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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당유고중 고려사열전과 여사열전이라 이름한 필기에서, 기존의 다른 데서 전혀 볼 수 없는 고려시대 인물의 생사연대가 보입니다
그 중 몇몇을 보면,
黃周亮[983-1046] - 일반적으로 생사연대 미상으로 알려져 있다
尹瓘[1042년생] - 1111년 사망이나 출생연도는 미상으로 알려져있다
김심언(956년생) - 1018년 사망이나 출생연도는 미상으로 알려져있다
黃瑩[1035-1108] - 일반적으로 생사연대 미상으로 알려져 있다
異應甫[966-1048] - 일반적으로 생사연대 미상으로 알려져 있다
魏繼廷[1038-1108] - 출생연도는 미상이고 1107년 사망으로 알려져 있다.
남당유고에 나오는 위 사람들의 생사연도는 확인되지 않고 있습니다.
이들 중 어느 한분의 묘지명이라도 장래 출토된다면 남당유고의 진실성 여부를 판단할 수 있는 직접적인 물증이 되겠지만 아직은 없습니다.
하지만, 이 남당유고의 기록중 하나에서 고려사열전(또는 여사열전)의 신빙성을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김취려에 대한 기록입니다.
고려중기의 무신인 명장 김취려는 일반적으로 출생연도 미상이고 1234년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김취려의 출생연도에 대해서 남당유고는 1158년경이라 하고 있습니다.
정말일까요??
여기저기 뒤진 끝에,
한국금석문종합영상정보시스템에서 김취려의 묘지명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일반적으로 金就礪라 쓰지만 묘지명에는 金就呂라 되어 있습니다
(손자 김변의 묘지명에는 就礪라 되어 있음).
묘지명에 의하면 김취려는 1172년 출생하여 1234년 사망했습니다.
이는 남당유고에서 적고 있는 출생연도보다 14년정도 늦은 해입니다.
이로써 보건 대, 남당유고의 기록은 의심이 갈 수밖에 없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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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취려 묘지명
贈諡威烈公守大師開府儀同三司門下侍郎平章事上將軍判吏部事金公墓誌銘」
公之姓曰▨諱曰就呂彥陽縣人也祖諱曰彥良金吾衛攝郎將父諱曰富金吾衛大將」
軍母大夫▨朱氏▨檢校將軍行郎將諱此明之女也公生而頴悟器識博而深風儀爽而」
▨幼以父蔭起家▨丙午年充隊伍之長旋入爲太子府牽龍自隊▨階升午將級不數」
年復入是▨補牽龍行首因而遷 御牽龍行首以至于指諭及管千夫則戌邊衛丙俱」
有聲績累遷至大將軍▨爲西北面知兵馬事以杖鉞之威折衝岳王名以此雷於時」
丙子秋 上聞丹賊入疆卽命三軍討之公爲後軍使與兩軍整旅而行逢敵▨戰▨」
▨捷之功多矣至若朝陽開平墨近香山之戰獨我軍先爲之鋒大破之故彼賊避我軍」
