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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항마을 앞 간이버스 정류장에서 제소가 버스를 타고 출발지였던 인월면으로 돌아가 지리산안내센터 주차장에 세워 놓은 자동차를 끌고와 산내면에 있는 천년고찰 실상사로 향했다.
도보여행을 중단하고 자동차를 가지러 간 이유는 황매사를 지나 가파른 산길을 오르던중 제소 처제가 무릎을 다쳤기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우리는 오늘의 도보여행을 이쯤에서 끝내고 근처에 있는 천년고찰 실상사를 관람하고 상황마을까지 자동차로 이동하여 민박을 하기로 결정했다.
실상사홈피에는 실상사의 역사를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지리산 자락이 감싸 안은 듯 평화롭고 풍요로운 고을 남원시 산내면에 천년 고찰 실상사(實相寺)가 있다.
지리산의 북쪽 관문인 인월에서 심원, 달궁, 뱀사골 방면으로 향하다 보면 삼거리가 나오는데 여기서 왼쪽 마천방면으로 가다 보면 만수천(萬壽川)변에 호국사찰로 천 년의 세월을 버티고 지내온 실상사가 나타난다.
만수천과 뱀사골 방면에서 흘러내리는 물줄기가 만나는 지점이 산내면 면소재지, 즉 인월에서 뱀사골 방면으로 가다 보면 나타나는 삼거리 부근이다. 이 삼거리에서 동쪽을 향해보면 천왕봉이 손에 닿을 듯 눈 앞에 선하다. 그 발 아래 산내면 입석리 들판이 넓게 펼쳐지는데 그 곳에 실상사가 자리잡고 있다.
실상사는 지리산 깊은 계곡에서 흐르는 만수천을 끼고 풍성한 들판 한가운데 위치해 있으며 동으로는 천왕봉과 마주하면서 남쪽에는 반야봉, 서쪽은 심원 달궁, 북쪽은 덕유산맥의 수청산 등이 병풍처럼 둘러싸인 채 천년 세월을 지내오고 있다. 대부분 우리나라의 사찰이 깊은 산중에 자리잡고 있는데 비해 지리산 자락의 실상사는 들판 한가운데 세워져 있는 것이 특이하다. 지리산 사찰 중 평지에 자리한 절은 이 곳 실상사와 단속사가 있는데 단속사는 폐허가 된채 석탑만 남겨져 있는데 비해 실상사는 여전히 사찰 구실을 하고 있다.
천년사찰, 호국사찰로 잘 알려진 실상사는 신라 흥덕왕(興德王) 3년(서기 828년) 증각대사 홍척(洪陟)이 당나라에 유학, 지장의 문하에서 선법(禪法)을 배운 뒤 귀국했다가 선정처(禪定處)를 찾아 2년동안 전국의 산을 다닌 끝에 현재의 자리에 발길을 멈추고 창건했다.
증각대사가 구산선종(九山禪宗) 가운데 최초로 그의 고향인 남원시 산내면 입석리에 절을 세운 것이다. 증각대사의 높은 불심을 높게 기린 흥덕왕이 절을 세울 수 있게 해줬고 왕은 태자선광(太子宣光)과 함께 이 절에 귀의했다. 증각은 실상사를 창건하고 선종(禪宗)을 크게 일으켜 이른바 실상학파(實相學派)를 이루었고 그의 문하에서 제 2대가 된 수철화상과 편운(片雲)스님이 가르친 수많은 제자들이 전국에 걸쳐 선풍(禪風)을 일으켰다. 신라 불교의 선풍을 일으키며 번창했던 실상사는 그 이후 조선시대에 접어들면서 화재로 전소됐다가 3차례에 걸쳐 중수 복원돼 오늘에 이른다.
세조때(1468) 원인모를 화재로 전소됐다는 기록과 정유재란 때 왜구에 의해 전소됐다는 설이 동시에 전해지고 있다. 화재로 인해 실상사의 승려들은 숙종 5년(1680)까지 약 200년 동안 백장암에서 기거했으며 절에는 철불, 석탑, 석등 등만 남아 있었다 한다. 그러다가 숙종 때 300여 명의 수도승들과 함께 침허대사가 상소문을 올려 36채의 대가람을 중건했다. 또 순조 21년(1821) 의암대사가 두번째 중건을 했으며 고종 21년(1884)에 월송대사가 세번째 중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여기서 제3중창건을 하게 된 것은 고종 19년(1882) 어떤 사람들이 절터를 가로챌 목적으로 방화를 했기 때문이다.
