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응봉 연봉
그러므로 역사는 한 시대에 하나의 뚜렷한 관점을 가진 하나의 존재가 된다. 역사는 그 어떤 애
원도 용납하지 않는 하나의 도덕을 갖게 되며……이것을 알면, 즉 우리가 옳다는 것을 알면 우리
는 좀 과장하고 단순화시켜도 무방할 것이다.
--- 에드먼드 윌슨, 「핀란드 역으로」
▶ 산행일시 : 2010년 6월 5일(토), 맑음, 초여름
▶ 산행인원 : 14명(영희언니, 버들, 설앵초, 산아, 드류, 대간거사, 더산, 사계, 선바위,
신가이버, 베리아, 산소리, 가은, 하늘재)
▶ 산행시간 : 13시간 2분(휴식과 점심시간 포함)
▶ 산행거리 : 도상 14.6㎞
▶ 교 통 편 : 25승 버스 대절
▶ 시간별 구간
00 : 26 - 동서울종합터미널 출발
02 : 50 ~ 04 : 53 - 인제군 북면 용대리 구만동(九萬洞), 산행시작
05 : 28 - 일출
06 : 34 - △1,004m봉
07 : 36 - 응봉(1,208.1m)
10 : 40 - 1,336m봉
11 : 43 - 십이선녀탕계곡 두문폭포 위 등로
12 : 09 ~ 12 : 54 - ┬자 갈림길, 1,362m봉 쉼터, 점심식사
13 : 27 - 1,336m봉, Y자 갈림길, 오른쪽으로 감
13 : 47 - 1,241m봉, ┤자 갈림길
14 : 48 - 1,002m봉, 급사면 트래버스
15 : 37 - 능선 진입
16 : 47 - 940m봉
17 : 55 - 구만동, 산행종료
21 : 30 - 동서울 강변역 도착
2. 응봉 가는 길
▶ 응봉(1,208.1m)
“산을 오르기 전에 스스로 묻는다. 내가 과연 오를 수 있을까? 왜 오르려고 하는 걸까? 하지만
오르고 나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모든 걸 잊게 된다.” 영화 ‘노스페이스’에서 오프닝에 등장하는
쿠르츠의 등반일지의 글귀다. 독일 영화 「노스페이스(원제 NORD WAND)」는 다큐멘터리적
소품이다. 러닝 타임 126분. 힌터슈토이서와 쿠르츠의 1936년 7월 21일 아이거북벽 조난을 다
뤘다. 1938년 이 북벽을 초등한 안데를 헤크마이어가 쓴 「알프스의 3대 북벽」중 ‘아이거에의
첫 도전’이 마치 그 대본 같다.
종전의 산악영화인 「더 마운틴」,「클리프행어」,「버티컬 리미트」 등에서 보는 비주얼적으
로 과장되고 산을 경외해야 한다는 교훈적인 요소를 철저히 배제하고 산의 냉정한 모습을 냉정
하게 담고 있다. 특히 로테 플루(Rote Fluh) 설벽에서 힌터슈토이서의 대담한 자일 트래버스와
그 자일의 회수로 결국 후퇴할 길이 막혀 몰살에 이르는 장면은 눈시울을 뜨겁게 한다. 내가 사
는 강동구에서는 이 영화를 개봉하지 않아 ‘군자CGV’로 원정 가서 보았다. 좌석 수 90개에 나와
아내 포함한 관람객은 겨우 13명.
설악산 하면 흔히 공룡능선과 서북주릉의 장쾌한 모습이나 침봉의 제국인 용아장성과 천불동
등의 현란한 모습을 연상하기 마련인데 우리에게는 그와는 전혀 딴판으로 각인되었다. 감투봉,
작은감투봉, 응봉, 황철봉 북릉, 안산 서북릉 등 하늘 가린 잡목숲속 오지와 돌연히 오금 저리게
하는 리지가 그것이다. 이제 설악산은 당일로 가도 충분하지만 잠입하려면 아무래도 밤중이 적
당하다.
02시 50분 들머리인 구만동 도착. 이 시각에 지나는 사람이 있다. 임기응변 준비하고 경계한다.
동네사람이다. 차 시동 끄고 자세 고치고 차근하니 잠자려고 하는데 여태 들리지 않던 코고는
소리가 들린다. 맨 뒷좌석에서다. 잠깐 그쳤다 하면 언제 다시 시작될까 초조히 기다리다 어김
없이 반복하고 그러다 날이 샌다. 04시 27분. 잠 못 이룬 이는 나만이 아녔다. 여럿이 성화하여
차안 불 켠다.
04시 53분. 구만동 산자락 끝 살짝 비킨 기슭에서 임도 따라 오른다. 통신탑 세우려고 낸 도로
다. 무덤 3곳 지나자 산속 소로는 흐릿하다. 멀리 닭 홰치는 소리도 뭇 새들의 지저귀는 소리와
어울리는 한 장단이다. 스무사흘 정확하던 반달은 어느새 이울고 운해 속이다. 어둑한 소나무
숲속, 아침 이슬 찬다.
