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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량의 무기/투기화와 한국의 ’식량주권’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
2008년 벽두부터 몰아닥친 세계적 식량위기에 대처할 방안이 나올 수 있을 것인가로 관심을 모았던 UN식량안보정상회의(2008.6.3∼6.5. 로마)에 대한 평가는 딱 한 줄로 요약할 수 있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
2000/01년부터 만성적인 식량공급 부족이 누적되면서 식량위기가 현실화될 것이라는 우려가 높아지던 가운데, 2007년부터 식량의 무기화, 식량의 투기화가 가세하면서 마침내 올해 초부터 세계적인 식량위기가 핫이슈로 떠올랐다. 세계 곳곳에서 식량부족과 가격폭등에 항의하는 폭동이나 소요사태가 발생하였고, 아시아와 아프리카 그리고 중남미 등 전 세계 약 9억 5천만 명의 기아 인구를 포함하여 약 21억 명의 인구가 식량위기를 겪게 되었다. 벌어들인 소득의 70∼80%를 식량구입에 사용하느라 아이들에게 학교를 그만두도록 만들고, 군인들이 총 들고 경비를 서는 식량창고 앞에서 5시간이나 줄서서 기다렸지만 결국 빈손으로 돌아와야 하는 모습은 식량위기가 초래한 최근의 현상들이다.(한겨레 2008년 기획연재 ‘지구촌 식량위기’ 기사 참조)
이에 UN산하 국제농업기구(FAO)는 2008년 4월 세계식량상황 보고서를 통해 향후 식량위기가 더욱 심각해질 것이라 경고하면서 2008년 6월 로마에서 식량안보정상회의를 개최할 것을 촉구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40개국 정상을 포함하여 151개국의 대표단이 참석하여 14개항의 공동선언문을 채택하는 것으로 막을 내린 UN식량안보정상회의는 알맹이 없는 말잔치에 지나지 않았다. 각국이 긴급 식량원조를 확대하기로 한 것을 제외하고는 식량위기를 해결할 수 있는 그 어떤 실효성 있는 방안도 제시하지 못했다. 오히려 식량위기의 주범으로 비판받고 있는 농업무역의 자유화를 확대시키기 위해 WTO/DDA를 신속하게 타결해야 한다는 권고조치가 버젓이 공동선언문에 포함될 정도로 퇴행적인 모습을 보였다.
처음부터 UN식량안보정상회의에 대한 기대치는 그다지 높지 않았다. 왜냐하면 미국, EU, 브라질 등 농산물수출국이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그 배후에는 곡물메이저와 초국적 농식품복합체의 이해관계가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 농업무역 자유화를 등에 업고 막대한 이윤과 권력을 확장해 왔던 이들에게는 세계적인 식량위기가 오히려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여겨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식량위기에 주목하는 많은 사람들은 식량안보정상회의 결과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고, 식량안보정상회의가 열렸다는 사실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식량위기를 주제로 정상회의가 개최되었다는 사실만으로 식량위기 문제가 우려의 차원을 넘어 이미 현실적인 문제로 드러났다는 것을 분명하게 확인해 주었기 때문이다.
식량위기, 만성적인 공급부족 구조
2000년대 이전까지 세계 식량문제라고 하면 보통 상대적인 식량위기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당시만 하더라도 세계 전체로 보면 식량생산량이 소비량보다 많았기 때문에 돈이 없어서 식량을 충분하게 수입할 수 없는 저소득국가 혹은 극빈국의 기아문제가 식량위기를 대변하는 현상이었다. 그러나 식량생산이 늘어나는 속도에 비해 소비가 증가하는 속도가 훨씬 더 빠르게 진행되면서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세계 식량생산량 보다 소비량이 더 많아지는 상황으로 바뀌는 절대적인 식량위기 국면으로 접어들게 되었다.
