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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강 1903년 3월 27일 회기 [르네상스: 시간의 새로운 측정]
시간관념의 역사(Histoire de l’idée de temps)
- 벩송의 꼴레쥬 드 프랑스 강의(Cours au Collège de France 1902-1903)
- 리끼에(Camille Riquier, 1974-) 편집, PUF, 2016, pp. 251-266(P. 395).
고대 철학에서 사물의 이동과 발전을 설명하는 데, 외적으로 변화를 설명하면서는 수를 통하여 표현할 수 있었다. 그런데 사물의 내부를 동질적으로 여겼기에, 사물들 전체와 개별 사물 각각 사이에 어떤 연관을 생각했으리라. 그래서 사물들의 전체를 보편영혼으로 그리고 개별물 각각 중에서 이동과 변화를 숫적으로 표현되지 않는 내적인 어떤 잠재력(뒤나미스)같은 것을 영혼이라 표현했을 수 있다. 그 잠재력은 하늘에 있었고 그것의 모습이나 능력(권능)은 하부의 세계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완전하고 영속적으로 보았다. 그 영속성과 불변성에다가 선함과 아름다움을 보태어 동경하고 또는 매혹되는 것으로 여겼다. 이것이 신화의 시대에서 이법(원리)의 시대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생각일 것이다.
잠재력이 개별자인 개인의 인격에게 각자의 몫으로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고대 그리스에서는 하지 않은 것 같다. 개인이 아니라 인간 종에게 속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개별영혼보다 보편영혼을 다루었을 것이다. 그러나 알렉산드리아 시대에 와서는 개별영혼에 관심을 갖고, 그 영혼이 신체(또는 물질)와 연관에서 자율성을 갖는다고 생각하여 영혼에 능동성과 자율성을 부여하고자 생각했다고 가정해보자. 그러면 개별영혼의 그 능동성과 자율성은 어디서 온 것인가? 당연히 보편(우주) 영혼에서 왔을 것이다. 그 우주영혼은 불변하며 영속하는 천구에서 왔을 것이다. 추론상 천구는 완전하고 불변하며 영원하다. 그 천구는 움직이지 않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부동에서 운동은 어떻게 나올 수 있는가? 여기서 알렉산드리아학파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와 달리, 누스의 이중성을 창안한 것으로 보인다. 누스은, 벩송 식으로 의식은 다른 것과 더불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자기 권능(잠재성과 능동성)을 지속하고 있다. 즉 운동하고 있는 어떤 것이다. 그 누스가 자기 전개장 두 가지로 분열한다. 하나는 그대로 유지하는 측면이 있고 다른 하나는 자기 바깥과 관계를 맺는 측면이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즉 자기 완결이 있으면서, 권능의 능동적 측면은 자기 지속을 풀어나가는 즉 흘러나가는 측면이 있다. 자기 완결은 무한하고 완전하기에 변하지 않는는데 비해 흘러나가는 지속은 타와 섞임으로 조금씩 변하고, 게다가 멀리까지 가면 갈수록 능동성은 약화되고, 약화되는 만큼이나 다른 측면(신체, 물체, 물질)의 강화(증가)로 가다. 이 방방향(경향)에서 능동성은 소멸하고 수동성만이 퍼져있을 때 공간화이며 이를 물질이라 부를 수 있다. 이 물질의 경향은 의식의 방향과 거꾸로 이다. 그래서 플로티노스는 신체의 방식 또는 습관에 빠지지 말고, 의식의 활성화 방향으로 올라가야 한다고 한다. 그 방향이 생명, 의식, 덕목, 아름다움의 길이다.
