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혀를 내두르면서 길을 계속 걷습니다.
2백 미터를 채 걷지 않아 또 다시 놀라운 시설을 발견합니다.
대수로의 오른쪽 둑길이었을 곳을 벗겨내고 비교적 좁은(좁다고 해도 폭이 10미터는 될 것 같습니다) 별개의 수로가 나 있는 것입니다. 수문으로 통제하도록 되어 있는데 수문은 닫혀 있어 흘러들어오거나 나가는 모습은 볼 수 없지만, 대수로의 물과 섞이지 않도록 벽이 쳐진 채로 나란히 함께 내려가고 있습니다. 이 별개의 평행수로는 흐름이 거의 느껴지지 않습니다. 고여 있는 물인지? 어디서 온 물이 이 수로를 타고 어디까지 함께 흐르는지?
별개의 평행수로가 시작되는 지점 건너편에 또 꽤 큰 수문통제탑이 보입니다.
건너가 보았습니다.
네 개의 강철수문이 모여 있어 대수로의 물을 취수하여 세 방향으로 공급하게 되어 있는 장치. 이것은 ‘물길의 4거리’라 할 수 있는 지점의 ‘수문 다발’이라 이름 붙입니다.
아까 보았던 ‘역류하는’ 중수로의 물이 바로 여기서 끌어들인 물이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뿐 아니라, 대수로의 ‘정방향’으로 보내는 중수로도 여기서 시작합니다. 즉, 이 지점에서 시작하는 중수로 중 하나는 다시 대수로의 경사와 같아진다는 뜻입니다.
이 설계와 시공은 일제강점기의 것이었을까요? 아니면 안내표지석에 있듯이 1982년에 한 것일까요? 어느 쪽이든 대단한 아이디어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중수로는 폭만도 5미터 정도로 보여 함부로 건너뛰기는 불가능하고, 수로 위를 가로지르는 좁은 브리지(bridge) 같은 것이 촘촘히 설치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이 가로대는 건너다니는 다리가 아니라 도수구의 시멘트 옹벽이 무너지지 말라고 걸쳐놓은 것입니다. 가끔 불가피한 곳에는 건너갈 수 있는 다소 폭넓은 가로대가 걸쳐져 있는 것까지 세심하게 배려되어 있습니다.
1백여 미터를 더 내려간 곳에 다리가 있어 다리 가운데에 서서 비교해 보았는데, 대수로의 본류와 별개의 평행수로와는 수위(水位)와 유속(流速)에서 차이가 큽니다. 뿐 아니라, 수질도 다른 것 같습니다. 탁하다는 것이지요. 문득 “별개의 평행수로는 하수나 폐수를 흘려보내는 수로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기 시작합니다. 이제 차츰 확인해봐야죠.
대수로는 농업기술원 앞에서 다시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왼쪽(남서쪽)으로 방향을 틀기 시작합니다. 여기서부터 신흥지(新興池)의 둑이 올려다 보입니다. 기술원으로 건너가는 긴 다리는 ‘진흥교’입니다. 「농업진흥청」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겠군요. 다리 위에서 보니 평행수로의 물 아래에는 이미 붉은 펄 같은 것이 쌓이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곧 이어 신흥정수장이 나타납니다. 상수도물을 생산하기 위하여 정화하는 곳. 이 물은 어디서 취하는 걸까요? 신흥지의 물? 대수로의 물? 정수장 정문 앞에 대수로의 물을 끌어들이는 장치가 있는 것을 보면, (또 한 번 내 추측이 작동합니다) 그렇게 끌어들인 대수로의 물을 신흥지로 퍼 올려서 가라앉혔다가 표층의 물만 둑 아래의 정수장으로 떨어뜨려 또 몇 개의 수조를 옮겨가며 정화시키지 않을까…
이제 익산의 시가지 지역에 들어선 것입니다. 번잡함과 함께 편리함도 느껴지지만 맹경뜰 지역을 거쳐 내려온 여행자에게는 다소 생소한 느낌도 듭니다.
