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황의 악순환 시작되는 생산연령인구 감소 임박
잠재성장률 급속 하락 10년내 '인구 재앙' 우려
우리가 사력을 다해 벤치마킹했던 '세계 최강 일본경제'가 20년째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 구미(歐美)나 일본의 전문가들은 이를 '저출산, 고령화의 재앙(災殃)'으로 진단하고, "한국도 일본의 닮은꼴로 가는 조짐이 뚜렷하다"고 지적한다. 조선일보는 이 같은 경고에 주목, LG경제연구원과 함께 '잃어버린 20년, 일본에서 배운다' 시리즈를 통해 한국의 활로를 모색한다. 일본과 한국의 저출산, 청년실업, 정부부채, 부동산, 대외 개방의 문제를 5차례에 나눠 점검하는 것이다. 한·미·일 각국의 전문가를 통해 한국이 지속 성장을 하기 위한 전략도 제시한다.
"일본보다 고령화가 빠르게 진행되는데, 한국 사람들은 아직 그 무서움을 모르고 있다."
5년간의 서울근무경험이 있는 다카다 히데오(51)씨는 인구구조 변화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해 장기침체에 빠진 일본의 경험을 한국이 판박이처럼 답습하고 있다고 우려했다. 그는 1991년 도쿄의 아파트를 5400만엔에 구입했다. "전년에 비해 집값이 10% 정도 떨어졌으니 집을 살 수 있는 마지막 찬스다." 집값이 다시 뜀박질할 것이라는 불안감으로 빚을 내 집을 샀다. 하지만 집값은 5년 만에 2500만엔으로 반 토막 났다. 샐러리맨이 중심인 생산연령인구(15∼64세)가 95년 8726만명을 정점으로 감소하면서 일본경제의 기반이 무너지기 시작해 주택가격도 직격탄을 맞은 것이다.
인구보너스(Demographic Bo nus·생산연령인구 증가) 시대에서 인구오너스(Demographic Onus·생산연령인구 감소) 시대로의 전환 충격이 일본을 불황으로 밀어 넣었다. 생산연령인구 비중 감소로 소비와 생산이 동시에 위축되면서 산업 전반의 수요 감소를 촉발시켰다. 인구성장 덕분에 늘기만 하던 기업매출이 급감, 일자리가 줄고 다시 소비를 위축시키는 '소비-생산 위축의 악순환'에 빠진 것. 다이이치생명연구소 구마노 히데오(熊野英生) 이코노미스트는 "고령화가 장기침체를 촉발시켰지만 당시 정부는 그 의미를 모르고 방치했다"고 말했다.
한국도 일본의 90년대처럼 성큼성큼 인구재앙이 다가오고 있다. 출산율(1.15명)은 일본(1.37명)보다 낮다. 일본은 생산연령인구 감소(1996년)에서 총인구 감소(2008년)까지 10년 넘게 걸렸다. 하지만 각종 수치는 한국이 생산연령인구 감소(2017년)와 총인구 감소(2019년)라는 '이중의 인구재앙'을 거의 비슷한 시기에 겪게 될 것임을 말해주고 있다. 후카가와 유키코(深川由起子) 와세다대 교수는 "한국이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면 부동산 버블붕괴, 재정악화, 청년실업 심화 등의 재앙을 피하지 못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를 증명하듯 한국도 잠재 성장률이 급격히 떨어지고 있으며 청년실업의 증가, 노인증가 등 '일본식 저성장' 조짐이 사회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조선일보와 LG경제연구원이 추산한 결과, 일본식 인구 고령화를 막지 못하면 4.1%인 잠재성장률이 2020년엔 1.9%, 2030년엔 -0.3%까지 떨어질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인의 마지막 10년 (1) 오래 사는 대신 오래 앓는다
한국인의 마지막 10년 (1) 오래 사는 대신 오래 앓는다10년 새 壽命(수명) 3년 더 늘었지만… 그중에 2년은 질병 안고 사는 기간 |
[고려대 연구팀, 全국민 진료기록 빅데이터 분석]
사망 주원인 9가지 질병 중 결핵 제외한 모든 질병이 환자는 늘고 사망자는 줄어
뇌혈관 질환 환자 크게 증가, 심장병 환자도 많이 늘어… 조기 발견·치료 영향인 듯
개개인의 의료 기록을 하나하나 들여다봐도 누가, 언제, 어떤 병에, 왜 걸렸는지 딱 잘라서 말할 수 없다. 변수(變數)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천만명의 의료 기록을 끈질기게 분석하면 질병별·지역별·세대별로 독특한 패턴이 드러난다. 고려대 박유성·김기환 교수팀이 국내 최초로 2002~2010년 건강보험 전 국민 진료 기록을 분석해보니, 한국인은 같은 노인이라도 의료 인프라, 경제적 수준, 생활문화에 따라 지역별로 생로병사(生老病死) 패턴이 크게 달라지는 것은 물론이고 전체적인 질병 패턴도 빠르게 변해가고 있었다.
