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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4회
말씀 393
십자가는 구원의 능력 (고전 1:18-31)
2009-06-21 예배 (좋은 교회)
제 친구 아내 중 상담학 교수가 있습니다. 그 자매는 설교시간에 상한 감정의 치료, 치유등을 목사님이 말씀하시는 것이 별 도움이 되지않는다고 합니다. 상담학의 아주 기본적인 그런 내용을 그냥 반복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라면 굳지 교회에 오지 않아도 되는데. 그런데도 그런 말을 해 주는 이유는 사람들이 자연적으로 치유 심리 위로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서 참된 치유가 일어나는데, 교회에서 상담기법으로 치유를 일으키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보면 문제는 하나님의 말씀에도 없는 위로의 말을 해 주려 한다는 데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시대에,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원하는 것은 지혜와 능력이었습니다.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검증하게 해 달라고 말했습니다. 헬라인들은 철학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서 합리적으로 설명되는 내용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오직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증거하겠다 결심했습니다. 십자가의 복음을 전할 때 듣고 믿는 사람들을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것을 알았습니다. 아무리 능력으로 놀라게 하고, 지혜로 사람들에게 합리적으로 말해도, 하나님을 만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지난 시간에 사도는 같은 마음 같은 뜻으로 온전 체 하라고 권면하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바울파, 아폴로 파, 게바파, 예수파 그렇게 파벌이 생겼습니다. 또 누구에게 세례를 받았는가에 따라 파벌이 나누어 졌습니다. 10절,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온전히 합하라는 성도가 한 마음으로 주신 은혜를 따라 교회를 서로를 세워 가라는 뜻이라고 말씀 드렸지요? 분쟁이 생기면, 문제는 하나님이 각자의성도들에게 주시는 성령의 은혜를 서로에게 공급해 주지 못해서 “온전히 세워져 가지 못하게 하는데 있습니다.” 우리가 교회적으로 개인적으로예수님의 인격을 닮은 온전한 자로 성장하게 하시는 이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면서 성장해야 할 교회가 영적으로 성장하지 못하고, 오히려 영적으로 죽어가게 합니다.
교회 분쟁에 대한 해결책으로 사도는 교회의 가장 본질적인 사명,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전합니다. 말의 지혜로 전하지 않고 십자가의 복음을 순수하고 정확하게 전합니다. 말의 지혜라는 것은 웅변하듯이 유 창하게, 멋있는 표현을 쓰는 것, 그런 것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 바울은 연설을 잘 하더라, 설교를 잘 하더라” 이렇게 해서 자기 이름을 내는 일을 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리이스 철학자들 처럼, “존재론, 인식론, 안분자족” 그런 말들을 하지 않고,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만 전하겠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사도는 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만 전하는 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지혜를 원하고, 기적을 바라지만, 그 가운데서 멸망으로 갑니다. 죄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십자가에 달렸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에게는 참 지혜를 주고,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는 능력을 줍니다. 오늘 우리 교회도 십자가의 복음을 더 풍성히 전하고 받아들여서 죄용서 받아 하나님을 알고, 그 구원의 능력을 풍성히 체험하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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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혜있다고 하는 사람들의 죄와 심판을 해결하는 십자가
첫째 바울은 사람들이 스스로 하나님을 아는 지혜로는, 멸망의 길로 가며 오직 십자가 구원의 능력을 준다고 증언합니다. 18절에, “십자가의 도는 멸망하는 자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멸망하는 자, 구원얻는 우리는 둘 다 현재진행 수동태입니다. “멸망되어 가고 있다, 구원을 받아가고 있다” 모든 인간의 삶은 두 길 중에 하나로 걸어갑니다. 모든 인간은 살아있지만 다 멸망당해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2절에 “우리의 주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 즉 믿는 자들은 구원을 받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능력으로 우리를 구원해 주십니다. 그 능력은 바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사건을 일으키신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런데, 멸망당해 가는 자들은, 계속 멸망의 길을 가면서도, 자기들은 참 지혜있다, 총명하다고 생각합니다. 19절에, “내가 지혜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지혜와 총명은 공부를 잘 하거나 일을 지혜롭게 하는 데도 쓰지만, 주로 하나님을 아는 지혜와 총명을 말합니다. 20절의 “세상의 지혜”는 하나님의 계시된 대로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 스스로 생각하는 생각입니다. 그 사람이 자기 스스로 만들어 낸 신관념, 그런 지혜를, 추구하지만 그런 종교적 지혜를 하나님은 멸한다고 합니다.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원래 헬라어 뜻은 reject, 배척한다는 것입니다. 멸망시킨다는 것과 대구가 되어 비슷한 뜻입니다. 지혜자의 지혜와 총명한 자의 총명을 멸망시킬때, 사실은 소위 그들의 소위 지혜와 함께, 그들의 총명과 함께 소위 지혜롭다는 사람, 총명한 사람을 멸망시키고, 하나님의 행복한 나라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배척합니다.
