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양과 떼(turf) 의 훼손
노르웨이인들이 그린란드의 초목을 훼손시킨 탓에 목재와 땔감, 그리고 철이 부족한 사태가 초래되었다.
한편 토양과 떼에 가한 훼손의 결과는 유용한 토지의 부족으로 나타났다.
제6장에서 우리는 아이슬란드의 가벼운 토양이 결국 토양 침식이란 큰 문제로 발전하는 과정을 살펴보았다.
그린란드의 토양이 아이슬란드의 토양만큼 취약하지는 않지만 세계를 기준으로 하면 상대적으로 취약한 편이다.
그린란드에서는 작물의 생장 기간에도 날씨가 쌀쌀해서 식물의 생장률이 낮고 토양도 느리게 형성되며 표토층이 얇기 때문이다.
식물의 생장률이 낮다는 것은 물을 담아 토양의 습기를 유지하는 성분인 부식토와 진흙이 토양에 적다는 뜻이기도 하다.
따라서 그린란드의 토양은 빈번하게 불어대는 강한 바람에 쉽게 말라버린다.
그린란드에서 토양 침식은
흙을 묶어두는 데 풀보다 훨씬 효과적인 나무와 관목이 베어지고 태워지면서 시작되었다.
나무와 관목이 사라지자 가축, 특히 양과 염소가 풀을 뜯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린란드의 추운 기후 때문에 풀은 느리게 재생될 뿐이었다.
표토를 덮고 있던 풀이 철저하게 뜯기자 토양이 드러났다.
강한 바람에 흙이 흩날렸고 간헐적으로 폭우까지 쏟아졌다.
표토가 계곡 전체에서 수 킬로미터까지 벗겨졌다.
모래층이 드러난 지역에서는 모래가 강한 바람을 타고 날아다니다 가라앉았다.
호수의 퇴적물과 토양 단면은
노르웨이인이 도래한 이후 그린란드에서 일어난 토양 침식의 발달사이며,
바람과 유거수에 표토와 모래가 호수에 퇴적된 과정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예컨대 빙하 바람이 불어대는 코르크 피오르드의 입구에 있어 버려진 한 목장터에는 돌밖에 보이지 않는다.
대부분의 흙이 강한 바람에 날려가버린 텃이다.
바람에 날리는 모래는 지금도 그린란드의 목장에서 흔히 볼 수 있다.
바트나베르피 구역에 버려진 일부 목장들은 3미터까지 모래에 파묻혀 있다.
토양 침식이 땅을 불모지로 만들어간 주된 원인이지만
목재와 댈감이 부족해서 떼를 떼어내 건축 자재와 연로로 사용한 것도 그런 비극에 적잖은 역할을 했다.
그린란드에 세워진 건물들은 기초에 깐 돌, 지붕을 지탱하기 위해 들보로 사용된 약간의 나무를 제외하면 주로 떼로 지어졌다.
가르다르의 성 니콜라우스 성당의 벽조차 바닥부터 1.8미터만 돌이 사용되었고, 그 위로는 떼가 사용되었다.
나무 들보로 지탱한 지붕에도 떼를 띄웠고, 나무판을 댄 건물의 정면에도 떼를 덧씌웠다.
발세이 교회가 예외적으로 벽을 온젆 돌로 쌓앗지만 역시 지붕에는 떼를 사용했다.
게다가 추위를 막기 위해서 떼벽은 무척 두꺼웠다.
거의 1.8미터에 이르렀다.
큰 집 한 채를 짓는데 대략 10에이커의 떼가 필요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게다가 떼는 영구적이지 못햇다. 시간이 지나면 부식되었기 때문에 수십 년마다 그만큼의 떼가 다시 필요했다.
노르웨이 사람들은 집을 짓기 위해 떼를 얻는 과정을 '변두리 밭을 벗겨낸다'라고 표현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초지로 사용되었을 곳에 안겨준 훼손을 적절히 표현한 말이라 할 수 있다.
게다가 그린란드에서는 떼가 빨리 재생되지 않아 그 훼손은 쉽게 아물지 않았다.
토양 침식과 떼의 남용에서 초목이 손실되었다는 지적에
환경회의론자는 다시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라고 반문할 수 있다.
이런 반문에는 간단히 대답할 수 있다
북대서양의 노르웨이 식민지 중에서 그린란드는 애초부터 가장 추운 섬이엇다.
따라서 건초 생산과 목초의 성장이 가장 한계치에 가까웠고
지나친 방목과 토양 침식 및 떼의 남용으로 인한 초목의 손실을 극복하기 어려운 섬이었다.
