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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C14. 수치와 영광(La honte et la gloire: T. E. Lawrence, 1993)
들뢰즈(Gilles Deleuze), dans “비평과 임상”(Critique et clinique, 1993), 144-157(P.191).
제목이 돋보인다. 수치와 영광. 다 읽고 나서, 나로서는 들뢰즈가 로렌스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고 느끼면서, 들뢰즈가 제목을 진솔함과 찬탄함, ‘진솔과 찬사’라 하는 것이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 아마도 내가 청소년 시절에 그에 관한 영화를 본 것이 이글을 읽는데 도움이 될 것이나, 들뢰즈의 분석과 전개는 나의 상상을 넘어선다. 인간에게 수치, 우여곡절, 지체, 제자리 걸음, 우회 등을 넘어서, 전재이라는 극한의 상황을 거치면, 전혀 다른 국면이 있을 수 있다. 신체가 겪는 국면들(aspects)은 사유의 위상의 영역과 다르다는 것이다. 자연에서 신체의 한계와 달리, 고문에서 신체의 한계는 전혀 다른 위상을 가질 것이다. 감화작용에서 애정관심의 한계에도 다른 영역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55QM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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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화적으로 인간의 양면성을 드러내는 만화영화로는 “야수와 미녀”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야수와 훌륭한 왕자는 이중성이다. 안데르센의 <눈의 여왕>에서 영감을 얻었다는 디즈니 영화 “겨울 여왕”에서 여주인공인 언니 엘사도 차거움의 속에 따뜻함이 있다는 이중성을 전제로 하고 있다. 사람들은 이중성 또는 이중화의 경향성이 있다. 그럼에도 둘 사이의 중계참(mi-chemin)의 역할을 하는 삶의 준안정상태가 있다.
로렌스에서 영광과 수치는 이중성에 대한 다른 각도에서 조망이라 할 수 있다. 이중성이 위험과 고립 속에서 더 잘 들어난다. 그렇다고 혼자서가 아니라 정치 집단 또는 사회 집단 속에서도 충분히 있을 수 있다. 어쩌면 삶은 이런 이중성 사이 길을 가고 있었는지를 자신도 잘 모르는 경우가 있을 것이다. 이중성보다 더 많은 다중성의 시기도 있을 수 있다는 의미에서 개인의 내재적 지속이 다양체일 것이다. 다양체라는 의미에서 영광과 수치, 교만과 수치, 음과 양의 대립으로 볼 것이 아니라 상호교대라는 점에서 건곤일척(乾坤一擲)과 같은 영광(건)과 비천(곤)이 있을 수 있다. 그럼에도 삶의 과정에서 중첩과 압축, 이완과 수렴의 과정에서 자아의 경향성은 이루어진다. 수치, 비참, 교만 등을 거쳐서 다른 줄기를 내보이는 것이 어쩌면 자아의 형성과정일 수 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대립각이 크지 않아 평온하고 안정된 삶을 살아가는데 비해, 경험의 확장과 사유의 풍부함에는 회오리를 동반하는 것 같다.
여기 아라비아의 로렌스가 그런 모습의 보인 것으로 보인다. 내가 어린 시절에 보았던 영화에서, 주인공은 영광이라기보다, 인간이 사막에서 산다는 것에서 오는 고독과 고뇌가 더 부각되었던 것 같다. 오직 혼자의 힘과 노력으로 풀 수 밖에 없는 상황, 혼자라는 고독(孤獨)은 사막이기 때문만이 아닐 것이고, 수행자들도 세상에서 고(孤)를 넘어서기에 싯달다가 천상천하에서 독존(獨尊)이라 했겠는가. 인간들뿐만 아니라 만물과 함께 하는 생애에서 홀로 거쳐가는 길들이 하나 둘로 셋으로 이중화 삼중화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갈래 길들이 있어서 다양체라고 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55Q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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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의 가족관계에 대해 잘 알려진 내용이 없지만 두 가지는 분명한 것 같다. 부인이 파니 들뢰즈(Fanny Deleuze, s,d.)는 영문학을 전공하면서 다이비드 로렌스(David Herbert Lawrence, 1885-1930)에 관한 책들을 번역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들뢰즈는 스피노자의 제자로서 문학가들을, 니체, 로렌스, 카프카, 아르토를 꼽고 있다. 그 로렌스에 대한 논문이 두 편이 있는데, 예수를 크리스트로 만들어서 구세주로서 나타났고 부활하여 다시 올 것이며, 심판을 할 것이라는 사상을 부여한 것은 바울로 보고 있고, 그리고 바울이 그런 생각을 했던지 아니던지 간에 크리스트라는 이름으로 종교화한 것은 파트모스의 요한이 쓴 아포칼립스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이다. 들뢰즈가 보기에 사회의 변혁의 활동으로서 나자렛의 예수와 종교의 숭배 대상으로서 크리스트는 다르다는 것이다. 서구 종교가 예수가 사라지고 크리스트에 대한 독단과 맹목만이 남았다는 것이다. 들뢰즈가 로렌스에 비추어서 이런 관점을 갖는 것은 벩송을 깊이 있게 다루었기 때문에 가능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들뢰즈가 꼴레주 드 프랑스 강의록이 출판되지 않아서 읽지 못했을 것인데도, 벩송의 관점과 동일하다. 즉 예수의 복음서들은 도덕적 가치를 바꾸고자 생각하는 스토아 후기 사상과 닮았으며,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후예들과 조합한 사상이며, 게다가 원자론적 결합의 방식을 가미한 것으로 본다. 진정으로 새로운 종교는 심층의 깊이에서 일자에로 합일하는 플로티노스일 것인데, 로마의 제국은 황제(참주)를 만드는 것과 같은 길을 가면서 크리스트교도 제도화 또는 제국의 길을 간다. 이런 길로 간 것을 선호하는 앵글로색슨의 철학이 원자론적 관념연합론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것과 같다. 데이비드 로렌스에 대한 논문을 쓰면서, 이점을 부각시킨 것은 흥미롭고, 부인과 상당히 깊은 대화가 죽 있어왔을 것이라고 느낀다.