정수장의 취수구에서 3백여 미터를 내려간 지점에서 ‘별개의 평행수로’는 시멘트로 덮이기 시작했습니다.
마침 둑길에서 밭을 가꾸고 있던 한 노인을 만나 물어봅니다. 머리에 「논감독」이라 찍힌 모자를 쓰고 있습니다. “이 물은 어디로 갑니까? 만경강으로?”
노인은 잠시 딱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더니 “이 물은 ‘폐물’이여. 바다로 가제.”
(사진 위 : 파란 점퍼 입은 노인이 '폐물'이라고 알려 주었다.)
역시 내 추측이 옳았군요. 하수 또는 폐수였던 것입니다.
의문이 풀린 데다 다리도 아파 마을 뒤 언덕으로 올라갑니다. 아래서 쳐다보았을 때 꽤 멋진 정자가 있는 것 같아서요. 마을 뒤의 이 공원은 모처럼 조성했지만 관리는 별로 잘 되고 있지 않습니다. 찾는 사람도 거의 없고 잡초만 무성합니다. 노거수는 꽤 많이 남아 있는데… 아깝습니다.
잠시 쉰 다음 다시 대수로의 본류로 돌아갑니다.
시멘트로 복개해버린 ‘별개수로’는 이제 더 이상 볼 수 없습니다. 복개한 위로는 잡다한 물건들과 주차해놓은 트럭들로 길이 막혀 걷기가 힘듭니다. 심지어 어떤 자동차공업사는 공장까지 지어놓고 “이리로는 통하는 길이 없소”라며 순진한 여행자를 돌아가라고 강요하기까지 합니다. 이런 것은 무단 점유 아닌가요? 바로 그 앞에는 「상수원 수질관리계획구역」이라는 익산시가 설치한 안내판도 서 있는데.
할 수 없이 수로와 가장 가까이 접근해 있는 차도로 올라서 보니 그곳은 신흥초등학교 앞이었습니다.
수로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복개한 곳 건너편 둑을 걷기로 생각을 바꿉니다.
복개한 도로(?) 위와 옆 일대는 상수원 수질관리계획구역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잡다한 쓰레기와 영세한 업체들의 작업장이 많아 대체로 지저분합니다. 사진 찍기도 민망하여 찍지 않습니다.
농업기술원 언저리에서 부드럽게 휘어져 남하하던 수로가 작은 산을 끼고 다시 서쪽으로 직각으로 꺾이는 곳.
동쪽에서 흘러오는 소하천이 있습니다. 대수로 둑보다 낮은 곳을 흐르는지라 잘 보이고 또한 그럭저럭 보기 좋은 경치를 가지고는 있는데…
이 하천은 대수로와 합쳐지거나 위 아래로 교차하며 흐르거나 하지 않고, 따로 가는 것 같습니다.
내친 김에 또 잠시 따라가 보기로 했습니다.
아마도… 동쪽 들판을 거쳐 내려온 생활하수 또는 농업폐수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물이 그리 맑지 않았으며, 하천 어귀에 ‘환경시설관리주식회사’가 있기 때문입니다. 상류 쪽으로 조금 더 올라가니 난간 없는 작은 다리가 있어 다리 가운데 올라서 봅니다. 이 하천은 여늬 인공수로처럼 시멘트 도수관으로 깔끔히 관리되지 않고, 자연하천처럼 대충 방치되고 있는 느낌. 만약 내 추측대로 하수가 맞다면 이렇게 노출시킨 채 흐르도록 놔두어도 되는가? 라는 생각도 듭니다.
다시 대수로로 되돌아옵니다. 산을 피해 우측(서쪽)으로 꺾여 흐릅니다. 큰 다리 아래를 통과한 다음에는, 수로의 수면이 다리 아래에 바짝 붙을 정도로 수위가 높아져 있네요. 큰 길이 통과하는 큰 다리니까 다리의 두께가 두꺼워서 그렇게 보였을까요? 단순히 내 느낌일까요?
