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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함시 복수초 원문보기 글쓴이: 김정복
장순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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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호는 사봉(師峰). 1928년 전북 정읍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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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학생 때부터 일본어 문학서 탐독
내가 태어난 해는 일제강점기인 1928년, 우리 부모님은 교육열이 대단히 높으셔서 어려운 살림 속에서도 큰아들을 중학교에 보내셨다. 우리 정읍군에 있던 중학 과정의 학교라고는 정읍농업학교가 유일했으니까 자연히 그곳에 진학하여 전시 단축 학제로 3년 만에 졸업하셨다. 그게 우리 8남매의 맏이였던 나의 장형이시다. 그 형님은 뒷날 유능한 공무원이 되어 전라북도에서 네 골의 군수를 역임하셨다.
내 장형도 독서를 즐겨하셨던지 당신의 거처에는 책이 많았다. 《세계문학전집》(일어 번역본), 《명치대정문학전집》(일어 원서) 등 전집류 말고도 단행본들도 시렁 위에 가득 쌓여 있었다. 모두 일본어로 된 책들이었다.
소학교를 졸업은 했으나 집안에 사고가 있어 중학교 진학을 못하게 되었다. 궁벽한 농촌인지라 아무 소일거리도 없고 함께 놀아 줄 친구도 없다 보니 하루하루가 무료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서 형이 쌓아 놓은 책을 읽기 시작했다.
물론 흥미 중심으로 대강대강 책장을 넘기는 정도였을 테니까 충실한 독서라고 할 수는 없었겠지만 어떻든 그것이 빌미가 되어 문학에 대한 향심을 굳혀 간 것만은 확실했을 것이다. 이때 주워 읽은 책들이 나중에 내 문학의 기초 자양이 되었을 것은 물론이다.
당시 내가 읽은 책들은 일정 시대인 명치(明治, 1868~1912) 대정(大正, 1912~1926) 치세에 쓰던 이른바 ‘역사적 맞춤법’ 따라 쓰인 글이었다. 말하자면 고문에서 현대문으로 넘어가는 중간 과정이어서 일본어를 좀 안다는 사람들도 그 무렵의 말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가 많았다.
이건 여담인데, 작년에 우리 근대 소설의 대가 가산 이효석(可山 李孝石)이 일제 때 쓴 일문 소설의 원고가 발견되었으나 이것을 번역할 사람이 없어 방치되고 있다는 말을 듣고 찾아가 보니 바로 그 역사적 맞춤법으로 쓴 것이라 번역자를 못 찾은 것이었다. 나는 바로 그 시기의 일본 소설을 많이 읽었던 터라 무난히 번역해 준 일이 있다.[2011년 8월 26일 자 〈연합뉴스〉 보도, 27일 자 〈동아일보〉 〈세계일보〉 〈강원일보〉 게재, 9월호 《현대문학》 전재]
이러한 엉터리 독서에도 신물이 나서 무작정 상경하여 잡화 가게의 꼬마 점원이 되기도 하고, 학비가 면제되는 체신이원양성소를 거쳐 공주우편국 사무원이 되기도 하는 등 온갖 신산을 맛본 끝에 조국 광복을 맞이했다. 광복이 되자 어지간히 나이도 들고 세상을 보는 눈도 열려 새로운 인생을 설계하게 되면서 확실하게 문학인이 되기로 작정했다.
나는 문학 수업을 위해서 세 번째 상경을 감행했다. 그동안에 한 내 문학 공부는 모두 일본어로 하는 문학이라 조국 광복과 함께 휴짓조각이 되었으니까 우선 한글부터 공부해야 했다.
나는 어려서부터 중학생 형을 둔 덕으로 일본어와 일본 글에 친숙해서 우리글과는 자연 소원했었다. 소학교 2학년 때 《조선어 독본》을 배웠는데 여러 과목 중 국한문 혼용의 그 ‘조선어’가 가장 어려웠다. 그러나 1년 만에 그나마 조선어 과목이 폐지되고 말았으니 나의 한국 어문 실력은 거의 공백에 가까웠다. 후일 내가 그 어렵던 한글을 가르치는 교사가 되고 또 그 한글을 표기 수단으로 하는 문학가가 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엉뚱한 아이러니라 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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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백일장 장원, 일생을 시조 하나로
우리 국어와 국자 되살리기 운동의 본산이 된 한글학회(조선어학회의 개명) 주변을 서성거리며 한글을 익히면서 한국어 문학 작품을 닥치는 대로 읽어대는 사이에 내 관심은 소설에서 시 쪽으로 자연스럽게 방향을 틀어 갔다. 처음에는 순수 서정의 정지용, 신진기예의 청록파, 모더니스트 김광균 등을 섭렵하다가 현대시조의 개척자 이병기, 이은상 두 선생의 영향을 받아 시조로 정착하게 되었다.
그 무렵, 문교부가 황무지와 같은 국어 교육을 바로 세우기 위해 한글학회에 위촉하여 1948년 초급대학 과정의 ‘세종중등국어교사양성소’를 개설할 때 나는 제1회생으로 입소하여 1950년에 수료했다. 그 수료식이 하필 6월 24일 오후 5시쯤이었으니까 그로부터 채 12시간도 지나기 전에 6·25 사변이 터진 것이었다.
