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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계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나아와서
식사하시는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제자들이 보고 분개하여 이르되
무슨 의도로 이것을 허비하느냐
이것을 비싼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거늘
(마 26:6~9)
값없고 조건없는 사랑에 대한
3가지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1. 선교사 이야기
1956년 새 해가 시작되자마자 5명의 미국 청년들이 남미 에콰도르에서 살해됐다는 뉴스로 미 전역은 충격에 휩싸였다. 기독교 명문 휘튼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한 짐 엘리엇과 그의 동료 조종사 등 크리스천 젊은이들은 에콰도르의 마지막 남은 식인종들인 아우카족 선교를 위해 현지로 떠났다. 당시 미국정부와 신학교 동료들, 교인들까지 너무나 위험한 지역이라며 막았지만, 이들 청년들은‘하나님 나라’를 위해 모든 만류를 뿌리치고 그 땅을 찾았다. 그러나 이들은 3개월간의 정찰 후 아우카족이 살고 있는 인근 해변에 도달한 지 5일 만에 아우카족에게 무참히 살해됐다. 제대로 복음을 전하기도 전에 죽임을당한 것이다.
당시 미 언론들은 분노 속에 이들의 피살소식을 전했다. 라이프와 타임지는 ‘이 무슨 낭비란 말인가’‘( What a Waste!)란 헤드라인으로 청년들의 죽음을 대서특필했다.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이들이 그 위험한 지역에 들어가 선교사역을 벌인 것 자체가 무모했다는 지적이었다. 언론은 이들의 헛된 죽음은 개인과 가족뿐 아니라 국가적인 낭비라고 비난했다.
언론들은 경쟁적으로 살해된 젊은이들의 가족을 인터뷰했다. 한 기자가 짐엘리엇의 아내 엘리자베스와 인터뷰하면서“이 무슨 낭비란 말입니까”라고 또 다시 이야기했다. 그러자 엘리자베 스는 즉시 이렇게 대꾸했다. “아니, 낭비라니요? 그런 말씀 하지마세요. 내 남편 짐 엘리엇은 어린 시절부터 이 순간을 위해서 준비한 사람입니다. 잃어버린 영혼에 다가가 복음을 전하기 위해 일생을 준비했고, 그렇게 살다가 하나님 곁으로 갔습니다. 이것이 낭비입니
까? 다시는 내 남편의 죽음을 낭비라고 말하지 마세요.”
짐 엘리엇이 죽은 후 휘튼대학 시절에 적었던 일기가 발견됐다.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영원한 것을 얻기 위해 영원하지 않은 것을 버리는 자는 결코 어리석은 자가 아니다”(He is no fool who gives what he cannot keep to gain what he cannot lose)이 사건은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그로부터 5년 후인 1961년 짐 엘리엇의 아내와 당시 비행기 조종사 네이트 세인트의 여동생 라헬 세인트 등은 아우카족 복음화를 위한 선교단을 조직해 현지로 들어갔다. 그리고 35년 후인 1996년 1월 75명의 아우카족이 자기 나라 언어로 된 성경을 봉헌하게된다. 이들 중 3명은 당시 짐 엘리엇이 죽임을 당할 때 현장에 있던 사람들이 었다.
지금은 아우카족 출신 목회자도 나왔고, 이들 스스로 선교단을 조직해 복음을 전하고 있다. 짐 엘리엇과 친구들의 죽음은 당시로서는 낭비요, 헛된 일처럼 보였지만 결국 이들이 품었던 아우카족 복음화의 비전은 이루어졌다.
오늘 본문에서 한 여인은 자신의 모든 것을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그리고 이
광경을 지켜본 제자들에게 비난을 받습니다.