2000/01년에 세계 곡물생산이 약 18억 4천만톤, 곡물소비가 약 18억 6천만톤으로 소비가 생산을 넘어서게 되었고, 2004/05년을 제외한 매년 생산이 소비를 따라가지 못하고 곡물부족이 쌓이게 되었다. 이렇게 누적되는 생산부족 때문에 2007/08년 곡물 재고량은 약 14.9%로 전망되고 있는데, 이는 식량무기화가 극심하게 기승을 부렸던 1970년 이후로 가장 낮은 수준을 기록하게 된다.
식량위기가 왜 일어났는가? 겉으로 드러난 것만 놓고 보면 2000년대 이후 생산·공급의 부족이 쌓이고 쌓여 곡물가격 폭등으로 이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중요하게 살펴보고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겉으로 드러난 것 보다는 그 이면에 숨어 있는 본질적이고 구조적인 것이다. 세계 식량 소비가 빠르게 증가하는 첫째 이유는 곡물 대신 육류 소비가 늘어나기 때문이며, 두 번째 이유는 중국과 인도의 소비가 빠르게 늘어나기 때문이며, 세 번째 이유는 바이오에너지 생산을 위해 사용되는 곡물의 양이 급격히 증가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쇠고기 1kg 만큼의 에너지(cal)를 섭취하기 위해서는 약 12∼14kg의 곡물을 소에게 사료로 먹여야 하며, 돼지고기는 약 6∼7kg, 닭고기는 약 2∼3kg 정도이다. 고기를 많이 소비할수록 식량소비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게 되는 것이다. 약 23억의 인구대국인 중국과 인도의 경제성장도 식량소비 증대에 한몫 단단히 했다. 게다가 중국 사람들의 육류소비가 증가하면서 식량소비는 빠른 속도로 늘어났다. 이 때문에 중국은 과거엔 식량수출국이었지만 육류소비가 크게 늘어나면서 몇 년 전부터는 식량수입국으로 바뀌었다. 미국이 이라크를 침략한 이후 국제 석유가격이 크게 오르기 시작했고, 석유연료를 대체할 에너지의 하나로 바이오디젤이나 바이오에탄올에 대한 수요가 최근 급격하게 늘어났다. 식량으로 사용해야 할 곡물이 자동차 연료 등으로 사용되면서 곡물소비가 크게 늘어난 것이다.
이처럼 빠르게 늘어나는 식량소비를 생산이 감당하지 못하고 생산·공급의 부족이 쌓이면서 자꾸만 재고량은 줄어들고 재고율은 낮아지고 있다. 농업기술의 비약적인 발전에도 불구하고 식량생산이 소비를 감당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지금 보다 농업기술이 덜 발전했고 단위 면적당 생산성이 낮았던 1990년대까지는 식량생산량이 소비량 보다 더 높았는데, 오히려 생산성이 더욱 높아진 지금은 왜 식량생산이 소비 보다 낮은 것일까? 그 대답은 기후변화와 신자유주의 세계화에서 찾을 수 있다. 기상이변과 세계화로 인한 식량생산 감소효과가 단위 면적당 생산성 증대 효과를 상쇄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기후변화로 인해 사막화가 확산되고 물이 부족하여 경지면적이 줄어들고 있다. 여기에 잦은 기상이변으로 태풍, 홍수, 가뭄 등이 빈발하는 등 자연재해가 식량생산을 감소시키면서 매년 수확량을 들쭉날쭉하도록 만들고 있다. 1993년 UR 농산물협상의 타결과 1995년 WTO 출범으로 농산물시장이 개방되면서 전통적인 소규모 가족농이 빠르게 붕괴됨에 따라 이들이 담당했던 식량생산이 급격하게 줄어들고 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세계화로 인해 가족농이 해체되고 식량생산이 크게 줄어들고 있는 우리나라의 현실에서 바로 알 수 있듯이 나라별로 농업보호의 수준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세계 모든 나라에서 소규모 가족농이 붕괴되는 공통적인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현재의 식량위기는 만성적인 생산부족으로부터 발생한 것이다. 식량생산의 부족은 어느 날 갑자기 발생한 일시적 위기현상이 아니라 기후변화와 세계화에 바탕을 두고 있는 구조적인 위기이다. 먹을거리에 대한 수요(소비)구조와 공급(생산)구조에 근본적인 변화가 발생하지 않는 이상 현재의 식량위기 문제는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2000년대 이후로 식량부족이 누적되면서 식량가격도 가파른 상승세를 보여 왔다. 2000/01년과 2006/07년을 서로 비교해 봤을 때, 쌀의 국제시장 가격은 약 74∼77% 올랐으며, 소맥(밀)은 58.8%, 옥수수는 70.7%, 대두(콩)는 53.4% 올랐다. 불과 6년이라는 비교적 짧은 기간에 이토록 곡물가격이 급등한 것은 1970년대 이후 처음이다. 곡물가격이 많이 오르면 오를수록 돈이 있어도 먹을거리를 사는 것이 어렵게 되는 것이다.
