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人間革命 29卷 第2章 力走(61~66)
<역주 61>
야마모토 신이치 일행은 오후 6시가 넘어서 하타회관에 도착했다. 주변은 이미 어두웠다.
신이치는 마중 나온 관리인을 격려하고 회관에서 기다리던 하타지역 멤버와 시간이 허락될 때까지 간담했다.
시간을 최대로 활용해야만 생명은 빛난다.
신이치는 4, 50분 뒤에 하타회관을 출발해 고치시로 돌아가기 위해 나카무라역에서 열차를 탔다. 돌아가는 열차 안에서도 도중에 승차한 학회원 가족과 대화를 나눴다. 오후 10시가 다 되어 고치문화회관에 도착했다.
이튿날 12월 10일, ‘교학의 해’의 대미를 장식하는 교학부 임용시험을 오후 1시부터 전국 시험장에서 일제히 실시했다.
신이치는 오전 중에 고치문화회관 주변에 있는 상점들을 찾아가 인사하고 때마침 만난 학회원을 격려했다.
오후에는 회관에서 임용시험 응시자를 격려한 뒤, 또 다른 시험장인 학회원이 운영하는 보육원을 찾아가 이곳에서도 응시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신심의 기본은 신행학입니다. 교학을 연찬하고 이렇게 시험에 도전하는 모습이 인간으로서 불법자(佛法者)로서 구도하는 존귀한 모습입니다. 또 그것이 복운과 공덕을 쌓는 원천이 된다고 확신하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신심의 승리자가 되기 바랍니다.”
시험장을 나와 복도에서 운동장을 바라보니 200명가량이 대기하고 있었다. 응시자와 함께 온 사람들이었다.
‘이분들은 응시자를 찾아가 임용시험에 도전하도록 설득하고 날마다 격려하며 교학을 가르쳤을 것이다. 성실함, 진지함, 끈기가 필요한 힘든 도전이었을 테지.
거기에 인재육성의 왕도가 있고 환희와 충실감이 있다. 그리고 창가(創價)가 추진하는 광선유포 운동의 본류가 있다!’
신이치는 감동과 고마운 마음을 담아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 정말 고맙습니다!”
그리고 기념촬영을 제안하고 세 번으로 나눠 이날의 만남을 사진으로 남겼다.
<역주 62>
신이치는 임용시험 장소를 제공한 보육원 원장 다카하라 요시미의 집에도 찾아갔다. 시험장을 제공해준 것에 진심으로 고맙다고 말하고 준비해 간 네모난 두꺼운 종이에 ‘광복(光福)’이라는 휘호를 써서 선사했다.
다카하라는 자신이 걸어온 40여년의 인생을 되돌아보며 말하기 시작했다.
다카하라는 결혼한 뒤 가난과 가정불화로 괴로워하며 어린 자식을 키우고 반신불수인 시아버지를 뒷바라지했다. 두레박으로 물을 길어다가 장작불로 밥을 지어 가족의 아침식사를 챙겼다. 자신은 가족들이 남긴 음식을 대충 입에 넣고 농사일을 하러 뛰어나가는 하루하루였다.
몸도 마음도 지쳐 아무런 희망도 느낄 수 없었다. 그때 친정어머니의 권유로 입회했다.
시부모는 ‘며느리가 선조대대로 믿어온 종교를 바꾸다니 당치도 않다’고 야단을 쳤다. 이웃사람들은 ‘저 집 며느리가 남묘에 빠졌다’며 비웃고 마을에서 따돌리기까지 했다.
‘신심을 그만 두자’고 생각하고 괴로워하는 날이 이어졌다. 그러나 학회 선배가 수시로 찾아와 ‘이 신심은 올바르고 힘이 있기 때문에 마(魔)가 다투어 일어난다. 당신이 바뀌면 반드시 환경도 바뀐다’고 확신 있게 지도해주었다.
격려가 사람을 사자(師子)로 만든다.
‘좋아! 아무리 괴로워도 열심히 해보자. 이 신심으로 숙명을 전환할 테야!’
다카하라는 신심으로 역경을 하나하나 이겨냈다. 그때마다 확신이 커졌다.
어느 날 소유하던 땅이 높은 가격에 팔렸다. 그것을 자금으로 집 주위 땅을 사서 지역 주민들이 바라는 보육원을 짓기로 했다. 보육원 개원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직원도 헌신적인 좋은 사람들이 들어왔다. 지역 사람들도 여러모로 애쓰고 도와주었다.
다카하라는 기쁨에 젖어 이렇게 말했다.
“야마모토 선생님! 입회하기 전에는 꿈에도 생각지 못한 행복한 경애가 되었습니다.”
“신심을 단호히 관철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위 사람들도 협력해 주는 것이랍니다. 신심이 바로 일체를 승리하는 힘입니다.”
