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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게시판 스크랩 善德女王의 진짜 일생
조홍근 추천 0 조회 13 09.11.18 16:3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TV 드라마가 아닌 善德女王의 진짜 일생

끝없는 전쟁의 시대에 나라를 맡았던 悲劇의 주인공

 

 

“혼자이기 때문에 외로운 것은 아니다.
정상에서 홀로 모든 것을 결정해야 하기 때문에 외로운 것이다”

⊙ 救國의 영웅인 아버지 진평왕의 後光으로 왕위 계승
⊙ 끝이 보이지 않는 전쟁의 시대를 상속받은 女王
⊙ 백제에 합천 대야성 빼앗긴 후 진골 귀족에게 축출당해

 

 

 

한국 역사상 최초의 女王(여왕)으로 비극적인 삶을 살았던 善德女王(선덕여왕)은 비밀스런 매력을 주는 인물이다. 기록의 부족 때문에 삶이 어둠 속에 남아 있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곳에 남게 될 것이다. 
 비밀은 창조력을 가진다. 알 수 없는 사람은 언제나 새롭게 해석되고 문학작품으로 거듭 만들어지며 드라마로도 제작된다. 
  
요즘 〈드라마 선덕여왕〉이 선풍을 일으키고 있다. 그녀는 많은 사람을 일찍 귀가시켜 TV 앞에 앉게 한다. 〈드라마 선덕여왕〉은 꾸준히 추리를 하면서 성장하는 ‘성장드라마’다. 
  
하지만 이 드라마는 추리과정이 디테일하고 치밀한 것과 거리가 멀고, 紀年(기년)의 알리바이도 제대로 맞는 것이 없다. “뭐! 이런 황당한 史劇(사극)이 있나?”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하지만 시청률이 매우 높다. 드라마 작가는 허구를 증폭시키고 있지만, 바로 이 허구에 바탕을 둔 ‘잘못된 설정’이 퍼도 퍼도 끊임없이 솟아나는 ‘재미의 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역사학을 공부한 필자는 이 드라마에 전혀 흥미를 느낄 수 없다. 역사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이름만 빌렸지 내용은 완전한 허구이기 때문이다. 
  
단적인 예로 드라마에서 선덕여왕의 맞수로 나오는 ‘美室(미실)’의 경우를 보자. <화랑세기> 필사본을 통해 추론하면 미실과 선덕여왕의 나이 차이는 40년을 훨씬 뛰어넘는다. 미실은 선덕여왕 당대에 살아 있거나 활동했을 인물이 아니다. 그런데 <화랑세기>는 박창화씨 개인의 창작물이다(박창화는 일본 강점기 일본 궁내성 황실 도서관에 근무했으며, 그 자신이 생전에 <화랑세기> 원서를 필사했다고 주장한 적이 없다. 몇 년 전 박창화 유고집에서 또 다른 화랑세기 습작소설이 발견됐다- 편집자 주). 그러니까 드라마는 현재 僞書(위서)가 되어 버린 <화랑세기>조차 왜곡하고 있는 것이다.
 

드라마 <선덕여왕> 속에 등장하는 비담·선덕여왕·김유신(왼쪽부터). 실제 역사에서 선덕여왕은 비담의 반란 와중에 죽고, 김유신은 이를 계기로 권력을 장악한다.


나아가 드라마는 <삼국사기> <삼국유사>의 기록도 왜곡하고 있다. 드라마 속에서 眞興王(진흥왕)의 두 번째 아들 眞智王(진지왕)은 미실과 通情(통정)하고 왕위를 받은 것으로 나온다. 이는 사실과 다르다. 진지왕은 형인 銅輪(동륜)태자가 일찍 죽어 왕위를 이어받았고(삼국사기), 그가 사랑한 여인은 桃花女(도화녀)였다(삼국유사). 
  
이 드라마는 역사를 알게 하는 사극으로서의 가치가 없다. 하지만 시선은 언제나 밝은 곳을 향하는 법이다. 드라마를 통해 선덕여왕은 널리 알려졌고, 덩달아 선덕여왕의 참모습에 대해서도 일반인의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이제 필자는 史料(사료)에 기록된 그녀와 그녀가 살았던 당 시대의 모습을 그려보고자 한다. 선덕여왕의 일생을 시간을 따라가면서 말이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그녀가 어떤 시공간 속에서 살았고, 무엇을 생각했는지 대략 알게 될 것이다. 
  
여기서 인정해야 할 한계가 있다. 사료를 아무리 심층적으로 분석하고 파악한다 해도 선덕여왕의 삶의 진실은 많은 부분 밝힐 수 없다. 오직 최고의 개연성에 도달할 수 있을 뿐이다. 歷史家(역사가)의 해석이란 결코 완전한 객관에 도달할 수 없으며, 최고의 지식과 양심을 걸고 객관적이라고 느끼는 것조차 여전히 주관적이다.
 
 
  진평왕의 딸
 

선덕여왕 德曼(덕만)은 신라의 왕성 반월성에서 태어났다. 580년 말에서 590년대 초반 사이가 아닌가 한다. 
   “어째서 아들이 아니란 말인가.” 
아버지 眞平王(진평왕)은 못내 아쉬워했다. 당시에도 딸이 왕위에 오른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진평왕은 당시 사람으로는 덩치가 장대했다. 하지만 성숙한 남자였고, 참고 기다리는 비법을 터득하고 있었다. 
  