다리 위를 건너 계속 수로를 따라가는데 이번에는 수로의 왼쪽 둑길입니다. 여기서부터는 길이 황토모르타르로 포장되어 있어 일부러 산책로로 조성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둑 왼쪽은 유천생태습지공원. 과거에 만경강이 심한 곡류를 이루며 흘렀다고는 하는데 설마하니 이곳까지 만경강 구역이었을까요? 대수로 공사 때 자연하천을 직류하천으로 만들기도 했으니 그 때 역할을 잃고 갇혀버린 내수면이 아니었을까요?
혼자 여러 상상을 해보며, 습지공원에 들르는 일은 생략하고 가던 길을 계속 걷습니다.
내 취향으로는 황토모르타르 길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 관계로, 다리를 건너 반대편 둑길을 선택합니다. 생태습지공원 구역을 지나면 건너편의 ‘동산동행정복지센터’가 잘 보입니다. 엄청난 위용을 자랑하는 동사무소로군요.
동사무소로 건너다니는 다리가 있고 그 다리 언저리에서 지금까지 함께 따라오던 폐수정화수로의 시멘트 구조물(도수관)은 사라집니다. 어디로 갔을지 궁금해 하는 일은 이제 더 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동사무소 앞 다리를 새로 짓는 공사가 한창입니다. 덕분에 수로의 물이 혼탁해졌습니다.
이 공사가 끝나면 흙탕물은 가라앉겠지만 공사 폐자재나 건설장비의 기름 따위는 어찌 할까요?
그뿐 아닙니다. 이 근처에서 시작하여 대수로 변에 산책로를 조성하는 공사도 막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우남아파트 인근에 훌륭한 메타세쿼이어 가로수길이 있으니 추가로 산책로를 만들어 시민들에게 서비스하고 싶은 행정의 자세는 충분히 이해하지만,
대수로의 원래 목적은 그대로 유지되어야 하지 않을지. 「맹갱뜰에서는 농업용수와 생활용수, 도시지역에서는 상수원」이라는.
산책로 공사 중에 도수관을 깨뜨리거나, 산책로 완공 후에 많은 사람들이 다니며 오염시킬 우려 등을 모두 사전에 검토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우남아파트 주변의 메타세쿼이어 나무들은 수십 년 된 것 같아 보입니다. 뿌리가 성장하면서 시멘트 도수관의 옹벽을 무너뜨렸을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돌로 새로 쌓은 둑이 이 구간에만 있습니다. 그 위에 또 다시 산책로를 위한 기둥을 박으면 이미 옹벽이 없어져 취약해진 것에 더하여 도수관의 둑을 더욱 불안정하게 하는 원인이 되지는 않을까요?
대체로 일본의 축언공법에 나무를 심는 일은 없습니다. 시멘트 포장으로 단단히 굳혀 빗물이나 오염수가 스며들지 않도록 하는 것이 요체인데 왜 나무를 심게 되었는지. 그것도 매우 키가 크게 자라고 뿌리도 강한 메타세쿼이어를.
메타세쿼이어 길 건너편 우남아파트 쪽 둑길을 걸어 내려가는데, 이곳은 또 아파트 주민들의 텃밭으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아무리 금지해도 둑 옆 땅에 농사짓는 행위는 근절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수로 옆 땅은 「수로관리용 통로」로 비워두어야 하기 때문에 농사를 금하는데, 지금까지 맹갱뜰을 지나오면서도 그것만은 제대로 이행되지 않는 것을 너무나 많이 보며 내려왔습니다.
27번국도가 지나는 동산교를 건너 계속하여 수로를 따라 갑니다. 동산교를 통과한 수로의 물은 토사가 쌓이는 등 이미 많이 탁해져 있습니다. 매우 실망스러운 장면입니다. 도심지역이니만큼 수면에 던져지는 이물질이 많아서겠지만, 둑에 나무를 심고 시멘트 옹벽을 경관용 돌로 대체한 것이 결정적인 원인 같아 보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도시형 하천조경의 유행」에 지나지 않습니다. 산책로를 나무데크로 조성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동산교를 통과한 물은 다시 오른쪽으로 굽어 서쪽으로 흐릅니다.