묘락대사는 “반드시 마음의 견고함에 따라서 신의 수호도 즉 강하니라”(어서 1186쪽) 하고 말했다.
<역주 63>
신이치는 임용시험 응시자를 격려하고 고치문화회관에 돌아와 시코쿠 대학회 멤버와 기념촬영했다.
오후 4시부터는 개관 1주년을 기념하는 반장, 반담 근행회에 참석해 지도했다.
신이치는 제일선 조직의 리더와 만나는 일이 가장 즐거웠다.
반조직이 바로 광선유포의 현장이다. 이곳에 창가학회의 실상이 있다. 우리 반이 학회다. 그것을 떠나 어딘가에 특별한 학회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반을 건설하는 데 최대로 힘을 쏟고 강화해 이상적인 조직을 만드는 일 이외에 광선유포의 발전은 없다.
신이치는 ‘후회 없는 인생을 위해 후회 없는 신심을’ ‘신심즉생활이다. 현실 사회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안정된 생활을 확립하자’고 혼신의 힘을 다해 강조했다.
그리고 만감을 담아 이렇게 외쳤다.
“여러분이 창가(創價)의 깃발을 당당히 내걸고 용감히 일어선다면 지역광포는 반드시 승리할 것입니다.
부디 여러분은 ‘내 모습, 행동을 보십시오, 이것이 불법의 힘을 증명합니다’ 하고 가슴을 펼 수 있는 한 사람 한사람이 되어주십시오. 형제, 자매로서 저를 대신해 지역광포의 지휘를 부탁합니다.”
‘완강한 기질을 자랑하는 광포의 아버지, 완고한 기질을 자랑하는 창가의 어머니여, 승리하라!’는 심정으로 지도했다.
또 저녁에는 제1회 ‘고치현 남자부간부총회’에 기쁜 마음으로 참석했다. 고치를 방문한 신이치가 제안한 총회였다.
신이치는 근대일본의 새벽을 연 일재(逸才)들을 길러낸 고치의 땅에 차대의 기둥을 반석같이 세워두고 싶었다.
신이치는 ‘학회의 후계자로서 숭고한 신념을 품은 사람이 되어라!’는 바람을 담아 이렇게 말했다.
“높은 산꼭대기에는 늘 바람이 세차게 휘몰아칩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위업을 이룬 사람은 모두 혹독한 중상과 비난을 받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세계 최고의 불법(佛法)을 유포하는 우리 창가학회에 비난 중상의 폭풍이 거세게 몰아치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입니다!”
<역주 64>
신이치가 고치 남자부에게 이렇게 힘주어 말했다.
“우리는 청년부 시절, 형제 이상으로 동지와 굳게 결합해 여러 투쟁을 벌였습니다. 다들 권력도 없고 재력도 없었습니다. 오로지 학회정신 하나로 오늘날의 평화와 문화를 추진하는 세계적인 단체를 만들어냈습니다.
이번에는 여러분이 그것을 모두 이어받아 더욱 발전시킬 차례입니다. 자기 세대의 광선유포는 자신들이 개척하고 구축해야 합니다. 긴 광포 여정의 인생을 걷다 보면 가정문제, 직장문제, 자신의 성격문제 등 많은 고뇌에 맞닥뜨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도 그랬습니다.
그러나 명심해야 할 점은 어쨌든 어본존에게서, 창가학회 조직에서 멀어지지 말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매달리듯 따라간다. 아무리 괴롭고 싫어도 따라간다. 그 사람이 최후의 승리자가 됩니다.
또 한 사람 한사람이 어떠한 형태로든 사회에 공헌하기 바랍니다. 무엇이든 최고가 되기 바랍니다. 그것이 미래의 광선유포를 결정짓는 힘이 됩니다.
특히 여러분은 이미 창가학회라는 세계에서 청춘을 살아왔습니다. 자신의 신념과 신조로 그 인생을 선택했기에 ‘누가 뭐라고 하든, 이 불법을 평생 관철하고 죽겠다. 비록 다른 사람들이 모두 쓰러져도 그 시체를 넘어 광포의 봉우리를 등반해내겠다'는 결의로 나아가기 바랍니다.”
구로시오 해류가 흐르는 고치의 남자부원에게 신이치는 광포의 정신이 담긴 바통을 맡겼다.
이튿날 11일은 고치에서 보내는 마지막 날이다.
이날 오전 11시 반부터 고치문화회관 개관 1주년 기념 인근지역 근행회를 열었다. 인근지역이라고는 했지만 ‘올 수 있는 분은 모두 참석하라’고 현 전체 회원에게 연락한 터라 회관 대강당이 참석자로 가득 찼고 다른 회합실에도 사람들이 차츰 들어찼다.
