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모한 용감함. ‘푸른달’이라는 극단을 만나고 나서 떠오른 말이다. 이들은 2008년에 극단을 만들어 작업을 해왔고, 3년 전부터는 푸른 달 극장까지 운영하고 있다. 오로지 극단의 레퍼토리 공연만으로 채워지는 극장이다. 그 공연들은 상업극과도 거리가 멀다. 한 차례 서울시의 소극장 지원을 받기도 했지만, 지원을 받기 위해 발 벗고 나서지 않는다. 돈이 많아서가 아니다. 사실 하루하루가 위기다. 심사 권력 앞에서 머리를 쥐어뜯을 시간도, 학연과 지연이라는 동아줄을 잡을 시간도 없어 보인다. 일 년에 8~9편의 작품을 300일 동안 공연하니까. 이런 얘기를 두 주먹 불끈 쥐고 하지도 않는다. 조용히, 성실하게 작품에 임하며 무대에서 살기에도 시간이 부족하니까.
이 코너가 ‘연극데이트도’도 아닌데, 작품에 대한 얘기가 아닌 작품을 만드는 사람들에 대한 얘기를 너무 길게 했다. 이런 집단이 만든 작품이니까 호의를 가지고 살펴보자, 는 얘기를 하고 싶어서가 아니다. 게다가 그들이 만든 작품은 <돈키호테>가 아니다. 다만 이런 집단의 특성이 <하녀들> 만들기에 어떻게 녹아들어 있는지 알고 싶었다. 지금까지 극단을 이끌어온 박진신 대표와 그 바통을 이어받기로 했다는 오화연 배우를 극장 앞 카페에서 만나기로 했다. 토요일, 하루 종일 비가 왔다. 그 탓인지, 낮 공연은 관객이 아예 없어서 취소됐다. 다행히(?) 저녁 공연에는 나와 장우제 사진작가를 포함해 열 명 남짓한 관객이 있었다. 극단의 현 대표는 ‘마담’역을, 차기 대표는 ‘끌레르(‘순남’)’역을 맡아 무대에 섰기 때문에, 두 사람이 분장을 지우고 올 때까지 우리는 기다렸다. 얼마 후, 두 사람이 해맑은 얼굴로 나타났다. 조곤조곤, 부드럽고 나직하지만 단단했던 그들의 목소리를 풀어본다.
박진신 대표(좌)와 오화연 배우(우)
프레임과 세 가지 목소리
- 한현주
- 무대 위에 놓인 세 개의 문틀이 중요한 장치이자 약속인데, 연기의 변화와도 맞닿아 있는 것 같아요.
- 박진신
- 맞아요. 가장 중요한 약속이죠. 일단 배우가 프레임을 통과하면 역할과 공간이 계속 바뀌는 식이죠. 프레임(문틀)을 이용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건, 법정스님의 『무소유』의 영향이기도 한데요. 그 책의 ‘오해 편’을 특히 좋아해요. 우리는 누구나 틀을 가지고 상대를 보잖아요. 그러니 다 오해일 수밖에 없는 거겠죠. 때로는 자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구요. 극 중에서 하녀도 마담도 프레임을 활용한 거울을 통해서 자기가 보고 싶은 자신만을 보죠. 지금과는 다른 나... 우리 스스로도 마찬가지죠.
- 한현주
- 그런데 원작의 역할 놀이에 기초한 연기 변화만 있는 거 같지 않아요. 예를 들어 자매들이 마담 역할을 할 때 말고도, 그들 스스로 한 세 가지의 서로 다른 연기를 보여주던데요.
- 오화연
- 맞아요. 바보 하녀, 늙은 하녀 등 한 사람마다 여러 가지 하녀 모습을 연기하죠.
- 한현주
- 그런데 이게 좀 복잡하게 느껴져요. 하녀들의 또 다른 내면인가 싶었다가 단순히 여러 하녀의 모습을 표현하는 것 같기도 하고요.