한국인의 목숨을 주로 빼앗는 9가지 질병은 ①결핵 ②암 ③당뇨병 ④고혈압성 질환 ⑤심장 질환 ⑥뇌혈관 질환 ⑦폐렴 ⑧만성 하기도 질환(호흡기병) ⑨간 질환이다.
고려대 연구팀이 빅데이터를 연령별로 쪼개서 들여다보니, 전 국민이 끙끙 앓으면서 오래 살게 된 현실이 실감 나게 드러났다. 암·당뇨, 심장·뇌혈관 질환 등에서 '환자는 늘고 사망자는 줄어드는 현상'이 반복적으로 나타났다.
현재 남녀 공히 사망 원인 1위는 암(癌)이다. 맨 처음 조사를 시작할 때(2002년)와 비교하면, 60세를 기점으로 환자 수가 급속히 치솟다가 70대 후반에 정점에 이른다. 반면 사망률은 과거 노인들보다 낮아졌다.
나이 들수록 암으로 죽는 사람이 늘어나는 패턴 자체는 변화가 없었다. 현재 평생에 걸쳐 남자 약 3명 중 한 명이, 여자는 4명 중 한 명이 암으로 사망하고 있다. 요컨대 고령화로 암 발생자는 계속해서 늘어나지만 의학 발달 등의 이유로 사망자는 줄어들었다. 결국 노년기에 암 생존자 또는 암 투병자로 살아갈 확률이 높다는 의미다.
암 이외 다른 질병 가운데 남자는 상대적으로 간 질환 사망률이 높고, 여자는 심·뇌혈관 질환 사망률이 높다.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뇌경색이나 뇌출혈 등 뇌혈관 질환에서 나타났다. 과거보다 노년기 환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그래픽 참조〉. 처음 발병하는 나이도 앞당겨져서 50세부터 환자가 확연히 늘었다. 하지만 이 역시 사망자는 도리어 예전보다 줄었다. 치료 기술의 발달과 조기 약물 투여의 효과로 보인다. 그만큼 뇌혈관 질환 후유증을 안고 말년을 살아가는 한국인이 부쩍 늘고 있다는 의미다.
심장병도 유사한 형태다. 환자는 늘고, 사망률은 그대로다. 노년에 심장병 치료로 활동 반경이 줄어든 환자가 많아졌다는 뜻이다.
당뇨병 환자는 30대 후반부터 가파르게 치고 올라가고 있다. 조기 발병 추세가 확연하다. 70대가 되면 3명 중 한 명이 당뇨병 환자로 나온다. 조사 시작 시점에는 같은 연령대 한국인 10명 중 1명만 당뇨병 환자였다. 이 병도 사망률은 과거보다 감소했다. 이 추세라면 인생 후반 40년을 당뇨병과 살아가는 사람이 주변에 부지기수로 보인다.
간 질환은 발생자 변화가 없으나 사망률은 확 줄었다. 간염 백신 보급으로 젊은 층에서 환자가 줄고, 간염 바이러스 치료제의 확산으로 사망자는 줄어든 결과다. 간 질환이 40~50대에 많은 것은 여전하다.
고혈압은 30세부터 조기 발생하고 있다. 60대 후반에는 절반이 고혈압이다. 비만 인구가 늘었고, 외식(外食)의 증가로 짜게 먹는 계층이 많아진 탓이다. 폐렴 발생과 사망은 노년으로 갈수록 꾸준히 늘고 있다.
생각보다 오래 살게 됐다는 건 모두 알고 있었지만, 그만큼 오래 앓게 됐다는 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윤영호 서울대 의대 교수는 "수명에 관한 한 한국인은 체력도 없는데 멋모르고 높은 산에 올라가서 멋진 돌을 욕심껏 배낭에 쟁여 넣었다가, 뒤늦게 다리가 후들거려 더 올라가지도 내려가지도 못하는 형국"이라고 비유했다.
현대 의학의 발전이 기정사실이라면, 그것이 개인과 국가에 다 같이 재앙이 아닌 축복이 되도록 만들어야 한다. 고려대 연구팀은 "건강이 받쳐주지 않는 수명 연장이 얼마나 위험한지 이번 빅데이터 분석을 통해 분명해졌다"면서 "빠른 속도로 노인이 늘고 있는 대한민국이 고령화의 파도를 어떻게 넘을지 국가 차원의 큰 그림과 개인 차원의 작은 그림을 둘 다 서둘러 그려야 한다"고 했다.
1952 남성 2,556 |
(1,000 명중 10명 꼴) |
434명이 고혈압성 질환 ,
209명이 당뇨병 ,
186명이 만성 하기도 질환 등을 앓고 있습니다.