다른 한편 두 자식에 관해서 이다. 우선 들뢰즈에게는 아들 줄리앙(Julien Deleuze 1960-)과 딸 에밀리(Emilie Deleuze, 1964-)가 있다. 아들은 어머니 쪽을 따라서 영문학 쪽이라 (아라비아의) 로렌스(Lawrence d’Arabie, T. E. Lawrence, 1888-1935)의 지혜의 일곱기둥(Seven Pillars of Wisdom: A Triumph(Les Sept Piliers de la sagesse) 등영문학을 번역하기도 하고 프로이트 작품의 번역도 있다. 딸은 아버지 쪽으로 경도되어 영화에 관계되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쥘리앙이 1992년에 번역을 마치고 들뢰즈가 이 글을 아마도 책의 서문 격으로 쓴 것 같다. 이 논문은 단순히 로렌스의 이 저술에 관한 것 관점 이상으로 들뢰즈의 사상이 들어 있다. 중동에 대해, 아랍인들의 삶의 영역과 종교에 언급하면서도, 방황하는 원인과 닮은 아랍인들의 봉기와 항쟁에 대해 긍정적이다. 이런 관점에서 영국인 로렌스는 사막의 삶에서 이중성을 드러내고 있다고 여긴다. 그럼에도 로렌스가 아랍에서 삶을 통해 느낀 감응(l’emotion)과 감화(l’affection)를 잘 표현하였다는 점에서, 그의 자전적 경험담이 위대한 소설가들 못지않게 풍부한 자연과 솔직한 인성을 드러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중동은 중동에서 삶의 근거와 이유가 있으며, 그 속에서 사는 이들도 자기들의 공동체와 그 이상을 실현하려는 노력이 있다는 것이며, 그런 노력들이 유럽의 사유와 관점에서 보아 달리 보여도 그 영역과 삶의 장은 고유성이 있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영국, 러시아, 프랑스, 독일이 일차대전을 기회로 오토만제국을 어떻게 갈라치기해서 먹을 것인가에 관심이었다. - 중국도 이들과 일본이 찢어보려고 했을 것인데 중국의 총체적 단일성은 덩어리 자체에 있지 부분에 있지 않았다 – 중동은 역사적으로 여러 다른 문화들로 이루어져 알라의 종교성으로 뭉치기에는 – 공통언어가 있는 것도 아니고 - 역부족일 것이다. 이 준안정상태의 난바다에서 파고가 일면서 외세들이 들이 닥칠 때, 인민의 저항, 부족들과 인종들의 구별에서 항쟁이 외세와 연결되어 복잡했을 것이다. 그 중에 한 인간이 아랍을 사랑했을까? 사막의 숙명을 느낀 한 영국인이 자신의 운명을 사막 유목민과 함께 해야 한다는 자연의 감응과 인간적 감화가 일어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다른 한편으로 영국인이라는 자신의 오랜 관습이 몸에서 퍼져 나와, 이 자연 속에서 운명과 부딪힐 때, 상반된 양가감정이 없을 수 있었겠는가. 그가 아랍인들과 함께하는 운명이 그의 솔직한 글을 남겼을 것이라. 그 넓은 사막을 가로지르고 또는 자신의 과거 습관과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는 몸에게, 영국 교육을 받았던 자신이 다른 사람이라는 스스로에게 이질감도 없지 않을 것이다. 들뢰즈는 인간에게 이런 우여곡절의 다양한 양상들(des aspects, 국면들)이 있는 것이 진솔한 삶이 아니냐고 반문하는 것 같다. 리좀이 뿌리를 뻗어나가듯이, 진솔한 삶의 흐름은 지상의 어느 풍토에도 퍼져나가리라. 들뢰즈는 작가로서 로렌스의 작품의 중요성을 여러 중요한 문학가들(카프카, 멜빌, 프루스트, 윌리암 블레이크)과 철학자들(벩송, 스피노자, 윌리엄 제임스)의 국면에 비추어서 서술하고 있다. 들뢰즈의 만년의 글들은 간략한 문단속에 함축하고 있는 이야기가 많다는 것을 유념하며 읽어야 할 것이다.(55QMF)
# 수치와 영광(La honte et la gloire: T. E. Lawrence, 1993)
[아랍의 이해, 빛=신]
사막과 사막의 지각작용, 즉 사막에서 아랍인들의 지각작용은 괴테적인 계기들을 통과할 수 있을 것 같다. 우선 빛이 있다. 그러나 그 빛은 아직 지각되지 않는다. 빛은 오히려 순수하고, 볼 수 없는, 색깔없는, 비형체적이고, 닿을 수 없는 투명성이다. 빛은 이데아이며, 아랍인들의 신이다. 그러나 이데아, 즉 추상은 초월이 아니다. 이데아는 공간을 통해 펼져져 있고 개방(l’Ouverts)처럼 있다. “저넘어에는 아무 것도 없고 단지 투명한 공기만 있다.”빛은 공간을 만드는 개방이다. (144)
봉기(la révolte)와 항쟁(la rébellion)은 빛이다. ... 봉기의 이간들은 예언자와 떠도는 기사이며, 파이살(Fayçal, 1883-1933),과 아우다(Aouda, 1874-1924)이며, 이데아를 설교하는자와 공간을 두루 다니는 자이다. 온운동, 봉기는 이렇게 불려진다. (144) [상층의 철학은 명령과 규율이라면 심층의 철학은 봉기(la révolte)와 항쟁(la rébellion)이다. 전자는 전쟁의 사고이며 후자는 공동체를 실현하려는 인민의 덕목이다.]