또한 실상사는 6•25를 맞아서는 낮에는 국군, 밤에는 공비들이 점거하는 등 또 한차례의 수난을 겪게 됐는데 용케도 사찰만은 전화를 입지 않았다.
천년 세월을 보내오면서 호국사찰로 알려진 실상사에는 유독 일본, 즉 왜구와의 얽힌 설화가 많이 전해진다. 앞서 언급한 사찰의 전소원인을 정유재란 당시의 왜구에 의한 것으로 보고 있는 부분에서도 일본과 관련된 전설을 엿볼 수 있다.
또한 약사전의 약사여래불은 천왕봉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는데 천왕봉 너머에는 일본의 후지산이 일직선상으로 놓여져 있다 한다. 이 때문에 가람배치도 동쪽을 향해 대치형을 하고 옆으로 강이 흘러 대조적이다.
이 절에는 "일본이 흥하면 실상사가 망하고 일본이 망하면 실상사가 흥한다"는 구전이 있는데 이는 천왕봉 아래 법계사에서도 전해지고 있어 흥미를 끈다. 이를 증명하기라도 하듯 실상사 경내의 보광전 안에 있는 범종에 일본 열도의 지도가 그려져 있는데 스님들이 예불할 때마다 종에 그려진 일본열도를 두들겨 치고 있다. 이는 앞서 언급했듯 우리나라와 실상사가 흥하면 일본이 망한다는 구전에 의한 것으로 여겨진다.
스님들이 이 속설에 따라 범종의 일본지도를 많이 두드린 탓에 범종에 그려진 일본지도 중 훗카이도와 규슈지방만 제 모양으로 남아 있을 뿐 나머지 열도는 희미해져 가고 있다. 최근의 독도 영유권에 대한 일본의 망언이 있는 오늘날 한일관계를 두고 볼 때 보광전의 범종에 얽힌 사연이 갖는 의미는 우리에게 많은 점을 일깨워주기에 충분하다. 이 같은 전설과 구전들을 살펴볼 때 실상사는 일본에 대한 호국사찰이며 불교문화의 큰 도량임을 알 수 있다.
실상사에는 백장암과 서진암, 약수암 등의 암자가 있으며 이 곳에는 신라시대의 많은 문화유산들이 산재해 있다. 국보 제10호로 지정된 백장암 삼층석탑은 전형에 구애받지 않은 자유로운 설계를 하고 있어 통일신라를 대표하는 공예탑이기도 하다. 실상사의 문화유적은 보물급에는 수철화상능가보월탑(33호, 905), 수철화상능가보월탑비(34호), 석등(35호, 개산당시), 부도(36호, 고려), 삼층쌍탑(37호, 887년), 증각대사응료탑(38호, 861년 이후), 증각대사응료탑비(39호), 백장암석등(40호, 9세기 중엽), 철제여래좌상(41호, 개산당시), 청동은입사향로(420호, 1584년), 약수암목조탱화(421호, 1782년)등 11점이 보존되어 있다. 지방유형문화재로는 극락전(45호,1684년), 위토개량성책(88호, 토지대장), 보광전범종(138호, 1694년), 백장암보살좌상(166호,고려), 백장암범종(211호, 1743년)등 5점이다.
중요민속자료는 실상사 입구의 만수천을 가로지르는 해탈교 양쪽에 세워져 있는 석장승 3기(15호)가 그것이다. 장승은 벅수라고도 하는데 보통 한 쌍으로 세워져 있으나 이 곳의 장승은 남녀를 판별할 수 없으며 만수천 양쪽에 원래는 4기가 세워져 있었다. 절을 향해 건너기 전에 세워진 한쌍의 돌장승 중 오른편 장승은 1936년 홍수때 떠내려 가고 없다. 잡귀를 막기위해 세워진 "상원주장군(上元周將軍)은 두 눈과 코가 크고 둥글며 머리에는 모자를 쓰고 손은 창을 든 것 같은 모습이며 "대장군(大將軍)"은 뒤에 만들어진 듯 이렇다 할 특징은 없다.
실상사에는 이렇듯 호국의 정신이 흐르며 찬란한 신라불교문화의 숱한 문화재가 잘 보존돼 있는 천년고찰이다.
다리를 건너기전의 석장승. 다리 건너 2기의 석장승이 또 있는데 촬영하지 않았다.