유년시절의 불행이 그를 신중한 사람으로 만들었다. 왕위가 약속된 진평왕의 아버지 동륜태자가 일찍 세상을 떴다(572년). 그는 아버지를 잃고 모든 것을 잃었다. 왕위는 새로 태자가 된 삼촌 금륜에게 돌아갈 것이고, 그의 미래도 불투명해졌다. 
  
그가 왕세자의 아들일 때 모든 사람은 경이롭게 바라보았다. 하지만 한순간 모든 것이 바뀌었고, 사람들의 관심도 떠나갔다. 남편을 잃고 슬픔에 빠진 어머니 萬呼(만호) 부인을 바라봐야 했을 뿐이다. 
  
할아버지 진흥왕이 살아 있을 때는 그래도 나았다. 삼촌 금륜이 진지왕으로 즉위한(576년) 후 매사에 눈치를 봐야 할 처지로 전락했다. 
  
삼촌은 色(색)을 밝히는 방탕아였다. 도화녀라는 유부녀를 좋아했고, 왕과 그녀의 염문이 온 왕경에 다 퍼졌다. 삼촌은 밤마다 광대들을 데리고 놀았고, 儀禮(의례)를 거르는 일도 잦았다. 진평왕은 여기서 배운 것이 많았다. 

  “저렇게 하면 안되지….”
진지왕의 방탕이 극에 이르자 柰勿王(내물왕) 후손들로 구성된 종친회의(화백)가 소집됐다. 화백의 회장은 한강유역을 차지하고 가야를 병합하는 데 절대적으로 기여했던 영웅 거칠부였다. 그는 진흥왕의 조부인 智證王(지증왕)의 직계비속은 아니었지만, 내물왕家(가)에서 유력한 위치에 있었다. 
  
종친, 즉 眞骨(진골) 귀족들은 백성이 왕의 행실을 비난하고 있으며, 그것은 왕실의 수치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왕실이 권위를 잃으면 통치가 불가능합니다. 지금 진지왕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지 않으면 우리 내물왕계 왕실 가문의 권위 상실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진지왕의 폐위가 결정됐다. 삼촌이 폐위되는 모습을 본 진평왕은 자신에게 기회가 왔다고 내심 기뻐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남의 일이 아니었다. 자신도 언제든 진골 귀족들에 의해 왕좌에서 끌어내려질 수 있다.
 
 
  권력은 상속받는 것이 아니라 쟁취하는 것
 
  진골 귀족들의 손에 떠밀려 왕위에 올랐던 진평왕은 지속적으로 그들의 심사를 살펴야 했고, 무엇보다 내물왕계 각 가문의 首長(수장)들에게 禮(예)를 차려야 했다. 권력이란 상속받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자신을 낮춤으로써 쟁취하는 것임을 그는 삶에서 배웠다.
 
  그는 의례에 충실했다. 왕은 신라국가와 내물왕계 왕실의 제사장이다. 그것을 잘 수행하지 못하면 문제가 된다. 하지만 진평왕은 責(책)을 잡히지 않기 위해 그렇게 한 것만은 아니었다. 의례의 기본은 서열이다. 왕 앞에 서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높고 낮은 서열이 있다. 그것은 진평왕이 스스로 왕실 구성원의 우두머리라 자청하는 것과는 달랐다.
 
  신라에 사는 모든 사람이 그가 하늘의 위임을 받은 대리인이라는 믿음을 가지지 않는다면 국왕은 그 지위를 유지할 수 없다. 믿음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국왕과 중신들이 주역이 되는 의례를 정기적으로 집행하되 그것을 미학적으로 채색할 필요가 있었다. 의례의 집행은 국왕의 지배권을 재확인하는 것이었다.
 
  신장 11척의 거구인 진평왕은 의례를 박력 있게 잘 집행했다. 郊祀(교사: 제왕이 천지에 제사하는 제단)와 宗廟(종묘)에 제사 지낼 때 진평왕이 허리에 두르던 옥대를 사람들은 하늘에서 받은 것이라 생각할 정도였다(삼국유사). 진정으로 믿음을 주는 의례 거행자의 모습을 선덕여왕도 보고 배웠던 것 같다.
 
  덕만이 태어날 당시 中原(중원)의 강자 隋(수) 나라가 남조의 陳(진)을 멸하고 통일을 달성했다(589년). 이는 수나라가 북방의 강력한 유목제국 突厥(돌궐)을 격파한 결과물이었다. 수의 중국통일은 後漢末(후한말) 이후 근 400년간의 분열을 종식한 것이었다. 중국 대륙의 분열 상태는 당시 사람들에게 익숙한 것이었고 중국의 통일 상태가 오히려 비정상적인 것이었다.
 
  수나라의 통일로 가장 충격을 받았던 나라는 고구려였다. 고구려의 성장과 전성기 구가는 漢帝國(한제국)의 몰락과 중원의 분열이 가져다준 선물이었다. 고구려는 북중국이 강력한 북위에 의해 통일됐을 때도 북방초원의 유목제국 柔然(유연)과 손잡고 남조 劉宋(유송)과 연결하여 사안을 해결할 수 있었다(5세기). 하지만 중원이 통일되자 이제 고구려는 중국에 손을 쓰기 어려운 처지가 됐다.
 