공간을 곧 가득 채울 것은 안개, 태양의 안개이다. 봉기 자체가 공기(un gaz, 기체)이며 증기이다. 안개는 태어나는 지각의 첫째 상태이며, 사물들이 오르고 내리는 신기루(le mirage)를 만든다. .. 안개처럼 보는 것, 흐트러져 보는 것, 환각적 지각작용의 초벌그림, 즉 우주적 회색. (145)
괴테(Goethe, 1749-1832)는 “흰색을 순수 투명의 우연히 불투명한 폭발”이라 정의했다. 흰색은 항상 새롭게 되려는 사막의 사고(l’accident)이며 아랍세계는 검은 색과 흰색으로 되어 있다.그러나 이것들은 여전히 지각작용의 조건들이다. 지각작용은, 색깔이 나타날 때, 다시 말하면 흰색이 노란 색으로 흐려지고, 검은 색이 푸른 색으로 밝아질 때, 충만하게 실행된다. (146)
시각과 고통이라는 두 본징(deux entités)‥…: “밤에 잠에서 깨어나서, 그는 자기 눈에서 시각을 찾을 수 없었고, 고통만을 발견했다.”
공간 속에서 이데아는 통찰(la vision), 이 통찰이란 볼 수 없는 순수투명에서 주홍빛 불로 가는데, 주홍빛 불에서 시각 전체는 불탄다. (145) [여기까지 사막세계의 찬미.]
[로렌스의 아랍세상 경험]
“어두운 절벽, 장밋빛 토양, 창백한 녹색의 관목들의 통합은 햇빛과 그을린 검은 응달로 여러 달 동안 포화된 눈들에게는 아름다웠다.”로렌스야말로 문학에서 가장 잘 풍경묘사를 한 작가의 한사람이다. 룸(Rumm), 숭고함이며, 절대적인 통찰, 정신의 풍경이다. (145)
얼굴들은 풍경들에 응답하며, 간략한 화폭들 속에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그 화폭은 로렌스를 가장 위대한 초상화가들 중의 한사람으로 만든다. “그는 습관적으로 유쾌하지만 그에게는 고통의 진액이 흐르고 있었다‥…” “그의 눈까풀은 .. 천천히 타들어가는 불구덩이...” [등등의 문장에서] (145-146)
[작가론: 메빌과 프루스트에 비교]
가장 아름다운 작가들은 특이한 지각작용의 조건들을 갖는다. .. 대양은 멜빌(Melville, 1819-1891)의 지각작용들을 그 안으로부터 스며든다. .. “깊이(심층)에서 솟아오르는 신기루”처럼... 주관적 성향(une disposition subjective) 덕분에 프루스트(Proust, 1871-1922)는 문 앞을 지나가는 공기의 흐름에서 자기 지각들을 찾고, 사람들이 그에게 알리는 아름다움 앞에서 냉정하게 남아있다. (146)
로렌스에게서 그를 아라비아 사막들로 내모는 내밀한 사막이 있다. .. 로렌스는 아랍인에게 말 건다. 그는 아랍인들처럼 옷입고 산다. 심지어는 고통이 있을 때도, 그는 아랍어로 소리치며, 아랍인들을 모방하지 않는다. 그는 이미 마치 배반처럼 겪은 자기의 차이를 포기하지 않는다. (146)
그는 자신이 매설한 지뢰 그 자신 속에서 폭발한다. 그는 그자신이 폭발시키는 포탄이다. 이것은 무한히 비밀스런 주관적 성향인데, 이 성향은 민족적 또는 개인적 성격과 혼동되지 않으며, 그를 자기 모국으로부터 멀리 인도하며 황폐한 자기 자아의 폐허로 인도한다. (147)
[로렌스 성향 분석: 가타리와 벩송에 비추어서]
로렌스를 이끈 이런 성향의 문제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없다. 한 정신분석가는 이런 주관적 성향이 동성애라고 말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147)
자기 자신의 이미지는 자기의 고유한 삶을 살 것이다. 그 이미지는 항상 되풀이되고 수선되며, 그것은 끊임없이 길에서(en chemin) 우화적인 것이 될 때까지, 성장한다. 그것은 거인들을 제작하는 기계이다. 그것은 벩송이 우화적 기능이라 불렀던 것이다. (147)
[로렌스의 성향: 이방인으로서 아랍인...]
로렌스는 자신이 안개를 통해서 본다고, 그리고 형태들도 색깔들도 무매개적으로 지각하지 못한다고, 말하며, 이것들을 무매개적으로 접촉만을 사물들을 재인식한다고 말한다. (147)
그가 자신과 아랍인 친구들에게서 뽑아낼 줄 알았던 이미지들을 실재적인 것에서 투사한다. (148)
아랍 빨치산들을 다마스(Damas, 시리아 수도 다마스커스)로 데려갔는데, 그 당시 저항군들(les résistances)은 해방된 도시의 공공건물들을 점령하고 있었고, 최후의 타협에 나선 대표자들을 무기력하게 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 (148)
투사의 기계(la machine à projection)는 봉기 자체의 운동과 분리할 수 없다. 그 기계는 주관적이라, 혁명적 그룹의 주관성에 귀착한다. ... 주관적 성향,즉 이미지를 투사하는 힘은 정치적이고 에로틱하고 예술적이다. ... 로렌스 자신은 작가가 되기위하여 봉기의 메카니즘과 설교[선전]의 메카니즘이 필요하다. (148)
[로렌스와 쥬네]