실상사 다리에서 본 지리산↓
지리산을 줌으로 당겨 보았다.
실상사 들어가는 다리. 200m 걸으면 실상사가 있다.
실상사 입구인 천왕문↓
천왕문에서 실상사를 지키고 있는 사천왕상↓
실상사 경내↓
범종각↓
1967년 실상사 경내 약사전 동남쪽에서 윗부분이 깨진 신라 시대의 동종 파편이 발견되었는데 여기에는 天衣자락을 휘날리며 생황과 피리를 불고 내려오는 비천상이 새겨져 있으며 현재 범종각(윗 사진)에 걸려 있는 동종은 이 파편을 기초로 복원한 것이라고 한다.
1967년에 발견되었던 신라시대의 깨진 동종 파편은 현재 동국대박물관에 보관돼 있고, 강희 33년(1694년)에 주조한 범종은 현재 보광전에 있다.
3층 석탑과 석등↓ 모두 통일신라 유물로 석탑은 보물 제37호이고 석등은 보물 제35호란다.
실상사의 대법당 보광전↓
실상사의 주법당인 보광전은 1884년(고종 21)에 월송대사가 세운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건물로 건물 안에 모셔진 삼존상 중 본존불은 조선시대에 조성한 것이고, 좌우의 관음, 세지 두 보살은 원래 극락전에 아미타불과 함께 봉안되었던 것으로 월씨국(베트남)에서 모셔왔다고도 한다.
현재는 단청이 되어 있지 않아 소박한 모습으로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지만 조선후기의 건축양식을 살필 수 있는 좋은 자료로써, 보광전 주변에는 83평을 추정케 하는 주춧돌이 남아 있어 굉장한 규모였음을 보여주고 있으며 이러한 사실은 1991년 동국대 박물관에 의한 보광전 주변 발굴에 의한 보광전 주변 발굴에서 이미 증명된 적이 있단다.
불상 뒤에는 아미타여래도가 있고, 불단 오른편에는 1981년에 만든 신중불화와 산신불화가 있다고 한다.
아래 사진은 보광전 내부의 모습으로 사진 왼쪽에 동종이 보이는데 1694년에 주조한 동종이란다.
이 동종의 몸통에 종을 만든 사람의 이름과 강희33년(1694)이라는 주조 년대가 새겨져 있어 침허 조사가 실상사를 중창할 때 사용한 범종으로 보이며 이 범종에는 한국과 일본의 지도가 새겨져 있어 이종을 치면 일본의 경거망동을 경고하고 동시에 우리나라를 흥하게 한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고 한다.
보광전의 처마인데 단청을 하지 않아 소박해 보인다.↓
칠성각↓
석등↓(보물 제35호)
이 석등은 통일신라시대에 만든 것으로 각 부분을 8각형으로 만들어 동 시대 석등의 일반적인 형식을 따르고 있지만 기둥이 둥근 장고모양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반 석등과는 다르며, 지붕위에 또 하나의 작은 원형지붕을 얹은점 역시 독특하다고 한다.
받침과 기둥, 몸체 등 곳곳에 연꽃을 비롯한 다양한 무늬를 새기어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3층석탑 (보물 제37호)
화재로 소실된 사찰의 기와잔해를 한곳에 탑처럼 쌓아 놓았다.↓
이렇게 실상사를 둘러보고 상황마을을 향해 올라갔다. 계속 삼봉산 정상쪽으로 올라가며 하황마을 중황마을 상황마을이 나온다. 상황마을은 어찌나 높은 지역인지 하늘아래 첫동네가 아닐까싶다. 상황마을 위로 펜션 서너곳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고 새로 짖는 곳도 보였다.
상황마을에서 바라본 삼정산↓
상황마을에 서서 산 중턱 계단식 논과 밭들을 내려다 보면서 이곳이 정녕 한국인가 싶을 정도로 의심되었으며 이국적 느낌이 든다.
저 멀리 끝없이 펼쳐진 지리산을 바라보면서 와!~ 하고 탄성이 절로 나온다.
실상사를 둘러보고 하황마을 중황마을 상황마을 등을 돌아 다니며 숙박할 곳을 찾아 보았다.
민박집과 펜션 등을 가보았는데, 이런저런 이유로 마음에 들지않았고 결론은 중황마을에서 민박을 하기로 결정하고 중황마을의 "호두나무 민박집"을 선택했다. 큰방 한칸에 30,000원이며 주방은 주인댁 주방을 이용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기로 하고...