▨於西海▨丁丑一月 上命行營元▨將五軍授公以金吾衛上將軍仍領後軍公」
▨▨行營▨屯至安州境見行營失利奔公獨奮力抗戰不知槍矢之貫體僅不殞命」
而還于國▨上更命五軍禦▨南路又以公代他將爲前軍使公乃忍痛應命行與敵戰于」
交谷克之曰朴達▨大捷以來彼且失勢▨果圖南而東還於其國十一月公遘▨疾」
將卒咸請歸京理病公曰寧死爲邊鬼豈▨安於京乎俄有詔許公還京以肩輿到京累」
▨而後疾▨戊寅正月轉神虎衛判禮賓少▨事九月 上命學士趙冲爲中師軍元師次」
▨公爲之使▨與元帥行▨洞州成殷州頭頭受敵俱見捷焉及據慈州城欲養兵以觀賊」
變十二月蒙▨自東陲入界連拔數城以兩國講和同破丹賊爲▨文句我軍請兵諸將」
無勇往之言▨獨奮髯作聲曰事不辭難而卽其人也乃領十千人至▨幕下蒙之師問」
公年幾許▨▨曰兄使之東坐我元帥聞蒙古敬我公如是擧軍▨至賊寇畏而出降蒙」
古喜與我軍▨爲▨弟及其還也公乃送惡▨▨于朝陽時有▨以公▨西京齋祭使齋祭畢」
後還▨寧州與元帥班師己卯三月復命又▨年十月因處置義州▨民公以右軍使▨中」
▨▨▨▨▨▨庚辰正月 上授公以樞▨院副使代他將爲中軍使時北隣亐加▨應」
▨▨▨▨到義 聞我軍▨聲反斬逆民▨▨▨我軍然後還其國▨軍止于▨州不使軍」
▨▨▨▨民▨▨處置逆民而▨已五月▨▨至于王都▨公▨▨兵終始▨五年▨由」
▨▨▨月遷▨▨樞密事壬午▨▨月轉▨紫光祿大夫叅知政▨判戶部事乙酉十二」
▨判三▨事戊▨十二月除▨大尉中書▨郎平章事判兵部事庚寅正月判吏部事十」
二月爲▨大保壬辰三月拜守大傅開府▨同三司門下侍郎平章事癸巳六月加將大」
是年十二月加特進柱國公 早▨揚歷▨官義而勇廉而剛出將入相裨益邦家者久」
▨▨於甲午二月▨四日微恙至二十一日翛然而逝享年六十三天子震悼吊有▨公」
娶僕▨趙諱彥▨▨女爲夫人生三子一女▨辦後事卽於七月十二日葬于鎭江▨大」
谷洞西麓」
銘曰」
將▨▨重▨之者誰唯公之謂爲世所奇出爲之將威▨雷馳入爲之相德猶雨施▨攘」
衆▨▨揔拜可如論功業宜享壽祺何從幻化巳促仙▨今其卜▨誌以記▨後所承慶」
蔭▨在玆」
[출전 : 『韓國金石全文』中世下篇 (1984)]
추증된 시호가 위열공(威烈公)이고 수대사 개부의동삼사 문하시랑평장사 상장군 판이부사(守大師 開府儀同三司 門下侍郞平章事 上將軍 判吏部事)인 김공(金公) 묘지명
취려(就呂)공의 성은 김씨(金氏)이고, 이름은 취려(就呂)이며, 언양현(彦陽縣) 사람이다. 조부 언량(彦良)은 금오위섭낭장(金吾衛攝郞將)이고, 아버지 부(富)는 금오위대장군(金吾衛大將軍)이다. 어머니 대부인 송씨(大夫人 宋氏)는 ▨ 검교장군 행낭장(檢校將軍 行郞將) 세명(世明)의 딸이다.
공은 나면서부터 총명하고 재능과 학식이 넓고 깊었으며, 풍채가 ▨ 훌륭하였다. 어려서 부▨(父蔭?)으로 벼슬하여, ▨ 병오년(명종 16, 1186)에 대오(隊伍)의 장(長)<隊正?>으로 충원되었다가 태자부견룡(太子府牽龍)으로 옮겼다. 대▨(隊正?)으로부터 품계가 장급(將級)으로 올랐으며, 몇 년 되지 않아 다시 바로 ▨ 견룡행수(牽龍行首)가 되었는데, 이로 인하여 어견룡행수(御牽龍行首)로 옮겼다. 지유(指諭)가 되어 1,000명의 군사를 거느리게 되자 곧 변방을 막고 나라를 지키는 일에 모두 공적이 있었다. 여러 차례 승진하여 대장군(大將軍)이 되고, ▨ 서북면 지병마사(西北面 知兵馬事)가 되어 장월(杖鉞)의 위엄으로 ▨▨ 적의 예봉을 꺾었으므로 명성이 당시 우레와 같았다.