왜 이것을 허비하느냐 라는 말을 듣습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영적인 자녀들을 위해
자신의 재물과 심지어 자신을 허비하는 일을
크게 기뻐함으로 행한다고 말합니다.(고후12:15)
성경은 허비하는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아브라함은 노년에 얻은 외아들을 기꺼이 주께
바침으로 삶의 마지막 희망과 기쁨을 하나님께
불살라 드리려고 했습니다.(창22:12)
주를 위해 자신의 삶의 가장 소중한 것을 기쁨
으로 드리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성경에 기록
되어 있습니다.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히 11:24~26)
반면 아버지께 받은 재물들을 자의든 타의든
허비한 사람들의 이야기도 나옵니다.
탕자는 유산으로 받은 아버지의 재물을 허비하고
빈손으로 돌아옵니다. 열두해를 혈루증으로 앓던
여인은 재물을 허비하고 많은 괴로움을 받았으나
그녀에게 남은 것은 병과 가난 뿐이었습니다.
불의한 청지기는 주인의 재물을 허비하는 것이
발각되어 직장을 잃을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눅15:13, 막5:26, 눅16:1)
자신의 기쁨을 위해서든, 건강을 위해서든, 재산의
증식을 위해서든 삶의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시간과 재물을 허비하는 사람들을 우리 주위에서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문제는 얼마나 많은 재물을 쌓았는지 또는 잃었
는지보다 무엇을 위해 그런 일을 했는지가
중요합니다.
이것을 가치판단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빌 3:7~9)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고 가치관의 전환이 일어
났습니다. 이전에는 유익하던 것을 오히려
해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부자 청년은 재물을 팔고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명령에 쓸쓸히 뒤돌아 섰고 들은 배와 부친을
버려두고 주를 쫓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베푸시던 수많은 기적과 가르침을
보고도 표적을 보이라고 하던 사람들과 네가
무화과나무아래 있을 때에 보았다는 한 마디에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십니다라고 고백한 나다
나엘과는 대조가 됩니다.
세상은 효율성을 강조합니다. 4당 5락이라는 말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과학자들은 건강한
생활을 위해 하루 7,8시간의 수면이 보장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도끼로 하루종일 나무를 자르는 나뭇군과
쉬는 시간을 내어 틈틈히 도끼날을 가는 사람과
비교할 수 있습니다.
안식일을 정하시고 사람들의 노동을 멈추게 하신
것도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습니다. 가장 노동시간
이 긴 편에 속하는 우리나라보다 짧은 시간 일하
면서도 생산성이 높은 나라들의 통계는 이미 다들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제자들은 재물의 효율적인 사용을 원했고 그렇지
않은 여인을 향해 비난의 손가락질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비생산적인 행동에 대해 분개하였
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제자들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가치와 삶의 목적이 예수님이 아닌 세상사람들
과 다를 바 없는 슬픈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에는 이렇게 말한 사람은 가룟유다이며,
그의 마음 속은 재물에 대한 탐욕으로 가득 차
있음을 알려줍니다.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요 12:4~6)
그리고 곧바로 (본문 14절) 가룟 유다는 대제사장
들에게로 가서 스승을 은 삼십에 팔기로 합니다.
예수님은 재물이 있는 곳에 마음도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마 6:21)
2. 가난한 화가의 사랑 이야기
여기 사랑을 위해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허비한 사람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는 바로
그루지야 출신의 화가 삐로스마니라는 사람
입니다.
전설적인 사랑이야기는 언제나 흥미롭습니다.
더구나 슬픈 사랑이야기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1900년경 그루지야의 수도 트빌리시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우리나라에도 번안되어 널리 알려진 러시아의
국민가수 알라 푸가체바의 ‘백만송이 장미’라는
노래의 주인공입니다.
1862년 그루지야의 시골에서 태어난 그는 일찍 부모님을 잃고 양부모 밑에서 자라다가 12세에 가출, 평생 험난한 삶을 살았습니다. 주로 막노동일과 트빌리시 기차역의 하역부로 일을 하면서 하루 벌어들인 돈을 선술집에서 술 마시는 데 쓰는 게 그의 삶의 전부였습니다.