나는 이리(지금의 익산시)에 신설된 남성중학교로부터 교사 초빙을 받고 27일 아침 열차로 초빙 사절 차 이리로 내려간바, 뒤에 보니 그것이 서울역에서 출발한 마지막 열차였다. 남성중학교에 가서 정중히 사절하고 돌아섰으나 이튿날 기차가 끊긴 김에 남성중고에 주저앉아서 16년간이나 봉직하는 신세가 되었다.
남성고등학교 재직 중인 1957년 개천절 경축 제1회 전국백일장 시조부에 장원 입상하여 문단에 화려하게 등단한 다음 직장과 거처를 서울로 옮겨서 본격적인 문학 활동을 전개하여 한국문인협회 이사, 한국 시조작가협회 부회장에 선출되기도 했다.
그로부터 이날까지 시조만 붙들고 일생을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는 혁신적인 시조 창작을 꾸준히 추구하는 한편 시조 평론 분야를 개척하였고 경시조를 창안하여 시조 보급 운동에 앞장섰다.
그동안 시조집 10권을 비롯하여 많은 저술을 하여 1981년에 제3회 가람시조문학상, 1987년에 제6회 중앙시조대상을 받았다. 그 밖에도 시조계에는 크고 작은 상이 많은데 내게 상복이 없어 그랬기도 했겠지만 어느 시조상을 거부했더니 그 뒤로 상 주겠다는 곳이 없어졌다.
내가 일생 동안 해 온 문학 활동을 총정리한 것이 2010년에 간행된 《장순하 문학전집》(전 8권)이다. 그 목록을 보면 그 개요를 알 것이라, 초라하나마 참고삼아 여기 열거한다.
제1권―시조집, 제2권―경시조집, 제3권―평론집, 제4권―수필집, 제5권―일기, 서한집, 제6권―장순하론, 시조 일역 등, 제7권―시조 짓기 교실, 제8권―《역주 몽암추선록》: 내 선조(조부)의 한시문집을 한글로 번역하고 주를 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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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위 수치(數痴)나 수맹(數盲)으로 자타가 공인하는 내가, 더욱이 기억의 나사못이 언제나 느슨히 풀려 있는 내가, 거의 반세기가 지난 지금 어느 특정의 날짜를 뚜렷이 기억한다는 사실에 나도 놀란다.
그날, 나는 서울 혜화동의 성균관(成均館) 앞뜰, 흰 광목으로 둘러쳐진 한 구역 안에 앉아 있었다. 그곳은 개천절 경축 제1회 전국 백일장 본선의 이른바 ‘과장(科場)’이었다. 과장이라면 옛날 과거의 시장(試場)을 이름인데, 당시 그 대회는 옛날 과거 제도를 본뜬답시고 여러 가지 격식을 그에 준행했으므로 나도 덩달아서 이런 말을 써보는 것이다.
시제(試題)는 국왕 격인 대통령이 낸다, 시관(試官) 격인 심사위원과 과객(科客) 격인 응시자는 가급적 한복을 입어라, 뭐 이런 등속인데, 과장을 흰 광목으로 둘러막은 것 외에 특히 표가 나는 기억은 별로 없다.
이 대회는 당시 집권 자유당의 실세로서 국회부의장으로 있던 이재학(李在鶴) 씨가 주관했는데, 시조부와 한시부로 나뉘었고, 예선과 본선으로 갈라 시행되었다. 한시부를 둔 것은 옛 과거 냄새도 풍길 겸, 이승만 대통령이 한시를 잘해서 거기 아유(阿諛)하는 저의도 깔려 있지 않았겠나 싶었다.
이 대회는 제3회를 끝으로 1960년의 4·19의거에 자유당 정권이 무너지면서 자동 중단되는 아쉬움을 남겼으나, 그래도 시들었던 시조 문단에 활성의 불을 붙인 역사적 의미는 컸다.
먼저 신문 공고로 예선작을 모집, 50명을 뽑아 본선을 치렀는데 여기까지는 예사 백일장과 비슷했으나, 이 대회의 특징은 예선과 본선 따로 장원, 차상, 차하, 참방의 등급을 매겨 시상하는 제도였다. 짐작건대 백일장 본선이란 즉석에서 주어진 제목, 주어진 시간에 지어 내는 즉흥작 성격이므로 작자의 실력을 제대로 파악하기 어렵다 하여 예선은 예선대로의 의미를 따로 부여했던 것으로 해석되었다.
예선의 시제는 ‘통일 대한(統一大韓)’, 나는 장사봉(張師峰)이라는 가명으로 응모하여 예선 장원으로 뽑혀서 당시 〈동아일보〉 제1면의 5단통 광고란에 4수 전작이 큼직하게 실려 이리(裡里, 지금의 익산) 촌놈을 놀라게 했다. 나중 안 일이지만 그때 예선 심사의 주관자는 소설가 김동리(金東里) 선생이었다. 약관 12세에 전라감영(全羅監營) 시행의 백일장에 장원하여 세인을 놀라게 했던 내 선조(조부)의 기뻐하시던 모습이 새롭다. 그 〈통일 대한〉은 뒤에 〈관도(觀圖)〉라 개제하여 내 첫 작품집 《백색부(白色賦)》에 수록했다. 백일장 출품작을 제 시집에 수록한 예는 아마도 전무후무하리라.