그러니, 20절, 지혜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헬라 그리스인들이 말하는 지혜자, 철학자들입니다. 도대체 그들의 지혜가 무슨 가치가 있단 말인가? 또 선비가 어디있느뇨, 선비는 서기관입니다. 유대인의 서기관들은 변사들은 어디 있느뇨? 변호사, 로마의 법정에서 누가 옳은가를 가려 주는 웅변가들, 이들을 하나님이 멸하시고 배척하십니다.
20절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 21절,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세상이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는 것은 NIV “did not know him, 하나님을 알지 않는 고로” 으로 잘 번역했습니다. 세상이 하나님을 알지 않기로,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의 지혜는 하나님 앞에 참 지혜는 아니라서, 미련케 한다고 표현했습니다.
로마서 1:21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의 지혜는 어리석음이라는 것을 잘 설명합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하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고린도 전서에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고 하는 것이나, 로마서 1장에서 하나님을 안다는 것이나 같은 상태를 말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약간의 느낌과 지식은 있지만,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감사치도 아니하는 것이니, 사실은 하나님을 알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로마서 1:21절은 계속하여, “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 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 졌나니 스스로 지혜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즉 미련하게 되어” 우리 본문 고전 1:20 하나님이 세상 지혜를 미련하게 했다”고 합니다. 사람이 스스로 지혜있다고 하지만 미련하게 행동하니, 하나님께서 그 미련한 가운데 그냥 내버려 두셨습니다. 그것을 하나님이 미련하게 만들었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로마서는 계속합니다. 23절 미련함은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이것이 세상의 지혜, 하나님에 대한 지혜입니다.
세상은 자연을 관찰하고 이성적으로 생각하면서 하나님이 있다는 것을 어느 정도 압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의 변화, 아름다운 꽃, 먹이사슬을 통해 생태계의 균형이 유지되는 것, 애틋한 남녀간의 사랑이나 헌신적인 부모의 사랑, 이것들을 보면 하나님이 계시고, 그 신은 능력이 있고, 그 분의 신성은 정의롭고 능력있고 사랑이 있는 분이라는 것을 분명히 압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알지 못하지만 일반적인 신이 있다는 것은 압니다. 그러나, 그들은 삼위 하나님으로 알지 못하고 감사하고 영화롭게 하고 섬기는 대신에, 우상을 만들어 섬깁니다.
우리 나라를 보십시오. 무당에게 가서 점치고, 법당에서 마음을 수양하고, 종교심은 있지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문제는 지혜를 추구하고 하나님을 추구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죄가 근본적인 문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고전 1:21절,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인정하지 않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전도의 미련한 것이란, 23절에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한다” 전도 전한다 같은 말입니다. 우리가 전도하는 것은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 성자 예수님을 전하는데, 이것이 사람들에게는 미련한 것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 죄의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사람들이 자연적인 지혜로 하나님을 찾는 시대를 끝내고, 새로운 시대를 여셨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박히셨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셨습니다. 2천년전에 승천하셔서 하늘에서 지금 다스리고 계십니다. 7절에, 예수님은 당신의 재림의 날에 다시 나타나셔서 우리를 온전케 하시고 천국으로 이끄실 것입니다. 이것은 그냥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심으로, 기쁘신 뜻으로 행하신 일입니다.
예수님이 처음 오시고 두번 째 오실 사이에 이 땅에서 하나님은 어떤 일을 하십니까?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의 복음을 교회를 통해 계속 전도하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사람들은 미련하다, 비합리적이다, 말이 되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러나, 믿는 자들에게는 구원을 주십니다. 예수 십자가는 사람들을 둘로 정확히 나눕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는 사람, 예수님의 십자가를 어리석은 것이라 말하면서 그냥 멸망해 가는 사람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합시다. 사람의 지혜가 아니라 참 지혜되신 그리스도를 의지합시다. 인간의 지혜의 말에 위축되지 말고 오직 십자가의 능력만 의지하여 하나님을 알기를 바랍니다.