하지만 그에겐 한가지 타고난 재능이 있었습니다. 그림이었습니다. 그는 틈틈이 그림을 그려 친구들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아무런 교육도 받지 못했지만 그의 그림은 어린아이가 그린 것처럼 소박하고 단순하면서도 어딘지 깊은 슬픔이 배어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루지야의 트빌리시를 여행하던 한 프랑스인이 우연히 그의 그림을 사들고 파리로 돌아가 화랑에 선을 보였습니다. 그런데 생각지도 않게 그의 그림은 당시 파리 화단에 제법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정식 교육을 받지 않은 그림이기에 더더욱 신선한 화풍으로 받아들여진 것입니다.
어느 순간 그의 그림은 프랑스와 러시아에서 인정을 받기 시작했고, 니코 삐로스마니는 난생 처음 자신의 집을 구입할 정도로 경제적인 안정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서글픈 사랑이 운명처럼 찾아왔습니다. 트빌리시에 공연 온 유랑극단의 삼류배우 ‘마르가리타’를 보고 그만 한눈에 빠져버린 것입니다. 한번만이라도 만나주기를 간청했으나 마르가리타에게 이 시골뜨기 화가가 눈에 들어올 리가 없었습니다.
니코 삐로스마니는 집을 팔았습니다. 그가 가진 모든 그림도 헐값에 급매로 처분했습니다. 그 돈으로 트빌리시 일대에 있는 모든 장미꽃을 사들였습니다. 그리곤 밤새 마르가리타가 묵고 있는 숙소 앞 골목을 백만송이의 장미로 장식했습니다.
아마도 인류역사상 가장 화려한 프로포즈가 아니었을까요? 하지만 그럼에도 마르가리타는 돈 많은 부자를 따라 도시를 떠나고 말았습니다.
이룰 수 없는 사랑에 삐로스마니는 모든 것을 던져버렸습니다. 그는 다시 기차 하역장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는 선술집에서 다시 술을 마시며 남은 인생을 그렇게 보냈습니다.
그리고 그가 죽은 지 63년이 지난 후 알라 푸가체바의 노래 ‘백만송이 선홍빛 장미’로 그 처절한 사랑이야기는 되살아났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허비하는 사랑을 하신 분이 계십
니다. 바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이십니다. 그는
아브라람처럼 자신의 가장 소중한 외아들을 십자가
의 제단위에 흠없는 어린 양으로써 올려놓으셨습니다.
침수를 폐하고 기악을 그치고 다니엘을 위해 밤새
고민한 다리오 왕처럼 아버지 하나님은 겟세마네
동산의 고민하시는 예수님을 말할 수 없는 안타까
움으로 바라보셨습니다.(단6:18)
아마도 창세이래 천국의 즐거운 찬양소리가 그친
날은 이 시간뿐이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세상을 다 주어도 바꿀수 없는 사랑하는 아들의
임종순간을 차마 볼 수 없었던 아버지는 하늘의
창문을 닫고 뒤돌아서서 우셨을 것으로 생각됩니
다.(마27:45, 막15:33)
우리에게 이런 사랑으로 자신의 생명을 주신
예수님의 임종을 준비한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녀가 모든 것을 허비해서 부은 향기로운
기름부음은 바로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별명을
가지신 그리스도의 이름에 걸맞는 장례준비였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아무도 장례식장에 와서 그토록 많은 국화를 장식
했다고 낭비라고 비난하지 않습니다. 모든 일을
접어두고 먼길도 마다않고 일가친척이 다 모여와
서 함께 슬퍼합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미 여러 차례 예수님의 고난
이야기를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죽음을 깨닫
지 못했고, 눈앞에서 값진 향유를 담은 옥합이
깨진 것에만 신경쓰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혹시 창밖에 백만송이의 장미가 펼쳐져
있는데도 그런 어리석은 낭비를 한다고 분노
하며 비난하고 있지는 않는지요.