로렌스가 실재적인 것에 투사하는 이미지들은 부풀려진 이미지가 아니라 순수하고 드라마적이며 희극적인 강도성에 의해 가치 있다. .. 문제는 실재적인 것을 제작하는 것이지 거기에 응답하는 것이 아니다. 쥬네(Genet, 1910-1986)가 이런 종류의 투사작용에 대해 말한 것처럼, 이미지 뒤에는 아무것도 없고, 즉 “존재의 부재”, 자아 그 아래를 증거하는 빈 것(un vide)이다. 이미지들 뒤에, 아무것도 없고, 단지 냉정한 낯선 자와 더불어 이미지들을 바라보는 정신만이있다. (149)
지혜의 일곱기둥(Seven Pillars of Wisdom: A Triumph(Les Sept Piliers de la sagesse)(1922완성, 1926출판, 1935출판) 속에 두 권의 책이 있는데, 하나는 실재적인 것에 투사된 이미지들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는 이미지들을 관조하는 정신에 관한 것이다. (149)
[로렌스와 포스터]
관조하는 정신은 빈 것 자체가 아니며, 추상화 작업들은 정신의 눈들이다. 정신의 고요함은 정신을 할퀴는 사유를 관통하고 있다. 정신은 다양한 눈을 지닌 하나의 짐승이다. .. 나는 추상의 하인이다. (149)
따라서 지혜의 일곱 기둥은 이중 독서, 또는 이중 연극성의 대상이다. 그것은 로렌스의 주관적 성향인데, 사막에서 정열적으로 본징들을 살아가게 하는 선물이며, 평범한 이들과 사물들 옆에 또한 낙타들의 발걸음에 꼬삐의 흔들리는 리듬이다. .. (포스터(Forster, 1879-1970)가 말하듯이, 영어는 흐르지 않는다.) ... (149)
어째든 아랍인들은 로렌스의 추상적업의 권능에 매료되었다. 열에 들뜬 어느 날 저녁, 그의 타오르는 정신은 그에게 반쯤 망상에 잡힌 연설의 영감을 불어넣는다. 그 연설은 전능(omnipotence)과 무한(infini)을 고발하고, 우리 속에 무기들을 단련시키기 위하여 우리에게 보다 더 충격을 가하도록 본징들(ces entités)을 간청하고, 아무것도 하지 못함을 마치 유일한 승리처럼, 궁지에 몰림이 마치 우리의 지고한 자유인 것처럼 싸움에 진 것의 중요성을 고양시킨다. “천리안을 가진자는 궁지가 유일한 목표였다‥…”(149-150)
[로렌스의 주관적 성향]
사람들은 이미지들로부터 본질들(les entités)에로 간다. 따라서 그러한 것은 최종심급으로서 로렌스의 주관적 성향이다. 사막에서 지나가는 본징들, 이미지들을 이중화하는 본징들, 이지미들에 섞이는 본징들, 이미지들에게 통찰적인 차원을 부여하는 본징들, 본징들의 세계가 있다. 로렌스는 말하기를 자신은 이 본징들을 내밀하게 한다고 한다. 그러나 그를 회피하는 것은 본징들의 성격(character)[fr.caractère] (150)
이런 조합이 로렌스라고 이름 불린다. 주사위 던지기는 주사위를 던지는 의지(un Vouloir, 원하다)이다. 성격은 짐승(Bête)이다. 즉 정신, 원하다, 욕망, 이질적 본징들을 재통합하는 사막-욕망(désir-desert). (150)
이 주관적 본징들은 어떤 것이며, 이들은 어떻게 조합하는가? 본징들 가운데 어느것도 수치와 영광, 수치와 오만 보다 더 강조하여 나타나지 않았다. 아마도 이들의 연관은 아마도 성격의 비밀을 해독해 줄 것이다. (150)
[수치 1: 아랍인들에 대한 그의 수치들]
각 본징은 다양하며, 동시에 본징은 다른 본징들과 연관 속에 있다. 수치, 그것은 우선 아랍인들을 배반하는 수치이다. (150)
그는 줄곧 사기꿈처럼 살았다. “그리고 나는 기만이라는 외투를 다시 걸쳤다” [영국신사는 세 가지를 지니고 있다고들 한다. 우산, 유머, 거짓말이다.]
수치에 뒤섞인 그의 오만은 아랍인들이 매우 고상하게 매우 아름답게 매우 매력적이라고 보았고, 이런 모든 점에서 영국 군인들에 반대된다고 보았다. (151)
반면에 전쟁과 군대의 문제는 객관적 규칙에 복종하는 익명 대중의 조직화이다. 그 규칙들은 인간을 “전형”으로 만들기를 제안한다.사막을 더럽히는 전장들의 수치, 싫증나서 로렌스가 터키인들에게 넘긴 유일한 수치는 무지하고 무용한 학살로 드러났다. 군대들의 수치, 그 구성원들은 사형수들보다 최악이며, 창녀들만을 끌어들인다. (151)
로렌스는 카프카(Kafka, 1883-1924)처럼 말 할 수 있다. “마치 수치란 자신에게 잔존하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수치는 인간을 자라게 한다. (152)
[수치 2: 예수 그리고 파르메니데스 – 두 갈래에서 의지적 예속]
하나의 수치 속에 많은 수치가 있다. 그러나 또한 다른 수치들이 있다. 수치 없이 어떻게 명령하는 것이 가능한가? 명령한다는 것, 그것은 영혼을 고통에로 보내기 위하여 영혼을 훔치는 것이다.
따라서 “씩씩한 제자는 수치를 갖는다.” 그것은 마치 크리스트가 도둑들에게 영광을 빼앗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 영광이 그들에게 돌아가야 할 것인데. 속죄자[구세주]의 수치, 왜냐하면 그가 “대속의 가치를 떨어뜨렸기 때문이다”그러한 것은 할퀴는 사유들의 종류이다. 이런 사유는 로렌스의 두뇌를 찢어놓고, 지혜의 일곱기둥을 거의 광기의 책으로 만든다. (152) [기억상으로 영화에서 로렌스는 자기가 구출한 한 아랍인을 자기가 죽일 수 밖에 없는 장면이 있다.]