  진평왕도 통일제국 수와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를 놓고 고민했다. 이미 594년에 수나라 文帝(문제)가 신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진평왕을 낙랑군공 신라왕으로 책봉했다. 이 시기부터 수는 고구려 공략을 위해 신라를 적극 이용하려고 했다.
 
  수나라의 의도를 간파한 고구려는 倭(왜)에 접근했다. 595년 ?陽王(영양왕)은 승려 혜자를 왜에 파견했다. 혜자는 595년부터 615년까지 20년간 왜에 체재하면서 실권자인 성덕태자의 스승으로 있었다. 네 차례에 걸친 수의 고구려 침략, 혜자의 일본 방문과 고구려 환국 모두 영양왕 시대의 일이었다. 이 시기에 고구려는 왜에 승려와 기술자를 보내는 등 경제적·문화적 원조를 아끼지 않았다(일본서기).
 
 
  일촉즉발의 東北亞 정세
 
  혜자가 성덕태자의 스승이 된 이듬해인 596년(스이코 여왕 4년)에 왜는 2만5000명의 군대를 규슈(九州)에 주둔시켰다(일본서기). 이는 고구려가 수의 침공에 대비하여 전부터 사이가 나쁜 신라군을 남쪽 해안에 묶어 두려는 의도였다. 600년에는 왜군이 신라를 공격했다. 그 이듬해 왜에서는 다시 신라를 공격하는 건에 대한 논의가 시작됐고, 602년에는 신라공격 계획이 중단됐다(일본서기).
 
  하지만 그해 백제가 신라를 공격해 왔다(602년). 10대의 예민한 나이였던 덕만은 백제가 남원에서 지리산을 넘어가는 길목인 現(현) 남원시 운봉면의 아막성을 공격했고, 貴山(귀산) 장군이 여기서 자신의 아버지 武殷(무은)을 구하고 장렬히 전사했다고 들었으리라. 충과 효를 모두 이루었으니 전 신라에 귀감이 될 사건이었다. 아버지 진평왕은 귀산에게 奈麻(나마)의 관등을, 함께 싸우다 전사한 추항에게 大舍(대사)의 관등을 추증했다(삼국사기).
 
  백제의 아막성 공격은 40년 후 지리산을 넘어 그 ‘운명’의 대야성(합천)을 차지하기 위한 첫 단추였다. 신라는 지리산 부근의 방어를 강화해야 했다. 하지만 고구려가 이를 허용하지 않았다. 이듬해인 603년에 고구려가 신라의 서북방 중요 군사거점인 북한산성을 공격했다. 성은 고구려군에게 포위됐고 함락은 시간문제였다.
 
  진평왕은 북한산성을 직접 구원하기로 결심했다. 아버지가 위험한 전쟁터로 가는데 딸의 인사가 없을 수 없다. 덕만은 전쟁터로 출발하는 아버지를 배웅하면서 전쟁은 소중한 이를 잃을 수도 있는 무서운 것임을 깨달았으리라.
 
  행군에 20일 정도 시간이 걸렸지만, 북한산성은 잘 버티고 있었다. 진평왕이 직접 구원하러 왔다는 사실을 안 북한산성의 병사들은 사기가 올라갔다. 성 안에서 신라 병사들이 북을 치고 소리를 질렀다. 신라군이 성문을 열고 나올 기세였다. 그렇게 되면 고구려군은 북한산성의 신라군과 신라왕의 구원군으로부터 협격을 받을 것이다. 고구려 장군 高勝(고승)은 철군 명령을 내렸다(삼국사기). 진평왕은 왕으로서 할 일을 했다.
 
 
  삼촌과의 근친 결혼
 

선덕여왕이 세운 천문관측시설로 알려진 첨성대.


  신라의 영토팽창은 진평왕의 祖父(조부)였던 진흥왕대에 정력적으로 추진되어 560년대에는 그때까지의 신라 역사상 최대의 판도를 누리게 됐다. 진평왕은 조부로부터 방대한 영토도 물려받았지만 고난에 찬 전쟁도 물려받았다. 신라는 진평왕대에 와서 失地(실지) 회복을 꿈꾸는 고구려·백제 양국으로부터 끊임없는 공격을 받았다.
 
  덕만은 신라에 대한 일본·백제·고구려의 협공이 동시에 시작되던 시기에 10대 초·중반을 보냈다. 그녀는 이때 결혼을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신랑은 飮葛文王(음갈문왕)이었다(삼국유사). 갈문왕이란 칭호는 왕이 되지 못한 왕의 형제에게 수여하는 것이었다(이기백 교수).
 
  덕만에게는 삼촌이 둘 있었는데 國飯(국반)과 伯飯(백반)이었다. 음갈문왕의 ‘飮(음)’은 飯(반)과 비슷한 글자이다. 그렇다면 덕만은 15세 이상 나이가 많은 두 분의 삼촌 가운데 한 사람과 결혼했을 가능성이 높다. 국반은 사촌인 진덕여왕(647~654)의 아버지다. 그렇다면 백반이 덕만의 배필이었다(주보돈 교수).
 
