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묻지마 범죄_진정한 치유와 해방
마태복음 15:21-28
21.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 띠로와 시돈 지방으로 가셨다.
22. 이때 그 지방에 와 사는 가나안 여자 하나가 나서서 큰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제 딸이 마귀가 들려 몹시 시달리고 있습니다." 하고 계속 간청하였다.
23. 그러나 예수께서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다. 그 때에 제자들이 가까이 와서 "저 여자가 소리를 지르며 따라오고 있으니 돌려보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말씀 드렸다.
24. 예수께서는 "나는 길 잃은 양과 같은 이스라엘 백성만을 찾아 돌보라고 해서 왔다." 하고 말씀하셨다.
25. 그러자 그 여자가 예수께 다가와서 꿇어 엎드려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하고 애원하였다. 그러나
26. 예수께서는 "자녀들이 먹을 빵을 강아지에게 던져주는 것은 옳지 않다." 하며 거절하셨다.
27. 그러자 그 여자는 "주님, 그렇긴 합니다마는 강아지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주워 먹지 않습니까?" 하고 말하였다.
28. 그제야 예수께서는 "여인아! 참으로 네 믿음이 장하다. 네 소원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바로 그 순간에 그 여자의 딸이 나았다.
지난 화요일은 78주년 되는 광복절이었습니다. 광복절은 나라를 빼앗긴 우리 민족사의 아픔과 고통을 되새기고 다시는 그런 치욕을 되풀이하지 않기를 다짐하는 날입니다. 또 나라의 독립을 위해 일제와 싸운 선열들의 숭고한 삶을 기리는 날이기도 하죠.
하지만 지난해부터 우리의 광복절은 잔혹했던 일제 식민지의 과거사를 통째로 들어내고 친일(親日)을 넘어선 숭일(崇日)을 강요하는 협박의 날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번 광복절 경축사에는 그나마 작년에는 있었던 "일제 강점기"란 용어까지 삭제되었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의 눈물겨운 일본 배려 덕이었죠. 윤석열은 일제의 극악무도한 식민지배를 "국권 회복 가능성이 희박한 암흑의 시기"라고 포장했습니다.
광복절 경축사라면 마땅히 거론해야 할 일제의 조선 강점과 식민 통치, 그리고 민족 해방과 조국 광복의 역사적 의미 등을 아예 외면해 버린 것이죠. 대신에 경축사의 대부분을 친미로 갈아탄 친일 세력의 반공 운동에 할애했습니다
더 기가 막힌 것은 그동안 나라의 민주와 산업발전을 위해 목숨 바쳐 온 “민주주의 운동가, 인권 운동가, 진보주의 행동가”들을 공산전체주의 세력으로 규정하고, “허위 선동과 야비하고 패륜적인 공작을 일삼아 왔다”고 왜곡한 것입니다. 숭일 주의자 윤석열이 참된 민주주의 회복과 평화통일을 위해 헌신한 애국자들을 반국가단체로 모독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일본은 “우리와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고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는 파트너”로 미국과 함께 “세계의 평화와 번영에 함께 기여”할 동맹으로 추켜세웠습니다. 아시아에서 북중러와 대결하여 전쟁을 하겠다는 한미일 군사동맹을 분명히 한 겁니다.
온갖 왜곡과 말도 안 되는 논리로 떠든 이번 경축사가 위험한 것은 아시아의 평화와 한반도의 경제, 안보를 위협하는 전체주의 시각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윤석열이 체제 간의 이념 대결을 자극하면서 일본과의 파트너십을 강조하자 야당은 “극우 유튜버냐”냐고 맹 비난을 했습니다.
같은 날 일본의 기시다 총리는 전쟁 범죄자들을 모아놓은 야스쿠니 신사에 자민당 최고 당직자 4인과 함께 공물을 바치는 몰염치한 짓을 저질렀죠. 야스쿠니 신사는 일본 제국주의와 군국주의의 상징과도 같은 장소입니다. 여기에는 246만여 명의 전몰자들이 합사돼 있고, 합사자 중에는 도조 히데키(東條英機)를 비롯해 A급 전범 14명도 포함돼 있습니다. 기시다의 이런 행동은 전쟁의 잘못을 뉘우치기는커녕 또다시 전쟁을 일으키겠다는 선언입니다.