목장이라면 춥고 긴 겨울을 지내면서 가축을 잃었더라도
다시 춥고 긴 겨울이 오기 전에 새끼를 낳아서 적정 수준까지 가축 수를 늘려야 했고,
그러자면 최소한의 가축을 유지할 수 있는초지가 있어야 했다.
추정에 따르면 동쪽 정착지나 서쪽 정착지에서
초지의 4분의 1만 사라져도 가축 수가 최소 수준 이하로 떨어질 수 있었다.
그런데 서쪽 정착지에서 실제로 이런 비극이 닥친 듯하다.
물론 동쪽 정착지도 그런 비극을 걲었을 가능성이 없지 않다.
아이슬란드가 그렇듯이, 중세 노르웨이 사람들을 괴롭힌환경 문제들이
지금의 그린란드에서도 커다란 걱정거리이다.
노르웨이 사회가 그린란드에서 붕괴된 후 5세기 동안 이 섬에는 가축이 없었다.
이누이트의 땅에도 없었고, 덴마크로 지배권이 넘어간 후에도 가축은 없었다.
그런데 1915년, 즉 중세 노르웨이인들이 그린란드 환경에 미친 영향에 대한 연구가 시작되기 전에,
덴마크인들은 아이슬란드 양을 시험삼아 그린란드에서 방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24년에는 첫 상주자들이 브타타흘리드 목자을 재건하고 양을 키웠다.
젖소도 실험했지만 너무 일거리가 많아 포기되고 말았다.
오늘날 그린란드에는 65가구가 주업으로 양을 기르고 있다.
따라서 과도한 방목과 토양 침식이 다시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린란드 호수에서 채취한 퇴적물들은 984년 이후의 과정을 1924년 이후에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나무의 화분이 줄어들었고, 풀과 잡초의 화분이 증가했으며, 호수에 유입되는표토량이 늘어났다.
1924년 이후 처음에는 겨울에도 견딜 만하면 양들을 밖에 풀어놓고 스스로 풀을 뜨게 했다.
그 때문에 초목이 최소한으로 재생할 수 있는 시간마저 빼앗기고 말았다.
특히 노간주나무의 ㅍ피해가 심했다.
말과 양이 먹을 것이 없어 노간주나무의 새씩을 뜯어 먹었기 때문이다.
그티스티안 켈러의 증언에 따르면
1975년 브라타홀리드에 도착했을 때 노간주나무는 그곳에 틀림없이 살아 있었다.
2002년 내가 그곳을 찾았을 때 나는 죽은 노간주나무만을 보았을 뿐이다.
1966~1967년 겨울에 혹독한 추위가 몰아닥치면서 그린란드에서 양의 절반 이상이 굶어 죽었다.
그 후 그린란드 주 정부는 그린란드 실험국(Greenland Experimental Station)을 창설해
과도하게 방목된 목초지, 야간 방목된 목초지, 양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울타리를 둘러쳐진
밭의 초목과 토양을 비교해서 양이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본격적으로 연구했다
이 연구에는 고고학자까지 참여해서 바이킹 시대의 목초지 변화상까지 연구했다.
그 결과를 근거로 그린란드 사람들은 가장 취약한 목초지에 울타리를 두러쳤고,
겨울에는 양을 축사에 가두어 두고 있다.
또한 목초지의 지력을 향상시키고 귀리, 호밀, 큰조아재비 등 외래종 풀을 심어
겨울 건초의 증산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린란드에서 토양 침식은 큰 문제이다.
나느 동쪽 정착지의 피오르드를 따라 올라가면서,
최근에도 양을 방목시킨 탓에 돌과 자갈이 훨히 드러나고
초목을 거의 찾을 수 없는 지역을 곳곳에서 보았다.
코를로르토크밸리 입구의 옛 노르웨이인의 목장터에
새로 조성한 현대식 목장은 지난 25년 동안 강한 바람으로 침식되었다.
7세기 전에 그 목장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보여주는 증거인 셈이다.
그린란드 주 정부와 목양업자들은 양이 장기적으로 그린란드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잘 알고 있지만
실업률이 높은 사회에서 일자리를 창출해야 한다는 압력도 동시에 받고 있다.
얄궂게도 그린란드에서의 목양사업은 단기적으로는 수지를 맞추기 힘들다.
따라서 주 정부가 매년 각 목장에 1만 4,000달러씩 보조해서 손실을 보전해주며
목양 사업을 계속하도록 독려해야 하는 실정이다.
354 - 3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