- 박진신
- 저희는 원작을 통해서 남녀노소 누구나, 누군가에게 하녀일 수 있고 마담일 수 있다는 생각을 했어요. 저 역시 극단과 극장 운영의 고충을 생각할 때 누군가의 하녀 같다는 생각을 하지만, 함께 작업하는 사람들에게는 또 마담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거든요. 그래서 각각의 배우가 표현할 수 있는 각기 다른 하녀, 각기 다른 마담을 찾아보려고 했죠.
- 한현주
- 대표님 마담 맞네요. (웃음) 여배우들이 너무 힘들어보였어요. 여러 모습의 하녀들을 표현하기 위해 목소리를 달리 하는데, 목에 엄청 무리가 갈 것 같더라구요.
- 오화연
- 엄청 힘들었어요. (웃음)
- 박진신
- 욕 많이 했을 거예요. (웃음) 근데 저는 원작을 읽으면 읽을수록 작가의 고통이 너무 절실하게 느껴졌어요.
- 한현주
- 작가의 자전적 고통 말인가요?
- 박진신
- 네.
장 주네의 범죄 경력과 고된 삶을 나열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하녀들>
- 박진신
- 하루하루가 지옥이었을 것 같은 작가의 고통이 작품에 여실히 담겨 있다고 저는 봤어요. 하녀들은 놀이를 시작하는 순간 죽고 싶었을 거예요. 그걸 우리 같은 어린 배우가 어떻게 잘 표현할 수 있을까 싶었죠. 그래서 전 ‘배우의 힘듦’으로 그 고통을 관객에게 전할 수 있다고 믿었어요.
- 한현주
- (그 의견에 동의하진 않지만 귀를 기울이며) 음...
- 박진신
- 9년 동안 이 작품도 참 여러 번 올렸는데요. 코미디로 작품을 해석해보기도 하고, 각 배우들이 더 많은 캐릭터를 담으려는 시도도 해봤어요. 카오스가 되더군요. 나름 사회 현상을 반영하면서 지금의 캐릭터로 정리가 된 거죠.
- 한현주
- 마담에 대해서도 말씀해주시죠. 남자 배우가 이 역할을 맡는 게 새로운 시도는 아니잖아요.
- 박진신
- 물론 그렇죠. 마담이 갖는 절대자로서의 위치 때문에 남성의 언어가 더 맞겠다고 생각한 거죠. 숨만 새어나와도 주변을 얼어붙게 만드는 뭐 그런...그런데 저는 마담 역시 어떤 면에서 피해자라고 생각해요. 예를 들면 가부장의 틀에 갇혀버린 아버지 같은 느낌이랄까. 그래서 하녀들과 마찬가지로 마담이 표현할 수 있는 캐릭터들을 생각했죠. 특히 우리 사회에서 소외받고 있는 사람들. 그러다 보니 성소수자에 대한 표현도 추가되었죠.
르네상스형 인간의 무모한 선택?
박진신 대표는 이 작품의 연출이자 배우이다. 그리고 무대 미술도 도맡아 했다. 게다가 각종 홍보물 디자인까지... 부족한 제작비 때문이겠지만, 과히 르네상스형 인간이랄 만하다. 그런데 이 다재다능한 인물의 몇몇 선택에는 눈이 동그래진다. 다음과 같다. (물론 그 혼자만의 선택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 한현주
- 공연이 끝날 때까지 암전이 거의 없어요.
- 오화연
- 암전은 딱 한번이고, 배우들 모두가 단 한 번도 퇴장하지 않죠.
- 한현주
- 헉. 그럼 공연이 시작되기 전부터 장식장을 통해 보인 게(?) 혹시 마담이었어요?
- 오화연,박진신
- 네. (웃음)
- 한현주
- 마담이 퇴장 후에도 계속 장식장 너머에 앉아 있기에 혹시 처음에도 그랬나 했어요. 제가 앉은 쪽에서는 꼭 무슨 장식물 같아 보였거든요. 상반신이라고는 생각지도... (웃음)
- 오화연
- 하하하. 마네킹인 줄 알고 수군거리는 관객도 있죠. 사실 이 작품 말고도 모든 공연이 그래요. 모든 배우가 공연 시작 전부터 끝까지 다 무대에 있습니다.