  어린 나이에 결혼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아버지와 나이 차이가 크지 않은 삼촌이 신부가 나이가 들 때까지 마냥 기다릴 수는 없기 때문이다. 여자에게 결혼의식이란 친정아버지가 모시던 조상신과 결별하고 남편이 모시는 조상신과 결합하는 것이다. 삼촌과 근친혼을 한 덕만의 경우 자신의 친정 조상신과 결별할 필요가 없었고, 지참금을 가지고 갈 필요도 없었다. 왕궁에 있는 아버지의 거처에서 삼촌의 거처로 옮겨갔을 뿐이었다.
 
  삼촌과의 결혼은 당시 신라왕실에서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덕만의 증조부였던 진흥왕은 법흥왕의 동생 입종갈문왕과 법흥왕의 딸 智炤(지소) 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었다. 조부였던 동륜 태자는 고모 만호 부인과 결혼하여 진평왕을 낳았다. 진평왕도 아버지 동륜 태자의 동생으로 보이는 복승갈문왕의 딸 마야부인과 결혼하여 덕만을 출산했다. 거듭된 근친혼은 열성인자의 누적을 의미했다.
 
  진평왕도 아들을 낳았을 수도 있지만 요람에서 죽었을 가능성이 크고, 덕만도 백반갈문왕과의 사이에 자녀를 두었지만 근친혼의 열성인자가 누적되어 떨어진 과실이 됐을 수도 있다. 그녀의 남편도 일찍 사망했다(김기흥 교수). 만일 남편이 살아 있었다면 진평왕을 이어 즉위했을 것이다. 진평왕의 동생인 그는 여자인 덕만보다 왕위계승 순위가 높았기 때문이다. 덕만이 즉위할 당시 聖骨(성골) 남자가 없었던 것은 지속적인 근친혼의 결과였다.
 
 
  왕실의 허약체질은 근친혼의 결과
 
  최근 근친혼의 대명사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에 대한 의학적 연구가 나왔다. 합스부르크 왕가는 유럽의 최고 명문이었다. 이 가문은 오스트리아를 6세기 동안 다스렸고, 결혼에 의해 보헤미아·헝가리·스페인을 통치했다.
 
  이 가문은 권력세습을 유지하기 위해 빈번한 근친혼을 하게 됐다. 200년간 스페인을 다스리면서 11건의 결혼을 했는데 9건이 근친혼이었다. 카를로스 2세는 삼촌과 조카딸의 결혼으로 태어났다. 펠리페 4세와 오스트리아 왕실의 조카인 마리아나의 결혼이 그것이다. 펠리페 4세의 조부인 필립 3세 역시 아버지 펠리페 2세와 조카딸 안나와의 결혼으로 태어났다.
 
  합스부르크家(가)의 아이들은 유아기와 소년기에 높은 사망률을 기록했다. 유아의 40%가 한 살을 넘기지 못했고, 어린아이의 절반이 10세 이상을 살지 못했다. 당시 스페인 평민 유아의 생존율은 80%를 넘었다고 한다. 특히 합스부르크 왕가 카를로스 2세의 지병은 명백한 근친혼의 결과였다. 동시대의 기록에 의하면 그는 키가 작고 허약했으며, 장 질환과 혈뇨증이 있었다고 한다.
 
  그는 4세가 되도록 말을 하지 못했고 8세가 되도록 걷지도 못했다. 그의 허약함은 근친혼에 의해 태어난 아이들에게 공통적으로 보이는 현상이다.
 
  근친혼의 가장 큰 특징은 대를 거듭할수록 열성인자만 누적된다는 점이다. 찰스 2세의 발기부전 무정자증의 원인으로 두 가지 유전적 결함, 뇌하수체 호르몬 결핍증과 신세뇨관 산증, 신장 기능부전으로 酸氣(산기)가 오줌으로 배출되지 못하는 병을 앓았다고 한다. 그는 자식도 없이 38세로 사망했다(스페인 콤포스텔라大 알바레즈 연구팀).
 
  덕만의 결혼생활이 무르익을 즈음이었다. 앞으로 일어날 대규모 전쟁을 예고하듯 607년 핼리혜성이 지구에 나타났다. 그해 2월을 전후하여 100일 동안 하늘에 혜성이 떠 있었다(수서). 국왕부터 백성까지 모두 그 모습을 보고 공포에 휩싸였다. 앞으로 닥쳐올 재앙에 대한 불안감이 머리를 짓눌렀다.
 
  왕은 백성의 불안감을 해소할 의무가 있다. 진평왕은 이 불길한 천체를 제거하기 위한 성대한 의식을 주관해야 했다(岡山善一郞 교수). 말로 설명할 수 있고, 그것으로 충분하다면 굳이 의례라는 행사를 거행할 필요가 없다.
 
  의례의 장면은 이러했을 것이다. 먼저 祭壇(제단)을 설치했고, 왕은 融天(융천) 스님에게 혜성을 물리칠 수 있는 혜성가를 지으라고 명령했다. 그러는 동안 왕실 수공업 공장의 일류 匠人(장인)들이 만든 의례용 제기와 제사 제물, 그리고 다른 제기들이 질서정연하게 제단에 올랐다. 의례 장소에는 왕실 구성원들과 관리, 군인들이 서열에 따라 자리를 잡았다.
 