수로의 폭이 15미터 정도로 좁아졌습니다. 대신 깊이를 조금 더했다고 할까요.
그것은 이 일대 ‘작은옛둑마을’과 작은 동산 사이를 통과하는 목이어서 수로 폭을 충분히 확보하기 어려웠기 때문일 것입니다. ‘작은옛둑’이라는 이름은 재미있고도 가슴 아픈 이름입니다.
수로가 꺾이는 곳 즈음에서 다소 멀리 남쪽으로 꽤 높은 둑 위에 걸린 낡은 다리가 보입니다. 호기심을 즉시 충족시키지 못하면 심사가 편하지 못한 성격이니만큼, 수로를 잠시 버려두고 그 다리에 가보기로 합니다.
거기까지 가는 길은 편하지 않습니다. 길이 확실히 나 있지도 않아 다소 질척거리는 밭(?) 사이를 누벼 어렵사리 접근해야 합니다. 둑에 올라서는 방법도 험합니다. 가팔라서 자칫하면 다치기도 하겠더군요.
겨우 올라서보니, 그곳은 옛 전라선이 통과하던 긴 철롯길이었고, 아까 보이던 다리는 용도를 다하고 부서져 가는 채 내버려져 있는 다리였습니다. 이 다리 아래로는 미처 덜 빼낸 옛 만경강의 물이 오르내리는 물길이었겠지요. 열차선로는 이미 다 철거되었고 그냥 높은 둑길로 남아 길게 오른쪽으로 부드러운 곡선을 이루며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미 일부 구간은 산책로로 재생하려는지 편백나무(?)의 가로수가 심어져있고 황토모르타르로 포장하는 공사가 진행 중입니다.
낡은 다리 위에 서서, 1백 년 전 천재지변에 가까운 거대 토목공사 당시의 모습을 상상해 봅니다.
만경강의 곡류(曲流)가 열두 구비를 이루며 깊숙이 휘돌아 흐르던 시절 옛둑마을(그때는 ‘옛둑’이 아니라 ‘유천마을’이었겠지요)은 거기 그냥 있었을 것입니다. 대간선수로 조성공사와 만경강 직강화 공사가 동시에 이루어지며 김제군에 속했던 마을은 만경강 북쪽이 되어 익산군으로 편입. 유천마을은 다시 전라선 철로에 의해 ‘큰 옛둑마을’과 ‘작은 옛둑마을’로 나뉩니다. 만경강 둑을 바깥으로 쌓아 마을 안 전체가 농사지을 땅으로 바뀌었다지만 여전히 물이 나는 진땅은 ‘장화 없이는 못 사는 동네’의 별칭을 얻게 했습니다. 못살겠다는 주민들은 딴 데로 이주했을 테고, 그냥 사는 사람들은 어디로도 가지 못하여 눌러앉았을 뿐인 딱한 사람들.
국가전체의 이익을 위하여 작은 지역사회가 입은 손해는 얼마큼이었을까요? 그것도, ‘내 나라’도 아닌 일제의 이익을 위하여.
1백년이라는 시간은 한 동네의 이름이 완전히 바뀌어 정착하는 시간이기도 한 모양입니다. 유천이던 마을이름이 ‘옛둑’으로 바뀌고 이는 다시 이 지방 발음습관으로 「잇둑·이뜩·이뜩이·이띠기」로까지 변천했습니다. 도로명주소조차 ‘옛둑1길, 옛둑2길…’로 걸려 있습니다.
옛 철로의 다리에서 내려와 대수로로 돌아옵니다.
작은 동산(수로를 좁게 막은)이 궁금하여 또 한 번 수로를 버려두고 동산으로 올라가봅니다.