깨뜨려진 옥합, 집안 가득히 번지는 향기로운
냄새, 울고있는 여인, 그리고 그 모든 광경을
담담히 바라보시는 예수님.
이런 감동적이고 숭고한 장면에 돌을 던지고
화를 내며, 왜 이런 짓을 하느냐고 항의하는
제자들 사이에서, 우리도 고개를 끄덕이며
제자들의 말에 동의를 표시하면서 함께 서
있지는 않았는지 곰곰히 생각해 보아야 할 때
인 것 같습니다.
3. 무조건적 사랑의 본을 보인 이야기
한 노인이 젊은 남자를 만나 이렇게 묻는다.
"저를 기억하세요?"
그리고 그 노인은 no라고 했다.
그리고 그 젊은이는 그에게 그가 그의 학생이라고
말했고, 선생님은 이렇게 물었다.
"당신은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그 젊은 남자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글쎄요, 저는 선생님이 되었어요."
"오, 나처럼, 좋네" 노인이 말한다.
"글쎄, 그래요. 사실, 선생님께서 선생님처럼
되라고 영감을 주셨기 때문에 선생님이 되었습니다."
호기심에 찬 노인은 젊은 남자에게 언제
선생님이 되기로 결심했는지 묻는다.
그리고 그 젊은 남자는 그에게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어느 날, 제 친구이자 학생인 한 명이 멋진
새 시계를 가지고 들어왔고, 저는 그것을
가지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리곤 훔쳐서 주머니에서 꺼냈어요
얼마 후, 제 친구는 시계가 없어진 것을
알아차리고 즉시 선생님인 선생님에게
불평을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당신은 수업 시간에 '이 학생의
시계는 오늘 수업 중에 도둑맞았다.
누가 훔쳤든 돌려주세요.'
하지만 저는
돌려주기 싫어서 안 줬어요.
당신은 문을 닫고 우리 모두 일어나서
원을 그리라고 했어요.
당신은 시계가 발견될 때까지 우리의
주머니를 하나씩 뒤지려고 했어요.
하지만 당신은 우리에게 눈을 감으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우리 모두가
눈을 감고 있어야만 그의 시계를 찾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시대로 했어요.
주머니에서 주머니로 다니다가 내 주머니를
뒤져보니 시계를 찾아서 가져갔어요. 당신은
계속 모두의 주머니를 뒤지고, 당신이 끝나면
당신은 '눈을 떠라'고 말했죠.
우리는 시계를 찾았다.'
당신은 날 고발하지도 않았고 그 에피소드에
대해 언급하지도 않았어요. 누가 시계를
훔쳤다는 말도 안 했어요 그날 당신은 내
존엄성을 영원히 구했어요. 내 인생에서 가장
수치스러운 날이었죠.
하지만 이 날은 도둑, 나쁜 사람 등이 되지
않기로 결심한 날이기도 합니다. 당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심지어 나를 꾸짖거나
한쪽으로 데려가서 나에게 도덕적인 교훈을
주지도 않았어요.
당신의 메시지를 분명히 받았습니다.
당신 덕분에 진정한 교육자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이해했습니다.
교수님, 이 에피소드 기억하세요?
노교수는 대답했습니다, '네, 저는 모든
사람들의 주머니에서 찾던 도난당한
시계의 상황을 기억합니다.
그러나 나는 너를 기억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나도 보는 동안 눈을 감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교육의 본질이다.
바로 잡으려면 낮아져야 한다.
그렇지 않고 가르칠 수 있는가."
바로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일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죄를 기억지도 못한
다고 하십니다. 하늘의 메모리에서
영원히 지워버리신 것입니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크신 사랑, 모든 것을
허비하고도 아까워하지 않는 사랑,
하나뿐인 아들을 주신 사랑, 끊임없이
배역하는 우리를 품어주신 사랑, 그 사랑
앞에 나아와 그 앞에 엎드려, 영원토록
주만 섬기고 경배하기로 다짐하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