 
  수나라와 고구려의 전쟁
 

경주 구황동의 분황사 석탑. 분황사는 선덕여왕 즉위 3년째인 634년 창건됐다. 잦은 전쟁을 겪고, 건강도 좋지 않고, 가까운 친족도 없었던 선덕여왕은 분황사와 황룡사 9층 목탑을 세우는 등 불교에 많이 의지했다.


  의례는 감동과 다채로움을 선사해야 한다. 의례를 주재하는 승려들은 화려하게 차려입었으며, 의례의 장면과 장면을 이어주기 위한 무희들과 솜씨 좋은 악공들이 동원됐다. 의례를 보기 위해 백성이 몰려들었다.
 
  융천 스님이 지은 혜성가가 선창되자 백성이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지속적으로 반복됐고, 도취된 백성은 집단최면에 걸려들었다. 혜성가가 왕경에 울려 퍼졌다. <삼국유사>에 나와 있는 융천 스님의 ‘혜성가’는 이 시기의 산물이다(서영교 교수).
 
  그해 7월 북방 초원에서 사건이 있었다는 소문이 들렸다. 수 煬帝(양제)가 그곳을 여행하던 중 돌궐 임금 계민가한의 천막궁정(牙帳)에서 고구려 사신을 목격했다. 고구려는 언제나 유목민들을 선동하여 중국을 괴롭혀 왔다. 고구려와 수 사이의 관계가 극도로 악화됐다. 수와 전쟁이 불가피하다고 판단한 고구려는 배후의 신라에 대한 공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608년 2월에 고구려는 신라의 북쪽 변방을 공격하여 8000명을 사로잡았으며, 4월에는 牛鳴(우명)산성을 함락시켰다.
 
  수 양제의 고구려 침공이 확실해진 611년에 진평왕은 수나라에 군사를 청하는 표를 올렸다. 이는 수가 요동 쪽에서 고구려를 공격할 때 신라가 여기에 호응하여 고구려의 남쪽 국경을 치겠다는 의사를 밝힌 것이다.
 
  그러나 백제가 신라의 발목을 잡았다. 그해 백제는 신라의 가잠성을 공격하여 100일 동안 포위했으며, 10월에 가서는 이를 함락시켰다(삼국사기).
 
  한편 611년 4월에 수나라의 100만 정벌군이 지금의 베이징(北京)에 집결했다(자치통감). 이듬해인 612년 6월, 고구려 요동성을 수차례 공격했지만 함락되지 않았으며, 그 직후 압록강을 건너간 수나라군 30만명이 전멸하는 참사가 벌어졌다.
 
  수나라의 패배는 신라의 앞날에 어둠을 드리웠다. 세계 최강이라 믿었던 수군이 전멸한 사건은 도저히 생각지도 못한 변수였다. 전 세계가 놀랐다. 수의 무능이 폭로되고 고구려의 막강함이 드러났다.
 
  613년 가을 7월에 수나라 사신 王世儀(왕세의)가 황룡사에 이르자 百座法會(백좌법회)를 열었다(삼국사기). 당시 수나라는 내란에 휩싸였고 급속히 멸망의 길을 걸었다. 실의에 빠진 사람의 마지막 선택과도 같은 것이었을까. 진평왕은 석가모니에게 의지하기로 결정했고, 전국에서 高僧(고승) 100명을 초청하여 백좌법회를 준비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국가 위기를 崇佛로 타개
 
  백좌법회가 열린다는 소문이 왕경에 퍼졌고, 곧 전국의 고승들이 왕경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백좌법회란 많은 승려를 모아놓고 국가의 평안을 기원하기 위해 불경을 읽는 법회다. 이는 반드시 국왕이 시주가 되어 국가의 安泰(안태)를 기원한다.
 
  신라왕경의 황룡사에서는 100가지의 향내가 진동하고 인왕경 외는 소리가 낭랑하게 울려 퍼진다. 절 안에는 삼보의 공양이 행해진다. 승려 100명이 사자좌에 앉아 있고 그 앞에 100개의 등불이 밝혀져 있으며 100가지 색깔의 꽃도 뿌려져 있다. 마치 천상의 소리인 듯 범종이 장엄하게 울려 퍼지고, 그와 함께 사원의 모든 악기가 일제히 소리를 냈으며, 화려한 휘장이 높이 쳐진 가운데 염불 소리가 파도처럼 끊일 줄 모르고 울려 퍼졌다.
 
  당시 거국적으로 행해지던 崇佛(숭불)의 소리가 고난받는 백성에게 희망의 빛을 던져주었을까. 의례가 실제적인 작용을 해낸다는 점이 아니라 심리학자 융(Jung)의 지적대로 그것이 기대의 상태를 보유한다는 점에서 마법적이다. 마법적인 의례로부터 생기는 이득은 새로 공이 들여진 대상이 심리적인 것과 관련되어 작용하는 어떤 잠재력을 확보하고 있다.
 