최근 ‘묻지마 범죄’가 빈번해지며 우리 사회를 공포로 몰아넣고 있습니다. 잇따른 '묻지마 흉기 난동'도 모자라 온라인상에서 '살인 예고'가 속출하고 부정확한 정보까지 무차별 확산하면서 시민의 불안감이 위험 수위로 치닫고 있습니다.
지난 7월 21일에 신림역 4번 출구 근처에서 30대 남성이 칼부림을 일으킨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 일로 20대 남성 1명을 죽고 30대 남성 3명이 부상을 입었습니다. 이 사건의 피의자 는 33살의 조선이란 남자인데, 경찰 조사에서 “오래전부터 살인 욕구가 있었다” “내가 불행하니 남들도 불행하게 만들고 싶었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8월 3일에는 성남시의 AK플라자 분당점 일대에서 20대 남성이 차량을 인도를 향해 돌진시켜 5명의 사상자를 낸 뒤, 주변 행인에게 칼부림을 일으켜 9명을 부상시킨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피해자 중 1명은 죽고 20대 여성은 뇌사상태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 사건의 피의자 최원종(22세))은 자신이 오랫동안 스토킹을 당해왔다는 망상적 사고를 하는 특성을 보였다고 합니다.
지난 17일에는 대낮에 서울 신림동의 한 등산로에서 30대 최 씨가 지나가던 여성을 너클로 폭행과 성폭행을 한 사건이 일어 났죠. 폭행을 당해 의식불명에 빠졌던 피해 여성은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19일 오후 결국 사망했습니다.
이런 사건들이 터지자 윤석열은 묻지마 범죄를 테러로 규정짓고 초강경 대응을 지시했습니다. 이에 경찰은 사상 처음으로 특별 치안 활동을 선포하고 도심 한복판에 특공대와 장갑차를 배치했죠. 법무부는 흉악범죄에 엄정 대응하겠다며 가석방 없는 종신형 도입을 공언했습니다. 여당은 흉악 범죄자 진압 과정에서 현장 경찰관의 면책권 강화 등을 추진하기로 했습니다. 언론 역시 공권력을 총동원해 강력히 대응해야 하고, 나아가 정신질환자 관리 강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주문했습니다. 서현역 사건의 가해자는 조현성 인격장애 진단을 받았고 신림역 사건의 가해자는 사이코패스라는 이유에서였죠.
하지만 이런 강경 대응이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 의문입니다. 전문가들은 묻지마 범죄의 경우 엄벌 등 강경 대응으로는 막기가 어렵다고 말합니다. 묻지마 범죄의 가해자들은 처벌을 염두에 두고 범행을 저지르지 않기 때문이란 것이죠. 반면 경찰 등 공권력이 강경 대응으로 일관하게 되면 자칫 무고한 피해자가 나오거나 정신질환자의 인권이 부당하게 침해되는 부작용이 나올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지난 14일 경찰청이 국회에 제출한 ‘이상 동기 범죄 대책’ 문건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1∼6월)에 일어난 살인·상해·폭행 사건 가운데 ‘사회에 대한 적대감’이 범행동기로 파악된 사건은 64건, ‘제3자 대상 분풀이’는 861건이었습니다. 모르는 사람에게 또는 길을 가다가 이유 없이 맞는 ‘묻지마 폭행’ 사건이 하루 평균 3.06건 발생한 셈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일들이 점점 늘어나는 걸까요? 전문가들은 묻지마 범죄는 ‘승자독식 사회가 키운 괴물’이라고 말합니다.