아무튼 이 백일장의 예선 장원작으로 인연해서 여러 선배 대가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김동리 선생은 조연현(趙演鉉) 선생의 전갈이라 하면서 내게 엽서를 띄워 《현대문학》에 작품 초대를 주선해 주었고, 초정 선생과는 소천(召天) 되시기까지 함께 계간지 《현대시조》의 자문위원을 맡는 등 오랜 교분을 지속했다. 또 그 무렵, 우리 학교 수학여행단을 이끌고 경주에 간 김에 경주고등학교 교장인 청마 유치환 선생에게 전화를 걸어 ‘이리에서 온 사람’이라 했더니 대뜸 “아, 장사봉 선생이오?” 하고 반색해서 밤늦게까지 길가 포장집의 술통을 비운 적도 있었다.
마침내 본선이 시작되었다. 시제는 ‘독임란사 유감(讀壬亂史 有感)’, 역시 이 박사다운 출제라 생각했다. 예선 때, 남들이 흔히 하는 시조의 고루한 누더기를 좀 벗어 보겠다고 다분히 자유시적 품격을 가미한 것이 먹혀든다 싶어, 좀 더 형태상의 파격을 많이 하고 상징과 비유 등 자유시적 표현 기법을 대담하게 원용해서 제출했다. 그래 놓고 장원에 내 이름이 불리기만을 은근히 기다리는데 어이없게도 장원, 차장, 차하 다 지난 다음 참방 5명의 머리에 겨우 끼였으니 말하자면 제4위인 셈이었다. 나는 시조 현대적 개혁의 벽은 아직도 엄청 높다는 것을 새삼 절감해야 했다.
사설이 옆길로 샌 듯하나, 이런 옛이야기도 한 번쯤은 남겨둘 법해서 생각나는 대로 주섬주섬해 보았으니, 이제 말머리를 다시 초정 선생에게로 되돌린다.
그래 시지(試紙)를 내놓고 단상에 마련된 심사석을 보니, 열 명쯤 되는 심사위원들이 디귿(ㄷ) 자 꼴로 놓인 책상에 둘러앉아 시지를 돌려가며 심사를 하는 것 같았다. 그러더니 이윽고 소란이 벌어진 것이 보였다. 흰 두루마기 차림의 한 중년 위원이 시지 하나를 들고 연신 흔들어대면서 이 사람 저 사람과 말다툼을 하는 것 같다가 좀 잠잠해진 다음 심사 결과가 발표된 것이다. 허탈한 가운데 시상식도 끝나고 다들 돌아갈 채비를 하고 있는데 아까 그 흰 두루마기 차림의 심사 위원이 장내를 돌면서 “재삼아, 재삼아!” 하고 사람을 찾다가 또 “장사봉” “정소파”를 부른다. 이 두 사람은 행사가 끝나도 가지 말고 기다리라는 것이었다. 그 흰 두루마기의 중년이 바로 나의 별 ‘초정 김상옥 선생’이었다.
이번 백일장 대회의 본선 장원인 정소파(鄭韶坡) 선생과 예선 장원인 나, 이렇게 우리 두 사람은 명동의 어느 일식당에 불려 가 촌닭같이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누가 우리를 그곳으로 안내했는지는 생각나지 않으나 “재삼아”라고 부르던 박재삼(朴在森) 씨가 아닌 것만은 확실했다.
그곳에는 양복으로 갈아입은 초정 선생 외에 두 분의 신사와 한 분의 숙녀가 미리 와 있었다. 그중 눌언다변(訥言多辯)의 중년은 물론 초정 선생으로 충무(지금의 통영)의 어느 중고교의 선생님, 조그마하고 온화한 중로(中老)의 선비는 역시 충무 시의 한 여중고 교장인 소정 서정봉(素汀 徐定鳳) 선생, 키가 훌쩍 크고 상고머리가 인상 깊던 호남아는 아호와 성명이 같으면서 다른 이호우 이호우(爾豪愚 李鎬雨) 선생으로 대구 어느 신문사의 요직에 있다고 했다. 홍일점이라고 해도 어색하지 않을 중년 미인은 정운 이영도(丁芸 李永道) 선생, 이호우 선생의 누이로 서정봉 선생네 학교에 재직 중이라 했던가 퇴직했다 하던가. 전례에 없는 큰 시조 행사라고 원로 중진 소장 할 것 없이 경향의 시조인들이 다수 모였는데 이분들도 구경 겸 격려차 온 것이었다. 말하자면 시조단의 별 중의 별들이 한꺼번에 한자리에 모인 가위 별들의 향연에 끼어든 나는 감격에 겨워서 정신이 아찔할 지경이었다. 더구나 나같이 지방에 있는 사람으로서는 더욱 그랬다. 그때만 해도 다들 어려운 형편의 박봉 생활자들이라 이렇게 여섯 명씩이나 모아 놓고 서울 도심에서 자리를 베푼다는 것은 그리 쉽지 않을 터, 아무래도 그날 물주는 서정봉 선생이 아닐까 했다. 수인사를 나누고 축하한다는 의례적인 말들이 잠시 오간 다음은 다들 거의 말이 없었다. 초정 선생은 당신의 말마따나 ‘일적불음(一滴不飮)’이고 여성인 이영도 선생, 전형적 훈장형인 정소파 선생들은 모두 술잔을 입에 대지도 않았으니 술판은 영 헤성헤성했다,
그때 첫말을 꺼낸 것도 성급한 초정 선생이었고 그 자리가 파할 때까지 이른바 마이크를 독차지한 것도 초정 선생이었다. 내용은 그날 백일장 본선 심사가 영 틀려먹었다는 것이었다.