- 한현주
- 네?
- 박진신
- 보통 공연을 하면 주, 조연의 대우가 다르잖아요. 이 극단을 만들면서 출연하는 배우 모두가 주연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아무도 퇴장을 못하게 만들었죠. 죽어도 무대에서 다 같이 죽었으면 좋겠다고. (웃음) 예전에 마담 역을 외부 배우가 맡았던 적이 있었는데, 이해를 잘 못하더라구요. 왜 나중에 등장하면 안 되냐고. 근데 제가 해보니까 알겠어요. 극 중반까지 꼼짝 않고 앉아 있다가 움직이려고 하니까 근육 경련이 막 일어나더라구요.
- 한현주
- 움직이든 그렇지 않든, 무대에 서 있는 것 자체가 액션인데 정말 힘드실 거 같아요. (이게 아까 말한 ‘배우의 힘듦’을 통한 고통의 표현? 난 죽어도 못해.)
- 오화연
- 힘들기도 하죠. 그래도 배우들이 끝까지, 무대에 다 같이 서 있는 것만으로도 작품에 애정이 생겨요.
- 한현주
- 암전은요?
- 박진신
- 극장에서 쫓겨나면 거리에서라도 해야 하니까, 암전을 많이 만들어놓으면 힘들잖아요.
- 한현주
-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절실한 표현인 거죠?
- 박진신
- 네.
다음 내용으로 넘어갈 수밖에 없다.
<하녀들>
연기의 어려움
- 한현주
- 마담이 등장하고 나서 몇몇 순간을 제외하고는, 무대에 계속 음악이 흘러요.
- 박진신
- 음... 특히 재즈가 많죠. 제가 재즈를 엄청 좋아해요. 하지만 개인 취향 때문만은 아니구요. 세상 모든 것에는 리듬감이라는 게 있잖아요. 제가 마담의 집을 생각해봤을 때, 여기에는 왠지 계속 음악이 흐르고 있을 것만 같았어요.
- 한현주
- 적극적인 각색은 아니지만, 어쨌든 근대 문물이 막 들어오던 일제말기로 배경이 설정이 되어 있어서, 재즈가 어울리기도 합니디만.
- 박진신
- 처음에는 대본을 악극처럼 바꿔서 운율을 살려보려고도 했죠.
- 한현주
- 근데... 음악이 너무 시종일관 흘러서, 게다가 바뀌니까, 오히려 배우의 리듬에 몰입을 잘 못하겠더라구요.
- 박진신
- 그렇죠. 아무래도 음악에 신경을 쓰게 되죠. 저는 이 작품을 보는 관객들이, 배우들이 표현하는 고통에 몰입해서 느끼기보다 밖에서 관찰하고 생각해주기를 바라거든요. 대학 때 서사극에 빠져 있기도 했는데요. 이 작품에서 쓰이는 프레임이나 음악 같은 서사극적 장치들이, 관객과 함께 작품을 사유하는 좋은 도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 한현주
- 몇 곡 정도를 쓰신 건가요?
- 박진신
- 많이 쓸 땐 60곡까지도 사용하는데, 이번에는 30곡 조금 넘게... 작곡해주신 분이 따로 있어요. 내셔널지오그래픽에 근무하는 회사원인데 재즈피아니스트로도 활동하는 분이에요. 우연히 저희 작품을 보고 너무 좋아서 함께 작업해보고 싶다고 하셔서 좋은 기회가 됐죠.
관객이 연우가 된다니 멋지다, 라고 생각하면서도 카페 너머 극장에서의 삶에 대해서는 상상이 잘 되지 않는다. 다음 레퍼토리 공연 연습으로 바쁜 그들은 인터뷰가 끝나자마자 한숨 돌릴 새도 없이 극장 후문으로 들어간다. 무모한 용감함만이 아닌, 지속가능한 용감함은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를 나 스스로에게도 물어본다.
[사진: 장우제 woojejang@gmail.com & 극단 푸른달 제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