그러면 근대인들은 신체, 물체, 물질에서 벗어나서 도덕적, 종교적 삶을 진실한 의식적 삶을 보았을까? 스콜라철학의 천상의 완전성과 우주(보편)의 원리가 인간 삶으로(예수의 육화로) 일관성이 있는 설명으로 세상을 설명할 수 없음을 깨닫는다. 우선 천상의 무한은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설에서 지구를 토대로 위라는 개념설정이 깨져 버린다. 그리고 항성들의 영속적 제자리 돌아옴도 물체들의 자기 운동 방식이 있다고 여긴다. 그 운동들의 시간을 재는 것은 움직임들을 잘게 쪼개서 각각의 단위를 수로 환원하는 방식을 찾아낸다. 쪼개는 분석과 기하학을 보탠 데카르트의 분석기하학의 방식은 이런 발상에서 나온 것이다. 벩송이 보기에 변화와 운동의 흐름을 실험적으로 또는 경험적으로 모아 체계화하려는 이는 베이컨인데, 이런 방식을 구체적 실험하고 경향성을 찾는 것은 생물학이 도래한 19세가 중방 이후라고 한다. 르네상스 지식인들은 고대 사유의 방식을 완전한 하늘에서 지상으로 내려오는 설명이 아니라, 지상에서 이동과 변화를 설명하는 방식으로 점들을 세는 숫적 방식과 더불어 더 잘게 자르고 병치(나열)하여 설명할 수 있는 수학에 의존했다는 것이다.
르네상스 시대는 고대처럼 완전에서 내려오는 방식이 아니라, 지상의 불완전 사이에서도 이동과 변화의 과정을 숫적으로 나열할 수 있다는 발상이 나온다. 이 발상은 지상의 이동(운동)을 무한히 자를 수 있고, 이들을 4연산에 의해 계산가능하다는 것이다. 그 계산가능에는 전체의 양은 불변이라는 것을 먼저 인정하고 있을 때, 계산가능하다. 총량의 불변, 나아가 운동량 불변의 원리를 상정(요청) 하였음에도, 이를 법칙으로 설정한다. 말하자면 운동의 방향과 순서를 무시하고, 사람들은 수학적으로 인수분해 하듯이 해답(운동양의 일정함)을 찾을 수 있다고 한다. 계산 가능한 운동은 운동의 지속에서 잘려진 부분들이 동등한 성질(동질성)을 지니고 있다는 가정을 하는 것이다. 벩송은 어떠한 부분도 동질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고 한다.
근대인들이 최소 단위의 동질화를 통하여 모든 운동을 수량화하였다. 벩송이 보듯이 동질화가 안되는 심리학적 부분이 있다는 것을 그들이 모르지 않았다. 그것을 근대인들은 운동이란 개념 대신에 에너지라는 개념으로 바꾸려고 하였다. 그 에너지가 우선은 물질 속에 있는 것으로 운동량과 에너지량을 등가로 하려고 했을 것이다. 그런데 생명체에 들어있는 에너지는 운동량으로 등가로 표시하면, 모든 인간의 능력(창조력)은 동일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문제에서는 자유의지 같은 것으로 설명하려고 달리 문제제기 한다. 그러나 이 15강에서 아직 다루지 않았지만, 물질에서 같은 수적인 점들이 동일한 에너지량으로 설명하는데도 문제가 생긴다. - 물론 지구의 공전 운동은 뉴턴이 질량이라는 개념을 풀어놓았는데, 왜 같은 미분을 적용하는 라이프니츠는 에너지(또는 mens)라는 개념작업을 했을까 - 에너지 양(또는 질)을 풀어가는 것이 화학에서 원자의 종류들이 질적으로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야 운동과 변화의 숫적인 나열의 시간과 다른 시간의 등장은 생물학에서 생명의 변화과정 즉 진화과정에서 시간은 의식의 변화과정이기에 다른 시간 개념작업이 필요하게 될 것이다. 벩송이 자신의 지속(즉, 시간)을 생명의 기원 또는 자연(우주)의 기원에서부터 이어짐이라고 하는 이유가 있다. 즉 생명의 시간은 자를 수 있는 물체를 숫 적으로 세는 시간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 것이다.
