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손의 왕관(사62:3)
2017.2.5 김상수목사(안흥교회)
셀 실버스타인(Shel Silverstein)의 “아낌없이 주는 나무(The Giving Tree)”라는 유명한 동화가 있다. 어느 언덕에 한 그루의 나무와 한 소년이 있었다. 소년은 나뭇가지에 매달려 그네도 타고 사과도 따먹고, 때로 나무그늘에서 잠을 자기도 했다. 나무는 이 모든 것이 너무 행복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청년이 된 소년이 다시 나무를 찾아와서 말했다 “나는 돈이 필요해” 그래서 나무는 자신의 사과를 따다 시장에 팔라고 했다. 그래서 소년은 사과를 딴 후에 다시 가버렸다. 그래도 나무는 행복했다.
그로부터 오랜 시간이 흘렀다. 중년이 된 소년이 다시 돌아왔다. “내게는 집이 필요해” 그러자 나무는 자신의 가지를 베어다 집을 집으라고 했다. 그래서 소년은 나뭇가지들을 베어서 가버렸다. 그리고 또다시 소년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 후 소년은 다시 와서 말했다. “여행을 가려는데 배를 한척 마련해 줄 수 없겠니?” 그래서 나무는 아낌없이 자신의 몸통을 내어줬다. 이제 나무는 밑동만 남았다. 그래도 나무는 행복했다. 그리고 아주 오랜 후에 노인이 된 소년이 돌아왔다. 소년은 자신이 앉을 의자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이번에도 변함없이 나무는 자신의 밑동에 소년을 앉혔다. 그래도 나무는 행복하기만 했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 동영상 링크 : https://www.youtube.com/watch?v=vSyHlpYVeiE )
이 나무는 왜 소년에게 모든 것을 아낌없이 주었을까? 진실로 소년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소년과 나무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누가 생각나는가? 부모님이 생각날 수도 있고, 또 나를 위해 희생하는 고마운 그 누군가가 떠오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이야기 속에 나오는 소년과 나무의 모습을 보면서 정말 잊지 못할 고맙고 감사한 분이 떠오른다. 그 분은 나를 위해 바로 독생자까지 아낌없이 내어주신 하나님이시다.
왜 하나님은 독생자까지 아낌없이 주셨을까? 진심으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하면, 그 사랑하는 대상을 위해서 생명까지 아낌없이 내놓을 수 있는 것이 사랑의 특징이다. 그래서 요한복음 3장 16절에서 우리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요3:16)
오래전 중고등부 시절에 성경을 처음으로 통독할 때의 일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끊임없이 하나님을 배반하는 것을 반복하는 모습과 반대로 끝없이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면서 어린 마음에 ‘나 같으면 용서를 안 할 것 같은데……. 이스라엘 백성들도 너무 답답하고 하나님도 대단하시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었다. 그런데 돌이켜 보면 답답하게 느껴질 정도의 하나님의 은혜가 없었다면, 오늘 우리는 이 자리에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진심으로 사랑하시기 때문에 독생자까지 아낌없이 주셨다면, 그러면 왜 이렇게까지 우리를 깊이 사랑하실까? 그것은 사람이라는 존재는 다른 짐승과는 달리 하나님의 생명을 친히 불어넣어 창조한 하나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이다. 창세기 2장 7절에 보면 태초에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 흙으로 사람을 만드신 후에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셨다. 그래서 사람이 비로소 생령(living being 또는 living soul)이 되었다고 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the breath of life)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living being)이 된지라”(창2:7)
여기서 “생기”란 ‘루아흐’라는 단어인데, 이것은 하나님의 숨결과 호흡을 뜻한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생명을 분여받은 존재가 바로 우리들이다. 성경은 이것을 다른 표현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다(창1;27)고 기록하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은 지금 이 순간까지 한 시도 우리들을 잊을 수 없으시다.
창세기 3장의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고 하나님을 떠난 후로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도 하나님은 한 시도 우리들을 잊지 않으셨다. 그래서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신 것이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죽은 영혼이 살아나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 신분과 특권이 회복된다(요1:12).
특별히 오늘 본문인 이사야 62장 3절에서는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다함께 읽자.
