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제님께서 어천 2년전 정미년(1907년)에 "너에게 천지대업을 맡기리라."며 수부로 들여세우신 고수부님은 어천후 만 1년이 넘게 지난 경술년(1910년) 9월에야 현몽으로 상제님이 돌아가셨음을 알게 됩니다.
이듬해 신해년(1911년) 4월 대원사에서 성령혼례식과 49일간 진법수행을 하시고 고부 와룡리 신경수의 집 윗방에서 100일 수행을 마친 직후 상제님 성탄치성 이틑날인 9월 20일 혼절후 도통을 받으시고 신정을 행하시고, 24일에 김형렬 종도에게 맡기셨던 약방의 약장과 궤를 인수해 대흥리로 옮기신후 29일에 교단창립을 선언 하십니다.
상제님께서 임술생인 김형렬의 딸인 김수부님께도 수부공사를 보시고 약장과 궤를 맡기십니다만 상제님의 우려대로 상제님 화천이후로 김형렬 종도가 유가의 틀을 벗지 못하고 김수부님을 개가시키면서 수부사명을 감당치 못하게 됨으로써 김수부의 명을 걷우시고 고수부님께서 약장과 궤를 인수하시어 수부로써 상제님의 대업을 이어 교단 창립을 시작 하시게 됩니다.
고수부님께서 1911년 차경석과 시작한 대흥리 교단이 창립 3년 무렵부터 교세가 갖춰지면서 차경석의 야심이 드러납니다. 이에 친자 종도들이 이탈하고 고수부님도 따로 법소이전을 고려하였으나 여러번 실패를 하시다가 7년째 되는 무오년(1918년)에 조종골로 옮겨오십니다.
약장과 궤를 두고와 새로 약장을 짜시고 교단을 조용히 꾸려가시던 10년째 되는 무진년(1928년) 정삼치성(1월3일)에서 혼절하셔 깨어나신후 "상제님의 영정을 그리라" 하시어 3월 26일에 봉안하게 됩니다. 그 해 5월에 7계잠을 공표하시고 간부조직을 변경하시고 9월에 보천교에 남겨두고 온 약장과 궤의 기운을 빼 쓰는 공사를 보시면서 본격적인 교단 일을 다시 도모를 하십니다.
그 해 무진년 12월 동지에 이상호 이정립 형제가 용화동에서 동화교를 창립하고 이듬해 기사년(1929년) 삼월에 대순전경을 편찬해 7월에 고수부님께 전해지게 되면서 조종골 교단과 동화교와 교류가 시작이 됩니다. 2년여의 교류 이후인 신미년(1931년) 동지에 조종골 교단과 동화교를 합친 통합교단을 조직하면서 고수부님께서 용화동으로 옮겨오십니다.
그러나 용화동 교단과 조종골 교단이 교단운영에 방법이 다를 뿐만 아니라 교단의 유지관리와 경비용도상의 규칙이 차이가 나고, 내부와 외부에 제반사가 상이하여 양 교단에 조직되어 있는 문제점등이 야기되며 도인들의 왕래가 끊어지고 이러한 처지에 때맞추어 돌연히 파란이 야기되어 불손한 언사가 점증해 지면서, 고후비님의 도기(道器)는 날로 묻혀 가니 고민환이 고민하다가, 급기야 다른 방도를 찾을 양으로 용화동을 등지고 고향으로 돌아가 도배친우들을 일일히 심방하여 상의한 결과, 다시금 도국(道局)을 세우기로 결의하고 임시 연락 장소를 옥구군 옥산면 기현리 문영희 집에 정하고 그로부터 도체(道體) 조직을 한 후에 임피 오성산에 도장 기지를 정하고 도장을 오간(五間)접집전퇴로 건축하기 시작한 것이 통합 1년만인 임신(1932)년 가을입니다.
통합 이후 2년만인 계유년(1933년) 동지치성 이후에 이성영에게 영정개사와 저술 도장건축등의 일을 당부하시고 영정을 잘 받들라 하신후 오성산 수양소로 이사를 하십니다. 이사하신지 약 한달만에 영정을 모셔오라 하시고 오성산으로 옮기시고 너희는 영정을 개사해 받들라 당부를 하십니다.
오성산으로 이사하신지 2년만인 을해년(1935년) 고수부님께서는 "잘꾸리고 있으라" 하시며 선화하십니다.
상제님을 보고서는 회개자심 한다하고 나 보고는 허허탄식 한다고 고수부님일 말씀하실 정도로 종도들의 서로 다른 마음과 강한 자아가 고수부님을 낮춰보고 힘들게 했습니다. 모두가 상제님을 따르지만 서로의 생각과 마음들의 차이로 대흥리, 조종골, 용화동의 바람 잘 날 없는 세 살림을 그렇게 고수부님께서는 꾸리다가 가셨습니다.