사회를 향한 무차별 공격의 형식으로 벌어지는 묻지마 범죄는 사회적 죄절에서 비롯된다고 보여집니다. 좌절-공격성 이론(frustration-aggression theory)은 기대했던 목표를 이루거나 만족을 얻는데 방해를 받았다고 지각할 때 공격 반응이 일어날 가능성이 증가한다고 말합니다. 열심히 살면 남들처럼 행복할 것이라 기대했는데 그렇지 않아 느껴야 했던 좌절감이 공격성을 부추긴다는 것이죠.
이렇게 공격성을 부추기는 우리 사회의 좌절 요인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수직적 서열주의가 만든 패배자 양산 시스템’입니다. 급속한 경제발전을 이룬 우리 사회는 그동안 생존을 위한 치열한 경쟁을 요구해 왔습니다. 그 속에서 수직적 서열주의와 능력주의가 판을 치면서 패배자를 멸시하는 배타성이 자리 잡았죠.
우리의 교육 시스템은 최우수 학생을 선발하기 위해 계속 패자(敗者)들을 쳐내는 배타적 방식입니다. 그리고 꼭대기에 오르지 못한 학생들은 모두 낙오자, 또는 패자로 규정됩니다. 사회에 진출해서도 대기업-중소기업, 정규직-계약직으로 계급이 나눠지죠. 승자는 패자를 조롱하고, 승자들의 ‘갑질’은 패배자들을 모멸감 속에 빠지게 합니다.
두 번째는 ‘상대적 박탈감이 키운 사회적 고립’입니다. 경제적 양극화가 심해질수록 사람들은 상대적 박탈감에 빠지게 됩니다. 그리고 이 박탈감은 사회적 고립감을 키우는 원인이 되죠. 우리는 지금 SNS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서로가 SNS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겁니다. SNS를 통해 소비의 향연에 동참하지 못하는 사회적 패배자들은 자신의 존재에 회의를 품게 되죠. 이렇게 고립되고 절망하는 사람들이 늘수록 묻지마 범죄의 가능성이 증가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묻지마 범죄’의 근본적 예방은 우리 사회의 병폐를 치유해야만 가능한 것입니다.
먼저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병패인 권력의 승자독식 구조를 깨야 합니다. 우리의 정치구조는 거대 양당의 과두체제가 확고히 구축되어 소수 및 다양한 목소리가 외면받고 있는 형태입니다. 정치적 승자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탓에 여야 간 권력투쟁이 격화되면서 진영논리가 활개치고 대결과 적대의 정치가 만연해졌죠. 이로 인해 국민은 준내전 상태로 분열되어 서로에 대해 증오와 혐오를 퍼붓고, 서로를 악마화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두 번째는 부의 불평등을 깨야 합니다. 우리나라의 부의 불평등은 세계 최악의 수준입니다. <세계 불평등 보고서 2022>에 따르면 1990년대부터 2021년까지 사이 우리나라 전체 소득 중 상위 10% 계층의 소득 비율은 35%에서 46%로 상승했으나, 하위 50% 계층은 21%에서 16%로 하락하여 소득 불평등이 커졌습니다. 자산의 경우 2021년 기준으로 상위 10% 계층이 전체 자산의 58%를 차지하는 반면, 하위 50% 계층은 6%에 불과했습니다.
이 불평등에 절망한 청년층들은 우리나라를 ‘헬조선’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 절망이 자살율과 출산율을 세계 최고와 최저로 만들었죠. 가장 죽고 싶은 나라, 가장 태어나기 싫은 나라, 그 나라가 바로 대한민국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 불평등을 깨뜨리지 않고는 묻지마 범죄가 사라질 수 없습니다.
세 번째는 차별과 혐오를 부추기는 능력주의의 타파입니다. 능력주의(Meritocracy)는 개인의 능력에 따라 사회적 지위나 권력이 주어지는 사회를 추구하는 정치철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능력주의는 본래 신분이나 계급의 세습에 대항하여 개인의 능력과 노력에 따라 사회적 지위를 분배해야 한다는 개념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무한경쟁과 승자독식의 사회 구조 속에서 왜곡되어 계층간의 양극화와 불평등을 고착화시키는 도구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사회의 기득권층이 능력주의를 앞세워 신분과 계층 세습을 공고히 하고 있는 것이죠. 봉건사회의 유산으로 사라진 것으로만 알고 있었던 세습주의가 새로운 형태로 나타나면서 민주주의의 목표인 자유와 평등을 가로막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율법학자들과의 정결 예법에 대한 논쟁 후에 일어난 일입니다.