이 마을은 고냉지역으로 논두렁을 돌로 높게 쌓아 만들어 놓아 이 또한 명물로 구경꺼리였다. 요즘엔 서울사람들이 노후의 삶을 위해 상황마을주변으로 새로 집을 지어 이사오고 있다고 한다. 이곳에 정착한다는 것은 동절기엔 확실히 문제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도로가 너무 가파르기 때문인데, 눈이 내리면 어떻게 다녀야 할지..........
늦으막히 민박집에 들었기에 저녁식사도 늦어졌는데 어찌되었건 저녁식사와 함께 한
목삼겹살 안주에 소주는 꿀맛이었고 피로와 소주의 취기는 일찌감치 나를 꿈나라로 데려갔다.
다음 날인 11월 16일 화요일 새벽, 밖의 기온은 영하로 떨어져 겨울의 맛을 느끼게 해주었는데 아침 식사전 밖으로 나가 동네 주변의 풍경을 잠시 스케치해 본다.
민박한 호두나무집 대문 앞에 큰 느티나무가 있는데 나무잎이 떨어져 아름다운 한폭의 그림을 만들었다.
중황마을에서 내려다 본 산내면 하늘위에 안개가 끼어 있다. 산 아래 호수처럼 끼어 있는 안개바다를 보면 이 마을의 고도가 무척 높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어림짐작으로 해발 500m정도 되지 않나 싶다.
아침햇살이 삼정산 정상부에 가득하고 반대쪽 산아래 산내면은 안개바다에 쌓여 있다.
어제처럼 오늘도 하늘은 청명하여 아름다운 쪽빛으로 칠해져 있다.
아무도 살지 않는 폐가↓ 마당에 호두나무와 감나무가 있다.
느티나무 밑의 정자↓ 얼마나 바람이 강하게 불면 정자4면을 샷시창으로 둘렀을까!
마을 뒷편에 해발 1천고지 이상의 삼봉산자락이 펼쳐져 있고 주변의 논과 밭은 모두 계단식으로 만들어져 있으며 고사리재배밭이 이곳에도 여기저기 보였다.
호두나무집 주인아저씨는 나에게 자기네 민박집 홍보를 부탁하신다.
부탁이 아니더라도 나는 이미 추후 여행자들을 위해 소개해 주려고 집과 전번이 써 있는 플랜카드를 촬영해 놓았었다.
주인 아저씨는 심성이 고으시고 인심 또한 넉넉하신 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저녁에는 호두를~ 아침에는 직접 조기찌개를 끓여 내 놓으시며 맛자랑을 하신다.
조기찌개를 먹어본 우리 일행은 우리가 끓인 김치찌개보다 더 맛있다고 하며 감탄한다.
어쩐지~ 군시절 장교식당에 근무했었고 미군부대에서 제대를 했다고 하신다.
연세는 얼마나 되셨는지요? 하고 물으니-
"70이 다 됐지!"
아마도 60대 후반이 아닐까 추측해 본다.
직접 농사도 하십니까?
"전에는 했는데 현재는 안해"..
아주머니는 어디 가셨어요?
잠시 머뭇거리시다가 "도망가 버렸어!" 하시며 껄껄 웃으신다.
어찌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부인은 안 계신게 틀림없는듯.....
아무튼 시골사람치고는 똑똑하셨고 별로 촌사람같지도 않으신 온화한 성품을 가지신 분이었다. 무엇보다도 아저씨가 한가족같이 대해 주시어 1박이었지만 무척 편했다는 점이다.
여행자들에게 호두나무 민박집을 추천하고 싶다.
▶호두나무 민박집 전화번호
010-2766-3421, 063)636-3421
보일러:기름과 나무 혼용
방: 2개(방1실에 3만원)
주방과 욕실은 입식으로 주인과 함께 이용가능
주인 아저씨 독거로 조용함
화려한 아침밥상, 주인 아저씨도 함께 하시고~ 넓은 냄비는 주인 아저씨가 끓이신 조기찌개
이렇게 맛있는 식사를 함께 나누고 작별인사를 한뒤 우리(제소와 나)는 다음 여정을 위해 상황마을로 걷기 시작한다.
다음 여정은 중황마을을 출발하여 상황마을을 지나 등구재를 넘어 경남땅으로 가는 것으로
3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