2. 능력을 구하는 유대인의 죄를 해결하는 십자가의 능력
둘째, 사람들은 표적과 강함을 원하지만, 하나님은 약해 보이는 십자가를 통해 구원의 능력을 나타냈습니다. 19절 “지혜를 멸하고, 총명을 폐하리라” 이사야가사 29:14에서 예언한 사건이 이루어 졌습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700여년 전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가 그랬습니다. 예언의 말씀 바로 전 절, 사 29:13절에,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 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공경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 그러므로 내가 이 백성 중에 기이한 일 곧 기이하고 가장 기이한 일을 다시 행하리니 그들 중의 지혜가 없어지고 명철자의 명철이 가리워 지리라”
그들의 죄의 문제를 해결할 기이한 일이 일어날 것이 예언되었습니다. 700년 후, 이 기이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셔서 구원의 일을 시작하시면서 이스라엘의 죄의 문제를 언급했습니다. 막 7:6-8에서 예수님은 이사야 29:13의 말씀을 인용하시며,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 도다” 이어서 막 7:8에서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유전 (전통)을 지키느니라. 사람의 계명이 무엇입니까? 식사할 때 마다, 부정한 것을 없애기 위해 손을 씻어야 한다는 그런 전통을 만들어 내어서 그것을 꼭 지킵니다. 자기들이 만든 전통을 잘 지키면 훌륭한 사람이다 칭찬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간파하십니다. 막 7:21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흘기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광패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사람이 만든 전통을 잘 지켜서 선한 체 가장하면서도, 마음 속에서 하나님의 계명은 계속 어기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 몇이, 예수님의 제자들이 식사전에 정결의식을 하지 않는다고,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들의 유전을 준행치 아니하고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나이까” 예수님을 비난합니다. 이것이 서기관들의 지혜입니다. 고전 1:20 “선비”로 번역된 서기관들의 지혜입니다. 서기관들의 지혜, 겉으로 보기에는 경건한 것 같지만 하나님을 믿지 않는 그들의 위선을 드러냈습니다.
이들이 지혜를 폐하시고, 예수님은 참 지혜의 길, 십자가의 길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 기이한 길을 보여 주었습니다. 이사야가 예언이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되었습니다. 이사야는 그 기이한 일을 29:18에서 “그 날에 귀머거리가가 책의 말을 들을 것이며 어둡고 캄캄한 데서 소경의 눈이 볼 것이며 겸손한 자가 여호와를 인하여 기쁨이 더하겠고 사람 중 빈핍한 자가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인하여 즐거워 하리니”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도 기이한 일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22절에,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들은 지혜를 찾으나” 그들은 표적, 다른 때는 기이한 기적을 기다렸습니다. 헬라인들은 신에 대해 멋있게 말하는 지혜를 구했지만 유대인들은 그 기이한 일, 병이 낫는 기적을 보여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예수님은 당연히 귀머거리 등 병자들을 낫게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보여 줄 기적은 육체적 질병을 낫게 되는 신기한 일만 보여 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복음서는 처음 부분에는 예수님이 병고치는 기적을 많이 보이지만, 뒤로 갈수록 그런 기적은 없어지고 대신에 가장 기이한 기적 십자자에 죽으시고 부활하는 일에 집중합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메시야가 아닌가 생각하면서, 확인하고 싶어서 계속 기적을 보여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마 12:38-40에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표적 보여주기를 원했습니다. 예수님은 “요나의 표적 밖에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요나가 밤낮 사흘을 물고기 뱃 속에 있었던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 속에 있으리라”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증거했습니다. 16:1-4에서도, 표적을 구하는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은 요나의 표적만을 보여 주겠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표적을 보여 주겠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그정도 표적을 보여 주었으면 되었지 계속 표적을 보여 달라는 것은 인간적인 생각입니다. 인간적인 지혜, 인간의 추구입니다.
그런 표적을 구하는 자들에게, 고전 1:24절, 십자가는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입니다. 스캔들, 넘어진 것이요 약하여 실패한 것으로 보입니다. 헬라인에게는 어리석은 것입니다. 비합리적인 것입니다. 일어날 수 업는 것입니다. 그러나, 24절 부르심을 입은 우리들에게는, 예수님을 믿을 수 있도록 부름을 받은 우리들에게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기적에서 그 능력 체험하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기적적인 능력체험보다, 연약해 보이는 십자가를 의지하여 그 능력을 체험하기 바라빈다.
