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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블랙박스를 찾아서
 
 
 
카페 게시글
자유롭게 글쓰기 남당유고 창작의 정황증거 한가지 추가
katnani 추천 0 조회 144 13.08.26 17:46 댓글 18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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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3.08.26 20:28

    첫댓글 1670년(현종 11)에 세워진 김취려(金就礪)의 묘표이다. 1657년(효종 8)에 김치룡(金致龍)이 글씨를 새겼다.
    김취려(1172~1234)는 고려 후기의 무신으로 본관은 언양(彦陽)이다. 예부시랑을 지낸 김부(金富)의 아들로 음서로 정위(正衛)가 되어 동궁위(東宮衛)에 배속되었으며, 이후 장군이 되어 동북지방을 맡아 지켰고, 대장군에 발탁되었다. 이때 그는 대장군으로 후군병마사가 되어 조양진(朝陽鎭)에서 거란군을 물리쳤다. 또한, 1219년(고종 6)에는 의주별장 한순(韓恂)과 낭장 다지(多智) 등의 반란을 이극서(李克偦)·이적유(李迪儒)와 더불어 평정하여 북방을 편안하게 하였다.

  • 13.08.26 20:29

    그는 많은 공을 세워 1221년에는 추밀원사 병부상서 판삼사사(樞密院使兵部尙書判三司事)가 되었으며, 참지정사 판호부사(參知政事判戶部事)를 거쳐 1228년에는 수태위 중서시랑평장사 판병부사(守太尉中書侍郞平章事判兵部事)가 되었으며, 그 뒤 시중에 제수되었다. 고종묘정(高宗廟庭)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위열(威烈)이다.
    비문에는 김취려의 외족인 민시중(1625~1677)이 영남(嶺南)을 안찰하던 도중에 황폐해진 김취려의 묘도(墓道)의 모습을 보고 12세손인 김정(金庭)과 본현의 현감 강응(姜膺)이 함께 협력하여 봉토(封土)하여 비석을 세웠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 13.08.26 20:29

    묘비는 1670년(현종 9) 9월에 12세손 김정과 언양현감등 후손들이 태지(胎地)와 유허비(遺墟碑) 비각(碑閣)을 건립했으며 1716년(숙종 42) 경주부윤으로 있던 김치룡이 다시 새운 것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묘역에는 봉분 아랫부분에 둘레석을 두른 묘 앞에 묘비와 장명등이 있으며, 좌우에는 문인석·무인석·동자석·동물석상이 한 쌍씩 세워져 있다.

  • 13.08.26 20:44

    남당유고의 기록이 창작인지 아닌지를 알고 싶지만 쉽지는 않습니다.
    참조할 만한 자료인 것 같습니다.
    자료에 오류가 있는데 1670년에 쓴 글을 1716년에 세긴 것이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 13.08.27 00:34

    최치원선생이 고구려와 백제가 강병100만이었다고 했지만, 기존 삼국사기로는 짐작이 불가능합니다.
    그런면에서 남당유고는 그당시의 상황과 맞는면이 많습니다. 창작이라면 정말 대단한 작품이라 할만합니다.
    이런 소설이 도무지 가능한 것인지 정말 의문입니다.

  • 작성자 13.08.27 07:39

    김취려는 묘지명과 묘표 두가지가 있습니다.
    정성일님이 언급하신것은 묘표입니다.

  • 작성자 13.08.27 08:51

    한가지 더 찾았습니다.
    남당유고에는 황주량이 1046년 죽은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고려사나 고려사절요에는 사망기사가 보이지 않으나 동사강목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동사강목 제7상
    계미년 정종 9년(송 인종 경력 3, 거란 흥종 중희 12, 1043)
    11월 ○ 시중(侍中) 황주량(黃周亮)이 졸하였다.
    시호는 경문(景文)이다. 처음에 거란의 난리 때에 서적(書籍)이 불타버렸으므로 주량이 조서를 받들고 탐문하고 채록하여, 태조(太祖)로부터 목종(穆宗)까지 7대의 실록을 찬집(撰集)하여 모두 36권을 바쳤다.
    =====================================================================================

  • 작성자 13.08.27 08:52

    즉, 황주량은 1043년 작고했으므로 남당유고의 1046년은 잘못된 것입니다.