예속(la servitude)을 선택해야만 하는가? 하지만 하급자들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것보다 더 수치스런 것이 있는가? (152)
그는 하급 현존의 현태에 의존하는 것을 부끄러워하기 때문이다. .. 로렌스가 여러 낙타들에 대해 그린 훌륭하거나 우스운 초상화에도 불구하고, 그의 증오는 폭발하는데, 열기(la fièvre)가 그를 낙타들의 악취(une puanteur)와 비열(une abjection, 비천)에게 내맡길 때이다. (152)
강제적이고 부끄러운 예속, 그러한 것은 군대들의 문제이다. 만일 지혜의 일곱기둥이 이런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즉 ‘자유로운 주관성으로서 사막에서 어떻게 살고 잔존하는가?’라는 물음이 있다. 로렌스의 다른 책 The Mint(주형/자궁 La Matrice)는 ‘나와 비슷한 인간에 내가 끌리면서, 다른 인간들처럼 어떻게 한 인간이 다시 되는가?’이다. .. 로렌스의 두 책은 파르메니데스((Parménide, 기원전 540-450)의 시에서처럼 두 길에 대한 약간의 탐험이다. (153)
로렌스 자기 자신을 위해 요청한 것은 의지적 예속이다. .. 제압(un assujettissement, 복종)이지, 더 이상 노예화(asservissement)가 아니다.그것은 사막에서 주체-집단을 정의하는 것은 의지적 예속이다. (153)
로렌스의 두 가지 길, 매우 다른 두 질문은 의지적 예속 속에 재결합하는 것이다.(153)
[수치 3: 신체의 수치] ,
수치의 셋째 양상은 아마도 본질적인 것이다. 그것은 신체의 수치이다. 로렌스는 아랍인들을 찬미하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육체를 경멸하기 때문이며, 그들의 역사에서 “그들은 살(육신)의 해변에 부딪히는 계속적인 파도에 스스로를 던졌기 때문이다.” (153-154)
로렌스는 아랍인들과 자신의 차이에 가치있게 하려고 한다. 그는 수치를 지니고 있다 왜냐하면 그는, 정신이, 매우 구별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신체와 떨어질 수 없고, 복구불가능할 정도로 잘 봉합되어[꿰매어져]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154)
유명한 두 일화[에피소드]에서, [하나] 터키 고급관리의 병사에 의해 고문당하고 능욕당한 자기 자신의 신체, [다른 하나] 죽어가는 터키인들이 아직 살아있다고 신호하는 손의 막연하게 올리는 단발마로 떠는 터키인들의 신체. (154)
왜냐하면 정신은 거기서 사람들이 넘을 수 없는 마지막 수준의 안전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의미한다. 정신 매우 특수한 방식으로 이 신체의(du) 수치를 지니고 있다. 사실상 정신은 신체 때문에(pour위하여) 수치를 지닌다. 이는 마치 정신이 신체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너는 나를 부끄럽게 만든다.l 너는 부끄러워해야만 할 것이다‥…. “육체적 허약함은, 수치를 통과하게 하는 것까지, 멀리 퍼져나가고, 나의 동물적 자아를 땅에 묻는다.” (154)
[신체의 수치?: 감화작용(affection), 감응(l’émotion)
신체 때문에 수치를 갖는 것은 매우 특별한 신체의 개념작용을 함축한다. 이 개념작업에 따르면 신체는 자치적인(autonomes)외적 반작용들을 갖고 있다. 신체는 하나의 동물이다. 신체가 행하는 것을 동물은 혼자서 행한다. 로렌스는 스피노자(Spinoza, 1632-1677)의 정식을 – 사람들은 신체가 할 수 있는 것을 알지 못한다는 정식을 - 자기자신의 것으로 만든다. (154)
사람들은, 제임스(William James, 1842-1910)의 감응이론(la théorie des émotion)을, 매우 자주 불합리한 반박들에 당했던 그 감응 이론을, 아마도 회상한다.제임스는 역설적 순서를 제안한다. 1) 나는 사자를 지각한다. 2) 나의 신체가 떤다. 3) 내가 두렵다. 여기서 (1) 어떤 상황에 대한 지각작용. (2) 강화하거나 약화하거나 신체의 변모작용들. (3) 의식 또는 정신의 감응. 아마도 제임스는 어떤 순서와 원인성을 혼동하는 잘못을 범한 것이고, 정신의 감응이 신체의 변모작용들의 결과물 또는 효과일 뿐이라고 믿는 잘못을 범한다. 그러나 순서는 바르다: [1]나는 탈진한 상황에 있고, [2]나의 신체가 “기어들어가 땅속에 스며들고”, [3]나의 정신은 수치를 지닌다.정신은 시작에서부터 신체가 무엇을 행하는 지를 냉정하고 호기심으로 쳐다보고 있고, {1}우선 그것이 증인이고, {2} 그러고 나서 그는 감응되고, 정념에 쌓인 증인이며, {3} 단지 감화들(des affects)을 증인의 고려로 해서 겪는데, 그 감화들이란 신체의 결과들일 뿐만 아니라 신체를 돋보이게 하고 또 신체를 판단하는 진실한 비판적 본징들(entités critiques)이다. (155)
정신적 본징들, 추상적 관념들은 사람들이 믿는 것이 아니다. 이것들은[본징들] [오히려] 감응들이며 감화들이다. 이것들은 수없이 많고, 수치가 주요한 본징들 중의 하나이긴 하지만 수치 속에서만 있는 것은 아니다. 여러 경우들이 있는데 그 경우에서 신체는 정신에게(à)수치스럽게 하고, 그러나 또한 [다른] 경우들이 있고 그 경우에서 신체는 정신을(le) 웃게하고 또는 정신을(le) 매혹하는데, 마치 젊고 아름다운 아랍인들의 정신과 같다(러시아 무용수들과 유사하게 만드는 끝이 구부러진 길다란 뿔을 달고 있고 관자놀이에 붙인 애교머리). (155)
감화적인 비판적 본징들은 무화되는 것이 아니라, 공존할 수 있고 뒤섞이고 정신의 성격(character)을 혼성(composer)하는데, 자아를 구성하는(constituer) 것이 아니라 무게 중심을 구성하는 것이다. (155)
본징들은 스스로 서고, 정신이 신체를 관조할 때 정신 속에서 움직인다.이것들은 주관성의 작동들(les actes)이다. 이 본징들은 정신의 눈들일 뿐만아니라, 또한 정신의 권능(ses Puissance)과 정신의 말투(ses Paroles)이다. 사람들이 로렌스의 스틸[문체] 속에서 이해하는 것은 본징들의 충격이다. (155)
지혜의 일곱기둥을 열면서부터, “그리고 밤이면, 우리는 이슬로 젖어있었으며, 수 많은 별들 침묵에 의해 우리의 작음이 수치로 되었다” ... 내밀한 사막은 외부 사막에 응용되고, 또한 외부사막에 신체들, 인간들, 짐승들, 돌들을 통해서 우화적 이미지들을 투사한다. 온본징들과 온이미지들, 온추상작업들과 온통찰들은 로렌스를 다른 하나의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 1757-1827)로 만들기 위해서 조립하게 된다. (156)
[소결론: 아랍은 다른 세상, 달리 사는 세상]