05시 28분. 일출을 본다. 미시령 너머에서 불쑥 솟는다. 줄곧 오름길이다. 고도계로 850m봉. 약
간 내렸다가 짧은 리지 지난다. 등로 벗어난 암봉에 들려 발돋움하고 지나온 능선 살핀다. 용대
리 북천은 운해로 겁나게 범람한다. 다시 짙은 숲속으로 잠행한다. △1,004m봉. 숲이 잠깐 걷힌
다. 삼각점은 설악 303, 2007 재설. 오늘 산행에는 막걸리 9병을 나누어 짊어졌다. 베리아 님은
5병! 더러 씹어 먹기도 하는 냉막걸리다. 쉴 때마다 한두 병씩 분음한다.
응봉이 가까울수록 십이선녀탕계곡은 더욱 깊다. 응봉 연봉은 변발한 모습의 암봉으로 엉큼하
니 십이선녀탕 내려다본다. 봉봉은 잡목 숲 리지다. 우리도 십이선녀탕 얼른 내려다보고는 잡목
숲 헤친다. 초여름 더운 날씨이지만 암봉 암반에 서면 등줄기부터 서늘하다. 살금살금 기어 오
르내리다가 선바위 님 척후하여 앞길 살피게 한다.
올리지는 어렵다. 대 트래버스를 감행한다. 야트막한 지능선 넘고 넘는다. 막판에는 가파른 암
릉 사이의 협곡으로 내린다. 펑퍼짐한 사면에 이르러서 응봉을 다 무사히 넘었음을 자축하는 술
잔 나눈다.
3. 응봉 가는 길
4. 응봉 가는 길
5. 용대리 주변
6. 큰앵초
7. 가까운 곳이 응봉, 멀리는 안산
8. 응봉 연봉
▶ ┬자 갈림길, 1,362m봉 쉼터
응봉 내린 안부 주변에도 곰취가 많다. 가는 걸음으로 뜯는다. 금방 한 봉지다. 다시 맞닥뜨리는
암봉. 선두가 직등을 시도하였다가 내려온다. 예전에 내려왔던 길을 도저히 찾지 못하겠다. 오
른쪽 바위 밑자락 너덜로 빙 돈다. 마루금에 올라서 배낭 벗어놓고 앞의 암봉 다니러간다. 오늘
산행 중 조망이 가장 좋은 곳이다. 응봉. 저기를 넘었다는 것이 두고두고 자랑이다.
대초원이 펼쳐진다. 큰앵초가 무리지어 피었다. 가도 가도 큰앵초 만발한 산상화원이다. 설앵초
님은 이 설악산의 큰앵초를 좋아하여 그렇게 이름지었다고 한다. 어느 산에서나 큰앵초와 박새
는 확실히 곰취가 자생하는 필요조건이다. 좌고우면하지 않고 오직 일로 전진한다. 눈 돌리다가
는 곰취에 홀려 여러 걸음 되돌 것이므로.
1,336m봉. 앞뒤 간격을 좁히고 줄지어 가되 발소리 말소리 죽이고 간다. 1,362m봉 너머 십이선
녀탕계곡으로 가는 갈림길에 국립공원관리공단 감시원이 지키고 있을지 몰라서다. 계도가 아
니라 에누리 없는 적발위주라니 바짝 존다. 1,336m봉 내린 안부에서는 대각선 사면으로 내린
다. 너덜 밀림이다. 몸부림친다. 덩굴줄기를 자일 삼아 붙들고도 내린다. 험로가 길어지자 앓느
니 죽는다고 차라리 들키고 말지 도시 못할 노릇이다.
산작약 꽃을 본다. 면사포 곱게 쓴 신부 같다. 잠시 진땀 훔치는 것도 잊고 둘러서서 들여다본
다. 산작약은 산림청이 선정한 희귀 및 멸종위기 식물이고, 환경부가 선정한 보호야생식물이다.
환한 그 모습에 힘 받아 쭉쭉 떨어져 마침내 십이선녀탕계곡 길에 다다른다. 허리 편다. 팍팍한
돌길 오름이 이어진다. 길기도 하다.
기진맥진하여 ┬자 갈림길인 1,362m봉 쉼터다. 관리공단 감시원이 없어서 더 맥 풀린다. 정신
수습하여 나무그늘에 자리 잡고 점심밥 먹는다. 파리 떼가 극성이다. 쉴 때마다 그랬다. 걸게 고
수레하여 상 차려 주어도 아랑곳하지 않고 우리 밥상에 달려든다.
대승령 쪽에서 오는 등산객들에게 안산 갈림길 동태를 묻는다. 관리공단 감시원 2명이 나왔
다고도 하고 어떤 이는 5명이다고 한다. 한 사람은 안산에 오른 등산객을 잡으러가더라고 한다.
빈말은 아니리라. 빤히 보이는 안산 정상인데 등산객은 한 사람도 볼 수가 없다. 우리는 어찌해
야 할까? ‘나 잡아 봐라’는 듯이 사면으로 돌아 넘어부러?