병자년(고종 3, 1216) 가을에 거란적이 변경을 침입하였다는 소식을 임금이 듣고 곧 삼군(三軍)에 명하여 토벌하도록 하였다. 공은 후군사(後軍使)가 되어 양군(兩軍)과 함께 부대를 정비하고 나아가 적을 만나 ▨ 싸워 ▨▨ 이기니 공훈이 많았다. 조양·개평·묵장 ·향산(朝陽·開平·墨匠·香山)의 싸움에서 홀로 아군의 선봉이 되어 크게 격파하자, 그 적들이 아군을 피하여 서해▨(西海道)로 ▨(퇴각하였다?).
정축년(고종 4, 1217) 1월에 임금이 행영원수(行營元帥)에게 오군(五軍)을 거느리게 하고 공을 금오위 상장군(金吾衛 上將軍)에 임명하였다. 이에 후군을 이끌고 공이 ▨▨행영(行營)하여 안주(安州) 부근에 ▨주둔하였으나, 행영이 패하여 도망하였다. 공이 홀로 힘써 마주 싸워 창과 화살이 몸을 뚫는 것도 알지 못하였으니, 거의 죽을 뻔하였다. 명을 내려 (개경으로?) 돌아오게 하였으나, 임금이 다시 오군에 명하여 ▨남로(南路)를 막게 하고, 또 공을 다른 장수에 대신하여 전군사(前軍使)로 삼았다. 공이 이에 고통을 참고 명에 따라 행군하면서 적과 맥곡(麥谷)에서 싸워 이겼다. 박달▨(朴達嶺?)에서 크게 승리한 이래로 적들은 세력을 잃자 ▨ 마침내 남쪽 방면으로 가다가 동쪽으로 하여 그들의 나라로 돌아갔다.
11월에 공이 ▨ 병이 들자 장수와 군사들이 모두 서울로 돌아가 병을 다스릴 것을 청하였으나, 공은 “차라리 죽어서 변경을 지키는 귀신이 될지언정 어찌 ▨ 서울에서 편안하게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곧 조서가 내려와 공에게 서울로 돌아가도록 하니, 가마를 타고 서울로 오게 되었다. 거듭 ▨ 한 뒤에 병이 나았다.
무인년(고종 5, 1218) 정월에 신호위 판예빈성사(神虎衛 判禮賓省事)로 옮기고, 9월에는 임금이 명하여 학사(學士) 조충(趙冲)을 중군원수(中軍元帥)로 삼고, 공을 부원수로 삼아 ▨ 돕게 하였다. 원수와 함께 동주·성주·은주(洞州·成州·殷州)로 행군하면서 곳곳마다 적과 만나 모두 이겼다. 자주성(慈州城)에 웅거하게 되자 군사를 훈련시키면서 적의 동태를 살피고자 하였다.
12월에 몽고가 동쪽 변방으로부터 국경을 침입해 들어와 몇 군데의 성을 잇달아 함락시키면서, 양국이 강화함으로써 함께 거란적을 물리치고자 하여 글[文句]을 ▨(보내어?) 아군의 병사를 내어주기를 청하였다. 여러 장수들은 용감하게 나서겠다는 말을 하지 못하였으나 ▨(공이) 홀로 수염을 휘날리면서 소리내어 말하였다. “일이 어렵더라도 사양하지 않아야 하는 법이니, 내가 곧 그 임무를 맡겠습니다.” 이에 일만 명을 거느리고 ▨ 막하에 도착하였다. 몽고의 장수<哈眞及扎剌>가 “공의 나이가 몇 살이나 됩니까.”라고 물은 뒤 ▨ 형이라고 부르기로 하고, 동쪽에 앉게 하였다. 몽고가 우리 공을 공경하는 것이 이와 같다는 소식을 우리 원수가 듣고, 모든 군대를 동원하여 ▨에 이르니 적들이 두려워하며 나와서 항복하였다. 몽고는 기뻐하여 우리 군사와 더불어 형제가 되기로 ▨(약속하고?) 돌아가게 되니 공이 이에 조양(朝陽)까지 ▨▨ 가서 송별하였다. 