로렌스는 거짓말하지 않는다. 심지어는 즐거움에서 조차 그는 아랍인들과 연관에서 온갖 수치들을 체험한다. 스스로를 숨긴다는 수치, 그들의 비참함을 함께 한다는 수치, 그들을 통솔하는 수치. 그들을 속이는 수치‥…. 로렌스는 아랍인에 대해, 아랍인들을 위해, 아랍인들의 면전에서 수치를 느낀다. (156)
영국인들, 터키인들, 세계인이 아랍인들을 경멸한다. 그러나 별나고 웃음짓는 아랍인들은 수치의 바깥으로 솟아올랐고, 아랍인들은 온통찰, 온아름다움의 반영을 사로잡았다. 아랍인들은 낯선 자유를 세계에 기여하고, 거기에서 영광과 수치는 거의 정신적인 신체를 맞대결로 들어간다. 여기서 사람들은 로렌스와 많은 공통 특징들 쥬네에게서도 발견한다: 아랍의(팔레스타인의) 이유(cause, 소송)와 뒤섞이기에 불가능성, 그렇게 뒤섞일 수 없다는 수치, 다른 곳에서 오는 수치, 즉 존재에 공동실체적인 수치, 쥬네가 말하듯이, 어떤 점에서는 “수치의 바깥으로 터뜨림이 쉬웠다고” 제시하는 별난 아름다움의 계시, 적어도 한 순간에 ‥…. (156-157) -[영국인이 팔레스타인을 지지하면 수치일까? 아마도 이들은 팔레스타인 지지를 의미할 것인데, 들뢰즈도 팔레스타인을 지지하며, 이들은 시오니즘이 제국의 길을 걷는 것에 대해 반대하는 입장이다. - 현재 미국과 유럽 대 러시아와 중국 사이의 대립보다 더 위험한 신자유주의의 방식은 이스라엘의 제국의 참주화이다. 이런 대립의 실질적 조장은 이란과 아랍에 대해 참주적 방식으로 대하는 이스라엘과 미국의 군수산업들이다. 미국은 반도를 남북으로 갈랐듯이 우크라이나를 동서로 가르고 있는 것 같다. 이스라엘 문제를 감추기 위해, 미국 우크라이나를 이용하고 있는 것 같이 보이며, 외교적 명분상으로 미국이 소련과 중국을 포위하려고 한다고 하는데,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인들 몰아내기가 완수되면, 이스라엘 대 이란의 문제가 제기될 것이다. 러시아와 중국이 완충지대로서 이란과 북한을 지원할 것이다. (55QMG)]
(11:07, 55Q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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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0-450 파르메니데스(Parménide, Παρμενίδης/ Parmenídês, 기원전 540-450) 존재가 있다(L'Etre est) / fr.Wi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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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2 스피노자(Baruch Spinoza, 1632-1677)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태생, 포르투갈계 유대인 혈통의 철학자이다.
1749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1749-1832) 독일 고전주의 성향 작가, 철학자, 과학자. 바이마르 대공국에서 재상직을 지내기도 하였다.
1757 블레이크(William Blake, 1757-1827) 영국 화가, 판화가, 시인, 순수의 노래(Songs of Innocence, 1789), 천국과 지옥의 결혼(The Marriage of Heaven and Hell, 1790–1793)
1808 압델카데르(Abdelkader ibn Muhieddine (en arabe : عبد القادر بن محي الدين (ʿAbd al-Qādir ibn Muḥyiddīn), 1808-1883), 뮈쥘망 수피즘 종교 지도자(émir, 국왕). 알제리 태생, 시리아에서 사망,
1819 허먼 멜빌(Herman Melville, 1819-1891) 미국 소설가, 수필가, 시인. 오무(Omoo: A Narrative of Adventures in the South Seas, 1847), 백경(모비 딕, Moby-Dick, or The Whale (1851)(135장(chapters)으로 되어 있다), 피에르, 혹은 모호함(Pierre: or, The Ambiguities, 1852) 바틀비("Bartleby, the Scrivener: A Story of Wall Street", 1853), 유작: 빌리 버드(Billy Budd, Sailor, 1924). - 광장 이야기(The Piazza Tales (1856), 「베니토 세레노(1855)」
1842 제임스(William James, 1842-1910) 미국 심리학자, 철학자. 심리학 개요(Précis de psychologie [« Psychology. Briefer Course, 1892»].
1844 니체(Nietzsche, 1844-1900), 독일의 문헌학자, 철학자.
1861 앨런비(Edmund Henry Hynman Allenby, 1861–1936), 영국 장군, 아랍에서 로렌스 지지.
1871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 1871-1922) 프랑스 작가. 연작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1913-1927)가 있다.
1874 아우다(Aouda Abou Tayi (arabe : عودة أبو تايه ) 1874-1924) 호웨이타트 연맹(les Howeitat)에서 아랍의 베드윈 종족 지도자, 일차대전 때 아랍 봉기 동안 파이살과 활동.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 1874-1965), 제1차 세계대전에 중령으로 복귀하여 참전, 제1차 세계대전 당시 해군 장관을 맡고 있었다. 영국의 총리(1940년 5월 10일-1945년 7월 26일, 1951년 10월 26일-1955년 4월 7일)를 지낸 정치가.]
1879 포스터(Edward Morgan Forster, 1879-1970) 영국 소설가, 단편작가, 수필가. 『기나긴 여행 The Longest Journey』(1907), 『인도로 가는 길 A Passage to India』(1927) Lettres to T. E. Lawrence, 1964(London, Jonathan Cape). cf. T.E. Lawrence Correspondence with E.M. Forster and F.L. Lucas(T. E. Lawrence, E. M. Forster, Frank Laurence Lucas, Edited by Jeremy Wilson and Nicole Wilson, 2010, 328p.)
1883 파이살(Fayçal ben Hussein al-Hachimi (فيصل بن الحسين الهاشمي en arabe), 1883-1933), 1920년 시리아왕, 1921-1933년까지 이라크 초대 왕. 이락의 자치를 위한 독립 운동. 후세인 벤 알리, 즉 메카(La Mecque)의 족장, 헤자즈(Hedjaz)의 왕의 아들이다.
