튼, '뭉크' 하면... (그 사람의 분위기로 보자면)
천상 요절 타입 Type인데 꽤나 오래 살았다는. (81세까지)
" 그러니 생명이 질긴가 실험했을까 뭉크는
어쨌든 고민과 즐거움 알 듯도 모를 듯도 하여 뭉크
보이지 않는 것들 본다고 하면서 당신도 강가에 한 점 그림이
되고 싶나 내 것이라 불렀던 분신들과 헤어지며 우리
부활은 생명을 믿는 소망의 현현顯現이라 부르기도 하네 "
노래였는지, 혹은...
그(뭉크)에 관한
CJ ; Chatting Jockey의 멘트 Ment를 듣다가 비롯된 건지는 몰라도
그로 부터 섬광처럼 비롯된 詩人의 연상聯想이
오늘의 우리들에게 절실히 필요한 햇살과 공기에까지 이르니,
부활을 언급하는 시의 결구結句가 묵시적으로 암시하듯이
우리들의 소망은 한시도 편하고 한가할 날이 없단 생각도 해보며...
아울러, 사족으로 (뭉크 얘기가 나온 김에)
그가 버려둔 그림들도 이 시를 핑계 삼아 한 번 감상해 본다는.
- 희선,
칠흙 같은 어두움
두려움의 그림자
검은 빛의 죽음
죽음 같은 고통
그리고 고독
고통을 직면하는 일은 참으로 쉽지 않습니다.
삶이라는 것은 어쩌면, 행복하고 기쁜 순간보다
그 어두운 순간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많은 예술가들은 그 어두움을, 그 그림자를 조명하곤 합니다.
에드바르드 뭉크(Edvard Munch, 1863-1944)가 버려둔? 그림들을 몇점 살펴봅니다.
왼쪽부터 Despair, 1893-4, Oil on canvas, 92 x 72.5 cm
The Scream, 1893, Tempera and pastel on board, 91 x 73.5 cm
Anxiety, 1894, Oil on canvas, 94 x 73 cm
뭉크, 하면 떠오르는 바로 그 그림입니다.
절망, 근심, 그리고 절규.
그 중에서도 가운데 있는"절규"가 가장 유명한 작품이지요.
지금은 예술이 상업화되는 대표적 예로 전락해버려
(이후 많은 광고나 영화에서 패러디를 통해 노출된 까닭에)
가벼운 무언가로 여겨질 수도 있지만
당시 독일에서는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던 그림입니다.
나는 두 명의 친구와 함께 거리를 걷고 있었다.
해는 지고 있었고 하늘은 핏빛으로 붉게 물들고 있었다.
그때 나는 우울함을 느끼고 있었다.
나는 심한 피로감에 잠시 멈춰 서고 난간에 기대었다.
검푸른 피오르드와 도시 너머로 불로 된 피와 혀가 하늘에 걸려 있었다.
내 친구들은 계속 걸었으나 나는 불안에 떨며 다시 멈춰 섰다.
그리고 자연을 통해 울리는 커다랗고 끝이 없는 비명 소리를 들었다.
당시 절규와 관해 뭉크가 남긴 유명한 글귀입니다.
그의 어두운 삶에서 비롯된 수많은 감정들을
그는 붓에 실어 캔버스에 옮겨 담았습니다.
그리 크지 않은 작품들이지만
찬찬히 바라보고 있으면
안으로 빨려들어갈 것 같은 착각이 들곤 합니다.
Self-Portrait with Burning Cigarette, 1895. Oil on canvas, 110.5 x 85.5 cm
뭉크의 그림은 "시선"입니다.
작가의 초상화에서조차 우리는
그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합니다.
대개는 그림 속의 화자는 차원의 경계를 넘어
보는 이에게 말을 걸어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캔버스 안의 세계를
맘 편안히 들여다 볼 수가 있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의 그림은 불편합니다.
그리고 거북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보고 있음을 알고 있는 듯 쳐다보는 그의 시선 때문입니다.
마치 우리가 들여다 보는 것을 경계하듯
뭉크는 우리를 바라보고 있지요.
Puberty. 1894. Oil on canvas. 151.5 x 110 cm
여전히 불편한 시선은 계속 됩니다.