3. 예수 안에 있는 구원, 영접하는 자가 받는다.
그러면 어떻게 이 구원의 능력을 체험합니까?
예수님은 부활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은 믿는 자들에게 나타내셨습니다. 30절에, 구원을 “너희는 하나님께로서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십자가에 달렸다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즉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께로서 납니다. 즉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됩니다 (요 1:12, 13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이 구원이 여러분에게 구원이 임하기를 기도합니다. 30절에, “예수님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기쁨, 하나님의 구원을 가지고 예수님은 우리 마음에 오시고 있습니다. 지혜, 즉 의로움 거룩함 구속이 되었다. 이렇게 읽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지혜가 되는 것을 경험합니다. 하나님의 지혜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는 것을 말합니다. 사 29장 24절은 “마음이 혼미하던 자도 총명하게 되며” 혼미는 그릇행한다는 뜻입니다. 이사야 53:6 우리는 다 그릇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우리 영혼이 하나님을 따나 방황하여 하나님을 아는 지혜와 총명을 잃었지만, 이제 예수 안에서 눈이 밝아져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예수 안에 있는 그 구원의 능력을 경험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의로움이 되십니다. 우리는 죄인이고 하나님 앞에 설 수 없고 죽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를 구속하셨습니다. 구속이란, 대신 값을 치르고 해방해 준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 값을 치렀습니다. 이제 믿는 자들은 더 이상 하나님 앞에서 죄의 벌을 받지 않습니다. 죄없다 하십니다. 의롭다 하십니다. 예수님의 의로움이 우리의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제 믿고 의롭게 된 자들에게 예수님은 우리의 거룩이 되십니다.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과 교제하고, 거룩한 삶, 으로운 삶을 살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 성령을 보내셔서 성령 안에서 거룩한 삶을 살게 하십니다.
이제, 믿고 의롭게 되고 거룩한 삶을 사는 우리들에게, 예수님은 우리의 구속이 되십니다. 예수님이 당신의 피로서 우리를 죄에서 해방해 준 구속으로 우리의 구원이 시작되었지만, 이제 우리는 완전한 구속의 날을 소망 가운데 기다립니다. 우리 영혼이 완전히 죄에서 해방될 그날, 온 인류와 역사가 새롭게 되는 구속의 날을 기다리니다.
영접
우리가 어떻게 이 은혜를 누리게 되었습니까? 고전 1:26,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우리들에게는 복음을 전해 주셨을 뿐 아니라, 마음으로 불러 주셔서 그리스도인 되게 하셨습니다. 27,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약한 것들을 택하사” 하나님이 택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처럼, 지혜없고 세력이 약한 사람들 불러 주셨습니다. 우리 믿게 된 우리들에게 어떤 특별한 착함과 선함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냥 우리에게는 특별한 사랑, 특별한 은혜를 주셔서 우리를 불러 주셨고, 우리를 선택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선택받고 믿게 되었다고 자랑하겠습니까? 29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그럼,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어떻게 누리겠습니까? 내가 예정받고 부르심을 받았으면 구원받겠지. 그렇게 팔짱끼로 앉아 있으면 될가요? 아닙니다. 하나님이 누구를 예정하였는가 하는 것은 하나님 당신만 아시는 비밀입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누가 예정되었는지를 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라.” (롬 10:9)
십자가에 죽었다가 부활하신, 이제 승천하실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받아들였습니까? 여러분은 행복한 자들입니다. 아직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이지 않으셨습니까? 오늘 예수님을 주님으로, 당신은 나의 주인입니다. 주인으로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그렇게 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오늘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의 기쁨이 이루어 지기 바랍니다. 형제님을 구원하시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기쁨이 이루어 지기 바랍니다.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아는 축복, 우리의 것입니다. 죄용서 받고 거룩하게 살고, 점점 더 죄와 사단의 권세에서 해방되는 이 축복을 계속 누립시다. 이 오늘 예수님을 영접하여 이 축복이 우리 모두에게 계속되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혜있다 하지만 사실은 하나님을 배반하는 사람들, 기적과 능력을 추구하지만 예수님의 십자가의 능력을 부인하는 사람들, 그래서 하나님께 멸망의 길을 가고 거절당하는 길을 가던 우리들이었니다. 이제 우리에게 전해진 복음을 듣고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받았으니, 계속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여, 참으로 하나님을 아는 지혜, 의롭게 되고, 거룩하게 되고 해방되는 축복을 계속 누리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