  • 13.08.27 10:08

    남당이 전한 화랑세기와 김동리의 형인 김범부씨의 화랑외사라는 책이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소설형식으로 쓰여진 책이 화랑외사인데, 기존 사료를 이용하여 쓰여진 책입니다.
    아무리 꾸며대도 드러날수밖에 없는 것이 역사소설류의 특징인데,
    오늘날 현대에 들어서도 고대사에서는 여지없이 그 한계가 드러나는 것이지요.
    김진명씨의 '고구려'로도 특히 그렇습니다.
    미천왕의 이야기에 관련해 읽어보면, 남당의 을불대왕전에 비교조차 할 수 없습니다.
    을불대왕전이 전래되어 오던 자료란 것이 명백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입니다.

  • 작성자 13.08.27 10:25

    주관적인 판단은 근거가 될 수 없겠지요..
    저도 아직껏 놓지못한 이유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입니다.

  • 13.08.27 10:34

    남당선생은 봉우 권태훈선생의 담임선생님이셨습니다.
    3번이나 봉우선생님의 꿈에 나타나셨다고 하는데,,,, 정말 역사소설이나 남기실 분인지!!!

  • 작성자 13.08.27 11:02

    <우리나라 역사는 삼국사기 고려사 이조실록이다. 삼국사기 이전은 약간의 전설 뿐이다. 신라의 나정, 선도성모, 탈해의 작, 알지의 계 같은 것과 고구려의 단군 유화 금와 등의 전설과 백제의 소서노 같은 것이다. 이 전기를 기한 고기가 금에는 하나도 남어있지 않이 함으로 삼국유사 같이 허황한 기록이라도 유일한 사료로 참작하는 것이나 이것도 또한 개찬된 흔적이 있다.> - 박창화 강역개론

  • 13.08.27 11:09

    강역개론이 언제 쓰여졌는지 의문입니다.
    저런분이 굳이 백제왕기를 써서 남길 필요가 있는지!!!
    추모경을 써서 남길 필요가 있었는지 의문입니다.
    저게 창작이 가능이나 한 것인지!!!!
    강역개론은 남당유고의 저작들을 접하긴전에 쓰여진 것인데, 함께 보관되어 있기 때문에
    다른 저작들이 오해를 받게 만든 것이 아닌지요?

  • 작성자 13.08.27 11:22

    http://blog.naver.com/sohoja/50144917557
    를 한번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 13.08.27 11:35

    http://blog.naver.com/kytong3202/20190023920
    읽어보면 , 남당유고는 창작이 아니지요 같이 근무하던 일본인이 "조선의 고서는 다 가져와서여기있는 사료들은 조선에는 없는 것이다." 자랑삼아 말했고, 1945년 청주사범학교에서 한학기동안 단군에 대해서만 강의하였다고 하니, 과연 남당유고를 창작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 후에 왜 삼팔선을 언급하며 왜 역사서가 없다고 하셧는지는 의문입니다.

  • 13.08.27 11:44

    굳이 소설이라면 굳이 일본에서 가져왔을정도인지도 정말 의문입니다.
    그분의 인생과 그분의 생각을 함부로 추정할 수는 없지만. 화랑세기를 제일 아끼셨다고 하는데, 나머지 자료들에 대해서는 당신께서도 확신을 가지지 못했던 때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보관은 하면서도 어떻게 해야 할지 아무런 유언조차 남기시지 않았으니!!!! 남당유고의 원본자료들이 조선시대까지 남모르게 전해왔던 것처럼, 남당선생도 그런 태도를 취하신 것은 아닌지!!! 총독부가 전국을 뒤져서 강탈한 자료들 중에 남당유고 원자료가 있었고, 남당선생을 그것을 보셨고, 그 원자료가 남모르게 전해져왔듯이, 남당선생도 그렇게 남겨놓은 것이 아니겠는가

  • 작성자 13.08.27 11:57

    ~카더라가 아닌 객관적 근거를 보고싶네요..
    문자화된 것 말입니다

  • 13.08.27 12:01

    원자료도 남당유고처럼 아무런 말도 없이 그저 어딘가에 보관되어 있다가 총독부에 강탈되었고, 그것이 남당선생에게 발견되었지만, 남당선생도 자신이 없었던 것이지요. 스케일이 남당선생이 알고 있던 삼국사기, 삼국유사에 있는 내용과 판이하게 달라서, 아마 고려왕조에서 부풀려젼 사료가 아닐까 하는 의문이 있었을 겁니다. 그래서 세상에 알리지 않았던 겁니다. -추정이라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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