그 생명이 고대철학에서 우주 영혼과 개별 영혼의 문제였고, 그리고 근세철학에서 영혼과 신체(심신 이원론)이었으며, 벩송에서 의식, 기억, 생명의 문제로 제기되는 것이다. 고대에서 누스의 하강에 맞추어서 보편영혼과 개별영혼의 대응론이 있었다면, 근세의 평행론은 지구의 운동으로 인해 신체(물체)의 운동 성립으로 운동의 미분화된 숫자화를 통일시켜주는 총량불변의 원리에 따라 총량을 지닌 정신(논리)가 우선하는 평행론이 제기되었다. 총량의 불변을 의심한 에너지보존 제2법칙의 제기에 따라 총량의 비결정과 미래의 비결정에는 의식 과 생명이 숫적인 점으로 환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보편영혼과 달리 살고 있는 개별영혼의 권능(능동성)과 자유(새로운 경향, 도약)를 말할 수 있게 되었다. (55N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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벩송의 다양체의 이론은 리만 수학에 있지 않을 것이다. 고대 플로티노스의 일자와 다자에 연관이 있고, 구체적으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간에 따른 운동의 길이(선위의 점들)에 대한 비판으로, 운동이 여러 방향임에도 등직선(등속도 운동)으로 설명하는 것을 오류라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플로티노스의 시간-운동의 설명에서 방법의 변화를 겪을 르네상스를 상세히 설명하면서 영혼의 능력의 물질의 힘으로 용어를 변형한 것은 케플러의 작품이라 한다. 벩송은 케플러도 첫 작품의 첫 판본(1596년)과 둘째 판본(1621) 사이에서 용어의 변화를 찾아낸다. 갈릴레이가 땅으로 내렸다고 했지만 땅으로 내리기 전에 하늘에서 일정한(등직선)을 땅으로 내려오면서 여러 선들과 다양한 속도들을 생각한 이는 케플러인 것으로 설명한다. - 암암리에 점 자체가 운동할 때 여러 방향으로 다양한 속도를 가진다는 의미를 벩송은 알아차리고 설명도 하고 있다. 이 점에서 다음 17강의의 “의향(intention)”은 내포(intension)와 다르며, 벩송이 꼴레쥬드 프랑스 이전의 “심리학 강의”들에서 ‘의향’을 항목으로서 다룬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 “의향”을 물질에서 다양체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비유클리트 기하학 이전에 철학사 속에서벩송은 다양체의 개념작업을 착안하고 있었다. 쿠자누스, 브루노, 케플러(1621년), 갈릴레이로 이어진다. 갈릴레이의 종교재판은 1632년이었다. (55O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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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5강 1903년 3월 27일 회기 pp. 251-266 [르네상스: 시간의 새로운 측정]
시간문제에 관하여, 고대인들의 관점에서 근대인들의 관점으로 이전하여 연구할 것이다. (251)
시간의 개념작업은 .. 철학적 사변과 근대인들의 과학적 사변으로부터 벗어나야 할 것이다. (251)
시간의 개념 작업은, 우선 시간을 우리 의식 안에서 연구하는 것, 그리고 나서 의식 밖에서 연구하는 전혀 다른 여러 관점들이 있다. (251)
안에서 관점에서 .. 우리의 지속은 단순하고 불가분이며 실재성 자체이다. .. 순간들과 단위들을 보태기 하면서 우리는 결코 지속을 만들지 못할 것이다. (251)
우리는 해체작업에서 해체작업으로 일종의 심리학적 먼지(poussière)로 가는데, 이렇게 하는 것처럼 영국철학자들은 표현으로 마음(심성)-먼지([mind-dust])를 사용하고, 여기서 [심성적 사실들]은 항상 후퇴한다. [이들은] 작은 것으로, 가장 작은 것으로, 실현된 무한이 있다고 여긴다. (252) [신간트주의의 과학주의와 논리실증주의는 그 작은 것(또는 무한소)이 실재한다고 여긴다. 그것은 수학의 상징(기호)과 같은 것으로, 계산하기 위한, 또는 측정하기 위한 방편이다. 영혼의 상상작업 속에 그 무한소는 실재한다. 어쩌면 수학적 단위보다 더 작을 수도 있다. 그게 형이상학적 사유의 경향성이다.]
