텃세
내리쬐는 햇살은 소갈머리 없는 밑머리까지 라이터 불을 대는 듯 뜨겁게 후벼판다. 삶은 감자 몇 알로 점심을 대신하고 근처 오일장으로 무거운 발걸음을 옮긴다. 농산물이 장터 사람들의 시선을 움켜쥐지만 갖가지 유실수는 가던 걸음을 되돌리게 한다. 제대로 익은 제철 과일은 침을 삼키게 만든다.
아내의 지청구가 반복된다. 요즘 “마누라 말 안 듣는 남편”이 있는가. 어찌 이렇게 ‘간이 큰지’라며 갸름한 얼굴 근육에 가로줄이 그어진다. 시골에 터를 잡고 전원생활을 겸한 지 삼 년째에 접어든다. 온돌방에는 앉은키만큼 편백을 두르고 마당에는 나무 그네를 조립해서 언제든지 타고 놀 수 있도록 했다. 긴 테이블과 다인용 나무 의자도 곁들였다. 안채에 화장실과 겸하고 있는 목욕탕 벽에는 무늬가 들어간 타일을 붙였다. 서툰 솜씨에 영상이 참고될 뿐 온통 혼자 하는 일이다.
마당에 자라는 잡초는 신비롭다. 퇴비를 주지 않아도 왜 이리도 잘 자라는지, 애써 키우는 잔디는 뒷전이다. 풀 깎는 기계의 힘을 빌려 손을 덜어보려 하는데 한 뼘 이상 자란 키에 기계가 스르륵 멈춰 제구실을 비켜 간다. 전기 충전을 거듭하지만, 낫만큼도 효율이 못하다. 시골 생활은 풀과의 전쟁이다. 비가 자주 내리는 장마철은 더 심하다. 한 주가 멀다 않고 빼꼼히 내미는 잡초는 성가신 일거리를 안겨준다. 제초제가 빠른 길이지만 자연과 함께하는 공간이기에 손놀림을 쉬지 않는 것으로 대신한다. 집 주변을 한 바퀴 돌다 보면 허리 펼 틈이 없다. 지붕 서까래마다 거미가 먹이 사냥에 노력한 흔적을 지우는 인간의 횡포를 덩달아 반복한다.
닭장에는 지난해 사 넣은 청계 두 마리와 토종닭 세 마리가 터를 잡고 있다. 다 자라 매주 우리 가족에게 신선하고 넉넉한 달걀을 넘겨준다. 중간 크기의 닭을 사 넣은 지 육 개월이 지나면서 하나둘 알을 낳더니 이제는 몇 꾸러미를 안긴다. 닭장 문을 열고 산란장을 살필 때마다 한 알 한 알 꺼내먹는 재미를 붙이면서 욕심이 생기는 모양이다. 수탉을 사 넣어 유정란을 기대하며 병아리 부화까지 해보자는 의견을 낸다. 말처럼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닐 터 입이 일을 다 하는 셈이다. ‘열려라. 참깨’ 하면 뚝딱 만들어진다고 생각하는지 지켜보는 내내 불안하다.
전통 시장 입구 신호등 근처 일전에 닭을 사들인 가게를 찾아간다. 도로 양쪽으로 차양을 두르고 제각기 다양한 물건을 진열해 놓았다. 그중에서 날짐승을 팔고 있는 곳에 멈춘다. 오리, 거위, 닭이 올망졸망 철망 속에서 모이를 쪼고 있다. 검은빛을 띠는 청계 수탉이 있는지 확인하는데 찾는 사람이 별로 없어 오늘은 준비되지 않았단다. 우리가 꼭 필요하면 다음 장에 가져온다고 일러준다. 나와는 생각이 다르다. 병아리 몇 마리를 더 사다가 중닭으로 키워 필요할 때 활용하려는 모습과는 타협이 되지 않는다. 수탉 구매는 다음 장으로 넘긴다. 강한 햇살에 챙이 긴 모자를 눌러쓰고 오일장으로 향한다. 하얀 바탕에 검은색이 들어간 수탉이 눈에 들어온다. 흰색을 띤 녀석 두 마리 중 머리 붉은 볏이 두드러진 닭을 택한다. 몇 군데 구멍을 뚫은 종이 상자에 담아 옮기는데 무게가 만만찮다. 상자를 두른 노끈이 중심을 잃고 기울어진다. 오이랑 가지 등 몇 가지를 검은 봉지에 담아 들고 집으로 향한다. 십여 분이 지나 집에 도착하여 짐을 푸는데 닭이 먼저 내려진다.