식량의 무기화, 식량의 투기화
만성적인 식량생산 부족과 식량가격의 급격한 상승으로부터 발생한 식량위기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앞에서 말한 국제 식량가격의 상승은 2006/07년까지의 상황만 나타내었다. 가격폭등이라는 말로도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질주하는 국제 식량가격 때문에 전 세계 37개국에서 크고 작은 식량폭동이나 소요가 발생한 것은 2007/08년의 상황이다. 2007/08년에 우리는 하루가 멀다 하고, 세계 식량이 심각할 정도로 부족하다느니, 어느 나라에서 식량폭동이 일어났느니, 국제 곡물가격이 또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느니 하는 등의 뉴스를 듣고 있다.
도대체 2006/07년과 2007/08년의 식량위기 상황이 이처럼 큰 차이를 보이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2000/01년부터 2006/07년까지의 식량위기도 심각하게 우려스러운 상황인 것은 맞지만 최근 1년여 사이에 벌어진 광란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생겼기에 UN식량안보정상회의까지 열렸던 것일까?
바로 식량의 무기화에 첫 번째 해답이 숨어 있다. 식량부족 상황이 누적되고 식량위기가 현실로 나타날 징조를 보이자 2007/08년에 주요 식량수출국인 러시아, 중국, 아르헨티나, 인도, 우크라이나, 브라질 등의 국가들이 식량수출을 통제하는 조치를 취하기 시작했다. 곡물을 수출할 경우에 수출세를 부과하는 것에서 출발하여, 곡물별로 일정하게 정해진 물량만 수출하도록 허용하는 수출할당으로 나아가거나, 아예 특정 곡물에 대해서는 수출 자체를 금지하는 조치까지 취하고 있다. 아래 [표 3]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최근에는 주요 쌀 수출국인 이집트, 필리핀, 베트남까지 수출통제 조치를 취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우려했던 식량의 무기화가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이처럼 식량의 무기화가 세계적으로 확산되는 것은 1970년대 이후 처음이다. 식량수출국들의 수출통제로 국제시장에서 식량공급이 축소되자 식량을 확보하려는 수입국들의 경쟁에 불이 붙으면서 가뜩이나 상승일로에 있던 식량가격이 완전히 고삐가 풀리게 되었다.
두 번째 해답은 식량의 투기화에 숨어 있다. 2006/07년 발생한 서브프라임 사태의 후폭풍으로 미국의 금융시장이 위기로 빠져들었다. 이 때 금융시장에서 빠져 나온 투기자본이 새로운 먹잇감으로 사냥에 나선 것이 석유, 곡물, 금, 철강 등이다. 가뜩이나 생산·공급 부족으로 가격이 가파르게 오르고 있던 이들 품목들을 국제투기자본이 그냥 놓아두지 않았다. 투기자본이 물밀듯이 몰려간 곳에는 예외 없이 가격이 하루가 다르게 하늘 높은 줄 모르고 폭등했다. 석유 값이 그러했고, 금이나 철강도 가격이 치솟았다. 곡물도 예외가 아니었다. 식량에 대한 투기는 한창 타오르고 있던 식량가격 폭등에 기름을 부은 꼴이 되고 말았다.