심사위원석의 맨 앞에 앉아서 먼저 시지를 든 초정 선생은, 비록 작자의 이름이 가려져 있었지만 그것이 ‘장순하 것’이란 걸 알겠더라 했다. 예선 장원작이 신문에 나 있어서 그것에 비추어 보니 틀림없더란 것이었다. 그래 최고점을 매겨 다음으로 넘기니 김동리(金東里), 서정주(徐廷柱), 박목월(朴木月), 유치환(柳致環) 등 소장 위원들은 모두 최고점인데, 일석 이희승(一石 李熙昇), 도남 조윤제(陶南 趙潤濟) 등 국문학 쪽의 원로들은 시조의 정형을 똑바로 지키지 않았다 하여 점수를 깎아 매겨, 집계해 보니 그래도 내가 제2석이었더란다. 그래 초정 선생이 이 심사 잘못되었다 재심하자고 우겨 국문학 쪽 원로들의 비위를 건드린 결과 괘씸타고 최하점으로 고쳐 매기는 바람에 이 지경이 되었으니 세상에 이런 놈의 심사가 어디 있느냐는 것이었다. 아까 본 심사석의 소란은 바로 그런 상황이었던 것이다. 초정 선생은 강연 같은 데서 차근차근 조리 있게 말씀하실 때는 아무렇지 않다가 몹시 흥분하시면 말을 많이 더듬고 입에서 침이 튀어도 의식 못 할 만큼 열변을 토하신다. 그날 그 자리에는 본선 장원자가 합석해 있는데도 막무가내였다. 듣고 보니 나를 두호하는 내용인데도 나는 좌불안석, 실로 몸 둘 곳을 몰랐다.
대개 말을 더듬는 이는 머리 회전이 빠른데 성질이 조급하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흥분하면 생각은 더욱 민활하게 앞서 가는데 말이 생각을 따라 주지 못하니 자연 말을 더듬을 수밖에 없으리라는 것이 나의 소박한 견해다. 많이는 겪어 보지 못해 장담은 못하지만, 기질로 보아 초정 선생의 격노는 대개 사사로운 일보다 공분인 경우가 많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백일장 뒤 우리는 모두 직장과 가정으로 돌아갔는데, 초정 선생은 곧 부산으로 옮기신 듯 뜸뜸히 생각나시면 그 좋은 글씨로 연하장 같은 것을 보내 주기도 하셨다. 내가 서울로 자리를 옮긴 1965년 무렵, 나와 전후해서 선생도 서울로 오신 듯 그 뒤로는 서울에서 자주 뵙게 되었다.
당시 내가 다니던 도서출판 일지사(一志社)와, 한때 출판사랍시고 차린 내 사무실이 다 안국동 네거리 근처였다. 초정 선생의 인사동 골동점인 아자방(亞字房), 그전의 화신백화점 근처의 표구점 등과 가까이에 있어 무시로 선생의 가게에 들러 좋은 차를 얻어 마시곤 했다. 내가 첫 작품집을 내면서 제자를 받은 것도 그 무렵이었다.
어쩌다 “점심이라도 잡수실까요?” 하면 사양하는 법 없이 흔쾌히 응하신다. 가식이나 빈 인사치레를 모르는 어른이다. 술을 통 안 자시니까 돈이 안 들어 좋기는 하나, 우리의 사귐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미묘한 구석이 있는 것 같다는 것을 느끼곤 했다. 거 왜 술꾼들이 한잔하면서 속에 있는 흉허물의 찌꺼기들 개운하게 다 털어내 버리는 그런 정서적 청소 작업이 잘 안 되어 아쉬움이 남은 데 대한 안타까움 같은 것이라고나 할까.
우리가 자주 가던 곳은 청진동의, 지금 교보빌딩 뒤쪽에 있던 ‘복청(福淸)’이라는 이 층의 일식집인데 당시에 중급치고는 제법 인기가 있는 곳이었다. 시키는 음식은 으레 복지리 아니면 대구지리라, 나중에는 선생 의견 여쭐 것 없이 내가 둘 중의 하나를 시키면 그저 빙긋이 웃기만 하셨다. ‘지리’란 일본말로 담백하게 끓인 생선 냄비를 이르는데 우리말로는 뭐라 하는지 지금도 일식 식당에 가면 역시 지리라 하는 그것이다.