닭장 문을 열고 들어서는데 평소와 같이 모이를 주는가 싶어 닭들이 모여든다. 장화 신은 발을 휘저어 길을 확보하고 종이 상자를 내려놓는다. 수탉은 상자 안에 움츠렸고 앉아 한쪽 구석에 붙어 있다. 상자 뚜껑을 열어 기존 닭들 앞에 선을 보인다. 낯선 환경에 얼떨떨한지 발걸음을 옮기지 못하고 서 있다. 몇 분이 지났을까. 닭장 가장자리로 옮겨 바닥 흙을 파헤친다. 모이통 가까이에는 서 보지도 못한다. 그렇게 넓지 않은 닭장에 몸을 비집고 흙 마사지를 하는 듯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몇 시간을 지켜보지만, 기세에 눌렸는지 혼자 따로 거닌다. 덩치는 서로 비슷하지만, 오히려 암탉에게 힘에 밀려 길을 비켜 간다. 콕콕 등과 닭벼슬을 쪼기도 한다. 아니 텃세에 밀려 따돌림을 당한다. 닭을 팔던 상인의 말이 머리를 스쳐 간다. 여러 마리의 암탉 속에 수탉 한 마리가 들어가니 얼마나 좋아하겠냐는 말은 빈말인 듯싶다.
하룻밤을 지낸 새벽녘 여태 들어보지 못한 울음소리에 잠이 깼다. 고요하던 닭장에 수탉이 자신의 존재를 알린다. ‘꼬끼~오, 꼬~끼오’ 지금껏 멀리 몇 개의 집을 가로질러 들려오는 닭 울음소리만 들었는데 가까이에서 닭 울음을 접한다. 어릴 적 어둑새벽 닭 울음에 농기구를 챙겨 들일 나가는 시간을 떠올려 본다. 귓전에 울리는 닭울음은 생소하기도 하고 시간이 가면서 시끄러워 성가시다는 기분까지 든다. 며칠 지내다 보면 익숙해지겠지 하는 생각으로 일상으로 파묻힌다. 아내의 원처럼 유정란이 쏟아져 나오기를 고대하면서 닭장 안을 살피는데 세 무리로 나뉜다. 크게 보면 두 부류다. 따로 노는 수탉과 이전부터 함께 지낸 다섯 마리의 닭으로 구분된다. 기존 무리 속에 녹아드는 데는 시간이 필요한 듯하다.
우리 사람 또한 마찬가지 아닌가. 짧은 시일에 새 환경에 녹아 들어가 어울리는 자는 많지 않다. 이들의 어울림을 보는 날을 기다려본다. 동물 또한 사람과 별다르지 않음을 본다. 약한 이는 집중적으로 공격을 당한다. 아니 오히려 건강한 이를 남겨야 우성의 법칙이 적용되어 생태계 질서가 오래 유지된다나. 수탉을 들이면서 이들 사이의 또 다른 힘겨루기를 접했다. 인간들의 편리 때문에 살아갈 자리를 옮겨 가는 여러 군상이 나를 돌아보게 한다.
풀밭을 헤치고 꽃망울 피울 흰 수국과 빨간 수국의 꽃송이를 한 아름 안아본다. 대문 밖 동백나무의 씨앗을 매만진다. 앞다투어 피고 지는 꽃망울은 내년을 기약하는 경쟁 속에 어우러짐을 돌려준다. 마당 한쪽 화단에 아침 이슬을 머금고 고개를 내민 모란은 낡은 가지를 딛고 이파리를 뻗어간다. 새잎이 나고 먹은 가지를 버려둔다. 여름이 짙어 갈 때면 희고 자줏빛 나는 꽃을 피워 줄 것이다. 적당한 수분과 햇빛만 주어진다면 별다른 욕심이 필요치 않다. 그나마 식물이 동물보다 욕심이 덜한 모양이다. 욕심 많은 동물 떨거지를 멀리하고 소박한 식물을 가까이 해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