만성적인 공급부족 때문에 식량위기가 현실로 나타났는데, 여기에 식량의 무기화, 식량의 투기화가 새로 첨가 되면서 지금 세계는 걷잡을 수 없는 식량위기로 내몰리게 된 것이다. 불과 최근 1년 사이에 미국산 쌀값은 57.8%, 태국산 쌀값은 59.0%, 베트남 산 쌀값은 65.0%가 올랐고, 옥수수는 36.9%, 대두(콩)는 81.7%, 소맥(밀)은 169.8%나 올랐다. 한마디로 광란이라고 표현해도 부족할 정도이다.
최근 벌어지고 있는 식량위기는 일시적인 것이 아니다. 만성적인 공급부족에서 오는 구조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환경문제와 더불어 21세기를 관통하는 핵심 이슈다.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근본적인 변화를 필요로 한다는 뜻이다.
어쩌면 단기적으로는 식량위기가 조금은 나아질 수도 있을 것이다. 미국의 금융위기가 해소되든지 아니면 또 다른 먹잇감이 나타나든지 국제투기자본이 곡물시장에서 빠져 나간다면 식량가격의 폭등세가 꺾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식량위기가 벌어지기 이전의 상황으로 돌아갈 수는 없을 것이다. 국제투기자본이 들어오기 이전에 이미 식량위기는 현실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기껏해야 국제투기자본이 본격적으로 들어오기 이전인 2006/07년 정도의 상황 정도가 최고 기대치일 것이다.
만약 기상조건이 아주 좋아서 식량생산이 일시적으로 늘어나거나 식량수출국들의 수출통제조치가 완화된다면 식량위기 상황은 그나마 조금 나아질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식량위기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일시적인 생산·공급의 증가가 만성적인 공급부족 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꾸지는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2006/07년 보다 조금 나은 상황 정도를 기대하는 것이 현실적일 것이다.
세계 식량 가운데 87∼88%는 자국 내에서 소비되고, 12∼13% 정도만 국제시장에서 거래된다. 그렇기 때문에 생산이나 소비에서 조금만 변화가 발생해도 가격이 크게 요동을 치는 것이 특징이다. 소위 얇은 시장(thin market)이라는 것이다. 식량 중에서도 쌀이 가장 얇은 시장에 해당하는데, 전체 생산량 가운데 국제시장에서 거래되는 물량은 5%를 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세계 식량이 만성적인 공급부족 구조라는 근본적인 문제점을 안고 있는 한 언제든지 식량의 무기화, 식량의 투기화가 발생할 수 있는 위험을 안고 있다.
식량의 국제거래 물량 가운데 약 80%를 곡물메이저가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식량위기는 곡물메이저에게 황금알을 낳는 거위와 같다. 최근 기록적인 순이익 증가율을 기록한 곡물메이저 아처 대니얼스 미들랜드(AMD)의 최고경영자인 패트리셔 워어츠는 “취약한 곡물시장으로 인해 사상 유례없는 기회를 맞았다”고 말한 것으로 월스트리트저널이 보도했는데, 현재의 식량위기를 대하는 곡물메이저의 시각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인류의 절대 다수는 먹을거리가 생존을 위한 필수품이지만 곡물메이저나 초국적 농식품복합체에게 식량은 더 많은 이윤을 추구하는 욕망의 도구에 불과하다.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통해 세계식량체계를 구축하는데 성공한 이들에게 만성적인 공급부족 구조는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황금알을 보장해 주는 사상 유래 없는 기회이다. 먹을거리 지배자에게 식량위기에 빠진 세계는 더 많은 권력과 이윤을 가져다주는 엘도라도와 같다.
식량위기, 위험한 밥상
현재의 식량위기는 먹을거리의 양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앞으로 다가올 식량위기는 양도 절대적으로 부족할 뿐만 아니라 질도 위험하다는 점에서 더욱 심각한 위기가 될 것이다.