진리로서, 지속은 전혀 구성된 것도 아니고 종합도 아니다. .. 부분들로 재구성하는 것은 모방작업(une imitation)이고 번역작업(une traduction)이다. 이러한 것은 실재적인 심리학적 상태들과 매우 다른 인위적인(artificiels) 것이다. (252)
이런 것을 실재와 동등하게 여기는 것, 그것은 지속이 아니다. 사변적 철학에 의해 지속에 동등하게 동화시키는 것은 지속을 모든 종류의 부조리성(des absurdités)에로 인도할 것이다. (252)
모든 난점들, 모든 부조리성들은 거기에서 온다. 따라서 내적 시간, 즉 지속을 형성된 것처럼, 또 다수의 부분들의 의해 구성된 것처럼 고려하기를 거부해야 만 한다. 이것은 불가분의 전체이다. 소위 말하는 부분들은 요소들로서 또한 요소적인 상징들로서, 이런 우리가 이해 첫 강의에서 말했던 것과 같다. (252)
흘러나옴들의 연속성, 거기에 결론이 있는데, 내적 지속에 도달하기 위해 우리가 이른 결론이다. (252)
지속의 흐름, 나의 지적 본능, 심리학적 경험, 지각작용의 수축[줄어듬] .. 이것을 우리는 의식적 인격성이라 부를 것이다. (253) [DI에서 외부와 연관이 거의 없는 심층자아를 인격성이라고 부르고, 지속의 근거로 삼는다.]
이런 인격성은 훨씬 더 넓은 어떤 것 속에 우리에 의해 잘려진 것으로 주어지기에, 우리는 우리 인격과 구별된 실재성을 제시하기 위하여, 일종의 도약(une espèce de saltus)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253) [인격성의 확장은 도약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흐름 또는 유동성인 한에서 온영혼과 이어져 있다.]
우리는 지적 본능이라 불릴 수 있는 것의 흐름 속에 위치해야만 한다. 우리 자신의 실재성으로부터 구별된 실재성의 현존인데, 그 현존은 단순한 요청이 아니다. 이 현존은 우리에게 우리자신의 고유한 현존으로부터 주어진 직관과 동일한 종류의 직관 속에 주어져 있다. 이 마지막 현존, 즉 우리자신의 고유한 현존은 두 부분으로 잘려져 있는데, 의식의 진행과 유일하면서 전체인 현존 속에 반성의 진행에 의해서 이다. (253) [자아의 인격성은 의식인 한에서 두 가지 방향이 있다. 의식의 진행과 반성의 진행, 나로서는 의식의 확장과 자아의 반성이라는 두 가지 경향 일 것이다. 즉 한편으로 예상참여의 진행이고 다른 한편 과거에서 지각을 불러오는 반성일 일 것이다. (55MMG)]
문제는, 우리에게 우리의 지속의 실재성과 다른 실재성이 있다고 가정하면서, 이런 실재성은 무엇일 수 있는가? 우선 이런 실재성이 지속하는지를 아는 것이다. (254)
지난해 인용했던 예가 있다. 주목할 만한 사실의 예이며, 아주 다른 가설에서 완전히 불가사의한 예이다. .. 즉 물 컵 속에 설탕 조각. (254) (설탕물 EC 1장, 9, 338, 339)
외적이고 물질적인 실재성의 성숙[숙성] 과정이 생산되는 것을 기다려야 한다. (254)
따라서 사물자체도, 자아자체가 지속하는 방식과 유사한 방식으로 지속한다. (255)
만일 사물들의 지속이 우리 자신의 지속과 동일하였다면, 그러면 이 사물들은 우리의 인격성과 하나를 이룰 따름이다. 따라서 본성상 차이가 있다. 이 차이에서 두 가지 실재성의 구별이 나온다.우리는 이런 차이를 더 멀리 찾아가지 않아야 한다. (255)
우리 지속, 그것은 우리 의식 자체이며, 그것은 이질성(l’hétérogenéité) 자체이다. .. 이것은 앞서 주어진 자료들을 가지고 재구성될 수도 없고 예견될 수도 없는 어떤 것이다. (255)
필연성은 아마도 고유한 기한(le terme propre)이 없다. .. 이 필연성은 물질적 세계의 제한된 부분들에만, 어느 정도로 현상들의 닫힌 원들에만, 관계한다는 의미에서 필연성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원을 크게 하면 할수록, 사람들이 우주의 전체성을 향하여 가면 갈수록, 사람들은 우리 의식의 현존에 비교할 수 있을 총체적 현존에 관여한다. [결국] 극단적으로 열등한 현존을 가정해야 할 것이다. (256) [극단적으로 하등한 현존이란 의식이 전혀 관여하지 않은 유동하는 물질일 것이다. 이 물질은 비결정성이기에 필연성이란 거기에 있을 수 없다. 의식의 작동이 자유이며, 창조이다.]