  장례식이란 의례도 없이 부모를 매장하는 것을 생각할 수 없듯이, 결혼식이란 의례 없이 부부가 되는 것을 꺼리듯이, 의례는 모든 인간에게 본연의 감정표현이며 인간 안에서 유래한 것이다. 특히 국가의례는 국가의 지배를 공고히 한다. 의례로 일체성을 확인하는 동시에 사회적 차별도 드러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원인이 아니라 결과다. 아들을 낳아야 하는 이유가 가족의 제사를 지속시키기 위해서인 것처럼, 국가의례를 지속하기 위해 국가는 존재하는 것이다. 국가의례의 제사장은 국왕이며, 왕실이란 그 제사장을 배출하는 가문이다. 그 가문 내부에서도 왕이 속한 가족은 신성하다.
 
  하늘같이 믿던 아버지 진평왕이 사망했다(632년). 조부 동륜태자의 후손 가운데 남자란 아무도 없었다. 아버지 진평왕의 삼촌이었던 진지왕의 아들 용춘은 살아 있었다. 5촌 당숙인 그는 덕만의 여동생인 천명과 결혼했고, 그 사이에서 아들 春秋(춘추)를 두고 있었다.
 
 
  聖骨의 탄생
 
  왕위계승 결정권을 가진 종친(진골 귀족)들도 난감했다. 여자를 왕으로 세운 전례가 없었다. 더구나 전쟁이 지속되는 난국이 아닌가. 자신들이 폐위했던 진지왕의 아들 용춘을 왕위에 올리자니 뭔가 걸렸다. 세월은 53년이 지났지만 그래도 폐륜아 진지왕의 아들이라는 인상이 남아 있었고, 인고의 세월을 살았던 그 한 많은 사람을 왕으로 모신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었다.
 
  당시 이웃 왜국의 여왕 스이코(推古)의 존재는 하나의 힌트였다. 진평왕과 그 형제 직계비속, 혈통의 신성함을 더욱 부각시켜야 했다. 물론 그것은 억지로 조작해낸 것은 아니다. 신라 사람들은 진평왕을 위기에 빠진 국가를 구해낸 영웅으로 보았다.
 
  진평왕은 신라의 왕들 가운데 가장 긴 53년 동안이나 왕위에 있었고, 생의 마지막까지 고구려, 백제와 혈투를 벌였다. 그동안 국가 생존은 지상의 과제였으며, 진골 귀족들도 국가 보위 전쟁에 말없이 그들의 병력과 물자를 내놓아야 했다. 사람들이 진평왕을 믿고 따랐기 때문에 그것은 가능한 일이었다.
 
  왕에 대한 믿음 속에서 다른 왕족들과 진평왕 직계 가계를 달리 보는 의식이 서서히 생겨나기 시작했다. 진평왕 가족을 일반 진골 귀족보다 더 상위에 놓고 보는 聖骨(성골) 의식이 그것이다. 성골 의식은 아래에서 시작됐다.
 
  덕만이 여자임에도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것 때문이었다. 진골 귀족들은 선덕여왕을 성골로 받들었다. <삼국사기>에는 “진평왕이 죽고 아들이 없자 나라 사람들이 덕만을 왕으로 세우고 ‘聖祖皇姑(성조황고)’의 칭호를 올렸다”라고 하고 있다.
 
  선덕여왕이 즉위한 것은 40대 중·후반이 넘는 나이였다. 당시로서는 할머니였다. 젊을 때 총명하고 지혜가 있었던 그녀의 모습도 초췌한 노인이 된 당시에는 빛을 잃었다. 외로웠다. 사사로운 정을 주고받을 직계 가족이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왕위에 오른 이후 혼자 있어서 외로운 것이 아니었다. 정상에서 모든 것을 홀로 결정해야 할 때 언제나 고독이 그녀를 엄습했다. 왕좌는 그녀에게 누리는 자리라기보다 저주받은 자리였다. 그녀는 국운을 걸고 한쪽이 절멸할 때까지 싸워야 하는 끝이 보이지 않는 전쟁을 상속받았다.
 
  근친혼의 열성인자도 그녀를 괴롭혔다. 늘 건강이 좋지 않았고, 잔병에 걸려도 잘 낫지 않았다. 636년 즉위 5년이 되던 해에 병이 들었다. 어떤 의술과 기도도 효과가 없었다. 황룡사에서 백좌법회를 열고 100명이 승려가 되는 것을 허락했다(삼국사기). 그녀는 4개월 만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후 부처의 영험만이 자신을 구할 수 있다고 굳게 믿게 됐다.
 
 
  시대에 無力한 인간
 
  그녀는 즉위 후 분황사와 영묘사를 세웠고, 불교계의 수장이었던 자장 스님과 가까이 지냈다. 642년 백제에 의해 운명의 대야성이 함락된 후 황룡사에 거대한 9층 목탑을 세웠다. 기술자는 敵國(적국) 백제에서 데리고 왔다. 여왕은 불교신앙에서 고난을 견디는 힘을 빌려오고 있었고, 그의 영혼은 이미 부처의 경이로운 세계에 가 있었다.
 
  마음의 평정이라 불리는 힘이 필요했고, 자신에게 닥친 운명의 파란을 지배해야 했다. 그녀는 자신을 ?利天(도리천)에 묻어 달라고 말했다(삼국유사). 도리천은 불교에서 말하는 俗界(속계) 6天(천)의 두번째다.
 
