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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도민일보 2009. 10. 26 거기서 만나자
봉리교회(전남 신안군) 세례교인 명부 첫 장에 김통안(1901. 8. 19-97. 10. 20) 권사님이 이름이 적혀있다. 그녀의 남편 김면주 씨는 아들 셋을 낳은 아내가 별세하자 김통안과 재혼해서 김준곤과 네 아들을 얻었다. 그의 비문에 ‘일제시 소작쟁의 사건에 가담하여 선봉적 역할로 일관하시고 농업에 종사하여 탁월한 기지로 풍요 단락한 가정을 영위하시니...민족적 비극인 6‧25사변으로 인하여 1950년 8월 26일 60세를 일기로 애석하게 기세하시었다.’ 라고 새겨져있다. 좌익 세력이 그를 죽였다. 김 권사님의 자부 인정진(故 김준곤 목사님 처)도 40여 일 후에 죽었다. 그녀 묘비에 ‘1924년 10월15일 생. 지도국민학교 교사 재직 중 주일학교 한 죄로 토착 공산당들에게 1950년 10월 3일 영광스러운 순교를 했다. 슬하에 딸 김은희가 있고...남편 고향인 원동으로 피난왔다 순교함. 김준곤 봉헌’이라 각인되었다.
김 목사님께서 가해자 입장을 생각하며 젊잖게 이런 단어를 쓴 것 같다. 몇 년 전에 보았던 비문은 ‘북만주에서 남편 따라 이 섬에 와서 밀 알 한 알처럼! 26세를 일기로 기도와 눈물과 사랑과 신앙의 거름되어 1950년 10월 3일 6․25 전란 중에 순교하여 여기 잠들으시다.’ 라고 새겨있었다. 젊은 부인의 애석한 죽음 역시 좌익에 의한 살해였다. 누가 끔찍한 살육을 저질렀는가. 마을 이웃. 친척, 얼굴을 맞대고 살아왔던 그 사람들이었다.
김준곤 목사님은 1948년에 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고 전도사로 금촌교회를 섬기고 있다가 6‧25가 터지자 고향(신안군 지도)으로 내려왔다. 그러나 평화스러웠던 섬마을 농촌이 피난처는 아니었다. 좌익세력이 일어나 공무원과 가족 그리고 주민들을 무차별 죽였다. 김 목사님은 광란하는 폭도들을 보며 순교를 각오했다. 10월 2일, 불안과 긴장가운데 부부가 찬송하고 기도했다. ‘후일에 생명 그칠 때 여전히 찬송 못하나 성부의 집에 깰 때에 내 기쁨 한량 없겠네 내 주 예수 뵈올 때에 그 은혜 찬송 하겠네…’ 사모님은 흰옷을 입었다. 부활 승천하신 주님 만날 준비였을 것이다.
10월 3일 새벽 2시쯤 폭도들이 들이닥쳤다. 김 목사님은 아내와 함께 붙들려서 마을 뒷산 황금리 저수지 위로 끌려갔다. 피비린내 나는 사람도살장이었다. 몽둥이, 죽창, 칼로 치고 찌르고 찢으니 그 울부짖음과 분노와 신음과 주검은 아비규환 지옥이었다. 인정진은 그렇게 죽었다. “은희야, 하나님 곁에서 만나자…” 세 살 딸에게 마지막 말을 남기고. 김준곤은 실신했다가 깨어나 도망쳐 숨었지만 다시 붙들리니 돌을 달아 바다에 던지기로 했다. 국군이 상륙하고 경찰이 들어오자 폭도들은 도망쳤고 김준곤은 산 자로 남았다.
1950년 그 때 증인은 만날 수는 없었지만, 김 목사님 부모가 살았던 그 시골집을 지키며 살고 있는 김 집사님이 눈물을 글썽이며 그 때를 아는 대로 들려주었다.
남편과 젊은 자부를 잃은 김통안 권사님의 그 때 마음을 누가 말할 수 있을까. 같은 시기 좌익에 의해 남편과 아들을 잃었던 한 부인의 몸부림과 절규를 조정래 소설 ⌜불놀이⌟에서 읽어본다. ‘남편이 잡혀간 충격으로 앓아누웠던 시어머니는 겨우 기운을 차리는가 싶더니 삼봉산에서 사람이 죽어간다는 풍문을 듣고는 다시 식은땀을 흘리며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기어이 시아버지가 살해 되었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안 되야! 안 되야!” 시어머니는 벌떡 일어서며 울부짖고는 그대로 대청바닥에 넘어졌다. “어무니이-” 그녀는 시어머니를 덮어 안았다. 그러나 시어머니는 이미 죽어 있었다. 눈을 허옇게 뜬 채였다.’ 아-, 어두운 시대의 비극이요 슬픔이었다.
김준곤 목사님은 피 흘림의 역사, 내 가족을 죽인 사람들까지도 예수 십자가 보혈로 용서하고 화해하며 복음을 전하고 순교 믿음으로 살았다. 둘 째 딸 김신희 씨가 두 딸을 남겨두고 말기 암으로 죽었을 때 “…지금 신희는 고통과 슬픔에서 벗어나 찬란하고 황홀한 주님 곁에서 천사들과 뭇 성도들의 찬송을 들으며 안식과 희락과 사랑과 건강과 행복을 누리고 있을 것입니다. 후일 내가 생명이 끝나 주님 품에서 깨어나면 그 애가 제일 먼저 꽃다발을 들고 아빠를 마중나와 주겠지요.” 하셨는데, 그도 지난 9월 29일 이 민족의 가슴에 예수 그리스도의 피 묻은 십자가 복음을 심으시고 가족이 먼저 가셨던 하나님의 나라로 옮겨가셨다. 우리에게는 거기서 만날 소망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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