그러다가 수년간 초정 선생과 담을 쌓고 지내게 된 사건이 벌어졌다. 사연인즉 이러했다.
당시 한국문인협회에는 시조분과가 따로 없고 시분과로 통합되어 있었다. 내가 시분과 이사로 선임되어 처음 이사회에 나가 보니 시조인으로서 이사는 월하 이태극(月河 李泰極) 선생이 달랑 혼자 있을 뿐이었다. 월하 선생이 깜짝 반기면서 이제 이사가 둘이나 되었으니 시조분과를 분리 독립시키는 공작을 하자는 것이었다. 당시 대다수의 이사들은 무관심하거나 반대 의견이었고, 그때는 나도 굳이 시조분과가 독립되어야 할 필요가 있을까 싶었으나 월하 선생의 열의에 밀려 그리해봅시다 하는 형편이었다.
그래 저래 몇 해를 지내는 사이에 분위기가 성숙되어 이사회에서 시조 분과의 분리 독립이 의결되었고 이어서 첫 분과회장을 뽑을 판인데, 당시 시분과 회장이 박목월 선생인 점을 감안하여 시조분과 회장도 그 정도의 권위자를 내세우고 싶었다. 그래 초정 선생을 설득해서 겨우겨우 응낙을 받아 냈다. 그 무렵만 해도 이치에 어긋나지 않는 한 초정 선생이 내 말을 묵살하지 않으리라는 자신이 있었던 것이다. 분과 회장을 선출하는 자리에 초정 선생이 나와만 주신다면, 내가 사회를 맡을 것이 확실하므로 무투표 추대로 몰아갈 요량이었다. 초정 선생이라면 누가 감히 거역하지 못하리란 확신이 있었다. 그러나 우려했던 상황이 기어코 벌어지고 말았다. 출석할 것을 세 번 다섯 번 다짐했던 초정 선생은 끝내 얼굴을 보이지 않았고, 사회를 맡은 나는 심한 배신감, 굴욕감, 모멸감 속에서 월하 선생의 손을 들어 주고 말았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그런 때 술 한 잔 따라 놓고 서로의 속마음을 털어내 보였더라면 물 흐르듯 흘려보낼 수 있는 하찮은 일이 아니던가.
그런데 그 뒤에 들려오는 소리에 나는 그만 기가 찼다. 장 아무개가 처음부터 월하를 당선시키기로 짜 놓고 초정 선생을 들러리로 이용하려 했다는 것이다. 정상적 사고를 가진 사람이라면, 비싼 밥 먹고 그따위 명분도 실리도 없는 바보짓을 누가 하랴 하겠지만, 세상인심이란 자기에게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없는 일이면 이치에 맞고 안 맞고 따져 보지 않고 어이없게도 남의 말에 귀를 기울여 버린다는 사실에 분노했다.
그래 내가 도리어 신의 없는 사람으로 몰려 있건만 까놓고 해명할 일도 아니고 보니 혼자 끙끙거리고 그 수모를 참고 견디는 수밖에 없었다. 그 뒤로 나는 한동안 나를 보는 시조인들의 야릇한 눈빛을 꾹 참고 견디어야만 했다. 어떤 이는 나를 세워 놓은 채 얼굴을 돌렸고, 어떤 이는 내가 악수하러 내민 손을 손등으로 쳐내기도 했다. 내게 대한 그런 모욕은 꽤 광범위하게 확산되었고 또 무척 집요하기도 했다.
참다못해 나는 장문의 편지로 사태의 자초지종과 나의 억울한 심정을 원고지 4~50장에 써서 초정 댁에 우송하고, 다시는 선생 근처로 발부리를 돌리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 없다고, 뒷날 그때 그 사태는 어떤 사람이 어떤 목적으로 모략의 모닥불을 피워 놓고 열심히 풀무질한 결과로서, 초정 선생과 나는 똑같은 피해자였다는 것을 알고 나의 섭섭한 감정은 많이 누그러졌다. 선생도 그 곡절을 알았으련만 끝내 한 장의 답신도 없고 말았다. 이렇게 인간적 교섭이 단절되었을 때에도 시인으로서 초정 선생이 나의 별인 것에는 변함이 없었다. 선생의 매끄럽지 못한 처신을 못마땅해하는 이가 있으면 ‘그래도 대초정 아닌가’ 하고 기를 써 변호하는 것은 내 몫이었다. 다시 몇 해가 흐른 어느 날, 초정 선생댁에서 따님이던가의 결혼식 청첩장이 날아들었다. 내 주소 성명을 쓴 필적이 분명 초정 선생의 친필이었다. 반가웠다. 나는 그걸 화해의 메시지라고 해석하고 싶었다. 그로부터 우리의 관계는 다소 서먹한 대로 만나면 이전처럼 큰절을 올리고, 웃으며 악수하고, 별로 길지 않은 대화를 나누는 데까지는 회복이 되었다.
한번은 어떤 이가 와서 나더러 무슨 시조문학상을 받으라 하기에 완곡하게 사양했다. 그런데 나중에 들으니 초정 선생에게서 거부당하고 나서 내게로 왔더라고 해서 우리는 무언중에 어떤 교감이 있는가 싶어 혼자 고소하기도 했다.