도통하신 고수부님이 이끄는 교단시절에도 사람들의 서로 다른 마음에야 별 수가 없었읍니다. 각자의 자유의지로 말하고 행동하는 것을 남이 강제할 수는 없는 도의 길입니다. 사람없다 사람없다 탄식하신 고수부님의 말씀이 절절하게 와 닿습니다. 나는 잘 한다 하리라 하지만 모두가 배반되나니 내 안에 싸둔 생명의 씨앗이 매말라 버렸기 때문이라는 상제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텅텅 비워가야 할 마음을 자존심으로 자기 생각으로 꽁꽁 채워가는 마음들에게서 느껴지는 먹먹함이 있습니다. 그만하면 알 만한데도 무슨 일인지 자존심이 앞선 마음과 말을 비추며 자기 생각을 앞세우며 스스로 벽을 치고 차별화하며 높여가려는 모습에 스스로 막히고 맙니다.
고수부님께서는 7계잠에서 자존심을 버려라 경계하셨습니다. 내가 낮아져야 하고 그것을 편안하게 느껴야 합니다. 오래된 젓갈에 뼈가 삭아 뭉게지듯이 자존심이 삭아 뭉게져야 합니다. 맞아도 대항치 못하는 싫은 소리 못하는 사람을 상등사람이라 하신바 있습니다. 나의 뾰족한 자존심의 뼈있는 말 한마디가 상처를 주고 분란을 일으키고 조직을 와해시킵니다. 묵묵히 받아주고 마음을 보태는 사람들이 있기에 단단한 핵심이 유지되어 큰 덩어리가 유지 되는 것입니다.
집의 기둥이 튼튼히 서있어야 자유로운 온갖 장식과 치장의 무게를 지탱하고 유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해와 달과 지구의 변함없고 한결같은 궤도와 한결같은 모습으로 돌아가기에 그 위에서 온갖 생명들이 자유롭게 안정되게 삶을 영위하는 것입니다. 근본이 확고히 서 있어야 말단에서의 온갖 자유로운 표현이 가능한 것입니다. 태을도인들은 그 근본을 세우고 중심을 잡는 화려하지 않은 반석이 되고 기둥이 되는 일입니다.
제 아무리 맹세하고 의지를 다져도 의지로 맹세로 한 마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철저한 공부와 수행을 통한 깨침으로 내 자신의 변화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자신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완성된 모습은 사람은 더 똑부러지고 더 날카롭고 더 똑똑한 사람의 모습이 아니라 결국 받아주고 포용해주고 용서해주고 감싸안는 모습의 사람입니다.
어설프게 알면 알수록 날카로워지고 어설프게 알면 알수록 뾰족해지고 그래서 상처주기 쉬워지고 척을 지고 살을 쌓기 쉬워집니다. 저만 알고 마는 생각이요 공부요 세상에 분란을 더할 뿐입니다. 그래서 완성된 인간의 모습은 상제님의 말슴처럼 대나무처럼 속이 텅텅비워져 가야 하는 것입니다.
상제님의 일은 결국 건방설도의 일입니다. 마음을 닦고 진리를 깨치는 길이지만 그 바탕위에 인사로서 세계통일 국가를 세워 안정을 누리게 하는 일입니다. 핵심조직이 그 마음에 동의하고 그 마음으로 한마음이 되어야 하고 합니다.
인존시대는 인간의 몸으로 인간의 마음으로 그런 한결같은 모습을 통해 세상을 안정시켜가야 합니다. 그 토대위에서 인간과 생명들이 만화방창한 아름다운 삶의 꽃을 피우게 될 것입니다.
첫댓글 선의 외피만 입고 선의 내실을 채워가지 않으면 악으로 기울게 됩니다. 상생의 겉옷만 입고 상생의 실질을 실천해가지 않으면 탐음진치의 유혹에 빠져 상극으로 기울고 맙니다. 죄가 없어도 있는듯이 참회하고 반성하며 자신을 잘살펴 선의 내실을 채워가고 상생의 실질을 실천해가야 절대로 타락하지 않습니다. 증산상제님과 고수부님의 마음과 마음씀을 닮아가야, 선으로 충만한 상생의 길을 통해 천지부모님의 뜻을 올바로 펼 수 있습니다. 증산상제님의 천지공사와 고수부님의 신정공사로 선으로 먹고 사는 상생세상이 열렸습니다.상극시대가 마감되고 상생세상이 열리는 후천개벽기에, 선의 내실화 상생의 실천화가 절실히 필요한 때입니다.
대나무처럼 비워가는 사람.. 제 마음을 돌아보는 좋은 계기가 되었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