이 때에 ▨이 있었으므로 공을 서경재제사(西京齋祭使)로 ▨(삼았는데), 재제(齋祭)를 마친 뒤 영주(寧州)로 ▨ 돌아와 원수와 함께 개선하였으며, 기묘년(고종 6, 1219) 3월에 임금께 복명(復命)하였다. 또 그 해 10월에 의주(義州)의 반역민을 처치하기 위해 공을 우군사(右軍使)▨중(中)▨▨▨▨▨▨로 삼았다. 경진년(고종 7, 1220) 정월에 임금이 공을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로 임명하면서 다른 장수를 대신하여 중군사(中軍使)로 삼았다. 이 때에 북쪽 변경에서 우가하(亏加下)가 ▨▨▨▨에 응하여 의주(義州)에 이르렀으나, 아군의 ▨ 소문을 듣고 도리어 반역민들을 베어 죽이고 아군에게 ▨▨(귀부해 왔다?).그런 연후에 우리의 경내로 돌아왔으나, ▨ 군대를 ▨주(義州?)에 주둔시키고 군사들로 하여금 백성들을 ▨▨▨▨하지 않게 하고 ▨▨ 반역민들을 처치하였다. 신사년(고종 8, 1221) 5월에 ▨▨ 서울로 왔다.
▨ 공이 군사를 ▨▨한 것이 모두 ▨5년이었다. ▨ 이로 말미암아 ▨▨2월에 ▨지추밀사(知樞密事)로 승진하고, 임오년(고종 9, 1222) ▨▨월에 금자광록대부 참지정사 판호부사(金紫光祿大夫 叅知政事 判戶部事)로 옮겼다. 을유년(고종 12, 1225) 12월에 판삼사사(判三司事)가 되고, 무자년(고종 15, 1228) 12월에 수대위 중서시랑평장사 판병부사(守大尉 中書侍郞平章事 判兵部事)에 임명되었다. 경인년(고종 17, 1230) 정월에 판이부사(判吏部事)가 되고 12월에는 수대보(守大保)가 되었으며, 임진년(고종 19, 1232) 3월에 수대부 개부의동삼사 문하시랑평장사(守大傅 開府儀同三司 門下侍郞平章事)에 임명되었다. 계사년(고종 20, 1233)년 6월에 장대(將大)를 더하고, 이해 12월에 특진 주국(特進 柱國)을 더하였다.
공은 어려서부터 ▨ 여러 ▨ 관직을 두루 거쳤는데, 의로우면서 용감하고 겸손하면서 강직하여서, 나가면 장수가 되고 들어오면 재상이 되니 나라와 가문에 도움을 준 것이 오래되었다. 갑자기 갑오년(고종 21, 1234) 2월 ▨4일에 병이 들었는데 21일이 되자 급하게 돌아가시니, 향년 63세이다. 천자(天子)가 매우 슬퍼하고 조문하니, ▨가 있었다.
공은 복야(僕射) 조언▨(趙彦▨)의 딸을 취하여 부인으로 삼았는데, 3남 1녀를 낳았으며, ▨ 뒷일을 맡아서 7월 12일에 진강현 대곡동(鎭江縣 大谷洞) 서쪽 기슭에서 장례지냈다.
명(銘)하여 이른다.
장(將)▨▨중(重) ▨한 이는 누구인가,
오직 공을 일러 세상에서 훌륭하다고 하도다.
나가서 장수가 되면 위엄이 ▨ 벼락이 치는 듯하고
들어와 재상이 되면 덕망이 비가 내리는 듯 하였다.
▨을 물리치자 무리들이 ▨▨ 모두 엎드려 절을 하였으니
가히 공로와 업적을 논하게 되면 마땅히 수와 복을 누려야 할 것이나
어찌 환화(幻化)를 좇아 급하게 신선이 되었는가.
이제 그 ▨(묘소를) 점쳐 정하고 묘지명을 기록하여 적으니
후손들에게 복이 이어지고 음덕이 ▨ 이에 있으리라.