먹을거리 안전은 종자단계에서부터 위협을 받고 있다. 유전자조작농산물(GMO)로 널리 알려진 GMO 종자가 바로 그것이다. 현재 미국 내에서 생산되고 있는 콩의 50%, 옥수수의 27%가 유전자조작농산물(GMO)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것이 축산물의 사료로, 가공식품의 원료로 사용되어 우리의 밥상에 오르고 있다.
식량생산 단계에서는 농약과 화학비료 그리고 동물성 사료와 화학약품이 먹을거리의 안전을 위협하고 있다. 곡물메이저와 초국적 농식품복합체가 주도하는 세계식량체계는 생산성의 극대화를 위해 대량의 화학농법과 공장식 축산을 더욱 확대시키고 있다. 대량의 화학농법은 먹을거리 안전을 위협할 뿐만 아니라 석유 등 화석연료의 고갈, 땅과 물의 오염, 생태계의 파괴 등과 같은 환경파괴를 일으키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또한 세계식량체계는 식량을 장기간 저장하거나 장거리 운송하는 것이 불가피하기 때문에 유통이나 가공과정에서 다양한 종류의 화학물질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 상품성의 유지를 위해 이른 바 수확후 처리(post harvest)과정에서 다량의 화학물질을 사용하거나 식품가공 과정에서 다양한 화학물질을 첨가하는 것이다.
종자에서 슈퍼마켓까지 곡물메이저와 초국적 농식품복합체의 지배력이 높아진다는 것은 그만큼 먹을거리가 더욱 위험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먹을거리의 지배자가 세계식량체계를 통해 우리의 밥상을 장악하는 것이 확대되면 될수록 우리의 밥상은 더욱 더 많은 위험에 노출되는 것이다. 물론 세계식량체계에서 벗어나 자국내에서 생산되고 소비되는 먹을거리도 안전성 문제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하다. 식량생산 단계에서 이루어지는 화학농법이나 공장식 축산, 유통·가공 단계에서 이루어지는 화학물질의 사용은 먹을거리의 안전을 위협하는 요소이다. 그러나 그 위험의 수준은 세계식량체계로부터 비롯되는 위험에 비해 상대적으로 나은 편이다. 그리고 자국내에서 생산되고 소비되는 먹을거리에 대해서는 개별 국가가 정책과 제도를 통해 안전성에 관한 규제를 적극적으로 시행할 수 있으며, 국민이 동의하고 정부가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환경친화적 농업으로 바꾸어 나갈 수도 있다.
그러나 세계식량체계로부터 공급되는 먹을거리에 대해서는 개별 국가의 안전성 규제가 제대로 효과를 발휘하기 어렵다. 오히려 먹을거리 지배자는 갖은 방법을 통해 개별 국가의 안전성 규제조치를 약화시키나 아예 없애려고 시도할 것이다. 미국이 다른 나라로 수출하는 농산물에 대해서는 수확후 처리를 법으로 보장하면서 수입국에 대해서도 그러한 조치를 인정하도록 압력을 행사하는 것의 배후에는 먹을거리 지배자가 있다. 유전자조작농산물(GMO)의 생산과 재배면적이 늘어나고 국제거래가 증가하는 것의 배경에도 이들이 있다. 광우병 위험 쇠고기에 대해 한국이 완전 개방하도록 만든 데에도 이들이 손길이 작용하고 있다.
자국민의 건강을 위해 먹을거리 안전을 강화하려는 개별 국가의 정책과 제도 그리고 검역주권을 무력화시키는 이들 먹을거리 지배자들이 먹을거리 안전을 위협하는 최대의 적이다. 그리고 이들이 주도하는 세계식량체계가 확대되고 지배력이 강해질수록 인류는 그만큼 위험한 밥상에 점점 더 심각하게 노출될 것이다.