신이치는 근행회에서 ‘교학을 심화하고 법을 넓힌다는 심학홍법(深學弘法)을 우리 정신으로 삼아 강성한 신심으로 하루하루를 상쾌하게 보내기 바란다’고 염원하고 인사했다.
<역주 65>
고치문화회관에는 아직도 많은 사람이 몰려들었다. 신이치는 근행회를 한 번 더 열었다.
그리고 창가 동지의 유대를 단단히 하고 불퇴의 신심을 관철하도록 정열을 담아 힘주어 말했다. 단 한 사람도 일생성불의 궤도에서 벗어나지 않길 바랐다.
돌아갈 준비를 하고 회관 1층으로 내려온 신이치는 운영실에 얼굴을 내밀었다. 합창단의 피아노 연주를 담당한 여자부원이 신이치를 보자 이렇게 보고했다.
“선생님, 저는 히라오 미쓰코라고 합니다. 이번에 선생님이 참석하신 근행회에 합창단으로 모두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실은 가족 중에 아버지만 아직 입회하지 않았는데 감격한 나머지 선생님의 지도를 아버지에게 날마다 전해드렸습니다. 아버지도 열심히 이야기를 들으며 함께 기뻐하셨습니다. 그래서 이런 시를 지어 주셨습니다.”
미쓰코는 조붓한 종이를 내밀었다.
“크나큰/ 겨울 태양 같은/ 사람이 되었도다”
“말씀하시는/ 한마디 한마디/ 따뜻하도다”
신이치가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자상한 아버지시군요. 당신을 정말 사랑하시는군요. 겨울 태양처럼 주위를 비추고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사람으로 자란 딸의 모습을 진심으로 기뻐하시는 마음이 느껴지는 시입니다.
또 당신의 모습을 통해 저를 알게 되고 공감해주시고 있군요. 딸인 당신의 성실한 행동에 아버지가 감동한 것이겠지요. 대승리입니다. 저도 아버지에게 시를 선사하고 싶군요.”
그러나 곧 떠나야 할 시간인데다 붓도 없었다.
“그럼 아버지에게 가까운 시일 내에 시를 보내겠다고 전해주십시오.”
그로부터 일주일쯤 뒤에 신이치가 아버지에게 보내는 토인비 박사와 엮은 대담집 ‘21세기를 여는 대화’가 미쓰코에게 도착했다. 그 책에는 시가 씌어있었다.
“아버지의 은혜/ 딸의 행복/ 기원하는 하루하루”
아버지는 머지않아 스스로 입회했다. 그리고 집을 회합 장소로 제공하는 등, 학회를 지키는 든든한 장년부가 되었다.
<역주 66>
고치문화회관을 출발한 신이치는 11일 오후 6시 전에 가가와현 아지초에 있는 시코쿠연수원에 도착했다.
신이치는 피로한 기색도 전혀 보이지 않고 가가와현 최고회의에 활기차게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가가와현은 2개 권, 1개 지역본부의 포진으로 새롭게 출발하게 되었다.
이튿날 12일 오후에는 도쿠시마현에서 대표 2800여명과 기념촬영을 했다. 1969년 10월 가가와현립체육관에서 시코쿠간부회를 열었을 때 합창을 선보인 ‘가가와소년소녀합창단’ 멤버였다.
신이치는 시코쿠간부회가 끝난 뒤에 어린 합창단원들과 함께 사진을 찍고 이렇게 말했다.
“오늘은 전국, 전 세계 소년소녀부를 대표한다는 의미에서 기념촬영을 했습니다. 여러분 속에서 위대한 인재가 반드시 육성되리라 확신합니다. 10년 뒤에 또 만납시다. 모두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10년 뒤’ 이 말이 목표가 되었다. 그로부터 10년째에 접어든 지금, 멤버들은 신이치가 시코쿠를 방문한다는 소식을 듣고 서로 연락해 기쁜 마음으로 달려왔다.
그때 초등학생이던 멤버들은 늠름하고 발랄한 청년으로 자랐다. 신이치는 기뻤다.
“잘 왔습니다! 정말 많이 컸군요!”
신이치는 감개무량한 표정으로 말을 건네고 함께 사진을 찍었다. 다들 이날을 목표로 창가의 훌륭한 후계자로 성장하자고 결의하고 입시와 취업, 그리고 학회활동에 분투했을 것이다.
결의는 대성(大成)이 될 씨앗이다.
그러나 결의를 성취하려면 하루하루 착실히 도전하고 노력해야 한다. 승리의 실증이 존귀한 이유는 끈질긴 정진(精進)의 축척이기 때문이다.
신이치는 21세기를 의탁하는 심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지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올곧게 성장해야 합니다. 곧게 성장해 거목이 되어야 합니다.”
청년들의 힘찬 대답 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간부회 때 부른 ‘치티 치티 뱅뱅’과 ‘다이난코(大楠公)’를 새로운 결의를 담아 합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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