하지만 이 그림에서의 주제어는 "그림자"입니다.
어린 시절 이불에 누워 잠을 자다
달빛에 커다래진 자신의 그림자를 보며 놀래곤 했던 경험.
그래서일까요, 어둠 속에서 그림자는 늘 두려움의 대상입니다.
그것은 그림자가 "또 다른 나"이기 때문일까요.
또 다른 나를 두려워 하는 나.
뭉크의 그림자는
두려움에 떨고 있는 소녀를
덮칠 기세로 저만큼이나 커져있습니다.
Moonlight, 1893. Oil on canvas. 140.5 x 135 cm
뭉크의 그림자는 계속 이어집니다.
하얀 담 넘어 이쪽과는 다른 공간인 저쪽에서
검은 그림자는
위에서 아래로
그녀를 내려다 보고 있습니다.
조용히, 그리고 천천히 그녀의 뒤를 밟습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림자가 자신의 일부인 걸 깨닫습니다.
왼쪽 상단의 검은 공간처럼,
빛이 없는 어두움의 공간에선 둘은 하나가 됩니다.
어둠 속에선 내가 그림자고
그림자가 나이기 때문이지요.
Melancholy. 1894/95. Oil on canvas. 81 x 100.5cm
뭉크의 그림은 "고독"입니다.
아름다운 석양이 하늘에 금빛 강물을 내고
그 아래에서 두 연인은 사랑을 속삭이고 있지만
그림의 주인공은 그 어느 것에도
마음을 두지 못합니다.
그는 깊은 슬픔에 빠져있어 아무것도 볼 수 없지만,
화면의 위와 아래의 대비는
그의 슬픔을 더욱 깊고 어두운 것으로
만들지요.
By the Deathbed (Fever) c. 1915. Oil on canvas. 187 x 234 cm
그의 그림은 "죽음"입니다.
누구도 죽음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습니다.
그것은 어두운 그림자처럼 우리의 뒤를 항상 쫓습니다.
그의 삶도 늘 죽음의 그림자가 함께 했습니다.
뭉크가 여섯살이 되던 해에 어머니가 죽고,
그 이후 어머니의 역할을 하던 누이가 폐결핵을 앓아 죽었고,
그의 여동생은 심한 정신병을 앓았으며,
뭉크 자신도 병약하여 늘 죽음의 공포와 함께 했습니다.
그의 그림이 이토록 어두었던 것은,
아마 그의 삶을 강하게 휘감았던 죽음의 그림자 탓일겁니다.
Vampire, 1895-1902. Combined woodcut and lithograph. 38.5 x 55.3 cm
그에게는 사랑도 죽음과 맞닿아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 강렬함때문에 아주 비싼 가격에 팔리게 되어 유명해진
이 그림의 원래 제목은 "흡혈귀"가 아닌
"Love and Pain(사랑과 고통)"입니다.
하지만 평론가들에 의해서 흡혈귀라는 별칭이 제목이 되었지요.
그가 붙인 제목처럼 죽음처럼 강렬한 사랑의 욕망이
너무도 생생하게 느껴지는 그림입니다.
The Kiss, 1897. Oil on canvas. 99 x 81 cm
그의 그림 중에서 가장 강렬한 인상을 주는 그림이라 할까. (개인적으로)
창문 틈새로 스미는 바람에
커튼이 무겁게 흔들리고
그 결에 스미는 미세한 빛이
어둠 속 두 사람의 사랑을 더욱
깊고 어두운 곳으로 인도합니다.
두 얼굴이 하나로 합쳐져
볼수록 마음이 아파오는,
그래서 더욱 아름다운
그런 그림입니다.
Red House and Spruces, 1927. Oil on canvas
모든 것이 고통스럽게 느껴지는
차갑고 스산한 계절이 성큼성큼 오고 있습니다.
어두운 생을 살았던 뭉크에게도 이 계절은
저렇게 차고 어두웠겠지요.
하지만, 항상 모든 것의 양면성에 대해 생각해 보자면
고통에는 치유를
그림자에는 실체를
죽음에는 생명을
어둠에는 빛을
절망 앞엔 희망을
이야기하는 날들이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