왜냐하면 순간적 정신(la mens instantanea), 이것은 무식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거의 순간적인 정신(la mens quasi instantanea), 기억은 거의 무의식적인 것이다. 그런데 사물들의 지속의 요소는 순간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지속적인 것이나 거의 순간적인 것이며, 따라서 비결정작용(l’indétermination)이다. (256)
너무나 비결정작용이라, 비결정작용은 아주 약할(très faible) 수 있다. ..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형이상학적으로 그것은 우리의 내적 지속에 대해 계산 가능한 어떤 것이라고. (256) [아무리 작은 지속이라도 비결정인데, 기호화 또는 상징화로 결정작용으로 환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근대의 시간 개념작업]
두 가지 지속, 나 자신의 지속과 물질의 지속에 대해 좀 전에 막 말했다. 나는 이 둘 사이에 많은 매개적 현존들을 가정해야 한다. .. 이 모든 지속들은 무한한 수로 되어 있는 지속들이다. ... 이것을 동등한 거리로 자르면, 이 잘려진 단면들의 수는 동질적 시간을 구성한다. 이 시간은 상징적 표상일 뿐이다. (257)
우리가 도달한 시간의 개념작업이다. 또한 이러한 가설을 가지고 도달한 집합의 철학(la philosophie d‘ensemble)이다. 이 철학은 모든 고대철학이 우리에게 가게 한 결론과는 반대 결론이다. (257)
고대철학의 개념작업은 어떤 것인가? 항들의 순서가 다음이다. 우선 이데아들. 즉 비시간적 본질들이 있고, 이것들은 모델이며, 원형이며 법칙들이다. (257-258)
왜냐하면 플라톤은 우선 데미우르고스를 통해 이데아들 이후에 창조했던 것, 그것은 시간즉 세계의 영혼이었기 때문이다. 시간과 세계의 영혼 이후에, 우리가 구체적 지속들이라고 부르는 것을, 즉 생성의 개별적 과정을 창조했기 때문이다. (258)
그리고 시간 일반으로부터 구체적 방식으로 지속한 현존들에게 사람들이 내려갔고, 사람들은 덜 실재적인 어떤 것에 이르기 위하여 실재성으로부터 멀어졌다.
우리가 도달했던 주제는 이와는 정확히 반대 방향이었다. 실재하고 있다는 것은 진동하지 않는 실재성이다. 왜냐하면 이런 지속만 이 고체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 이것은 이미 상징적인 것이며, 모든 지속들의 공통척도이다. 즉 그것은 척도이며 상징일 뿐이다. (258)
이데아란 이 단어는 협약적인(conventionnel) 어떤 것이고 인위적인 어떤 것이다. 따라서 이는 우리가 도달하려는 철학과는 전도(une inversion, 반대)되는 철학이다. (258) [벩송의 사유는 고대철학의 사고에 전도된 것이다.]
근대 철학은 매우 분명한 두 부분을 포함하고 있다. [하나는] 체계적인 부분이며 .. 다소 변형된 플라톤주의이다. 일종의 전통이 철학에게 부여한 틀이다. 다른것이 있는데, 이 틀 속에 그럭저럭 유지하면서 찾으려 애쓰는 직관들이 있다. (259)
이런 직관들을 찾으려는 것을 사람들은 막을 수 없다. (259)
고대인들의 관점과 근대인들의 관점 사이에 이동[이전]이 정확하게 어디에서 있는 지를 나는 찾기를 바란다.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1561-1626)에서 였다. (259)
프랜시스 베이컨은 오늘날 사람들에게 끼친 영향을 조금도 행사하지 않았다.그는 매우 명석한 정신임에도 불구하고, 철학과 과학을 다룸에서 단순한 애호가(아마추어)였다. 즉 수학적 것에는 거의 들어가지 않고 또한 순수 수학을 너무 무시하였다. 수학을 알기는 알았으나 깊이있게 들어가지 않았다. (259)
그의 저술 신기관(Novum Organum,1620), 즉 실험적 방법은 19세기에서 발전되었다. 19세기 전까지는 물리-수학이었는데, 이후에 실험에 직접호소 하였다. (260) [화학이 물리학적 견해에서 떨어져 나오는 것도 18세기말 19세기 초이다.]