바로 그 무렵에 계간 《현대시조》에서 자문위원 교섭이 와서 ‘초정 선생을 모셔 온다면’ 하는 조건을 달아서 우리는 함께 자문위원이 되었고, 그 잡지의 일로 만나는 일도 더러 있게 되었다. 가끔 불리어 가서 안수기도를 해 드린다는 선정주(宣珽柱) 목사에게서 와병 중이란 소식을 들으면서도 미적미적 문병 한번 못 가고 유명을 달리하니, 싸우면서 정이 든다든가, 초정 선생과 나와의 반세기에 가까운 애환과 우여곡절의 인연도 여기서 끝나는가 싶어 서운했다.
그러나 나는 묘소의 영결식에 가서 조사도 읽게 되었고, 이런 추모의 글도 쓰게 되었으며, 또 비록 이름뿐일망정 선생 기념사업회에도 이름이 올라 있으니 우리 인연의 줄이 그리 쉬 끊어질 것 같지 않음을 예감한다.
초정 선생은 이제 몇백 억 광년으로도 잴 수 없는 하늘 저편으로 멀어지셨다. 그렇지만 내가 지금 확신하는 것은, 선생은 멀어질수록 더욱 빛나는 별로서 내 안에서 길이 반짝일 것이라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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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950년, 더 정확히 말하면 6·25 사변이 일어난 이틀 뒤에 이리에 있는 남성고등학교에서 수업을 시작하여 1965학년도 말까지 재직한 것으로 되어 있다. ‘취임’이라 하지 않고 ‘수업을 시작’했다고 한 것이나 ‘재직했다’고 하지 않고 ‘재직한 것으로 되어 있다’고 한 것들은 다 사실대로 적자니 그럴 수밖에 없다.
사변이 터진 6월 25일 바로 전날인 1950년 6월 24일에 나는 한글학회에 부설된 2년 과정의 ‘세종 중등 국어 교사 양성소’를 수료했다. 나는 교직에 뜻이 없어 현대사라는 출판사에 다니고 있는데, 형님으로부터 전갈이 오기를, 이리에 있는 좋은 학교에서 너를 초빙하겠다 하니 사절을 하더라도 직접 와서 하는 게 예의라 했다. 나는 출판사에서 내주는 왕복 티켓을 갖고 기차로 이리에 내려갔더니 그게 바로 마지막 열차였다. 사절하러 갔다가 다시 올라오지 못하고 그대로 주저앉은 곳이 바로 남성고등학교였다.
사절하고 돌아온 이튿날 교장님에게서 사람이 왔다. 다시 기차가 통할 때까지 단 며칠이라도 좋으니 빈 수업 시간을 메워 달라는 것이었다. 교장의 교육열에 감동한 나머지 ‘단 며칠’을 예정하고 시작한 게 그만 16년간 교직에 묶이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때 그 교장선생님은 신설 학교를 명문교로 키운 역량이 평가되어 정계로 진출, 지조 높은 야당 지도자로서 국회부의장을 지내기도 한 윤제술(尹濟述) 선생이었다. 단 며칠 빈 수업 시간을 채울 처지라서 취임식도 없이 ‘수업을 시작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또 1965학년도 말까지 ‘재직한 것으로 되어 있다’ 했으니 학년도가 바뀌는 1966년 2월 말에 퇴직했어야 옳다. 그러나 나는 1965년 겨울, 방학이 되면서 당시 국어과 전문 출판사인 일지사(一志社)에 초빙되어 새로 바뀐 고등 국어 교과서의 자습서 집필을 하게 되었다. 이듬해 개학이 되었어도 출판사에서 놓아주지를 않아 그만 눌러앉아 사직원을 우송하고 말았다. 나는 취임식 없이 취임했고 퇴임식 없이 퇴임한 별난 교직 생활을 한 사람이다.
이와 같이 국어국문학을 공부하고, 국어 선생이 되고, 문학가가 되고, 편집 출판의 일을 하게 된 일련의 경력은, 뒷날 탁족회라는 이름의 모임에서 유능한 시조인들과 인연을 맺는 내력과 관련이 있어 다소 지면을 할애하였다.
우리는 곧 서울로 이사했고 두 번 집을 옮긴 끝에 청운국민학교 뒤에 자그마한 한옥을 마련하였다. 직장과 집이 안정되니 하나둘씩 문학인들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초기에 자주 오던 사람으로는 김해성(金海星), 김준(金埈) 등 내가 교직 생활을 할 때 인연 있던 사람들이었다.
내가 2년간 전주고등학교에 근무한 적이 있었는데, 김해성은 당시 그 학교 학생으로서 시집(자유시)을 2권이나 냈고, 김준은 구름재 박병순 선생이 이리공고에 재직할 때의 애제자로서 재학 중에 시조화전을 열기도 하여, 다 같이 소년시인으로 문명을 날리던 재사들이었다. 그 무렵 무슨 연유였던지 소설가 신석상(辛錫祥)이 불편한 다리로 지팡이를 짚고 동행하기도 했었다.