  운명의 女神(여신)도 여자이기 때문에 젊은 남자를 좋아했다. 여신은 백제 의자왕에게는 관대했다. 젊은 의자왕은 운명의 여신을 자기편으로 만드는 용기와 힘이 있는 남자였던 것 같았다. 적어도 그가 늙기 전에는 말이다. 하지만 늙은 선덕여왕은 죽는 날까지 여신에게 결코 환대받지 못한 운명이었다.
 
  그녀가 왕이 된 지 11년째 재앙이 닥쳤다. 642년 백제의 의자왕은 신라 서부전선의 총사령부인 합천 대야성을 함락시켰다. 대야성은 주변의 40여 城(성)을 총괄하는 지휘부라 그것을 점령한 백제는 낙동강 서쪽을 거의 장악했다.
 
  합천과 고령이 백제 손에 넘어가면서 신라의 왕경은 적군의 직접적인 공세에 바로 노출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고령에서 낙동강을 건너면 대구의 탁 트인 들판이 나온다. 여기서 신라의 왕경 경주까지 백제군대를 방어할 수 있는 자연장애물은 거의 없다. 대구-경주 구간 경부고속도로를 타보라.
 
  이미 죽은 줄 알았던 소수의 패잔병들이 대야성에서 귀향했을 때 전선에 자식과 남편을 보낸 어머니와 아내들은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산 자들의 증언은 죽은 자들이 어떻게 굴욕을 겪었고, 죽으면서 얼마나 괴로워했는지 말해주었다. 그들의 입은 공포를 증폭시키는 앰프였다.
 
  “대야성 성주인 김춘추의 사위와 딸이 참수당했고, 그 머리는 의자왕이 있는 백제로 옮겨졌다고 합니다.”
 
  선덕여왕은 당 태종에게 사람을 보내 구원을 요청했다. 하지만 그것은 역효과를 나타냈다. 신라 사신에게 당 태종의 답변은 간단했다.
 
  “내가 나의 휘하에 있는 거란과 말갈기병을 시켜 고구려 서북 국경을 공격하면 신라에 대한 고구려의 압박을 완화시킬 수 있다. 하지만 1년 정도라 시한적이며, 근본적인 대응은 되지 못한다. 너희 나라 신라는 여자가 왕으로 있어 주변 나라들이 업신여긴다. 내가 나의 친척 한 사람을 보내 신라의 왕으로 삼으면 고구려 백제가 침공하지 못할 것이다.”
 
 
  敗戰 책임 女王에게 물어
 

당태종은 신라의 구원요청을 받자 선덕여왕의 퇴위를 권유했다.


  신라 사신은 그 자리서 아무 답변을 할 수 없었다. 어떻게든 당 태종의 말은 신라 귀족사회에 흘러들어 갔고, 패전 위기가 여왕의 개인 책임으로 돌려지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그래도 천하의 당 태종이 건재해 있을 때는 괜찮았다. 하지만 645년 그가 고구려와의 전쟁에 패하자 신라 내부 분위기는 완전히 바뀌었다. 누가 당 태종이 고구려와 싸워 패할 줄 알았겠는가.
 
  645년 선덕여왕은 당과 전쟁 중인 고구려 군대의 상당 부분을 남쪽에 묶어 두기 위해 군대 3만명을 동원하여 북침을 단행했다.
 
  신라의 주력군대가 북쪽에 있는 틈을 이용해 서쪽에서 백제가 침공해 7개 성을 함락시켰다. 당 태종의 패배로 신라의 희생타는 아무 의미도 없이 사라졌고, 그녀의 일관된 親(친)중국(당) 정책도 힘을 상실했다. 거기다 그녀를 신라왕으로 책봉한 당 태종이 중풍에 걸렸다는 말이 흘러나왔다. 일생 패배를 몰랐던 그에게 첫 패배는 화병을 불렀고, 그를 끝없는 회환에 빠지게 했다. 병마가 그의 몸에 똬리를 틀었다. 동아시아에서 반신불수가 된 노인 당 태종의 카리스마는 사라지고 있었다.
 
  647년 정월 신라의 귀족회의 의장 상대등 毗曇(비담)은 백제에 대한 패전 책임을 여왕에게 묻는 쪽으로 분위기를 조장했고, 진골 귀족 회의체인 화백이 무능한 여왕을 폐위시키기로 결정하게 만들었다. 위기의 시기에 여자가 왕위에 있는 것은 신라 전체에 이롭지 못하다고 본 것이다.
 
  왕궁의 문을 걸어 잠근 여왕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진골 귀족 종친회 화백의 결정은 너무나 정당하고 합법적인 것 아닌가. 퇴위를 강요하는 비담의 귀족군대가 왕성을 포위한 가운데 그녀는 자리에 누웠고, 영원히 일어나지 못했다. 그녀 또한 시대에 무력한 일개 개인에 불과했다.
 
  역사 속에 개인은 시대에 얼마나 無力(무력)한가? 끝이 보이지 않는 전쟁이 지속되던 시기에 국왕들은 피할 수 없는 운명 같은 것이었다. 그래도 선덕여왕은 왕궁의 침상에서 임종을 맞을 수 있었기에 행복한 편이었다. 예상치도 못한 상황의 변화로 野戰(야전)에서 목숨을 잃거나 치욕적인 처형을 당한 국왕들이 속출했다.
 