수학적 실험 과학(la science expérimentale mathématique, scientia ancilla mathematis)는 실재성의 운동을 따르도록 되어 있는 절차의 일체를 계속하고 있었다. .. 이런 방법은 여기 저기 점들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연속된 연결선에 의해 점들을 통합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인위적이 아니라 연속 운동의 곡선을 거리는 것이다. (260)
베이컨은 아마도 연속적 실험을 예감했을 것이다. 신기관(1620)에서 묘사한 방법은 18세기 말까지 적용되었던 방법에 가장 가까운 방법이었다. (261)
우리들의 철학과 과학의 기원들(les origines)은 아주 다르다. 기원들은 여러 가지이다(multiple). 게다가 모든 역사적 사건들에서처럼 우발적 사건(l’accident)이다. 확실히 생산되었던 것은 혁명(la révolution), 또는 오히려 진화(l’évolution)이다. 이 진화는 수학들이 계속해서 양생되었지 않았다면 거의 생산될 수 없었을 것이다. .. 또한 크리스트교가 매우 깊은 영향을 행사했다는 것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정도이다. .. 왜냐하면 중세의 철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에 전적으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순수하게 합리적으로 말하자면, 또한 순수 rsua을 초월하는 사유를 지닌 흐름도 있다는 것이다. (261)
내가 보기에 모든 것은 고대의 관점으로부터 전도(une inversion)에 의해서 설명된다. 그러나 그 전도는 마지막 그리스 철학자들에 의해서, 즉 플로티노스에 의해서 지적되었던 것이다. 그것을 우리는 특별하게 다루었다. (262)
혁신(l’innovation), 개혁(la réforme)이 철학 속에서 생겨났다. .. 이 철학은 세 가지 위격(trois hypostases) 중에 하나를 제1서열로 놓았다는 것이다. 그것은 세계 영혼 즉 보편영혼이었다. (262)
이것은 하나의 위격이 아니다. 르네상스시기에 철학 변형작업을 따르는 것으로 충분하였다. 르네상스 철학자들은 대부분 또는 모두가 다양한 정도에서 네오 플라톤주의자들, 네오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이며, 그러나 특히 네오 플로티노스주의자이다. 이
중세와 르네상스 사이에 쿠자누스(Cues, 1401-1464)가 있다. 그의 저서, 무지한 학식에 대하여(De docta ignorantia, 1440)(De la docte ignorance)에서 그는 우리가 철학과 과학이 취할 방향을 제시했다. 그리고 우주는 심리적 본성으로 되어 있고 동시에 플라톤이 세계의 영혼이라 부르는 것과 같은 것으로 제시하는 노력이었다. 즉 그것은(ce) 심리학적 어떤 것임과 동시에 수적인 어떤 것이다. (262)
무지한 학식에 대하여(1440)이 1부와 2부 10절에서 그는 자연은 운동에 의해 생산된 모든 것들 얽힘(l’enchevêtrement)이라고 제시한다. .. 비교가 나오는데, 신이 있고, 이 단어들은 어떤 운동으로부터 정해진 질서 속에서 나온다. 이처럼 운동은 보편자로부터 개별자로 내려온다(ab universale contrahitur in particulare).