김해성은 나보다 먼저 《자유문학》에 자유시가 추천되었고 김준도 《시조문학》에 시조가 추천되어 등단해 있었다. 얼마 뒤에 자주 들른 그룹에는 서벌(徐伐), 이상범(李相範), 윤금초(尹今初) 등이 있었다.
이상범은 이때 장교로 군복무 중이었는데 《시조문학》과 공보부 신인예술상에 이어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했고, 서벌은 사병으로 복무 중이었는데 《시조문학》과 신인예술상으로 데뷔해 있었다. 윤금초는 서라벌예대를 갓 졸업하고 곧 가족계획협회에 근무하면서 좀 늦게 《시조문학》과 신인예술상에 이어 〈동아일보〉 당선으로 데뷔, 그들은 선후하여 문단에 나왔다.
그들이 오면 으레 술판이 벌어졌고 시조를 논하다가 통금 시간이 다 되어서야 서둘러 돌아가곤 했다. 당시의 술이란 막걸리나 약주라고 하는 저질 술이고 안주라야 날두부를 김치로 싸 먹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한번은 밤중에 쿵 하는 소리가 나서 나가 보니 둘 다 군복 차림인 이상범과 서벌이 담을 뛰어넘어 와 있었다. 통금 시간을 어떻게 뚫고 왔는지 몰랐다. 우리는 술잔을 기울이며 시조 이야기로 밤을 허옇게 새웠다. 서벌이 요즘도 그때를 회고하는 걸 보면 그들에게도 인상이 깊었던 것 같다.
그때도 해마다 주요 신문에 신춘문예 당선자가 나오고 《시조문학》에서 추천작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지만, 이들의 데뷔 작품들―이상범의 〈일식권〉 서벌의 〈낚시 심서〉 윤금초의〈내재율〉 등―은 구태의연한 매너리즘 속에서 가장 신선하고 발랄하여 나는 이들에게 시조의 장래를 걸고 있었다. 당시 대다수 선배들의 눈에 급진적 성향으로 비쳐 그들을 경계하는 상황 속에서 나는 격려와 고무를 아끼지 않았으니 그들도 나를 좋아할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 무렵인 1969년 1월, 김해성이 《한국시단》이라는 월간 시지를 창간하고 2월호부터 내게 월평을 청탁해서 평필을 잡았다. 이 잡지는 3호를 내고 휴간했으므로 월평은 2회에 그치고 말았으나 그런대로 그것이 최초의 시조 월평이 되었다.
‘세검정 대학원’
이러구러 하다가 1970년대 초에 나는 금강출판사를 차려 독립했으나 시운을 못 만나 2년 만에 도산하고, 할 수 없이 편집 용역으로 호구 연명을 하면서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무실도 처음에는 인사동 사무실을 계속 쓰다가 광화문으로, 다시 내가 이사 가서 살던 세검정 집으로 옮겨 다녔다. 편집 용역이란 것도 퍽 다양해서 《한국 우정사(郵政史)》 같은 방대한 일을 해내기도 했고, 《국어대사전》 같은 어려운 작업을 하기도 했다. 《우정사》는 체신부가 발주한 일인데 김준(金埈)이 주선해 준바 일을 잘 마쳤다고 표창장을 받기도 했다. 《국어대사전》은 금성출판사의 용역인데 완성을 못 본 채 중단되고 말았다.
이런 편집 일에는 많은 일손이 필요하나 편집 용역이란 워낙 각박해서 고봉의 일꾼을 쓸 수가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서로의 필요에 따라 나는 세 번째 그룹의 시조인들을 만나게 된다. 서로의 필요란 이런 것이다. 내게는 적은 보수로 일 도울 사람이 필요했고, 상대에게는 비록 박봉일지라도 어떤 직능을 익혀서 떳떳한 직장을 가질 일이 필요한데 젊은 문인들에게 편집 직종은 그런대로 매력이 있었다.
이때 인연을 맺은 사람들 중 데뷔했거나 데뷔를 준비 중이던 시조인들은 오영빈(吳永彬), 김상묵(金相默), 박시교(朴始敎), 선정주(宣珽柱), 김승규(金承奎), 이기라(李起羅), 김영재(金永在), 유재영(柳在榮), 최숙영(崔淑英) 등이 있고, 조금 경우가 다른 사람으로 박천석(朴千石)이 있었다.
이들의 처지는 각기 달랐으나 몇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첫째로 직업이 없고, 둘째로 특별한 기능이 없고, 셋째로 우수한 지능의 소유자들이라는 점이었다. 이들은 대개 교통비나 받는 정도의 보수로 내 일을 도우면서 편집교정을 익혀서는 빠르면 3개월 늦어도 5~6개월 안에 직장을 얻어 나갔다.