(00야!) “너는 또 여호와의 손의 아름다운 면류관, 네 하나님의 손의 왕관이 될 것이라(You will be a crown of splendor in the LORD'S hand, a royal diadem in the hand of your God)”(사 62:3)
성경을 읽으면서 도처에서 많은 은혜와 감동이 있지만, 특히 이 말씀은 충격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마음에 강하게 다가왔다. 하나님께 이 말씀을 주실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직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있었던 때였다. 그러한 그들에게 하나님은 최고의 표현으로 그들을 회복시키시고 높여주실 것을 약속하셨다. 이 말씀에서 “너는”이라는 말 앞에 여러분 각자의 이름으로 넣어서 “00야! 너는”으로 읽어보라. 그러면 이 말씀이 고난 중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주신 것이 아니라, 오늘 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인 것이 마음에 와 닿을 것이다.
그런데 이 말씀을 깊이 묵상해 보면 “면류관”이나 “왕관”이라는 단어, 다시 말해서 우리들이 단순히 면류관이 되고 왕관이 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눈에 들어온다. 그것은 바로 “손”, “하나님의 손(in the LORD'S hand)”이라는 단어다. 우리들이 누구의 손에 붙잡혀 있느냐 하는 문제는 매우 중요하다. 예수님 당시에 작은 소년이 바쳤던 오병이어는 분량으로만 본다면 얼마 안되는 것이었지만, 그것이 예수님의 손에 붙잡혔을 때는 엄청난 기적의 씨앗이 되었다.
이러한 영적인 원리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도 동일하다. 우리들이 정말 중요하게 여기고 감사하게 여길 것은 흔히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눈에 보이는 축복의 요소들(돈, 건강, 명예 등)이 아니라, 오늘 말씀에서처럼 하나님께서 나를 “하나님의 손 안에(in the hand of your God)” 있게 하시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과 건강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손 안에 머물러 있으면 그 다음은 주님께서 알아서 능력과 기적을 베푸시고 아름다운 면류관과 왕관으로 만들어 가신다.
그렇기에 설령 지금 일시적으로 어렵다고해서 아낌없이 모든 것을 주시고 예비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약속을 의심해서는 안된다. 설령 우리들이 불길 같은 어려움 속에 있다해도 하나님은 잊지 않고 찾아와 주신다. 실제로 이와 유사한 일이 우리 주변에서도 일어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몇 년 전 제주시 노형동 어느 고층 아파트에서 화재가 났을 때의 일이다. 소방관들이 엄청난 연기와 불길 속에서 한 가족을 구조하였다. 그런데 밖에 빠져나온 아버지는 어린 아들이 아직 구조되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소방관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산소마스크도 착용하지 않은 채로 맨몸으로 불길 속으로 다시 뛰어 들어갔다. 그리고 마침내 죽어가던 아들을 구해냈다.
그렇다면 그 아이의 아버지는 왜 그 위험한 불길 속으로 뛰어 들어갔겠는가? 다른 이유는 없다. 사랑하는 그의 아들이 아직 그 불속에 있었기 때문이다. 불속에서 숨을 헐떡이며 죽어가는 자식을 생각할 때, 눈에 보이는 불보다 더 뜨거운 사랑의 불길이 아버지의 가슴을 견딜 수 없게 만든 것이다.
자식을 향한 부모의 마음이 이와 같을진대, 하물며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어떠하겠는가? 그래서 우리들이 죄악 중에 헤매며 지옥의 불길을 떨어질 때, 지체하지 않고 달려오셨다. 그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시다. 그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 순간에도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들의 가슴에 외치신다.
“00야! 너는 여전히 내 손 안에 있는 아름다운 면류관이고 왕관이란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아낌없이 주는 나무와는 비교할 수 없는 광대한 사랑으로 우리에게 아름다운 면류관과 왕관을 씌여줄 준비가 되어 있으시다. 그러므로 지금까지의 삶이 어떻든지 간에 뒤로하고, 이제부터는 다시는 하나님의 품을 떠나지 말자. 그래서 아낌없이 주는 나무의 소년이 어린 시절에 나무와 교제하며 함께 행복한 시간을 보냈듯이 우리들도 주님과 함께 행복하고, 보람되고, 왕관과 같은 생을 살아가자. 주님과 함께 하는 것이 행복의 비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