이 비교는 아주 놀라운 것이다. 사람들은 단어들을 분석한다면, 음절들과 철자들을 발견한다. 사람들은 정신(l’esprit, [영혼])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그 전체가 정신이다. (263)
쿠사누스는 아리스토텔레스에게 그의 관념들이 아닌관념들을 부여한다. 그리고 수가 사물로 내려간다는 말하는 데는 일치한다. 수가 사물들을 설명한다는 데 일치한다. (263) [이데아 또는 형상들이 사물 속으로 들어가는 것과 달리, 수(le nombre)가 사물 속으로 들어간다. 획기적인 변화이다. ]
르네상스 이전부터 우리는 고대철학으로부터 마지막 위격, 다시 말하면 적어도 플로티노스가 말한 세계의 영혼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을 파악하였다. (263)
이것이 우리가 르네상스 철학자들에게, 즉 브루노(Giordano Bruno, 1548-1600)에게서 발견한 것이고, 우리가 유사한 생각을 발견한다. .. 그 논문 원인, 원리, 일자에 대하여(De la causa, principio, e Uno, 1584)(La Cause, le principe et l’un)에서는 다섯 대화록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논문에서 브루노는 어떻게 세계영혼이 있고, 하나의 영혼이 전체를 침투한다(pénétrer)고 제시한다. (264)
브루노의 이데아들은 개념적 이데아들, 즉 관계라는 이데아들에는 보편적 공감(une sympatheia, συμπάθεια)가 있다. .. 브루노는 자주 연속적으로 플로티노스를 언급한다. 그는 플로티노스를 플라톤주의들 중의 왕자(le prince, 군주), 프린캡스 플라토니코룸(princeps platonicorum)이라 부른다. (264)
그러나 흥미로운 것이 있는데, 그것은 케플러(Kepler, 1571-1630)의 책을 연구하는 것이리라.호기심을 끄는 것은, 불가사의한 우주 형상지(Mysterium Cosmographicum, 1596)의 초판과 둘째 판 사이에 차이가 있다. 첫째 판에서 우주영혼의 플라톤주의자의 이론을 진술한다. (264)
첫 판본에서는 유일한 운동 영혼(une âme motrice)이란 용어를 쓴다. (264)
둘째 판본에서 “영혼 대신에 힘(le mot force) 단어를 쓴다(ce pro voce anima vim substituas). ... 예전에 내가 혹성들의 운동 원인이 영혼(une âme)이라 믿었기 때문이고, 그리고 나는 스칼리거(Scaliger, 1484-1558)의 독단들에 젖어있었기 때문에 나는 그것을 믿었다.” (265) [르네상스까지는 천체의 운동을 영혼[즉 기(氣)]로서 생각했으나, 케플러도 첫 판본 1596년에는 영혼으로 썼다가 둘째 판본 1621에 force로 바꾼다. 서양은 용어를 바꾸어 실증적으로 나가고, 동양은 같은 단어 기(氣)의 의미를 바꾸어 설명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 서양은 개념작업의 변화와 과학사의 발전과 같이 갈 것이다. 영혼 -> 힘 -> 에너지 -> 생명(충력)으로 바뀔 것이다. (55OLMA)]
철학자로서 스칼리거(Scaliger, 1484-1558)는 정확히 네오플라톤주의자들에게, 즉 파두아 학파의 폼포나찌(Pietro Pomponazzi, 1462-1525)에 결부되어 있었다. (265)
그가 힘을 정의했던 것이다. .. 그것은 물질이지만, 탈물질화된 물질이다. 그것은 사물들 사이에 일종의 긴장된 실(une espèce de fil tendu)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것을 그것의 물질성으로부터 약간 제거하였다. (265)
우리는 이런 단순한 묘사에서 어떻게 사람들이 힘의 관념에 도달했는지를 본다. 그것은 보편영혼이며 한편으로 수학적 영혼이다. 왜냐하면 그 보편영혼은 플라톤의 이데아들의 운반자(le vehicule)이며, 한편으로 수학적이고 그럼에도 – 의식에 유사한 - 심리학적인, 피타고라스학파의 수들의 운반자이다. (265-266)
이 보편영혼은 점진적으로 물질 속에서 어떤 것을 찾아야하는 이런 관념을 암시했다. 이 어떤 것은 비물질화된 물질과 같은 것이며, 이 어떤 것은 심리적 것과 수학적인 것의 혼합(un mélange), 종합(une synthèse), 상호침투(une compénétration)이다. (266) [이 혼합물에서 영혼과 신체를 갈라서 설명한 이는 스피노자일 것이다. 벩송은 갈라지기 전의 물질덩이를 MM에서 이미지라 불렀다. (55OMA)]
(lu, 55NKA) (9:03, 55OMA)
# 인명,
1401 쿠자누스(Nicolaus Cusanus, Nicolas de Cues, 1401-1464) 독일의 철학자, 신학자, 광학자, 수학자, 천문학자. 추기경을 지냈고, 교황 비오2세의 친구이다. 무지(無知)한 지(知)(De docta ignorantia, 1440)(De la docte ignorance): à Dieu (livre I), à l'univers (livre II) et à Jésus-Christ (livre III)1
1462 폼포나찌(Pietro Pomponazzi, ou Pomponace, 1462-1525), 의학 박사, 이탈리아 인문주의자. 파두아 대학에서 가르쳤다.