1883 카프카(František Kafka, 1883-1924)(마흔하나) 오스트리아-헝가리, 지금의 체코에서 태어나 독일어를 쓴 유대인 소설가.
1888 (아라비아의) 로렌스(Thomas Edward Lawrence, Lawrence d’Arabie, 1888-1935)[마흔일곱], 영국 장교, 작가. 옥스퍼드 대학에서 동방어학 전공, 아랍 봉기(Arab Revolt, 1916–1918)에 참여, 십자군의 성들(Crusader Castles)(1910년 논문, 1936출판), 지혜의 일곱기둥(Seven Pillars of Wisdom: A Triumph(Les Sept Piliers de la sagesse)(1922완성, 1926출판, 1935출판), 요약본 사막의 봉기(Revolt in the Desert)(1927출판). The Mint(주형/자궁 La Matrice)(1929년 타자본, 유고, 1955년): 공군복무시절 이야기. 그는 장교로 다른 한번은 일반병으로 군대 근무하였다.
- 강연: 방송인이며 작가인 토마스(Lowell Thomas, 1892–1981)의 강연「With Allenby in Palestine and Lawrence, 1920」과 수필집 T.E. Lawrence by his Friends, 1937),,
-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Lawrence d'Arabie (Lawrence of Arabia)(1962, 감독, David Lean)
1910 쥬네(Jean Genet, 1910-1986), 프랑스 작가, 시인, 드라마 작가. 동성애와 에로티즘으로 유명하다. 그는 1982년 팔레스타인지지 입장으로, 팔레스타인에 두 번 체류로 여러달을 보내면서, 사랑의 포로(Le Captif amoureux, 1986)를 썼으며, 반시오니즘을 드러냈다.
1915 웰즈(George Orson Welles, 1915-1985) 미국 예술가, 배우, 영화감독, 제작자.
1918 바쟁(André Bazin, 1918-1958) 영화와 텔레비전의 프랑스 비평가. Cahiers du cinéma의 창간자 중의 한사람. 오손 웰즈(Orson Welles, 1972) ,
1930 가타리(Félix Guattari, 1930–1992), 프랑스 정신과의사. 라보르드(la clinique de La Borde à Cour-Cheverny, Loir-et-Cher) 임상병원에서 지냈다.
"Genet retrouvé" (in revue d'Études Palestiniennes, 1986), Cartographies schizoanalytiques(Paris, Galilée, 1989: 재수록?) 272-275.
?-? 밀리앙띠(Alain Milianti, s.d.)[1950k] 엑스-마르세이유 대학, 법철학, 정치철학 전공. 「수치의 아들: 주네의 정치참여에 관하여(Le fils de la honte Notes sur l'engagement politique de Jean Genet)」, Revue d'Études Palestiniennes; Beyrouth, Liban Vol. 0, Iss. 42, (Winter 1992): 205
1960 쥘리앙 들뢰즈(Julien Deleuze 1960-) 쥘 들뢰즈의 첫 아들, 영어와 독어 번역. 특히 지혜의 일곱기둥(Seven Pillars of Wisdom: A Triumph(Les Sept Piliers de la sagesse)(1922완성, 1926출판, 1935출판) 번역. fr. 1992년.
에밀리(Emilie Deleuze, 1964-)
*
* 아우다(Aouda) 쥘 베른 80일 간의 세계일주(1873)의 주요 등장인물, 인도 여성.
쥘 베른(Jules Verne, 1828-1905) 프랑스 작가. De la Terre à la Lune (1865) Vingt Mille Lieues sous les mers (1870), 80일 간의 세계일주(Le Tour du monde en quatre-vingts jours, 1873)
80일 간의 세계일주(Le Tour du monde en quatre-vingts jours, 1873)
필리어스 포그(Phileas Fogg): the fog 안개 혼란 -. (쟝 발쟝)
파스파르투(Jean Passepartout) : un passe-partout 만능열쇠
픽스 형사(Fix), (자베르)
아우다(Aouda): Mrs Aouda 인도의 여성, 포그가 전통의 순장에서 구해준다.
* 아우다(Aouda).
오토만 권력들에 반대하는 아랍 봉기를 이끈 자는 파이잘(Fayçal, 1883-1933)이다. 파이잘은 봉기를 하여 사막에서 소규모전투와 게릴라를 이끌었다. 아우다 1917년 [현요르단 최담단 도시] 아카바의 함락에서, 아우다(Aouda Abou Taya: sheik[족장] de la tribu des Taoueihas)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 Akaba: 요르단 최 남단 항구 도시(홍해로 나가는 항구)]
(13:13, 55QMI)
*참조 1** ***
지혜의 일곱 기둥(Seven Pillars of Wisdom)
- T.E. 로렌스 저 / 최인자 옮김 | 뿔(웅진문학에디션) | 2006년 11월 15일 |
'지혜의 일곱 기둥'이라는 제목은 로렌스가 구약 성서의 잠언 9장 1절("지혜가 그 집을 짓고 일곱 기둥을 다듬고")을 인용한 것으로, 아랍 지역의 일곱 도시에 대한 고고학적 탐구의 결과를 담은 원고에 붙이려던 표제를 사용한 것이다.
『지혜의 일곱 기둥』에서 로렌스가 활동했던 역사적 무대는 1차 세계대전 당시 서구 제국주의 열강들이 식민지 분할에 열을 올리던 시기였다. 영국 정부는 터키에 대한 아랍인들의 반란을 이용하여, 적대국이었던 독일의 동맹국인 터키를 격퇴할 수 있으리라는 속셈에서 아랍 반란을 지원한다. 당시 터키에 대항한 아랍 반란을 주도했던 인물은 메카의 후세인 왕이었으나, 이를 실질적으로 이끌었던 지도자는 그의 셋째 아들 파이살이었다. 로렌스는 파이살과 함께 부족 간 적대로 흩어진 아랍 부족민들을 민족주의적 정신 속에 하나로 규합하고, 2년 만에 다마스쿠스 해방이라는 업적을 이루어냈다. 그러나 1918년 파리 평화회의에서 아랍 자치 정부 수립에 대한 논의는 안건에 오르지도 못했고, 이러한 영국 정부의 약속은 결국 거짓으로 드러난다. 로렌스는 이 전쟁이 “아라비아에서 벌어진, 아랍인의 목적을 위해, 아랍인들이 주도하고 수행한 아랍 전쟁”이라는 확신 속에서 역사의 흐름을 주도했으나, 끝내 서구 제국주의 열강들의 이해관계에 따른 결정을 되돌려 놓을 수는 없었다.
