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적인 지(知)를 논의하면서 시간을 보내야 한다
지혜로써 본다는 것은
'일체가 브라만'이라고
느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말을 들어 보았지만,
이것은 그냥 듣기만 하라고
있는 말이 아닙니다.
그것을 체험해 보아야 합니다.
모든 존재들은 본질적으로
브라만의 성품을 가지고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남들을 분석하기 시작하면
여러분은
그 분석적 대상의 하나,
별개의 한 개체가 되고,
이것은 여러분에게
속박입니다.
여러분이 어떤 사람을
도둑으로 생각하면,
여러분의 마음 내용은 '도둑'입니다.
왜냐하면 도둑을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세간적 대상들에 대해
생각할 때는,
일체를 실재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그에 따라 행동하고 행위합니다.
하지만
영적인 가르침을 경청하거나
그것을 이해하게 될 때는,
그런 대상들을 참된 것으로
마음에 간직하는 일이
좀처럼 없을 것입니다.
'일체가 브라만이다'하는 태도를 유지하고,
그것이 참되다는 확신을 가지고 행위하십시오.
"나는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고
말만 하면서
그것이 여러분의 삶 속에서
잠자게 하지 마십시오.
그것을 여러분의 삶 속에서 시험하고,
그것이 참된지 아닌지 살펴보십시오.
일체를
파라브라만뿐이라고 보면
여러분이
신이 되지만,
일체를 그저 현상적인
평범한 세계일 뿐이라고 보면
여러분이
하나의 개인으로만 남습니다.
세계는 여러분이 그것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나타납니다.
세계를
다양한 형상을 취한
브라만으로 보면,
도처에서 브라만만 보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나'라는 열병,
에고의 자부심은 해소됩니다.
예를 들어
아내가 있으면
남편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내가 없으면
누구의 남편이 있을 수 있습니까?
보이는 것이 있기 때문에
보는 자가 있습니다.
보이는 것이 전혀 없다면
보는 자가 어떻게 생겨날 수 있겠습니까?
보이는 것을 내버리면
브라만이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이 소멸한다면,
마음이 무엇을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나'라는 느낌이
가라앉으면,
혹은 익사해 버리면
있는 것은
브라만 뿐입니다.
순수한 브라만의 표지는,
그 상태에서는
'나'라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브라만일 뿐입니다.
여러분이 어떤 사람을 대상적으로,
곧 '아무개 씨'와 같은
이름이나 명칭으로 지각하는 것은
브라만이 아닙니다.
만일 자신이 누구인지를
보지 못했다면,
바라나시나 다른 어떤 성자들을
순례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내면에 자기 진아의
영적인 성품에 대한 깨침이 없다면,
앵무새처럼 브라만에 대해
이야기해 본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여러분의 마음에
영향을 주어 온
그 독을 제거하십시오.
여러분이 거듭 거듭
반복해서 하는 일에 따라
더 많은 경험을 쌓게 됩니다.
누구나 감각대상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습관을 놓아 버리고
브라만의 지혜에 대해 이야기하십시오.
그런 식으로 부단히
그것에 대해 생각하면
브라만이 됩니다.
영적인 지(知)를 논의하면서
여러분의 시간을 써야 합니다.
감각대상들에 대해
계속 거듭하여 이야기하다 보면
더욱 세속적으로 될 뿐입니다.
진아 깨달음을 열망하는 구도자는
이런 주제에 관심이 있는
친척과 친구들을 두어야 합니다.
딴 사람들과 이야기하느라고
인생을 허비하지 마십시오.
헌신자인
가족친지가 있다는 것은
희유한 행운입니다.
만일 여러분에게 진아지가 없다면
모든 세간적 활동이 무슨 소용 있습니까?
우리의 '진정한 친척'인
성자들의 조언은
일상생활에 바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조언은
일자성(Oneness, 모두가 하나) 안에서의
대화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해탈의 길을 보여주는 스승이
우리의 진정한 친척입니다.
우리는 비나(인도의 악기)의
현을 조이듯이
자신을 조율해야 합니다.
그 악기가 알맞게 조율되면
소리가 맑게 울리겠지요.
스승과 여러분의 관계도
그와 같아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돕는 사람이
참으로 복 있는 사람입니다.
ㅡ 싯다르메쉬와르 마하리지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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