이들은 일을 쉽게 배우고 곧 숙달했다. 당시 내게는 편집인을 구해 달라는 요청이 많았다. 가령 어떤 출판사에서 3년쯤 경력 있는 편집인을 구한다는 연락이 왔다고 하자. 나는 먼저 들어온 사람의 순서나 사정이 급박한 사람을 가려서 추천한다. 내가 가려낸 사람이 3개월 된 사람이거나 6개월 된 사람이거나 별로 걱정하지 않고, 우리 출판사에서 3년쯤 근무한 경력자로 이력서를 쓰게 하여 내가 먼저 저쪽 편집장을 만난다. 머리가 좋고 근면 성실하니 적임자라고 추천한다. 다만 편집이란 익숙지 않은 일거리는 적응할 동안이 필요하니 처음에는 당신이 손잡이를 해 주기를 바란다 하고 들여보낸다. 그러면 그걸로 무사통과다. 누가 보아도 무모하다 싶은 나의 이런 취업 작전은 한 번도 뒤탈이 난 적이 없었다. 도리어 좋은 사람 소개해 주어서 고맙다는 치하와 함께 가끔 술을 대접받기도 했다.
나의 이런 일들을 곱지 않은 눈으로 보는 이도 있는 것 같았다. 지금 누구라고 하면 다 아는 시조단의 중진 한 사람이 이영도 선생에게 장순하가 취직을 미끼로 제 세력을 모으고 있다고 비아냥했다가 되게 핀잔을 받았다는 것이었다. 지금처럼 취직이 어려운 때 발 벗고 후배들 직업을 주선해 주니 얼마나 장한 일이냐, 너는 왜 그리 못하고 비난만 하느냐는 것이었다. 이 부분은 이영도 선생에게서 직접 들은 이야기다.
독자들은 위에 거명한 면면들을 지금 보면, 나의 추천사가 전혀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알 것이다. 혹 3개월짜리를 3년이라고 경력을 속인 것은 거짓이 아니냐 할지 모르지만 나의 신념은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두뇌가 명석하고 근면 성실한 사람이라면 3개월로도 능히 3년의 경력을 터득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그것을 단적으로 증명할 것이 있다. 그들 중 한둘은 편집계를 떠났지만 나머지는 모두 현재 유수한 출판기관에서 요직을 맡고 있거나, 요직에 있다가 독립하여 자기 출판사를 성공적으로 운영하고 있음이 그것이다.
그들은 저희끼리 우리 집을 ‘세검정 대학원’이라고 부른다고 했다. 어떤 뜻으로 한 말인지 직접 듣지는 못했으나 일차적으로는 취업이 잘된다는 의미였던가 싶다. 그러나 더 큰 의미는 따로 있지 않았을까 한다. 그것은 오늘날 그들이 차지하고 있는 시조문단상의 위상을 보고 하는 추리이다. 시조가 뚜렷한 지향점을 잡지 못하고 방황하던 시기에 여기 모인 젊은이들은 선진적 분위기 속에서 서로 문학적 안목을 높이고 연찬을 해 나가는 곳이라는 뜻을 이렇게 비유적으로 표현하지 않았든가 한다.
이 ‘세검정 대학원’에는 정식 대학원생 말고도 자주 드나든 객원 몇이 있었다. 서벌, 윤금초, 김현, 김원각 등이었다. 또 가끔 한 번씩 들여다보는 길손으로 이상범, 유제하(柳齊夏)가 있었다.
‘탁족회’라는 맑은 모임
세검정의 우리 집은 게딱지 같은 ‘기역자’형 집인데 그 뜰 바닥에 마루를 놓고 지붕 창을 가려 판잣집 같은 곳을 사무실로 썼다. ‘세검정 대학원’의 교실은 이렇게 초라한 몰골이었다.
지금 같은 냉난방 시설이 있을 리 없으니 겨울이면 북한산 내리바람에 손발이 다 얼고, 여름이면 슬레이트 지붕이 우려서 온몸을 통째로 삶는 것 같았다. 그래서 한여름 복철이면 닭 두어 마리 삶아 들고 구기동 골짜기에 가서 시냇물에 발을 담그고 복달임을 하는 것이 연중행사처럼 되었다. 너나없이 술 고픈 시절이라 안주가 없어도 막걸리를 통으로 마시고 떠들어댔다.
그 모임은 특별한 목적도 정해진 이름도 따로 없었다. 그리고 ‘세검정 대학원생’ 중에서도 빠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시조인 아닌 사람이 끼어들기도 했다. 박시교와 동향인 자유시의 권달웅(權達雄) 같은 사람은 단골 객원 손님이었다.
이렇게 몇 해를 계속하는 동안에 차츰 모임의 모양새도 갖추어져 갔다. 모임은 대개 여름으로 정례화했고, 참가자도 차츰 시조인으로 단일화해 가더니 시조인 중에서도 타성적이고 수구적인 성향의 사람은 사라지고 의식적이고 진취적인 성향의 시조인들의 모임으로 그 성격이 정착되어 갔다.
이러한 일련의 변화는 어떤 누가 주장하거나 선도한 것이 아니라 이심전심, 요즘 용어로 보면 ‘국민적 합의’로 이루어진 것들이었다. 그들은 이 모임을 시조 개혁 운동의 구심체로 몰고 갔고, 누구로부터 비롯되었는지 모르지만 모임의 이름도 ‘탁족회’라 불리게 되었다.
이름은 ‘탁족’이라도 모인 사람의 성정과 기상은 가을 하늘처럼 맑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