[출전 : 『역주 고려묘지명집성(하)』(2001)]
===이상 한국금석문종합영상정보시스템에서===
첫댓글 1670년(현종 11)에 세워진 김취려(金就礪)의 묘표이다. 1657년(효종 8)에 김치룡(金致龍)이 글씨를 새겼다.
김취려(1172~1234)는 고려 후기의 무신으로 본관은 언양(彦陽)이다. 예부시랑을 지낸 김부(金富)의 아들로 음서로 정위(正衛)가 되어 동궁위(東宮衛)에 배속되었으며, 이후 장군이 되어 동북지방을 맡아 지켰고, 대장군에 발탁되었다. 이때 그는 대장군으로 후군병마사가 되어 조양진(朝陽鎭)에서 거란군을 물리쳤다. 또한, 1219년(고종 6)에는 의주별장 한순(韓恂)과 낭장 다지(多智) 등의 반란을 이극서(李克偦)·이적유(李迪儒)와 더불어 평정하여 북방을 편안하게 하였다.
그는 많은 공을 세워 1221년에는 추밀원사 병부상서 판삼사사(樞密院使兵部尙書判三司事)가 되었으며, 참지정사 판호부사(參知政事判戶部事)를 거쳐 1228년에는 수태위 중서시랑평장사 판병부사(守太尉中書侍郞平章事判兵部事)가 되었으며, 그 뒤 시중에 제수되었다. 고종묘정(高宗廟庭)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위열(威烈)이다.
비문에는 김취려의 외족인 민시중(1625~1677)이 영남(嶺南)을 안찰하던 도중에 황폐해진 김취려의 묘도(墓道)의 모습을 보고 12세손인 김정(金庭)과 본현의 현감 강응(姜膺)이 함께 협력하여 봉토(封土)하여 비석을 세웠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묘비는 1670년(현종 9) 9월에 12세손 김정과 언양현감등 후손들이 태지(胎地)와 유허비(遺墟碑) 비각(碑閣)을 건립했으며 1716년(숙종 42) 경주부윤으로 있던 김치룡이 다시 새운 것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묘역에는 봉분 아랫부분에 둘레석을 두른 묘 앞에 묘비와 장명등이 있으며, 좌우에는 문인석·무인석·동자석·동물석상이 한 쌍씩 세워져 있다.
남당유고의 기록이 창작인지 아닌지를 알고 싶지만 쉽지는 않습니다.
참조할 만한 자료인 것 같습니다.
자료에 오류가 있는데 1670년에 쓴 글을 1716년에 세긴 것이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최치원선생이 고구려와 백제가 강병100만이었다고 했지만, 기존 삼국사기로는 짐작이 불가능합니다.
그런면에서 남당유고는 그당시의 상황과 맞는면이 많습니다. 창작이라면 정말 대단한 작품이라 할만합니다.
이런 소설이 도무지 가능한 것인지 정말 의문입니다.
김취려는 묘지명과 묘표 두가지가 있습니다.
정성일님이 언급하신것은 묘표입니다.
한가지 더 찾았습니다.
남당유고에는 황주량이 1046년 죽은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고려사나 고려사절요에는 사망기사가 보이지 않으나 동사강목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동사강목 제7상
계미년 정종 9년(송 인종 경력 3, 거란 흥종 중희 12, 1043)
11월 ○ 시중(侍中) 황주량(黃周亮)이 졸하였다.
시호는 경문(景文)이다. 처음에 거란의 난리 때에 서적(書籍)이 불타버렸으므로 주량이 조서를 받들고 탐문하고 채록하여, 태조(太祖)로부터 목종(穆宗)까지 7대의 실록을 찬집(撰集)하여 모두 36권을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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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황주량은 1043년 작고했으므로 남당유고의 1046년은 잘못된 것입니다.
남당이 전한 화랑세기와 김동리의 형인 김범부씨의 화랑외사라는 책이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소설형식으로 쓰여진 책이 화랑외사인데, 기존 사료를 이용하여 쓰여진 책입니다.