미래의 식량위기는 먹을거리의 양이 절대적으로 부족하여 지금보다도 훨씬 더 비싼 가격을 지불해야 하는 문제와 아울러 지금보다도 훨씬 더 위험한 먹을거리가 우리들의 밥상에 오르는 문제가 동시에 나타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먹을거리 지배자들에게 지금보다 훨씬 더 강한 권력과 많은 이윤을 안겨 주고, 그것은 다시 우리의 밥상을 보다 더 위험하게 만드는 부메랑으로 돌아오는 악순환으로 이어질 것이다. 이러한 식량위기 상황에서 가장 고통 받는 것은 절대빈곤층이며, 소수의 상위계층을 제외하고 대다수 국민들 역시 비싼 식량가격과 위험한 밥상으로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어쩌면 부자일수록 값비싼 친환경농산물을 소비하고, 가난하면 가난할수록 유전자조작농산물(GMO)이나 광우병 위험 쇠고기와 같은 위험한 먹을거리를 먹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올 수도 있을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위험한 밥상인 줄 알면서도 혹은 여론조작에 의해 안전하다고 믿고 있지만 실상은 위험한 밥상을 먹어야 할지도 모른다. 지금도 일부에서는 식량위기의 대책으로 유전자조작농산물(GMO)의 생산과 공급을 확대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고, 가공식품의 원료를 유전자조작농산물로 바꾸는 사례도 벌어지고 있다. 여기에 대통령까지 나서서 광우병 위험 쇠고기 전면 수입개방을 두고 국민이 값싸고 질 좋은 미국산 쇠고기를 먹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 것으로 호도하는 일도 벌어지고 있다. 식량위기가 더욱 심각해지거나 먹을거리 지배자들의 세계식량체계가 더욱 강력해지는 상황이 올 경우 어떤 일이 벌어질 지 예상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 같다.
한국은 식량위기의 안전지대인가
2006년 한국의 식량자급률은 25.3%이다. 한국의 식량자급률은 OECD 국가 가운데 포르투갈, 일본, 네덜란드와 함께 최하위그룹에 속한다. 이 가운데 포르투갈과 네덜란드는 EU 회원국으로서 공동농업정책에 따라 다른 국가들로부터 식량을 안정적으로 공급받고 있기 때문에 한국과는 상황이 다르다. 일본의 경우 일찍부터 남아메리카 등에 해외 식량기지를 조성하는데 노력해 왔기 때문에 한국에 비해서는 식량의 안정적 확보가 나은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대체로 한국이 연간 필요한 식량소비량은 약 2천만톤에 조금 못 미치는데, 이 가운데 약 5백만톤은 국내에서 자급하고 나머지 1천 5백만톤은 외국에서 수입하고 있다. 주요 식량 가운데 쌀은 자급이 가능한 수준이며, 쌀을 제외한 옥수수, 대두(콩), 소맥(밀) 등을 포함한 나머지는 모두 합쳐서 자급률이 5%에도 미치지 못할 정도로 대부분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한국이 수입하는 식량의 약 60∼70% 정도가 곡물메이저를 통해 수입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1980년대 중반까지는 약 50% 수준의 식량자급률을 기록했으나 농산물시장개방이 확대되면서 식량자급률이 지속적으로 떨어져 현재에 이르고 있다.
국내 식량자급률이 약 1/4 정도에 불과할 정도로 한국의 식량자급률은 매우 취약한 기반 위에 놓여 있다. 그런데 2007/08년 세계를 휩쓸고 있는 식량위기 상황에서 식품가격의 물가가 빠르게 상승하고 있다는 정도를 제외하고는 별다른 소요사태나 사재기 등과 같은 극심한 사회적 혼란은 벌어지지 않고 있다. 소맥(밀), 옥수수, 대두(콩)와 이를 원료로 하는 가공식품의 가격이 오르면서 물가가 상승하고, 옥수수와 대두를 사료로 사용하는 축산농가의 수익이 크게 악화되는 타격을 받고 있지만 심각한 식량위기 상황으로 치닫지는 않고 있다.