5년 전 '좋은 죽음(Good Death)' 개념 만든 영국,
마지막 10년 삶의 質 세계 1위
[생애 말기에 대한 인식 바꾸기에 성공한 영국 사회]
-영국이 제시한 '좋은 죽음'
익숙한 환경에서, 가족과 함께 존엄 유지하며, 고통 없이… 생애 말기 치료프로그램 가동
호스피스 예산 66%가 기부… 왕실·정부·민간단체 함께 '편안한 죽음'에 대한 준비 호소
매기 센터는 최근 죽음에 대한 새로운 접근법으로 영국 내에서 주목받는 비영리 암 힐링 센터이다. 영국 내 14개 센터가 있다. 치료 기관이 아니라 암 환자와 가족들이 무료로 와서 쉬는 '커뮤니티 센터'다. 그런데 연간 10만명 이상이 찾는다. 2008년부터 찰스 왕세자의 부인 커밀라 콘월 공작부인이 회장을 맡을 정도로 이들의 '함께하는 죽음'은 화제다.
◇함께 나누는 마지막 삶
'죽음의 질'을 따질 때 가장 중요한 요소가 '얼마나 아프지 않고, 편안하게 세상을 떠나느냐'다. 죽음을 앞둔 이들을 돌보는 호스피스는 '편안한 죽음'을 맞기 위해 꼭 필요한 시설이다. 영국은 인구 6300만명에 호스피스 병상이 3175개다. 한국은 인구가 5000만명인데 호스피스 병상은 880개뿐이다. 2010년 영국 이코노미스트연구소(EIU)가 전 세계 40개국을 대상으로 실시한 '죽음의 질 지수(Quality of Death Index)' 조사에서 영국이 1등, 우리가 32등에 머문 것도 이 때문이다.
- 영국 런던 해머스미스 지역에 있는 매기 센터 런던. 가정집처럼 꾸며진 센터에서 암 환자들이 식탁에 앉아 차를 마시며 평화롭게 얘기하고 있다.‘ 함께하는 죽음’으로 주목받는 이 센터가 내세운 슬로건은‘마지막 순간까지 삶의 기쁨을 즐기자’다. /게티이미지 멀티비츠
영국 특유의 '나눔' '기부' 전통도 영국인의 마지막 삶을 안온하게 만드는 동력이 되고 있다. 지난 8월 30일 'BBC 라디오 4'의 인기 프로그램 '여성시간(Woman's Hour)'에 피오나 헨드리라는 청취자가 출연했다. "암 투병으로 삶을 제대로 정리하지 못하고 떠난 남편을 지켜보며 '죽음 준비'의 필요성을 뼈저리게 느꼈다"는 그녀는 '죽음 준비' 전도사를 자청했다. 슬퍼하는 대신 그는 방송에서 "미리 생애 말기를 준비할 수 있는 '장례식 박람회'"를 제안했다.
영국 '호스피스돕기연합(Help the Hospices)'에 따르면 133개(2008년 현재)에 이르는 영국 내 민간 호스피스의 연간 예산은 5억파운드(약 8500억원). 이 중 정부 지원은 34%이고 나머지는 개인이나 단체의 기부로 운영된다. 그만큼 죽음을 위한 기부도 일반화돼 있다.
◇'죽음' 알리는 사회
처음부터 영국이 죽음에 호의적인 나라는 아니었다. '신사의 나라'인 만큼 죽음 얘기를 꺼리는 문화가 있었다. 사회 분위기를 바꾼 건 정부였다. 2008년 영국 정부는 고령화는 심각해지는데 죽음에 대한 사회적 준비가 부족함을 직시하고 전문가 집단을 구성해 보고서를 만들었다. '생애 말기 치료 전략(The End of Life Care Strategy)' 보고서였다.
비영리단체들도 동참했다. 2009년 출범한 민관합동기구 '다잉 매터스(Dying Matters: 중요한 죽음)'는 영국 보건부와 전국완화치료위원회(National Council for Palliative Care·NCPC)가 "죽음을 금기시하는 문화를 바꾸자"는 취지로 2009년 만든 단체다. 해마다 5월이면 '죽음 알림 주간(Dying Matters Awareness Week)' 행사를 연다. 이브 리처드슨 '다잉 매터스' 대표는 "거리낌 없이 생의 마지막을 얘기하고 직시하는 사회에서 '잘 살고 잘 죽기'가 가능하다"고 말했다. '죽음의 질' 1위라는 명성은 '의료 인프라(practice)' '정책(policy)' '사회 인식(public)' 삼박자 위에 얻어진 것이다.
- 1920~39년생에게 하는 조언 "자식에게 재산 미리 물려주지 말라" 김수혜 기자·특별취재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