깜짝 놀랄 구조물이 거기 있습니다. 수로를 건너 동산으로 오르는 다리가, 이 역시 매우 낡았는데, 수평으로 걸린 것이 아니라 경사가 있군요! 수평으로 걸린 다리를 건너 동산 기슭에 닿으면 거기서부터는 계단으로 오르도록 설계하는 것이 보통인데, 이 다리는 애초부터 동산 꼭대기까지 오르막 경사를 이루며 설치되어 있습니다.
동산 위에는 ‘유령의 집’처럼 낡고 허물어져가는, 그러나 원래는 꽤 괜찮았을 기관(?)이나 회사의 건물 같은 것이 남아 있습니다. 「수위실」도 있고 담벼락 바깥쪽으로 게시판 같은 부속시설도 있는, 한 시대 이전 스타일의 건물. 수리시설 같지는 않았습니다. “사유물이므로 함부로 출입하지 말라”는 경고가 붙어 있습니다.
돌아내려오며 내려다 본 동산 기슭에는 사과꽃이 화려하게 떨어져 카페트처럼 쌓여 있습니다. 이런 아름다운 동산이 또 있을까요?
이 건물이 쓰이지 않게 되면서 다리도 다리의 역할을 잃고 온갖 물건들이 쌓여 있음은 안타깝습니다. 생각해보니, 이 다리가 경사지게 된 것은 자동차로 그 건물까지 바로 올라갈 수 있도록 한 설계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아이디어가 기막히지 않습니까? (해몽이 더 기막힌가요? ^^)
다리 아래 동네 공터에는 커다란 정자나무가 있고 동산마을경로당도 있습니다. 마지막 수문일 것 같은 수문에도 ‘銅山制水門(동산제수문)’이라 썼습니다. 이 작은 동산(東山)
을 말하는 것은 아니고, 아까 오산리 모정에 걸린 ‘팔경’의 銅山이겠지요.
수로 가에는 희고 붉은 색의 깃발을 세운 무속인의 집이 있어 역시 예전에 포구를 드나들던 배들이 안녕을 기원한 흔적이랄 수 있네요.
‘작은옛둑마을’을 빠져나와 수로를 따라 다시 걷습니다.
동춘교를 건너면 아직은 멀쩡하고 튼실한 옛 전라선 철길 둑의 다리가 보이고, 왼쪽으로 또 한 갈래의 길이 보입니다. 수로는 철롯길 다리 아래를 통과하지만, 우선 다른 갈래 길로 잠깐 접어들어 봅니다.
역시, 과연, 그곳은 철길 아래를 지나 만경강 옛둑으로 나가는 길입니다. 철길을 받치던 다리는 이미 철거되었고 교각만 남은 것을 어느 시민단체가 벽화로 장식해놓았습니다. 이곳에서 둑길을 올려다보아도 옛 철로길 가에 심은 가로수길이 길게 길게 잘 보입니다.
‘철도ㅅ길→철두ㅅ길→ 철둑(뚝)길’로 조금씩 와전된 발음습관과 함께, 어차피 철로는 사다리꼴로 높이 쌓아 지반을 견고히 한 위에 깔아야 했으므로 강둑과 별반 다를 바 없는 둑이기에, 이래저래 옛둑이라 부르게 된 것은 아닐까, 그런 쓸데적은 생각도 했습니다.
다시 수로로 돌아옵니다. 옛 철교 아래를 통과하는 물.
철교 아래 공간은 서민들의 비밀 아지트입니다. 쓰지 않게 된 둑길(철뚝길) 위 흙땅에서 농사짓는 사람들의 농기구 창고이기도 하고, 놀이터이기도 하고, 낚시터이기도 하고… 엄밀하게는 불법점유이지만, 강을 막아버리기 전에는 포구로 활기 넘쳤던 유천마을 사람들의 울분이 이렇게라도 표현되어야 했던 것은 아닐까 합니다.
철롯길 건너편에는 세경아파트가 철롯길과 나란히 긴 건물을 세우고 있습니다.
오늘은 여기서 여정을 마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