15장 전반부(1-20절)에는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학자들이 예수님께 정결 문제로 시비를 거는 내용이 나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음식을 먹을 때 손을 씻지 않는다는 것이죠. 이들의 문제 제기에 예수님은 음식이나 손 씻지 않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는 것(부정)이 아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힌다고 응수하십니다.
예수님은 율법학자들이 전통을 핑계 삼아 하느님의 계명을 어기고 있다고 책망하시죠. 그 사례로 고르반 전통을 듭니다. “하느님께서는 '부모를 공경하여라'하셨고 또 '아버지나 어머니를 욕하는 자는 반드시 사형을 받아야 한다' 하셨다. 그런데 너희는 사람을 가르칠 때 ‘누구든지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해드릴 것을 '하느님께 바쳤다’하고 말만 하면 아버지나 어머니를 봉양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한다. 이렇게 너희는 너희의 전통을 핑계 삼아 하느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있다(4-6절)”고 책망하신 거죠.
‘고르반’은 하느님께 드리는 헌물 또는 제물을 뜻하는 용어입니다. 신약성서에서 바리새인들은 장로의 유전을 중시하여 고르반이란 말로 맹세한 경우, 그것이 부모 부양에 필요한 것일지라도 취소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맹세가 악용되어 부모에 대한 부양의무를 게을리하게 되는 핑계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가르침에 반대되는 율범학자들의 이런 위선을 공격하였던 것입니다.
율법학자들과의 위선에 대한 논쟁 후에 예수님은 띠로와 시돈 지방으로 가셨습니다. 띠로와 시돈은 이방인의 지역 중 중심이 되었던 곳이고 가나안 민족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원수로 여겼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곳으로 가셨고 거기서 가나안 여자를 만났다는 것은 무언가 의도가 있음을 짐작하게 합니다.
마태는 수로보니게 여인을 의도적으로 ‘가나안 여인’으로 표현합니다. 가나안 사람들에 대한 유대인의 적개심을 한껏 드러내려 한 것이죠. 옛부터 가나안 민족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반드시 진멸해야 할 대상이었던 것입니다.
더군다나 예수님이 만난 가나안 여인은 자신의 딸이 흉악하고 더러운 귀신에 들려 고통 가운데 있는 여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유대인 입장에서는 원수의 족속이며, 여인이고, 하나님께 저주 받아 귀신들린 딸을 둔 그야말로 상종할 수 없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여인이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고백하며, 자신을 불쌍히 여겨 고통당하는 딸을 낫게 해달라고 간청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가나안 여인의 간청에 예수님은 침묵하십니다. 제자들은 한술 더 떠 예수님께 "여자를 쫓아 버리자고 말합니다.
예수께서는 모두가 들을 수 있게 "나는 길 잃은 양과 같은 이스라엘 백성만을 찾아 돌보라고 해서 왔다"고 말씀하시죠. 이방인에 대한 편견에 가득한 유대인과 바리새인 율법학자들에이 듣고 싶었던 말씀일 겁니다.
계속 도움을 청하는 여인에게 이번에는 "자녀들이 먹을 빵을 강아지에게 던져주는 것은 옳지 않다"는 말씀을 하시죠. 이 또한 유대인들이 듣고 싶었던 말이겠죠.
하지만 여인도 물러서지 않습니다. "주님, 그렇긴 합니다마는 강아지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주워 먹지 않습니까?"라며 도움을 청합니다.
그제서야 예수께서는 "여인아! 참으로 네 믿음이 장하다. 네 소원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말씀하시고, 바로 그 순간에 그 여자의 딸이 나았다고 마태는 증언합니다.