  前燕(전연)의 공격으로 자신의 모든 병사를 잃고, 아버지의 시신과 어머니와 왕비가 개처럼 끌려가는 치욕을 겪어야 했던 고구려의 고국원왕은 예상치도 못한 남쪽 백제의 기세에 밀렸고, 그 북침을 막아 내다 평양성에서 전사했다(371년). 이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북중국의 강자 북위가 등장하면서 그 침공을 받던 연나라는 약해졌고, 반사이익을 본 고구려는 점점 강성해졌다.
 
 
  군사천재 金庾信을 역사에 등장시킨 의자왕
 

김춘추(왼쪽)와 김유신(오른쪽)은 비담의 난을 진압하고 권력을 장악했다.


  당시 백제왕이었던 개로왕과 그 가족들은 고국원왕의 증손자 장수왕에게 체포되어 지금 워커힐 호텔 자리 언덕, 만백성이 보는 앞에서 치욕적인 처형을 당했다(475년). 6세기 중반 고구려가 내분의 늪에 빠지자 함께 북진하도록 신라를 설득했던 백제 성왕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신라의 배신으로 또다시 잃어버린 한강유역을 되찾으려다 사로잡혀, 어느 비천한 사람에게 참수됐다(553년).
 
  재앙은 언제나 국왕들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는, 자신의 힘이 닿지도 않는, 알 수 없는 곳에서 찾아들었다.
 
  백제 의자왕도 비극을 피해 갈 수 없었다. 당나라의 개입은 그에게 전혀 예상치도 못했던 일이었다. 그는 나당연합군의 급습으로 나라를 잃고 당나라에 끌려가 무덤에 제물로 바쳐졌고(660년), 직후 동쪽 하늘을 바라보다 눈을 감았다. 그는 지금 중국 낙양의 북망산에 잠들어 있다.
 
  결과적으로 패배자가 됐지만, 젊은 시기의 의자왕은 누구보다 영민하고 의욕적으로 영토팽창을 감행한 군주였다.
 
  642년 7월 의자왕은 신라의 합천 대야성 등 40여 성을 함락시키고 경상도 낙동강 서쪽 대부분의 땅을 확보했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이 사건은 의자왕이 신라의 군사 천재 金庾信(김유신)을 중책에 등용하도록 선덕여왕과 진골 귀족들에게 강요한 셈이 됐다.
 
  김유신의 등장이 의자왕 자신에게 얼마나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올지 몰랐다. 적어도 당시에는 말이다. 아직 그에게 게임은 절반을 넘어서고 있었을 뿐이었다
 
  위기가 닥치자 선덕여왕도 요직에 포진하고 있던 진골 귀족들도 능력이 있는 장군을 원하게 됐다. 신라 진골 귀족 사회에서 ‘가야 개뼈’라고 무시당하던 김유신이 서부전선 총사령관으로 임명됐다(642년). 그는 47세 나이로 당시에 노인이었다(595년생).
 
  역사 속에 큰 변화는 항상 예기치 못했던 것에서 생겨나고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남긴다. 대구의 벌판이 바라보이는 경산 주둔 사단을 맡게 된 김유신은 낙동강을 건너올 백제군을 막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하지만 647년 1월 그는 군대를 신라왕경으로 돌렸다(삼국사기).
 
  선덕여왕을 폐위한 화백의 결정에 정치적 반기를 든 것은 여왕의 여동생 천명부인의 아들이자 6촌 형제인 김춘추(후에 무열왕)였다. 그는 경산에 주둔해 있는 김유신 사단에 도움을 청했다.
 
 
  김춘추와 김유신의 쿠데타 성공
 
  신라의 왕경에서 김유신 사단과 귀족들이 이끄는 병력이 뒤엉켜 싸우는 시가전이 벌어졌다. 우려했던 백제의 외침을 받은 것이 아니라 김춘추와 김유신이 주동한 내부 쿠데타가 일어났던 것이다(井上秀雄 교수). 첩자를 통해 소식을 들은 의자왕은 쾌재를 불렀을 것이다.
 
  “나와 같이 운이 좋은 사람이 어디 있겠어! 이거 정말 절호의 기회야. 그래 너희 신라 놈들끼리 피가 터지게 계속 싸워라! 내가 너희 나라를 접수해 주마.”
 
  의자왕이 원한 것은 신라의 장기적인 內鬪(내투)였다. 전쟁기간의 내분은 나라가 망하는 치명적인 독이 된다. 하지만 동시에 카리스마를 가진 군사지도자가 등장하는 産苦(산고)이기도 하다.
 
  예상외의 결과가 나왔다. 내분은 너무 빨리 수습됐고(10일 만에), 用兵(용병)의 천재 김유신이 신라의 군부를 장악했다. 의자왕이 백제 멸망 작전을 기획하고 실행한 김유신을 신라군 총수 자리에 올려놓은 셈이다. 의자왕은 자신이 점령한 대야성이 김춘추와 김유신의 유능한 독재정권을 잉태하는 자궁이 될지 꿈에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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