왜 그럴까? 정답은 쌀에 있다. 우리 식량의 대표 품목인 쌀은 충분한 국내 자급기반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세계적인 가격폭등에도 불구하고 국내 쌀값은 비교적 안정적인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이 때문에 당장의 식량가격 폭등과 같은 상황으로는 이어지지 않고 있다. 적어도 이 정도 수준으로 현재까지 식량위기 상황이 안정적으로 관리되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우리 농민들에게 고마움을 느껴야 한다. 쌀마저도 완전히 개방하려는 것에 맞서 우리 농민들이 쌀이라도 지키기 위해 싸우지 않았다면 지금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을지 쉽게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은 식량위기로부터 안전한 것인가? 최소한 현재 수준 정도의 관리상황을 앞으로도 계속 유지할 수 있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한국은 결코 식량위기로부터 안전한 지대가 아니다. 2004년 미국, 중국 등과 쌀협상을 타결할 때 2014년까지 국내 소비량의 8%에 해당하는 쌀을 의무적으로 수입하기로 약속했으며, 10년의 협상시한이 끝나는 2014년까지는 쌀시장도 사실상 완전개방하기로 하였다. 우리가 최후의 보루로 여기고 있는 쌀의 운명도 그다지 많이 남지 않았다. 게다가 한미FTA가 국회비준을 통과하고 나면 쌀농업이 무너지는 시기가 훨씬 더 앞당겨질 수도 있다.
우리 국민의 절대 주식인 쌀마저 무너지고 나면 한국은 세계적인 식량위기의 충격을 고스란히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지금 세계 곳곳에서 식량부족과 가격폭등으로 인해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 우리 사회에서도 벌어지게 될 것이다. 이 와중에 가장 고통을 받는 것은 절대빈곤층이며, 농민과 서민은 물론 소수의 상위계층을 제외한 국민 대부분이 식량위기의 고통을 겪게 될 것이다.
식량주권, 아직 늦지 않았다
식량위기 대비책은 없는가? 먹을거리 지배자에게 지배당하지 않을 방법은 없는가? 당연히 있다. 비록 때 늦은 감이 없지는 않지만 아직도 기회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식량주권에 대한 국민협약이 있어야 할 것이다. 세계화의 대안을 모색하는 국제적인 진영에서 빠르게 확산되고 있는 식량주권(food sovereignity)이란 과거의 식량안보(food security)에 인권으로서의 식량권(food right)을 새롭게 결합한 개념이다. 전통적인 식량안보 개념이 충분한 식량을 안정적으로 확보하는 양적인 개념에 그치고 있는 반면에 식량주권은 식량의 양과 질을 모두 포괄하는 개념이다. 요약하자면 국민의 안전한 먹을거리를 안정적으로 확보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식량주권에 대한 국민적 합의의 형식으로서 국민협약에는 식량주권을 실현하는데 따르는 생산자 농민의 의무와 권리, 국민을 대신하여 국가가 수행해야 할 의무와 역할을 담을 수 있다.
식량주권을 실현하는데 가장 핵심적인 과제는 식량자급률 목표를 법제화하는 것과 국내 농업을 환경친화적 농업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현행 식량자급률에서 출발하여 중장기적으로 달성해야 할 식량자급률 목표수준을 단계별로 30%, 40%, 50%와 같은 식으로 정하여 법에 명시함으로써 적어도 먹을거리의 국내 자급을 안정적인 수준으로 확보해야 한다. 그러고도 모자라는 부분은 식량수출국과 우호협정을 맺거나 해외에 식량기지를 조성하는 방법으로 조달하고, 그래도 부족한 먹을거리는 국제곡물시장을 통해 조달하면 지금보다는 훨씬 더 먹을거리를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고, 식량위기에 대한 대응력이 높아질 것이다. 식량자급률 목표를 달성하려면 그에 맞게 농지를 보전해야 하는데, 대운하나 골프장과 같은 대규모 개발이나 무분별한 농지전용을 막고 투기목적의 농지매입을 원천적으로 봉쇄할 수 있는 농지공개념 제도를 도입하는 것이 필요하다.