아무리 꾸며대도 드러날수밖에 없는 것이 역사소설류의 특징인데,
오늘날 현대에 들어서도 고대사에서는 여지없이 그 한계가 드러나는 것이지요.
김진명씨의 '고구려'로도 특히 그렇습니다.
미천왕의 이야기에 관련해 읽어보면, 남당의 을불대왕전에 비교조차 할 수 없습니다.
을불대왕전이 전래되어 오던 자료란 것이 명백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입니다.
주관적인 판단은 근거가 될 수 없겠지요..
저도 아직껏 놓지못한 이유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입니다.
남당선생은 봉우 권태훈선생의 담임선생님이셨습니다.
3번이나 봉우선생님의 꿈에 나타나셨다고 하는데,,,, 정말 역사소설이나 남기실 분인지!!!
<우리나라 역사는 삼국사기 고려사 이조실록이다. 삼국사기 이전은 약간의 전설 뿐이다. 신라의 나정, 선도성모, 탈해의 작, 알지의 계 같은 것과 고구려의 단군 유화 금와 등의 전설과 백제의 소서노 같은 것이다. 이 전기를 기한 고기가 금에는 하나도 남어있지 않이 함으로 삼국유사 같이 허황한 기록이라도 유일한 사료로 참작하는 것이나 이것도 또한 개찬된 흔적이 있다.> - 박창화 강역개론
강역개론이 언제 쓰여졌는지 의문입니다.
저런분이 굳이 백제왕기를 써서 남길 필요가 있는지!!!
추모경을 써서 남길 필요가 있었는지 의문입니다.
저게 창작이 가능이나 한 것인지!!!!
강역개론은 남당유고의 저작들을 접하긴전에 쓰여진 것인데, 함께 보관되어 있기 때문에
다른 저작들이 오해를 받게 만든 것이 아닌지요?
http://blog.naver.com/sohoja/50144917557
를 한번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http://blog.naver.com/kytong3202/20190023920
읽어보면 , 남당유고는 창작이 아니지요 같이 근무하던 일본인이 "조선의 고서는 다 가져와서여기있는 사료들은 조선에는 없는 것이다." 자랑삼아 말했고, 1945년 청주사범학교에서 한학기동안 단군에 대해서만 강의하였다고 하니, 과연 남당유고를 창작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 후에 왜 삼팔선을 언급하며 왜 역사서가 없다고 하셧는지는 의문입니다.
굳이 소설이라면 굳이 일본에서 가져왔을정도인지도 정말 의문입니다.
그분의 인생과 그분의 생각을 함부로 추정할 수는 없지만. 화랑세기를 제일 아끼셨다고 하는데, 나머지 자료들에 대해서는 당신께서도 확신을 가지지 못했던 때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보관은 하면서도 어떻게 해야 할지 아무런 유언조차 남기시지 않았으니!!!! 남당유고의 원본자료들이 조선시대까지 남모르게 전해왔던 것처럼, 남당선생도 그런 태도를 취하신 것은 아닌지!!! 총독부가 전국을 뒤져서 강탈한 자료들 중에 남당유고 원자료가 있었고, 남당선생을 그것을 보셨고, 그 원자료가 남모르게 전해져왔듯이, 남당선생도 그렇게 남겨놓은 것이 아니겠는가
~카더라가 아닌 객관적 근거를 보고싶네요..
문자화된 것 말입니다
원자료도 남당유고처럼 아무런 말도 없이 그저 어딘가에 보관되어 있다가 총독부에 강탈되었고, 그것이 남당선생에게 발견되었지만, 남당선생도 자신이 없었던 것이지요. 스케일이 남당선생이 알고 있던 삼국사기, 삼국유사에 있는 내용과 판이하게 달라서, 아마 고려왕조에서 부풀려젼 사료가 아닐까 하는 의문이 있었을 겁니다. 그래서 세상에 알리지 않았던 겁니다. -추정이라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