1473 코페르니쿠스(Nicolas Copernic, 1473-1543) 폴란드 천문학자. 의사, 수학자. 태양중심의 지동설 주장.
1484 쥘 스칼리거(Jules César Scaliger, 1484-1558) 이탈리아 출신 박식자. 철학자. 그의 스승은 폼포나치 이다. / 프랑스 박식가 조셉 스칼리거(Joseph Juste Scaliger. 1540-1609)의 아버지
1548 조르다노 브루노(Giordano Bruno, 1548-1600) 이탈리아의 도미니코회 수사, 철학자, 수학자, 우주론자. 유일한 순교자. 1600년 2월 9일 화형을 실행할 때 « Vous éprouvez sans doute plus de crainte à rendre cette sentence que moi à la recevoir. » "말뚝에 묶여 있는 나보다 나를 묶고 불을 붙이려 하고 있는 당신들(그를 사형하려는 로마 교황청측) 쪽이 더 공포에 떨고 있다". 원인, 원리, 일자에 대하여(De la causa, principio, e Uno, 1584)(La Cause, le principe et l’un) ;
1561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1561-1626) 영국 철학자, 정치인. 영국 경험론의 시조. '아는 것이 힘이다'(scientia est potentia). [수학-물리학과 다른 방식으로 실험과정이란 길을 열었다.]
1571 케플러(Johannes Kepler, 1571-1630) 독일 천문학자.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설을 확정했다. [갈릴레이가 1632 “대화록” 출판으로 1633년 종교재판을 받은 것은 케플러 사후이다.] 불가사의한 우주 형상지(Mysterium Cosmographicum, 1596)(sur la relation entre les distances des planètes et les cinq solides de Platon). Seconde édition en 1621. Traduction française : Le secret du monde, tr. Alain Philippe Segonds
1612 아르노(Antoine Arnauld, 1612-1694) 프랑스 신학자. 얀센파.
1646 라이프니츠(Gottfried Wilhelm Leibniz, 1646-1716) 독일 철학자.
1820 스펜서(Herbert Spencer, 1820-1903) 영국 철학자.
1842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 1842–1910) 미국 철학자, 역사가, 심리학자. The Principles of Psychology, 2 vols. (1890), A Pluralistic Universe (1909)(tr.fr. Philosophie de l'expérience : Un univers pluraliste, Paris, Les empêcheurs de penser en rond, 2007.
1842 피스크(John Fiske, 1842-1901), 미국 철학자, 역사가.
1844 배럿(Alfred Barratt, 1844-1881), 영국 법정 변호사, 철학자. Physical Metempiric(미완성 유고, 1881),
1845 클리포드(William Kingdon Clifford, 1845–1879) 영국 수학자, 철학자. en.Wiki에서, (mind-stuff)는 그의 논문("On the Nature of Things-in-Themselves, 1878")에서, 그가 스피노자를 읽고서 암시 받았다고 하는데, 가설적인 물질의 원자(atom)에 해당한다.
1964 라푸자드(David Lapoujade, 1964-) 프랑스 철학자, 파리1대학 교수. 실용주의 전문가.
?-? 갈틱(Stephen Galetic, s.d.) 벨기에? 미국 실용주의 전공? 윌리엄 제임스 번역자( Philosophie de l'expérience : Un univers pluralis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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