안전한 먹을거리의 공급을 늘리기 위해서는 국내 농업을 화학농업에서 환경친화적 농업으로 전환시켜 나가야 한다. 짧은 기간에 한꺼번에 전환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지만 목표를 정하고 단계별로 바꾸어 나가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환경친화적 농업으로 바꾸어 가려면 그에 맞는 소비가 이루어져야 한다. 지금과 같이 시장기능에 맡겨두면 전체 농산물 가운데 10% 정도의 틈새시장에서만 친환경농업이 이루어질 수 있고 국민들은 상대적으로 높은 가격을 부담해야 한다. 그러나 정부가 공공영역에서 환경친화적 농산물에 대한 소비를 창출하고 일정한 재원을 부담한다면 환경친화적 농업은 틈새시장을 넘어 국민 모두에게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학교급식이나 병원, 군대, 사회복지시설, 공공기관 등에 환경친화적 농산물을 공급하는 것에서 출발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시장기능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안전한 먹을거리의 공급을 사회가 담당하는 소위 사회적 먹을거리 체계를 창출해 낸다면 그만큼 많은 국민들이 안전한 먹을거리를 제공받을 수 있을 것이다. 중장기적으로 환경친화적 농업의 생산성이 화학농업 수준으로 올라가거나 혹은 농지공개념 제도의 도입으로 생산비가 떨어지게 되면 그만큼 정부의 재원 부담이 없어도 싼값에 환경친화적 농산물을 공급할 수 있다.
이렇게 식량주권을 실현하기 위해 식량자급률 목표를 정하고 국내 농업을 환경친화적 농업으로 바꾸어 나가는 과정과 아울러 먹을거리의 안전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수입되는 먹을거리에 대한 검사와 검역은 현행 보다 더 강화되어야 할 것이다. 특히, 유전자조작농산물(GMO)이나 광우병 위험 쇠고기와 같이 안전성이 분명하게 입증되지 않은 먹을거리에 대해서는 ‘사전 예방의 원칙’을 적용하여 수입되는 것을 최대한 차단해야 할 것이다. 혹자는 이 같은 주장에 대해 시장논리에 어긋나기 때문에 시장경제체제에서는 수용하기 어려운 것이라고 주장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 한 가지는 분명히 하자. 시장을 위해 국민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이 먹고 살기 위해서 시장이 필요하다는 점을. 식량위기로부터, 먹을거리 지배자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우리 국민이 안전한 먹을거리를 안정적으로 확보하는데 필요하다면 시장논리에 어긋나더라도 정부가 개입하여 정책과 제도를 시행할 수 있는 것이다. 국제식량시장이든 국내농산물시장이든 시장기능이 우리 국민의 안전한 먹을거리를 안정적으로 확보하는 역할을 할 수 없다면 국민을 대신하여 정부가 그 일을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 아닌가.
마찬가지로 더 이상 WTO 농업협정문을 들먹이지 말자. 먹을거리를 이윤추구의 상품으로 취급하는 WTO가 없어지면 좋겠지만, 먹을거리가 자유무역의 대상에서 제외되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방법은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WTO와 FTA가 판치는 속에서도 자국 농업을 보호하기 위해 애쓰는 미국이나 유럽연합(EU)의 정책과 제도를 보라. 우리가 하고자 하는 의지만 있다면 국민적 합의와 동의를 모아 주어진 한계와 조건 속에서 최선의 방법을 찾는 것이 가능하다.
우리의 먹을거리를, 우리의 밥상을, 우리의 생명줄을, 우리의 운명을 미국과 같은 식량수출국이나 카길과 같은 곡물메이저나 초국적 농식품복합체에 맡길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보호하고 챙기는 날이 오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 이 글은 「누가 우리의 밥상을 지배하는가」(시대의 창) 2008년 개정판에 필자가 ‘식량위기와 먹을거리 지배자’라는 제목으로 쓴 글을 요약 보완한 글입니다.
<출처: [새로운 시선] [2008년 하반기 초점과 전망①] 식량의 무기/투기화와 한국의 '식량주권' - 2008 / 07 / 01 장경호/통일농수산사업단 정책실장, 새사연 운영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