마태복음의 저자 마태는 세리였습니다. 당시 세리는 창녀와 비슷한 취급을 받을 정도로 경멸을 받는 직업이었죠. 예수님 시대에 세리는 로마 제국의 앞잡이로 인식되어 더욱 경멸의 대상이 되었습니다.다. 세리는 특정 지역의 세금 징수권을 위임받아 세금을 거둔 뒤 정해진 액수만큼을 나라에 보내고 나머지는 자기 수입으로 챙겼습니다. 세리들은 자신의 수입을 극대화 하기 위해 갖은 방법을 다 동원하여 정해진 액수보다 더 많은 세금을 뜯어냅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엄청난 증오와 경멸의 대상이 되었죠.
회심한 마태는 당시 멸시와 천대를 받던 민중들에 대한 공감과 이해기 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 가나안 여인에 대한 이야기는 당시의 유대인, 특히 기득권층에게 보내는 경고의 의미를 담은 이야기가 된 거죠.
당시의 권력자들에게 이 이야기는 진정함 믿음, 하느님의 해방 사역이 어떻게 일어나는 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먼저 생각할 것은 진정한 믿음은 세치 혀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데 있다는 것입니다. 율법학자들의 교묘한 말로 하느님의 진리를 왜곡할 수는 없습니다. 윤석열이 교묘한 언설로 진실을 외면하고 역사를 왜곡하려 하지만 이는 하늘을 거역하는 처신입니다.
두 번째는 모든 차별은 하느님의 뜻에 어긋난다는 것입니다. 이념으로 갈라치기 하고 신분으로 사람을 나누며, 돈으로 온갖 탐욕을 채우려 하다가는 하느님의 심판을 면할 수 없습니다.
세 번째는 가나안 여인과 같이 자기를 부인하고 낮추며 하느님의 자비를 간구해야만 해방의 기적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귀신들린 이 땅의 권력과 기득권자들은 돌이켜 가나안 여인이 되어야 합니다. 회개하고 돌아선다면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씌인 귀신을 쫓아내 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저주와 심판만이 있을 뿐입니다.
지난 16일 아사히신문은 ‘한·일 관계의 개선을 가속할 생각을 강조하는 윤 대통령’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윤석열 정권과 여당 내에서는 당면한 현안인 도쿄전력 후쿠시마 제1 원전의 처리수 방출이 불가피하다면 차라리 총선에 악영향을 적은 조기 방출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면서 “그 의향은 일본 측에도 비공식적으로 전해지고 있어 일본 정부의 판단에도 영향을 미칠 것 같다”고 보도했습니다.
정부는 논란이 불거지자 18일 사실이 아니라고 부인했지만, 더불어민주당은 그렇다면 일본 언론에 왜 항의를 하지 않느냐고 반박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윤석열이 캠프 데이비드 한미일 정상회담에서 ‘오염수 투기 반대’를 말해야 한다는 요구가 들끓었습니다.
하지만 후쿠시마 핵 오염수 방류에 대해서는 입도 뻥끗 못하고, 아시아판 나토를 만드는 돌격대 노릇만 자초하고 돌아왔습니다. 북중러에 대한 적대 의사를 분명히 했고, 전쟁이 발발할 경우 자동 개입 등 한반도를 위협에 빠뜨리는 합의를 하고 온 겁니다.
‘묻지마 범죄’의 난무는 세상은 사람 살기가 너무도 어려워졌다는 증거입니다. 정상적인 사회라면 혁명이 일어나야 하는 절박한 상황인것입니다. 하지만 민중들의 고통과 절망이 사회변혁의 동인으로 작용하지 않고, 자기보다 더 약한 자에 대한 폭력으로 나타나는 것은 종말을 향한 더 위험한 신호일 수 있습니다.
이를 극복하는 것은 예수님이 그러했던 것처럼 고통 속에 살아가는 민중들과의 굳건한 연대와 관심입니다. 이것이 이 땅에 진정한 치유와 해방을 안겨 줄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꿈꾸는 이들이 이 땅의 고난 받는 이웃들과 함께 새 세상을 일구길 소망하며 축원드립니다.
<2023. 8.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