9. 공룡능선, 멀리는 화채봉
10. 응봉
11. 응봉, 선바위 님이 바쁘다
12. 안산 자락
13. 응봉 연봉
14. 응봉
15. 곰취
16. 산작약
▶ 1,002m봉, 구만동
성질 다독인다. 뒤돌아서 아니오니골(김부자터골)과 음지골 사이 능선으로 내리자고 한다. 아까
1,336m봉에서 사면 치기를 아주 잘했다. 온 길로 가지 않고 새로이 가는 등로이기 때문이다.
1,362m봉을 단숨에 넘고 Y자 능선 분기봉인 1,336m봉에서 서슴지 않고 오른쪽으로 간다. 아니
오니골 가는 길이 좋다. 주걱봉 가리봉 중청봉 공룡능선 저항령 황철봉, 그 너머 화채봉 바라보
며 사뭇 느긋하다.
그러했는데 ┤자 능선 분기하는 1,241m봉에서 인적 드문 왼쪽 잡목 숲으로 들어간다. 잡목 숲
에서 좌충우돌 헤매다보면 어디 쯤 가고 있는지조차 모르겠다. 지도의 조그만 타원 하나하나가
무시 못 할 준봉이다(우리는 그 생김새를 보아 찐빵이라 표현한다). 찐빵이 수두룩하다. 1,002m
봉이 절정이다. 뾰쪽하니 솟은 암봉이라 감히 덤비지 못하고 오른쪽 사면으로 길게 트래버스 할
수 밖에 없다.
당연히 마루금이겠거니 배낭 벗어놓고서 1,002m봉을 사뿐히 돌아 넘은 자축주 나누는데 지도
뚫어지게 들여다보던 대간거사 님이 우리가 가야할 길은 왼쪽 건너 능선이란다. 뜬금없는 일이
다. 왼쪽 건너 능선은 아침에 올랐던 응봉 능선이 아니던가! 가은 님을 1,002m봉 정상으로 정찰
하러 보내고, 대간거사 님은 더 내려가 우리가 서 있는 능선의 자락을 확인한다.
왼쪽 건너 능선으로 가야한다. 수직사면을 더듬더듬 트래버스 한다. 이도 더 갈 수 없는 절벽으
로 막힌다. 두 패로 나뉜다. 1,002m봉 정상으로 올라가서 능선을 붙들자는 편과 아예 골로 가서
건너 사면을 오르자는 편이다. 지도를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어디가 낫다고 할 수 없다. 운이다.
골로 가는 것도 수월하지 않다. 기다란 나무뿌리 움켜쥐고 레펠로 내린다.
급사면 오르고 주능선 진입. 험로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아니 시작이다. 나이프리지 길이 나온
다. 가슴에 둘렀던 카메라를 배낭에 넣어 행동의 자유부터 확보한다. 선등은 베리아 님. 천천히
뒤따른다. 전후좌우 상하고저로 고개 돌려 움찔움찔 바라보는 경치가 장관이요 대관이다. 더구
나 짜릿한 손맛까지 보는 데야.
얕은 안부에서 모두 모여 방금 전의 고역을 즐거운 한때로 채색한다. 암봉은 자주 나타난다. Y
자 분기봉에서 왼쪽으로 간다. 등로는 풀리는가 싶다가도 잡목 숲이다. 으르렁대는 원뢰가 소리
만으로 시원하다(이때 한계리에는 30분간 장대비가 내렸다고 한다). 암봉인 940m봉은 직등한
다. 그 반대편 슬랩에 드러누웠더니 바람 솔솔 불어 시원하기 이를 데 없다.
능선의 힘이 좋다. 좀처럼 당찬 기세를 누그러뜨리지 않는다. 절벽을 좁은 테라스로 트래버스
한다. 거목인 소나무를 연거푸 지난다. 영자 아니지만 너도나도 그 품 두 팔 벌려 얼싸안아 본
다. 산기슭 두른 교통호 넘고 생사면 지친다. 아니오니 민박집 옆이다. 우리 차가 기다리고 있
다. 하 길었던 맘 졸임에서 해방된다.
17. 안산
18. 가리봉과 주걱봉
19. 공룡능선
20. 응봉 자락
21. 지나온 봉우리
22. 소나무
23. 응봉
24. 소나무
첫댓글 아주 스릴이 넘치네요,,제가 안가면 꼭 이렇게 좋은곳을 간다니깐이번주에 설악곰취 맛좀 보여주시겠죠
꿈~속 같은 설악산행!! 드류님 산행기로 이제 기억을 되찾았습니다...ㅎㅎㅎ 무사히 설악의 추억을 만들어 주신 오지님들께 감사드립니다.
드류님 허락없이..... 귀한 사진들 가져 갑니다...
모처럼 13시간 이상의 알찬 산행을 하셨네요. 갓자란 곰취가 아주 연하고 부드러워 보여요.... 하산지점의 구만교가 사고지점입니다.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