열강의 치열한 이해관계와 힘없이 분열된 민족들의 고통 사이에서 고민했던 로렌스 역시 자신의 역할의 역사적 한계와 이율배반을 잘 인지하고 있었다. 로렌스는 이러한 한계 속에서 자신의 행위가 ‘헛된 희망’과 ‘실패’로 귀결될지라도 아랍인들이 최소한 유리한 입지를 확보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으리라는 믿음 속에서, 그리고 무엇보다 인간의 자유를 향한 내적 신념 속에서 행했다.
1권에서는 로렌스가 카이로에서 출발하여 아라비아 반도의 항구 도시 지다에 도착하는 것에서 시작하여 후세인 왕의 셋째 아들인 파이살을 만나기까지의 진로와 이후 메디나 근방의 철도를 장악하고 터키군의 물자 수송로를 차단해 나가는 북방 원정의 과정을 담고 있다. 2권에서는 적대적인 관계에 있던 아부 타이족이 파이살과 로렌스 진영에 합류하여 주요 항구이자 요새인 아카바로 진격하는 과정과 치열한 전투를 그리고 있다. 3권에서는 이 저작의 백미라 할 수 있는 사해 전투로부터 시작하여, 전쟁의 종착지였던 다마스쿠스로 입성하기까지의 과정이 그려진다. 고원지대의 혹독한 날씨와 엄혹한 지형 속에서 행했던 행군을 그려낸 3권의 사해 전투 기록은 이 저작에서 인간 한계의 극단에 대한 예리한 묘사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이다. 영어권 문단에서 이 저작에 멜빌과 도스토예프스키의 문장이 지닌 서사적 권위를 부여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3권에서 펼쳐지는 이러한 대장정은 결국 다마스쿠스에 입성하여 아랍 독립을 완수하고 아랍의 자치 정부 수립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끝이 난다. 로렌스는 비정한 살육의 현장에서 터키군 포로를 시켜 전사자들을 매장하고, 이후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파이살에게 모든 권한을 넘긴 뒤 아라비아를 떠난다.
** 참조 2*
아라비아의 로렌스: 전쟁, 속임수, 어리석은 제국주의 그리고 현대 중동의 탄생
- 스코트 앤더슨 / 정태영 역 | 글항아리 | 2017년 06월 12일 | 원서: Lawrence in Arabia
Scott Anderson(2013). Lawrence in Arabia: War, deceit, imperial folly and the making of the modern Middle East. 2013.
러시아 차르는 콘스탄티노플을 낚으려고 200년 전부터 낚싯바늘을 드리우며 기다렸다. 그리하여 1870년대에 발칸에서 오스만 군대를 궤멸한 바 있다. 프랑스 역시 16세기 이래 오스만 제국 치하 시리아의 가톨릭 신도들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특별한 지위를 누려왔다. 만약 제국이 붕괴하면 그 지역은 프랑스 땅이 될 터였다. 영국은 인도로 가는 육로를 제국주의 경쟁자들의 침식 작용으로부터 보호하는 일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1882년 대영제국은 민족주의 움직임을 구실 삼아 이집트를 잡아채기도 했다. 1915년에 연합국을 구성한 이들 3국은 독실한 기독교국으로서 어쩌면 십자군의 역사를 해피엔딩으로 다시 쓸 기회가 생길지도 모른다고 보았다. 한편 독일 역시 군사대국으로 떠오르면서 오스만 제국과 무슬림의 영토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유럽의 제국주의 열강 5개국(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미국)은 눈치껏 뜯어먹던 행태에서 벗어나 게걸스럽게 달려들었고 오스만 제국은 “거대한 전리품”이 될 위기에 놓였다.
특히 영국은 유럽 열강 가운데 해양 의존성이 가장 큰 국가로, 1870년대 이집트 수에즈 운하 건설을 배후에서 주도했으며, 운하를 독차지할 수만 있다면 오스만 제국과 지켜온 우호관계 따위는 내동댕이칠 준비가 돼 있었다. 마침내 영국은 속마음을 드러냈는데, 1882년 이집트를 침공한 것이다. 그 결과 수에즈 운하 서쪽 이집트 땅 전체가 영국 손안에 들어왔고, 오스만 군대는 운하 건너편 시나이 반도에 머물러야 했다. 그러나 이마저도 시작에 불과했다. 영국은 1906년 사소한 외교적 분쟁을 핑계로 시나이 반도까지 차지했다. 그리하여 이제 이집트와 시리아 서남부의 팔레스타인 지역을 분리하는 넉넉한 완충지대까지 얻게 되었다. 즉 영국은 오스만의 가슴에 영원토록 변치 않을 적개심을 심게 된 것이다.
더욱이 제1차 세계대전을 치르면서 영국은 후세인-맥마흔 서한으로 아랍인들에게 거짓 독립을 약속했고, 사이크스-피코 협정으로 뒤통수를 쳤다. 그리고 밸푸어 선언으로 시온주의자들에게 팔레스타인 땅을 내주었다. 중동에 피바람을 일으키고 마침내 아랍인들과 로렌스를 좌절시킨 영국의 3중(속임수) 외교의 핵심은 사이크스-피코 협정이었다.
스콧 앤더슨(Scott Anderson, 1959-), 미국 소설가, 국제분쟁 전문 기자. 미국 국제개발처 소속 농업 전문가인 아버지를 따라 1960년대에 한국과 인도네시아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레바논, 이스라엘, 이집트, 체첸, 수단, 보스니아, 엘살바도르 등 분쟁지역을 취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